소설리스트

곤륜마협-186화 (185/569)

186화

독특하다 못해 괴이한

귀주원가 무인들은 본거지 중 하나인 가릉전장(嘉陵錢莊)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 여섯 명의 장로는 가주인 투웅에게 인사한 후 정광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만약 가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본가는 전력을 다해 복수할 것이네.”

정광은 시원시원하게 받아들였다.

“네. 기대할게요.”

“…….”

“하하. 농이에요, 농. 잘 풀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패잔병이 퇴각하듯 가셔야 하는 거 아시죠? 지금 너무 당당하신 것 같은데.”

정광이 날카로운 기세를 보이는 귀주원가 무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장로들은 힘 빠진 얼굴로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알겠네.”

그리고 정말 패잔병처럼 허겁지겁 달려가기 시작했다.

근처엔 보는 눈이 없었으나 가는 길에 지나치게 될 이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정광은 그들에게서 눈길을 거둬 투웅을 바라봤다.

투웅은 담담히 시선을 마주치다가 궁금한 듯 물었다.

“왜 웃는가?”

“안 웃었는데요.”

“아니, 눈이 웃고 있네.”

“아. 그런가요?”

정광의 미소가 얼굴 전체로 번졌다.

혈도를 짚인 채 말 등에 엎드려 말과 함께 꽁꽁 묶였는데도, 당당하기 그지없는 투웅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였다.

“비웃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비웃어도 상관없네. 내가 택한 길이니 어떤 취급을 받아도 감수해야지.”

“이래서 가솔들이 따르는구나. 일이 끝나고 사마련으로 돌아가시면 꽤 재밌겠어요.”

“무슨 말인가?”

“귀주원가의 희생을 발판으로 도주한 분들이요. 그분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빚을 갚으려 하지 않겠어요?”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얘기를 들은 다른 이들도 마음이 움직일 것이다.

자연히 사마련주와 비교가 될 터.

분란의 씨앗이 늘어날 게 분명했다.

정광의 말을 알아들은 투웅이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일이 다 잘됐을 때의 얘기지. 확신하진 말게.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까.”

“물론이죠.”

그래서 여러 명에게 손을 썼다. 산서 지부장 송훈을 살려두고 사마련주의 제자 후위진을 협박…… 아니, 설득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 말이지.’

게다가 의도한 바는 아니나 스스로 도주한 가균도 있었다.

안에서 분란이 일어나면 밖에서 때리기 쉬워지는 법.

역사를 통해 검증된 진리인 만큼 그 결과를 수확할 날이 오리라.

‘뭐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쓰고.’

어떤 변수가 있더라도 힘이 있으면 부숴 버릴 수 있다.

전생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낮은 경지이지만, 힘이 부족하면 머리와 사람을 쓰면 되는 일이었다.

‘그건 그거고…….’

정광은 투웅에게 당부했다.

“이대로 청성산까지 가셔야 하는데 좀 분한 표정이라도 지으세요. 보는 사람들이 오해할지도 모르잖아요.”

“……노력하겠네.”

“달리다 토하실 것 같으면 꿀꺽 삼키시고요. 그냥 하시면 뒤따라오시는 분들이 다 뒤집어쓰거든요.”

“……명심하지.”

정광은 두 손을 모아 응원한 뒤 당영중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주님, 청성에 연락은 하셨죠?”

“자네가 본가를 떠나자마자 했네.”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영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자네 말을 안 따랐을 걸세.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하거든.”

“저도 그럴 것 같네요.”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정광이나 당가나 청성에 할 만큼 했으니 그 결과는 청성이 책임져야 했다.

정광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준비되셨죠?”

본가에서 끌고 왔던 말에 올라탄 당가 무인들과 무혈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갑니다.”

정광은 고삐를 내려치며 말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전력 질주에 가까운 속도.

당기황은 그보다 느리게 말달리며 투덜거렸다.

“청성산까지 백오십리(百五十里)는 되는데. 반도 못 가서 말이 거품을 물겠군.”

당영중이 그 옆에서 달리며 말했다.

“그때부턴 경공(輕功)으로 달리지 않겠습니까.”

“나도 달릴 수 있어! 왜 빼놓고 가는 거야!”

“진옥룡만큼 빨리 달릴 자신이 있으십니까?”

“……내가 경공이 좀 약한 편이지만 그래도 꽤 빠르잖아.”

“그 정도론 안 되지요. 잠행술과 은신술은요?”

“……흥. 위대한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인 내가 그따위 잡기를 뭐하러…….”

당영중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진옥룡도 정파명문 곤륜의 제자입니다. 헌데 둘 다 잘하니 분란을 일으킬 만한 말씀은 삼가주십시오.”

“……지금 아비를 핍박하는 거냐? 어디 한번 해볼까?”

