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그냥 비무
-사형께 배운 대로 해야지요.
정광은 백승무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돈과 협에 관계된 일이 아니면 물렁하기 그지없던 녀석이 이렇게 변하다니.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하지 않았는가.
-그래. 밟아버려. 다시는 못 덤비게.
-네. 한 달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바로 그거지. 보내 버리는 거야.
-사, 사형. 한 달 안에 무덤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한 달만 누워 있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정광은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쩌겠는가.
조금씩 나아지겠지.
백승무는 정광이 수긍하는 듯하자 몰래 한숨을 쉰 뒤 진형에게 물었다.
“청신 진인께서 진검으로 비무하라 하셨소?”
“……그게 무슨 말이오?”
“진인께서 시키신 일이잖소.”
“…….”
진형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백승무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솔직해집시다. 사문의 존장이 계신 데 진형 도우께서 독단으로 이럴 수는 없는 일 아니오.”
“……내가 사백조님께 부탁드리고 허락을 받은 것이외다. 헌데 백 소협께서는 사형인 진옥룡께 묻지도 않고 받아들이시는구려. 곤륜의 문규(門規)는 가벼운 편인가 보오?”
백승무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살짝 웃었다.
“사형께서는 비무를 받지 않으면 주먹부터 날리실 분인지라…… 사, 사형. 왜 주먹을 쥐십니까?”
“저절로 그렇게 되네. 뭐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정광은 고개를 돌려 청신에게 외쳤다.
“진인! 진검으로 생사결(生死決)을 벌이면 되는 거죠?”
멀리서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부리던 청신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생사결이라니! 자네, 제정신인가?”
“아. 죽이진 않고 망신만 주실 생각이셨어요?”
“……나를 무엇으로 보고 그런 말을. 그저 시간도 남겠다, 후학끼리 절차탁마할 기회라 생각했을 뿐일세.”
“절차탁마하려면 생사결을…….”
“그냥 단순한 비무라니까!”
“어쨌든 진검으로 하실 거죠?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요.”
청신의 눈에 분노가 떠올랐다.
“……자네 사제가 반드시 이길 거라 자신하는 것 같군.”
“무인이라면 자신감이 있어야죠.”
“……좋아. 그렇게 하세.”
“참관인(參觀人)은요?”
“음? 내가 있는데 무슨 상관인가?”
“에이. 왜 이러세요. 공정하게 볼 분이 계셔야죠.”
“……지금 도발하는 겐가?”
“아뇨. 그게 강호의 관습이니까요. 게다가 여긴 아미산. 양해도 구하는 김에 아미파 분을 참관인으로 모시죠.”
청신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네. 저기요, 한성 사태님!”
보현전(普賢殿) 앞에서 교봉(敎鳳) 혜진과 대화하고 있던 한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혜진과 함께 다가와 나직이 주의를 줬다.
“어르신들께서 회의 중이시니 조용히 말하게. 무슨 일인가?”
“제 사제와 청성의 진형 도우가 비무를 했으면 하는데요. 연무장을 쓸 수 있을까요? 사태님께서 참관도 해주시고요.”
한성의 이마에 잡혔던 주름살이 더 깊어졌다.
적이 아미산 초입에 진을 치고 있는데 쓸데없는 짓을 벌인다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정광의 전음을 듣자 마음이 바뀌었다.
-진인께서 저한테 앙심을 품었는지 계속 강요하셔서요. 거절했다가 앙금을 남기느니 차라리 비무 한번 하고 털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기분 좋게 만들어 드릴게요.
한성은 마지막 말에 주목했다.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라…….’
청신에게 망신을 주겠다는 말 아닌가.
‘저 속 좁은 양반을 꽁한 채로 두면 계속 분란을 일으킬 게 뻔한 일. 차라리 망신을 주고 주눅 들게 하는 게 앞날을 위해서도 더 좋아.’
어차피 청신에게 감정도 안 좋은 상황, 정광의 사제가 이긴다는 보장만 있으면…….
‘금권검협이라 불린다 했지? 많이 과장된 별호라는 평이던데.’
그에 비해 청성의 진형은 청수검(淸秀劍)이라 불리며 사천성에서 제대로 인정받는 후기지수.
두 사람의 기도를 살펴도 누가 이길지 짐작이 되지 않았으나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유명한 정광의 안목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세. 이쪽으로 오게나.”
한성은 모두를 연무장으로 안내했다.
사찰 경내에 지나다니던 아미파 여승들과 속가제자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합류했다.
