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적당한 것
힘없는 목소리의 주인은 아미파의 큰 어른인 대원이었다.
그녀는 홀로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오고 있었는데, 많이 힘든지 이마에서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대경한 혜진이 재빨리 다가가 부축했다.
“이렇게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누구든 부르셔서 돕게 하시지…….”
“항상 신세를 질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신세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대원이 빙그레 웃었다.
“내 힘으로, 원하는 곳을 향해 걷고 싶은 게 사람이다. 네가 그렇듯이 말이다.”
“…….”
혜진은 복잡한 표정으로 대원을 바라봤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정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태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빨리 하죠.”
“…….”
혜진의 눈에서 작은 열기가 솟았다.
강자다.
강자가 그녀와 겨루려 하고 있었다.
‘아니, 소문으로 들은 진옥룡의 무위라면…….’
겨루려는 것이 아니라 놀이로 여기는 것일 터.
‘……그래도 상관없어.’
정광이 어떤 마음으로 임하든 진지하게 상대하면 된다.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강자, 그것도 손속이 거칠기로 유명한 고수와의 비무였다.
‘내 생에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기회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한성을 바라봤다.
한성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사부…….’
한성의 마음은 알았으나 물러나기 싫었다.
혜진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정광의 비무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미타불. 진옥룡, 아미의 혜진이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비무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미파 사람들과 무혈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광과 혜진이 마주 보고 섰다.
정광은 허례허식은 치우고 바로 시작하자고 했고, 혜진이 받아들임으로써 비무가 시작됐다.
혜진이 대정신공(大靜神功)으로 닦아온 내공을 끌어 올리자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꽤 정순한 기운이야.’
자세한 건 몸 내부에 진기를 불어넣어 살펴봐야 알겠지만, 팽수빈에게 전수한 수빈일기공(秀彬一氣功)과 통하는 바가 있었다.
하북팽가의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을 팽수빈에게 맞춰 만든 게 수빈일기공인데, 아미파의 심법이 그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니 무척 흥미로웠다.
‘아미파의 무공이 수빈패검(秀彬覇劍)과 비슷한 무리를 품고 있으니 내공도 그럴 수밖에. 참고할 만한 게 있나 한번 볼까.’
정광은 제자인 팽수빈을 천하제이인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으나 시간을 단축하려면…….
‘여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아미파의 무공을 한번 견식해 보는 것도 좋지.’
그래서 비무를 요청했고 운룡을 뽑게 되었다.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조화를 이룬 여승보다 혜진처럼 무공의 기틀을 갖춘 지 얼마 안 된 이가 아미 무공의 특징을 진하게 보여줄 터.
“오세요.”
“아미타불. 그럼 선공하겠습니다.”
그냥 오면 되건만 예의가 지나치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젓다가 끄덕였다.
‘교봉(敎鳳)이라고 했지? 소문도 그렇고 별호도 그렇고. 고루한 냄새가 팍팍 나지만 그게 더 괜찮겠지.’
생각대로였다.
혜진은 강맹한 검격들을 쏟아냈는데 그 사이사이의 틈을 정교한 초식으로 메꾸었다.
사마련과의 싸움에서 아미파의 여승들이 보여준 것보다 더 정직하고 세밀한 모습이었다.
정광은 제자리에 선 채 운룡을 휘둘러 그녀의 검을 계속 쳐냈다.
‘여인인데도 음(陰)이 아니라 양(陽)의 기운에 치중한 검법. 맹수를 잡을 만한 일격, 주변을 뒤덮는 변초(變招). 확실히 재밌어.’
아미가 자랑하는 검법들인 소양검(少陽劍), 복호검(伏虎劍), 대라검(大羅劍)에 대한 감상이었다.
‘보법의 운용도 좀 볼까.’
정광은 한 걸음 내디디며 운룡을 쭉 내밀었다.
운룡은 금룡이 되어 혜진의 목을 노렸다.
허초(虛招)가 아닌, 살기가 담긴 진초(眞招)였다.
혜진의 눈이 커졌다.
‘생사결이 아니라 그냥 비무라더니!’
스치기만 해도 목이 잘릴 판 아닌가.
가슴이 급격히 뛰었다.