말달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눈싸움을 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당영중이었다.

“아버님께서 더 강해지셨다 하나, 본가의 힘을 너무 낮춰 보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너만 당가냐? 나도 당가다!”

“네. 하지만 아버님은 실권이 없으시고 제겐 있지요. 말씀대로 한번 해볼까요?”

당기황이 폭발했다.

“하자! 해! 언제 할까? 지금?”

“이번 일이 끝나면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이놈이! 끝끝내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가주의 권위로 눌러 드릴까요?”

두 사람은 계속 티격태격하며 달렸다.

말싸움일 뿐이었으나 살벌한 살기가 풀풀 날렸다.

허나 당가 무인들은 익숙한 일이라 그러려니 하며 달렸다.

물론 무혈단원들도 비슷했다.

파격이라는 단어도 때려 부술 정도로 파격적인 정광의 언행을 봐온 그들이었다. 이 정도에 놀라서야 되겠는가.

오직 혜진만 놀라고 있었다.

‘당가의 위명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는데 이런 분위기였다니…….’

명문가다운 예의 바른 모습은 무슨.

저게 바로 패륜인가 싶었다.

그래도 실망감보단 호기심이 솟았다.

‘태상가주와 가주가 싸우는데도 식솔들이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감정을 공유하며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건가.’

그녀에게 사정이 있듯이 당가 또한 그럴 터.

아니, 더 복잡한 일이 얽히고설킨 복마전 같아 보였다.

‘속세는 정말 신기하구나.’

붉게 불타고 있는 청성산에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감이 솟았다.

‘단주가 먼저 가서 상황을 파악하겠다고 했는데…….’

그럴 리가 있나.

정광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절대로 지켜보기만 할 자가 아니었다.

* * *

“어서 불을 꺼라!”

“다른 곳은 신경 쓰지 마! 전각에 붙은 불부터 잡아야 해!”

“아니오! 숲에 붙은 불도 꺼야 하오! 거기에서 번져오고 있지 않소이까!”

“그럴 여력이 없어서 그러는 것 아닌가! 뭐 하는가? 어서 움직이게!”

오백장(五百丈)을 좀 넘는 높이의 청성산 노소정(老霄頂).

푸른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무거운 물통을 진 채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부어라!”

촤아악-

이렇게 최선을 다했건만.

안타깝게도 소용없었다.

“불길이 잡히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마! 할 수 있는 건 다해라!”

물을 끼얹는 것에 그치지 않고 흙까지 퍼서 쏟았다.

불붙은 나무를 검으로 베어서 밀어내며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려 애썼다.

허나 불길이 너무 거셌다.

푸르름의 상징이었던 청성산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전각 지붕 위에 올라 상황을 살피던 노도사가 크게 탄식했다.

‘청성이…… 대청성이 내 대에 이르러 이런 수모를 겪게 될 줄이야…….’

분노보다 슬픔이 더 컸다.

청성 장문인 청유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사부께서 내게 장문의 직을 맡기신 건 도문(道門)다운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으라는 뜻이었는데…….’

되찾긴커녕 사제들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돈과 권력을 맛본 지 오래인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교묘하게 거부하며 자신들의 의견을 종용했다.

‘……정신을 차리고 강하게 나갔어야 했어.’

그들과 많이 다르지 않았던 청유는 사부의 유지(遺志)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리고 결국 대가를 받게 된 것이다.

‘사부께서 임종에 이르셔서야 후회하셨던 것을 나도 느끼게 됐구나.’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는 법. 본산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속가문파들은 갖은 변명을 늘어놓을 뿐, 적극적으로 달려오지 않았다.

‘모두 본산 탓이다. 내 탓이야.’

과거 마교가 곤륜을 침공했을 때 곤륜의 속가문파들은 전력을 이끌고 본산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이는 곤륜이 덕이 있었기에 일어난 일.

안타까운 사건이었으나 정파무림의 귀감이 되는 사례였다.

‘……이미 지난 일. 언제까지 후회만 할 수는 없지.’

사방을 둘러봐도 불길 천지였다.

사마련이 악독하다 하나 이런 만행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산 아래에서 참배객들이 올라오는 걸 막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런. 아직도 이러는구나.’

청유는 고개를 홱홱 저어 미련을 떨쳤다.

‘어쩐다.’

어차피 불길을 잡을 방법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사람이라도 살려야 했다.

청유는 내공을 끌어 올려 크게 외쳤다.

“도경과 비급은 챙겼는가?”

거대한 전각에서 한 중년 도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쳐나왔다.

“장문인! 없습니다! 텅텅 비었습니다!”

“무어라?”

“토굴이 뚫려 있습니다! 불을 지르고 그곳으로 들어와 모두 챙긴 뒤 도주한 것 같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추적하려 했으나 이미 막혀 있어서…….”

