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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185화 (184/569)

185화

붉은 산

투웅은 정신을 차렸으나 여전히 정신이 나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광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였다.

그것도 전음으로.

-사마련주, 마음에 안 드시죠?

“…….”

“어라? 아직 의식이 없으시나?”

있긴 한데.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어이가 없을…….

잠깐.

손은 또 왜?

짜악!

“윽.”

쫘악!

“억.”

투웅은 연달아 따귀 두 대를 맞았다.

하도 황당하다 보니 말도 안 나왔다.

‘뭐 이런 놈이…….’

정광도 황당했나 보다.

“어? 왜 정신을 못 차리시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내공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그냥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었다.

치켜든 손에 희뿌연 기가 맺혀 있었다.

투웅은 직감했다.

‘저걸 맞으면 죽는다!’

굳어 있던 입을 가까스로 여는데.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가주를 모욕하지 마라!”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투웅은 드러누운 채로 눈동자만 옆으로 굴렸다.

그의 가문, 귀주원가(貴州元家)의 여섯 장로가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당영중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어떤 손해를 입더라도 빨리 몸을 빼내 자신들의 가주를 구하려는 모습이라니.

허나 저런 식으로 싸우다간 얼마 못 가 죽을 터.

투웅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동시에 그의 입이 열리며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만…… 꿀꺽. 쿨럭. 쿨럭.”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코피가 기도를 타고 들어와 말을 잇긴커녕 기침만 터져 나오는 것 아닌가.

그래도 의식이 돌아왔음을 항변했기에 다행이랄까.

정광이 휘두르려던 손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코피 때문에 말을 못 하시는 거였네요. 어쩌다 이렇게…… 쯧쯧.”

“…….”

어쩌다 이렇게?

제 놈이 그래놓고 뭐?

‘……정말 소문대로 제멋대로인 놈이구나.’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엉망진창 깨진 얼굴로 코피를 꿀꺽꿀꺽 삼키며 짓는 미소라.

정광이 보기엔 무척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어라. 머리 다치셨으면 안 되는데. 철월처럼 되신 건가?”

무척 괴로운 상태의 투웅이었으나 이번만큼은 확실히 대답해야 했다.

“쿨럭. 그 녀석과 나를 같이 놓지 말게.”

“와. 다행이다.”

“그보다 싸움을 멈춰줄 수 있겠나? 개죽음시키긴 싫어서 그러네. 크윽.”

“시무를 아는 준걸(俊杰)이셨군요. 잠시만요.”

정광은 투웅의 뜻을 크게 외치며 싸움을 멈춰달라 부탁했다.

안 그래도 지쳤던 양측은 한 걸음씩 물러났고 서로를 경계하며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진옥룡!”

당영중이 귀주원가의 여섯 장로를 노려보며 정광에게 외쳤다.

“자네가 청하니 멈췄네만. 무얼 하려고 그러나?”

“일단 좀 고쳐 드리고 말씀드릴게요.”

고쳐?

뭘?

사람들은 곧 알 수 있었다.

정광이 투웅의 부러진 코를 똑바로 맞추더니 주변의 혈도들을 짚는 것 아닌가.

금세 코피가 멎고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투웅이 감사를 표하려고 하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살짝 아플지도 몰라요.”

“……뭐가 말인가?”

정광이 투웅의 어깨와 팔을 잡더니 반대 방향으로 당겼다가 다시 밀어 넣었다.

탈구됐던 어깨가 제자리로 들어가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우둑.

“크헉!”

“괜찮죠?”

“크으…… 사, 살짝 아프군.”

“네. 다음은 조금 더 살짝 아플 거예요.”

“……!”

정광은 투웅의 부러진 팔을 잡고 뼈를 맞췄다.

근처에 뒹구는 봉을 수도로 내리쳐 적당한 길이로 자른 후 팔에 대어 부목으로 삼았다.

“잠시 실례요.”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채 움찔거리는 사마련 무인의 옷을 찢어 투웅의 팔과 부목을 묶었다.

빠르고 완벽한 치료였다.

“어때요? 훨씬 낫죠?”

이를 악물고 참고 있던 투웅이 억지로 농담을 했다.

“얼굴은 안 해줄 건가?”

“하나 안 하나 별 차이 없을 것 같은데요.”

“…….”

“무엇보다 명분이 없어지고. 으차.”

정광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투웅을 번쩍 들어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그 앞에 마주 앉아 입을 열었다.

“대협.”

“……나 말인가?”

“네.”

“……적당한 호칭이 생각 안 나서 그러는 거면 그냥 투웅이라 부르게.”

“그건 좀 버릇없지 않나요?”