두려움과 기쁨 때문이었다.
‘그래. 이게 무인의 싸움이야.’
평생 처음 접하는 살초였다.
갈망하던 진짜 싸움인 것이다.
사부인 한성의 비명이 들린 것 같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감각은 눈부신 빛을 뿌리며 날아오는 금룡에 집중되어 있었다.
“합!”
혜진은 나직한 기합과 함께 미종보(迷踪步)를 펼쳐 옆으로 돌았다.
강맹한 검법과 달리 현란한 변화를 일으키는 보법.
금룡이 그녀의 귀밑을 간발의 차이로 비껴가며 머리칼을 베었다.
흑단처럼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칼 몇 올이 허공을 부유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절벽에서 떨어져 가슴속이 쑥 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동시에 안도의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비어버린 가슴을 채우다 못해 터질 듯이 팽창했다.
안도가 기쁨이 된 것이다.
그 기쁨을 표출해야 했다.
‘반격을! 읏!’
정광은 무자비했다.
벌써 왼팔 팔꿈치로 그녀의 인중을 베어오고 있었다.
‘이런 연환식이!’
뾰족한 수가 없어 보법을 밟았다.
그녀의 신형이 차가울 만큼 빠른 기세로 물러났다.
후웅-
그 순간 정광의 팔꿈치가 두 눈 가득 들어왔다가 지나갔다.
아미 일절(一絶) 한매보(寒梅步)가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번에는!’
하체를 굳건히 하고 뒤로 젖혀졌던 상체를 세우며 일검을 내질렀다.
놀랍게도 정광은 또 한 걸음 다가오며 금룡을 대충 휘저었다.
까르륵-
금룡에 얽힌 그녀의 검이 비명을 질렀다.
금룡은 그녀의 검을 물고 우아하게 꿈틀거리다가 밖으로 내던지려 했다.
혜진은 검을 꼭 쥐고 버티려다 포기했다.
그녀로선 막을 수 없는 거력(巨力)이었다.
‘힘으로는 안 돼!’
순간적으로 힘을 풀며 금룡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검이, 팔이, 상체가 볼품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여 흔들림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껏 펼쳤던 미종보도 한매보도 아닌 본능적인 움직임.
무척 어색한 모습이었으나 검을 뺏기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정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대련만 해보고 실전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 같더니. 임기응변이 좋네.’
언의진과 동급으로 봤건만 자질은 더 위였다.
경험만 더 쌓으면 금방 치고 나갈 만큼.
‘뭐 그건 그거고.’
정광과는 상관없는 일.
아미의 무공을 제대로 뽑아내려면 더 몰아쳐야 했다.
‘살초를 더 써야지.’
마음을 먹자 몸이 움직였다.
금룡이 세상을 뒤덮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혜진은 깜짝 놀라 정신없이 물러났다.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는 검초들이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것 아닌가.
‘아니야. 세상에 완벽한 초식은 없어. 허점을 찾아야 해.’
그녀는 미친 듯이 온몸을 움직이며 정광을 노려봤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얼마 안 가 그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아…….”
틈이 없다니.
있을 수도 있으나 그녀의 경지로는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꺾이진 않았다.
그녀는 투사였다.
온실 속에 갇혀 있다가 해방된 투사!
‘간다!’
단전 바닥에 있는 내공까지 끌어올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을 펼쳤다.
그녀는 확신했다.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물러설 수밖에 없으리라고!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정광의 손에 들린 금룡이 그녀의 검을 부드럽게 받아들인 뒤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 아가리를 쩍 벌린 채 그녀를 삼켜왔다.
죽음이었다.
“멈춰!”
사부인 한성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까처럼 불확실한 것이 아닌, 귀에 선명히 박히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허나 이미 늦은 상황.
‘이렇게 끝인가…….’
생의 마지막 순간 떠오른 얼굴은 깊이 존경하는 대원도 아니요, 그녀를 딸처럼 키워준 사부 한성도 아니었다.
그녀도 놀랄 만큼 의외의 인물.
평생 몇 번 보지도 못한 중년 사내였다.
‘……하필이면…….’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 사내가,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우울해진 그때, 그녀를 삼키던 금룡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동시에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셨어요.”