백승무와 진형이 연무장에서 마주 보고 섰을 땐, 상당히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한성은 구경꾼들에게 먼저 경고했다.
“너무 시끄럽게 굴면 당장 내쫓을 거다.”
“네!”
다음은 비무 당사자인 두 청년이었다.
“피치 못해 상대를 상하게 하는 건 어쩔 수 없으나 내가 제지하면 즉시 멈춰야 하네. 알아들었는가?”
“네.”
마지막으로 그녀의 시선이 정광과 청신에게 향했다.
“곤륜과 청성은 절대 비무에 끼어들면 안 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당연한 말이네.”
한성은 손을 들었다 내리며 말했다.
“두 소협은 비무를 시작하게.”
진형이 검을 거꾸로 쥔 채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청성의 진형이 백 소협께 가르침을 받겠소.”
“곤륜의 백승무요. 진형 도우와 검을 나누게 되어 기쁘오. 무공명을 말하는 건 생략하고 해도 되겠소?”
“……그렇게 합시다.”
진형은 속으로 예의도 없는 놈이라 욕하며 검을 비스듬히 들었다.
청성이 자랑하는 청풍검(淸風劍)의 기품있는 기수식(起手式)이었다.
“오시오.”
그에 반해 백승무는 한쪽 다리로 삐딱하게 선 채 왼손을 우아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검지를 펴서 까닥거렸다.
“도우께서 오시오.”
구경하던 아미파의 젊은 제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한성이 노려보자 금세 조용해졌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진형이 물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오?”
“본문의 기수식이오만. 뭐가 잘못됐소?”
“…….”
진형은 청명심법(靑明心法)으로 닦아온 내공을 끌어올렸다.
마음속에 쌓인 살기와 함께.
‘네놈이 잘못됐지. 버릇을 고쳐주마.’
그는 청류보(淸流步)로 미끄러져 나아가며 일검을 찔렀다.
청수검이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은 날카로운 수!
아니, 좀 더 제대로 말하면 악랄한 수였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옆으로 이동해서 피하거나 검으로 방어했을 상황.
하지만 백승무는 달랐다.
정광에게 들었던 금과옥조와도 같은 조언을 떠올렸다.
‘상대가 얕보면 기쁘게 받아들여. 네가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거니까.’
진형은 별다른 탐색도 없이 강한 일격을 찔렀다. 그것도 과한 수법으로.
은연중에 백승무를 얕보는 데다 성품이 곱지 않아서였다.
‘그런 놈을 곱게 상대하면 기세만 올려주는 꼴이지. 사제, 그럼 어떡해야 할까?’
백승무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전력을 다해 맞받아쳐야 합니다!’
나이에 안 어울리게 많은 실전을 겪은 백승무였다.
그 실전들을 통해 정광의 조언들이 옳다는 걸 확실히 체감했고 그 조언들을 따름으로써 별다른 부상 없이 적을 이겨올 수 있었다.
진형이 뛰어난 후기지수라 하나, 백승무도 많이 성장한 상태.
여기에 정광 밑에서 구르며 키워온 악과 실전 경험을 더하면 진형은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마음 편하게 상대할 수 있지.’
백승무는 용형보(龍形步)를 펼쳐 사선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상체가 용이 꿈틀거리듯 우아하게 휘었고 진형이 찌른 검은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엇!’
너무나 시기적절한 수에 놀란 진형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 거리를 확보하며 검을 휘두르려 하는데.
백승무가 뇌전보(雷電步)로 번개처럼 따라붙으며 애검 흑우(黑友)를 내질렀다.
흑우는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진형의 얼굴로 향했다.
경악한 진형은 고개를 옆으로 젖혀 간신히 피해냈다.
그의 뺨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조금 늦어 흑우가 살짝 베고 지나간 것이다.
‘이놈이 감히!’
진형은 사천성에서 인정받는 후기지수답게 검만 고집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바짝 붙어 있는 백승무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내질렀다.
일격에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쇄비천수장(碎碑千手掌)!
하지만 백승무가 더 빨랐다.
그는 진형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흑우를 끌어당겨서 검 손잡이 끝, 검두(劍頭)로 진형의 뒤통수를 찍어 버렸다.
빠악!
“커헉!”
일격필살의 기세로 펼쳤던 쇄비천수장이 백승무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뒤통수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무릎이 꺾여서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이, 일어서야 해!’
억지로 하체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드는데.
흑우의 검두가 확대됐다.
이번엔 뒤통수가 아니라 이마였다.