“자네 실력이면 그럴 자격이 있어. 버릇은 이미 충분히 없고.”

뼈가 있는 말이었으나 정광은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그렇긴 하네요. 그래요 그럼.”

“…….”

“련주와 사이 안 좋으시죠?”

“…….”

“련주가 아니라 그나마 부련주와 성향이 비슷하신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

“그래서 소모품으로 쓰이셨구나.”

투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소모품이 아니었으면 련주가 저에 대해 알려줬을 테니까요.”

“자세히 말해보게. 이해가 안 가는군.”

정광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도사는 물론 부사와 창사를 죽인 놈이다. 그러니 싸우려면 전력을 집중해서 필승의 자신이 있을 때 해라. 이렇게요.”

투웅의 가늘어졌던 눈이 크게 뜨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까지 떨릴 정도였다.

“……부련주가 자네에게 당한 거야 알고 있었네만. 그 두 분도 그랬는가?”

정광은 고개를 돌려 당영중에게 청했다.

“가주님. 그분들 병기 좀 보여주실래요?”

“그러지.”

당영중이 명하자 당가 무인들이 기이할 정도로 긴 창과 예리한 쌍부(雙斧)를 치켜들었다.

투웅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 나이에 홀로 팔사 중 두 분을 잡다니. 진천마의 환생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가 아는 한, 그럴 만한 존재는 오래전에 죽은 진천마밖에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그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조용히 있던 당기황이 소리쳤다.

“창사 그놈은 내가 잡았다!”

나름 억울해서 나선 것이었건만.

귀주원가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경악한 얼굴로 정광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광이 아무리 강해봐야 남이다.

그들에게 관계된 일이 더 중요했다.

‘왜 련주는 그 사실을 안 알려줬지?’

‘정말 우리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는 건가?’

은연중에 차별을 느끼고 있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숨길 줄이야.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투웅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에서 파란 귀화(鬼火)가 일렁였다.

“본가와 련주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건 사실일세. 허나 자네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기는 힘들군.”

“굳이 믿으려고 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 예상일 뿐이니까.”

“…….”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더 싸울까요?”

투웅은 시선을 돌려 귀주원가의 식솔들을 둘러봤다.

피가 이어진 이들도 있고 가신들도 있었으나 모두 그의 사람인 건 마찬가지였다.

‘수도 적을뿐더러 너무 지쳤어. 싸워봐야 전멸이다.’

애초에 투항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으나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떤 연유가 됐건, 련주가 우리를 속인 건 사실이지.’

어떻게 보면 사파야말로 신의를 중시했다.

동료라 해도 신의를 어기면 목을 치고 가문을 멸할 정도로.

‘그렇다고 투항을 하면…….’

련주가 가만있지 않을 터.

귀주에 있는 본가는 잿더미가 되고 말리라.

‘어떡하지? 분명 길이 있을 텐데.’

정광이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물었다.

“투항하자니 본가가 걱정되시죠?”

“……”

“이대로 보내드려 봤자 의심 많은 련주가 추궁할 거고요. 아니, 손부터 쓰고 보려나?”

“…….”

정광의 말대로 외통수였다.

“가문도 보전하고 련주에게 한 방 먹이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 물론 련주가 귀주원가를 사석으로 썼다는 확신을 얻게 되시면요.”

“…….”

최상의 수이긴 한데.

어떻게?

정광의 말에 답이 있었다.

“가릉전장(嘉陵錢莊)에서 봤던 천요문(天妖門)처럼 일정한 거주지가 없으시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그분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

“……큰 비밀도 아니지. 모두 사천성을 떠났네.”

“천요문도 련주와 사이가 별로인가 봐요.”

“그들은 련에 속했다기보단 련주와 협력관계를 맺은 것에 가까워.”

“협력이라. 좋은 거죠. 매이지 않고 서로 얻을 건 얻고. 그러니까…….”

“……?”

“우리도 협력하죠.”

“……!”

투웅의 눈이 커졌다.

정광이 그 눈을 들여다보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 *

혜진은 정신이 없었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였다.

‘이것이 강호인가.’

아미산이 아무리 높고 넓다 해도 강호(江湖)에 비할 바는 아니다.

걸음마다 새로운 걸 넘어 놀라울 지경.

‘사천성의 일부만 달려도 이런데, 더 넓은 곳으로 나가면?’

가슴이 절로 두근거렸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돼. 침착하자.’

혜진은 가슴에 손을 얹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와 달리 경험이 많은 당가와 사마련의 무인들은 몸 상태를 점검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병기를 날카롭게 손질하고 있었다.

‘양측이 협력하기로 했으나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몰라. 무림에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고 했으니까.’

말로는 많이 들었었으나 실제로 겪게 되니 느낌이 달랐다.