“……!”
“왜 검을 꽉 잡아요? 제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만 하기로 했잖아요.”
혜진은 큰 눈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정광은 공포스럽게 그녀를 삼키던 금룡을 검집에 넣은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딱 달라붙어 있던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혜진은 그 말을 끝으로 허물어졌다.
집중력과 긴장감이 풀리며 기절한 것이다.
쓰러지는 그녀를 한성이 달려와 끌어안았다.
잠시 제자의 몸을 살피던 한성은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항상 차갑던 그녀의 눈에는 따뜻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손속에 사정을 둬줘서 고맙네.”
“뭘요.”
정광은 건성으로 대답한 뒤 아까의 싸움 아닌 싸움을 복기했다.
‘놀기를 잘했네. 접목해 볼 만한 게 꽤 있어.’
훗날 팽수빈을 시켜 아미산에 들리게 할까 했지만 이게 더 나았다.
심심할 때 궁리해 보면 꽤 그럴듯한 무공이 나오리라.
‘수빈이를 빨리 천하제이인으로 키워서 노후를 편하게…… 아. 승무랑 공동 천하제이인이 되면 더 편해질 텐데.’
정광이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과 달리 한성은 진지했다.
“진옥룡. 겸양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 소문은 익히 들었어. 이렇게 멀쩡하게 상대를 놔준 적이 없지 않은가.”
정광의 무위에 놀라 멍하니 있던 구경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무혈단원들까지.
정광은 정말 억울했다.
“아니, 대체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 그런 모함을…….”
그때, 대원이 다가왔다.
그 짧은 거리를 움직이는 것도 힘든지 땀방울을 흘리면서.
그녀는 정광의 코앞에 이르자 숨을 몰아쉰 후 자애롭게 웃었다.
“이보게, 진옥룡. 이 늙은이와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잠깐이면 되네.”
* * *
정광은 대원을 부축하며 걷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원하는 곳을 향해 걷고 싶으시다더니. 왜 부축해 달라고 하세요?”
“힘들어서.”
“말씀이 앞뒤가 다른데요?”
“흘흘. 혜진이에게 들으라고 했던 말일세. 저기가 좋겠군. 저리 가세나.”
두 사람은 커다란 노송(老松) 밑에 있는 작은 바위에 앉았다.
정광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대원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저한테 사기 치시려는 것 같아서요.”
“무어라?”
“어째 전에 뵀던 분이 생각나네요.”
대원의 눈에 호기심이 맺혔다.
“누군가?”
“현오 선사님요.”
“숭산(嵩山)에서 밥만 축내는 그 돌중?”
“어? 아세요?”
“알다마다. 서로 얼굴을 본 적은 없으나 오래전부터 서신을 교환하고 있지.”
“설마…… 연서(戀書)?”
“예끼. 그런 심한 농을 하면 쓰나. 그저 같은 학승(學僧)으로서 서로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듣다가 깨달은 바를 나누게 되었을 뿐이야.”
대원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서신을 받았는데 얼마 못 살 것 같다더군.”
“그 정도면 천수를 누리신 거죠.”
“그래. 아니, 그 늙은이나 나나 너무 오래 살았어.”
“진맥해 드려요?”
“하하. 됐네. 얼마나 남았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거든.”
대원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정광을 똑바로 바라봤다.
“현오 그 양반이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험담하실 줄 알았는데.”
“뭐 그런 점도 조금 있었지만 칭찬이 확실히 많았네. 그래서 궁금했지. 대체 어떤 청년이길래 그 깐깐한 늙은이가 그렇게 칭찬하는지. 그리고 오늘 보니…….”
“……?”
“칭찬이 부족했어. 자네는 정말 특별한 인물일세.”
“잘생기긴 했죠.”
“……그것도 그렇고. 무공 또한 그렇지만 협을 행하는 방식이 독특해. 괴협(怪俠)을 넘어 마협(魔俠)이라 할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건데요.”
“그래서 독특하다는 걸세. 마(魔)는 마고 협(俠)은 협이거늘. 악한 이에게는 마요, 선한 이에게는 협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광이 황당해하자 대원이 작게 웃었다.