빡!
“억!”
빡! 빠악! 빠각!
“윽! 악! 아악!”
진형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며 부르짖었다.
“그, 그만…… 크악!”
백승무는 흑우의 검두로 계속 내려찍었다.
흑우에 현철이 두 냥이나 섞여 있어서 그런지 손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익! 익! 익!”
“억! 악! 꼴깍.”
진형이 정신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백승무는 우아하고 멋진 동작으로 흑우를 검집에 넣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 경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광만 빼고.
“사제.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사형.”
“조금 부족한 거 같은데. 조금만 더 하지그래?”
정광의 말에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조, 조금만 더?’
‘너, 너무하잖아!’
하도 어이가 없어 굳어 있던 한성이 고함을 질렀다.
“그만! 백 소협이 이겼네!”
그 뒤를 이어 청신이 분노하여 외쳤다.
“이렇게 악독한 수를 쓰다니! 정파인으로서 이게 무슨 만행인가!”
“악독하다니요? 검사답게 검으로 끝냈는데요.”
정광의 항변에 사람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가 검을 썼으니 잘못된 건 아니지.’
‘검두로 머리를 계속 찍는 검초는 듣도 보도 못 했지만.’
청신은 고함을 치려다가 겨우 참았다.
그래 봐야 승부에 승복하지 못하는 속 좁은 늙은이라고 험담만 들을 터.
싹수 있는 사손인 진형의 상세부터 살펴야 했다.
‘……끔찍하군.’
진형의 머리통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여기저기 터지고 혹이 불룩 솟아 있는 게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청신은 사손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으며 작게 말했다.
“진형아. 내 말이 들리느냐?”
“으으…… 그, 그만 찍으시오.”
“진형아!”
“으악! 그만! 백 소협! 내가 잘못했소! 제발 그만…… 끄르륵.”
진형은 경기를 일으키다가 다시 기절했다.
청신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가 바닥에 눕힌 뒤 일어섰다.
그리고 정광을 노려봤다.
그의 시선엔 차가운 살기가 담겨 있었다.
정광이 반색하며 물었다.
“진인. 저와 비무 하시려고요?”
“…….”
청신은 정광을 잠시 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무엇들 하느냐? 그만 가자!”
“아, 알겠습니다!”
청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진형을 챙긴 청성 제자들이 그 뒤를 다급히 따랐다.
정광은 청신의 뒷모습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제 몸보신 할 때는 아주 냉철하기 그지없네. 하긴. 그러니 아직도 살아 있겠지.’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아직도 백승무를 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천성에서 기대받는 후기지수인 진형을 가볍게 이긴 무위도 무위지만.
아미의 속가제자들이 짓궂게 굴어도 얼굴을 붉히며 예의 있게 응대하던 백승무에게 저런 독심이 있을 줄이야.
다들 곤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아직 도호도 못 받은 정 자 배의 막내가 저 정도라니…….’
‘소문대로 곤륜의 무공은 우아하면서도 멋지구나. 거기에 독심이 섞이니 정말 무시무시하군.’
공우와 언의진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백승무를 축하했다.
담담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던 혜진은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서 열기가 일렁였다.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제자가 저 정도라니…… 사실상 진옥룡이 데리고 다니며 가르쳤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진옥룡은?
소문은 많이 들었으나 사제인 백승무의 실력을 보자 더 궁금해졌다.
‘……얼마나 강할까?’
멀지 않은 곳에 자신과 같이 구룡사봉으로 묶여 불리는 공우와 언의진이 있었으나 눈길이 가지 않았다.
오직 정광과 싸워보고 싶었다.
그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높은 곳에 있는 자에게 두려움 없이 덤비는 투사였다.
‘……안 돼. 자중해야 할 때야.’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문에 큰일이 닥친 만큼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었다.
구경하는 것이야 큰 문제 될 게 없으나 직접 싸우다 다치면 사문에 폐를 끼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평소라도…….’
옆에 있는 한성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그 마음을 읽은 걸까?
정광이 다가와 물었다.
“비무 하고 싶으시죠?”
혜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광의 눈은 평상시와 같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해보죠. 생사결 말고 그냥 비무로. 대신 제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해야 해요.”
혜진이 자신도 모르게 좋다고 말하려는 순간.
한성이 끼어들었다.
“그만. 여기까지만 하세. 너희들도 모두 물러나라!”
한성은 혜진과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미미하게 저었다.
혜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미파 제자들이 찔끔하며 뿔뿔이 흩어지려고 하는데.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