꼿꼿이 서 있던 청유가 비틀거렸다.

고수인 그조차 못 버틸 정도로 강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본산을 봉쇄하고 계속 분란을 일으켜 정신없게 하더니. 이런 짓을 벌이려고 그랬던 것인가.’

치를 떨 정도로 간교한 술책.

소문으로만 듣던 악랄한 모사(謀士)의 술수다웠다.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청유는 몸을 억지로 가눴다.

‘무너지면 안 돼!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마음이 서자 몸도 섰다.

청유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제자들에게 외쳤다.

“나는 괜찮다! 제자들은 그만 몸을 피하라!”

도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청성을 버리겠다는 말 아닌가!

즉각 반발하는 자들이 나왔다.

“장문인! 불가하오!”

“어찌 그런 불경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외까!”

분노하는 그들과 달리 청유는 침착했다.

“불길을 잡을 방법이 없네! 이대로 다 죽을 셈인가?”

“할 때까진 해봐야지요!”

“한다 치세. 불길이 잦아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사마련이 밀고 올라올 걸세! 지친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나?”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 아니오?”

“갈!”

“……!”

도사들은 깜짝 놀랐다.

우유부단한 장문인이 노호성을 내지르다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금 청성을 지키려는 것인가,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인가!”

“그야…….”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인가, 재물을 지키려는 것인가!”

“장문인! 말씀이 심하오!”

노도사들이 수염을 부르르 떨며 화냈으나 청유의 분노를 넘어설 순 없었다.

“안 보이는 이들이 꽤 있군. 다들 어디에 있나?”

“…….”

“뻔하지. 재물과 토지 문서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터.”

“장문인, 그게 아니라…….”

노도사들이 계속 변명하려 하자 청유가 악을 쓰듯 말했다.

“청성을 지키려면 사람이 살아야 한다! 자존심을 지키려면 가슴에 묻고 훗날을 도모해야 한다! 헌데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당가에 구원을 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가주가 먼저 서신을 보냈지. 그가 뭐라 했는가?”

“…….”

“사마련이 본문을 먼저 칠 가능성이 크니, 구원하러 갈 때까지 몸을 피하라 했거늘…… 무슨 무례한 말이냐며 분개하기나 했지.”

켕기는 표정을 짓던 한 노도사가 작게 항변했다.

“청신 사제가 아미로 달려갔으니 곧 소식이 올 것이오.”

“사제. 정말 그렇게 믿는가?”

“…….”

“본문이 그들의 사업을 야금야금 삼키고 있었는데, 그들이 도와줄 거라고 믿느냔 말일세.”

“…….”

노도사들은 불편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청유는 나직이 한숨을 쉰 뒤 중년 이하의 제자들에게 명했다.

“내가 부덕하여 본문에 화가 닥쳤다. 이 죄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그러니 너희들은 반드시 살아남아라. 나를 반면교사 삼아 수양을 쌓아라. 이는 장문인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이니라.”

“장문인…….”

청유의 처량하면서도 비장한 말에 제자들은 눈물을 훔쳤다.

비분강개하는 이도 있었으나 눈이 젖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청유는 그들을 둘러본 뒤 무겁게 명했다.

“서쪽이 그나마 나을 것 같구나. 적이 함정을 파놓고 있을지도 모르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제자들은 어서 떠나라. 내가 앞장선다.”

“네! 장문인!”

청유를 필두로 청성 제자들이 달렸다.

망설이던 노도사들도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재물과 문서 꾸러미를 짊어진 노도사들이 뒤늦게 튀어나와 그들을 쫓았다.

정말 가관이었으나 청성의 현 모습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청유는 나무를 베며 길을 열다가 탄식했다.

‘최선은 다하겠다만, 오늘이 끝일지도 모르겠군.’

안 좋은 예감은 벗어나는 경우가 드물다더니.

저 멀리 진을 치고 있는 무인들이 보였다.

뒤쪽에는 꽤 높은 단이 있었는데, 독특하다 못해 괴이한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미소년이 고풍스러운 검을 비껴 찬 채 오연히 서 있었다.

‘……사뇌(邪腦) 위진홍! 듣던 옷차림대로이긴 한데 저리도 젊었던가?’

청유가 사마련 사천지부의 총 책임자를 보며 경악할 때.

진작 도착해 잠행술을 펼쳐 뒤를 따르던 정광도 경악했다.

칠흑보다 어두운 흑색 학창의 가슴에 붉은 실로 수놓은 날개 달린 범…….

전설로 전해지는 사흉(四凶) 중 하나인 궁기(窮奇) 아닌가!

‘저런 옷을 입고도 당당하다니. 쓸 만한 모사는 무슨. 그냥 겉멋 든 애새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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