“하하. 쑥스러워하지 말게.”
“어이가 없는 건데요.”
“그래. 그렇다 치고. 고맙네.”
“뭐가요?”
“자네 덕분에 혜진이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조금을 풀렸을 게야.”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나?”
“투사의 피를 가진 분이던데 너무 과보호하신 것 같아요.”
“맞는 말일세. 허나 그럴 수밖에 없었지.”
“왜요?”
“혜진이가 잘못되면 큰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황제의 숨겨둔 딸쯤 되나 봐요.”
“……만약 그렇다면?”
대원이 묘한 눈빛으로 묻자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그런 거죠 뭐. 아. 뭐라도 얻을 수 있으려나.”
“하하하하.”
대원은 한참을 웃다가 중얼거렸다.
“놓아줄 때가 한참 지났거늘. 이제껏 잡고 있었던 건 내 보신을 위한 걸까, 녀석을 위한 걸까.”
둘 다일지도 몰랐다.
허나 영원히 그렇게 갈 수는 없는 일.
혜진이 원하고 있었다.
혜진을 아끼는 만큼 스스로 서고 걸을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진옥룡이라. 이 아이처럼 적절한 이가 없겠지.’
천하의 그 무엇도 꺼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한다.
그러면서도 협을 잃지 않으니 훗날 마협이라 불리며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리라.
그런 정광이라면 혜진을 위해 길을 뚫어줄 수 있을 터.
대원은 마음을 굳혔다.
“당가를 사천의 맹주로 인정하고 훗날 곤륜이 위험에 처했을 때 최선을 다해 돕겠네.”
“장문인께서 벌써 그러겠다고 하셨는데요.”
“최선은 빠져 있지 않았나?”
“음. 그렇긴 하네요. 저는 뭘 해야 하죠?”
“간단하네. 혜진이를 데려가게나.”
“무량수불. 저 혼인 안…… 못 해요.”
“흘흘. 그건 나도 싫네. 그냥 데리고 가서 세상을 보여달란 말일세.”
“앞의 말씀이 좀 걸리네요.”
“그냥 흘려듣게나. 어떤가?”
정광은 대원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제자 하나 데리고 다녀주는 것으론 과도한 대가 같습니다만.”
“어차피 일은 그렇게 될 것 아닌가? 당가나 자네를 보면 말일세.”
그녀의 말대로 당영중이 이끄는 당가는 당기황 때와 달리 높은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도 사천의 맹주가 되기 충분한 데다 정광까지 원하고 있으니 아미가 반대해도 그렇게 될 터.
자존심 때문에 괜히 발목을 잡아서 시간만 끄느니 인정할 건 인정하고 당가에 빚을 지우는 게 나으리라.
게다가…….
‘사천제일이라. 운이 좋아도 한 세대까지만 유지할 수 있는 칭호지.’
대원은 물론 정광도 당영중도 아는 사실이었다.
대원이 빙그레 웃자 정광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러면 혜진 소저를 안 데려가도 되겠네요.”
“흘흘. 데려가는 만큼 더 밀어주겠다니까.”
“진짜죠?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실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게 그 녀석의 길이겠지. 원하면 문서로라도 써주겠네.”
정광은 잠시 고민했다.
‘아예 내보내려는 것 같은데. 정말 황제의 딸일 리는 없고. 고관대작(高官大爵)의 딸쯤 되려나.’
뭐가 됐든 황태손보다는 덜 귀찮을 터.
얻어낼 건 오히려 더 많을지도 몰랐다.
“그러죠 그럼. 이따 꼭 써주세요.”
대원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다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회의가 끝날 때가 됐군. 같이 가보세.”
“저도요?”
대원의 나이답지 않게 맑은 눈이 반짝였다.
“자네의 진짜 계획을 들어야 제대로 도울 것 아닌가. 그렇다고 너무 힘겨운 건 피해주게.”
정광의 눈도 빛났다.
“적당한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 눈매가 왜 날카로워지세요? 정말 적당한 것이라니까요.”
* * *
후위진은 정면에 서 있는 거대한 사마련 총단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깊게 가라앉은 눈에 한 줄기 빛이 번뜩였다.
‘해보자, 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