정(正)과 사(邪)는 양립할 수 없다고 배웠거늘, 서로의 필요로 이렇게 손을 잡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사파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에도 금이 갔다.

‘귀주원가라…… 미리 알지 못했다면 명문정파인 줄 알았겠지.’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혼란스러워졌다.

혜진은 같은 불문에 몸담고 있는 공우에게 조언을 구했다.

속가제자와 본산제자라는 차이가 있었으나 어쨌든 통하는 면이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막 속세에 내려왔는데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소저께서 그러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밖에는 말씀을 못 드리겠군요. 그리고 저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니, 배워가는 중이지요.”

“네? 공우 스님께서도요?”

공우는 반장하며 불호를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소승을 높이 보지 마십시오. 멀고도 멀었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광을 따르며 아집은 조금이나마 버리게 됐으나, 무엇이 자신의 선(善)인지 알기는 요원한 상태.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고 유연하게 천하를 받아들이고 싶었으나 언제 그날이 올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조급해하지 말자. 부단히 수양을 쌓으면 그 열매가 맺힐 터. 그때 가서 신중히 과실을 맛보면 돼.’

과거 사조인 불존이 이르기를, 넓고 깊게 생각하되 생각에 매몰되진 말라 했다.

그 화두를 붙잡고 애써왔으나 적절한 균형을 잡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알면서도 또 고민하는군. 너무 과해.’

그에 비해 혜진은 참 신기한 여인이었다.

이제 갓 속세에 내려온 것치곤 별 무리 없이 모든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공우는 혜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소저. 살생은 이번이 처음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너무나 담담한 대답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검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을까.

속내를 들여다볼 순 없으나 자책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미의 기풍 때문이라 해도 너무 담담해. 본성 자체가 그럴지도.’

그렇다고 즐기는 건 아니었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이니 하는 모습이었다.

‘지금보다 더 큰 싸움이 곧 있을 텐데. 심마(心魔)에 들게 될지도 모르니 신경 써야겠구나.’

그때, 도주한 사마련 무인들을 쫓아갔던 당가 식솔들이 돌아왔다.

“많이는 못 잡았습니다. 가주의 명대로 적당한 거리까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네. 곧 떠날 테니 조금이나마 쉬게나.”

당영중은 그들을 격려한 뒤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놈들이 생각 외로 빠르군.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사파가 도망가는 실력은 일품이더라고요.

-언제 출발할 셈인가?

-일각쯤 뒤에요.

-적당하군.

잠시 침묵하던 당영중이 전음을 이었다.

-각오는 했네만 피해가 커.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하네.

-물론이죠.

-그리고 귀주원가 말일세. 뜻대로 흘러간다면야 살려두는 게 낫겠지만 혹시나 싶은 생각이 자꾸 드네.

-그런 일이 일어나면 활약하실 분이 있잖아요.

-…….

정광과 당영중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기황이 불퉁한 얼굴을 한 채 있다가 투덜거렸다.

“둘이 전음으로 무슨 음모를 꾸미느냐? 또 날 이용하려고?”

“아직도 기분 안 풀리셨어요? 조금 전에 대화로 다 풀었잖아요.”

정광의 말에 당기황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덕분에 무공이 늘어났으니 넘어가자고 했던 거?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느냐?”

“솔직히 만족스러우시면서.”

“안 만족스러워.”

“정말요?”

당기황은 할 말이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 선택하라 하면 화를 내면서도 지금의 결과를 택할 것이기에.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공이다.

그것도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벽을 하나 깼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할 말은 있었다.

“아까 약조한 대로 부려먹으려면 제대로 설명하고 해라. 아니면…….”

“에이. 얘기 다 끝난 지 언젠데 자꾸 그러세요.”

“도무지 믿음이 가야 말이지.”

“가주님이 태상가주님을 못 믿으시는 게 더 크지 않을까요?”

“…….”

정광은 당기황을 침묵시킨 뒤 주변을 둘러봤다.

대충 준비가 된 듯 보였다.

‘슬슬 갈까. 어?’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야. 머리가 좋다더니. 화끈한 면도 있네.”

“무슨 말인가?”

당영중이 의아해하자 정광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 방향 끝에는 한 산이 있었다.

사계절 내내 푸르기에 청성산(淸成山)이라고 불리는 산이.

허나, 지금의 청성산은 푸르름을 잃고 붉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청성산에 불을 질렀다고?”

“……미친.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구나!”

당영중과 당기황이 경악하자 모든 이들이 청성산을 바라봤다.

그리고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정광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가보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무척 궁금하네요.”

무엇보다 이런 짓을 벌인 사마련의 모사(謀士)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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