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배운 대로
대정과 대연은 급히 식당 밖으로 나갔다.
식사 중이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정광이 느긋이 뒤따라 나가니 청신이 노한 얼굴로 대정에게 주장하고 있었다.
“장문인. 놈들이 아미산까지 원군을 보냈소이다. 아미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오.”
“진인. 대체 얼마나 왔길래 그러시오?”
“아주 많소이다. 이럴 게 아니라 직접 보시는 게 좋을 듯하오.”
사람들은 한동안 산길을 내려가 산밑이 보이는 절벽으로 갔다.
청신의 말대로였다.
아미산과 조금 떨어진 평지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었다.
아미파 제자들의 눈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감히 본파를 핍박하다니…….’
정광은 내심 웃었다.
‘생각보다 열심이잖아.’
그가 당가에서 대놓고 아미로 향한 건 사마련의 이목을 끌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따라올까 궁금했는데 꽤 많이 온 것 아닌가.
청신이 원군이라 생각할 만했다.
“장문인. 어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하오. 저들이 언제 산에 오를지 모르외다.”
재촉하는 청신과 달리 대정은 침착했다.
적들의 형세를 면밀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본파를 치러 온 것 같진 않소만.”
“무슨 말씀이오?”
“그럴 의중이었으면 기습의 묘를 살리기 위해 벌써 산을 오르고 있을 터. 진형을 보아하니 길을 막으려 하는 것 같소.”
“아미를 안심시키려는 간악한 술책일 수도 있소이다.”
“그렇다기엔 저들의 말에 짐이 너무 많이 실려 있지 않소? 꽤 오랜 시간 동안 본산을 봉쇄하려는 것 같은데…… 진옥룡.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대정이 지목해서 묻자 정광은 눈을 살짝 감았다.
그리고 이맛살을 모으며 생각에 잠기자 사람들은 기대 어린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천재 중의 천재라 들었다. 반드시 저들의 속셈을 알아낼 게야.’
‘아아. 생각하는 모습마저 이렇게 아름답다니.’
그들의 짐작과 달리 정광은 어디까지 말해줄까 고민 중이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단 대충 넘어가자.’
감았던 눈을 뜨자 그의 눈에서 신비한 빛이 일어났다.
물론 보는 이들의 착각이었다.
원래 잘난 눈이 감겼다가 뜨이자 더 새롭게 보인 것이다.
“장문인 말씀대로 산을 오르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아미타불. 자네 생각도 같군.”
“장문인.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소. 진옥룡, 자신할 수 있나? 근거가 무엇이길래?”
청신이 강하게 의문을 표했다.
납득할 만한 대답이 안 나오면 꽉 물고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정광은 가볍게 그를 뿌리쳤다.
아주 원론적인 대답으로.
“하지만 진인 말씀처럼 가만히 있을 순 없죠. 방비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청신은 할 말이 없었다.
누가 들어도 상식적이고 옳은 말 아닌가.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대론 안 돼. 아미를 이용해서 저놈들과 싸워야 해.’
양측의 전력을 깎고 분노한 아미를 청성으로 끌고 가야 한다.
그게 청성을 위하는 길이었다.
허나 대정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정광의 말에 찬성하며 사안을 마무리 지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제자들은 모든 도량에 경계 태세를 취하게 하라. 대 자 배는 보현전(普賢殿)으로 모이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장문인!”
아미파 제자들이 바쁘게 흩어졌다.
얼마 안 가 타종 소리가 금정봉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이어받아 다른 봉에서도 타종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더 흐르자 아미산 전체가 종소리로 물들어 버렸다.
그러자 아미산이 깨어났다.
산 곳곳에서 비구니들이 부산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고 대 자 배 노승들은 승복을 펄럭이며 금정봉으로 달려왔다.
지켜보던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쓸 만한걸. 방비가 잘돼 있어.’
아미파는 여타의 문파와 달리 수많은 사찰과 암자로 엮인 연합체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항렬도 통일해서 쓴다고 했지. 다들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한 노승이 다른 노승에게 소리쳤다.
“사저! 저번 산사태로 인한 피해 때문에 도와달라 요청했거늘, 왜 아직도 소식이 없으시오?”
“산사태는 보국사(報國寺)에만 생겼나? 본사 것을 처리하기도 바쁜데 무슨.”
“바쁘기는! 저번 냉해(冷害) 문제 때문에 꽁해서 그러는 것 아니오!”
“사매! 나를 무엇으로 보는가! 좋아.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데 저번에 사매는 왜 안 도와줬지? 응?”
여기저기서 노승들이 투덕거렸다.
사이좋게 웃으며 안부를 묻는 이들이 더 많았는데 옆에서 싸우든 말든 그저 그러려니 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지.’
정광이 피식거리는데 그를 발견한 한 노승이 외쳤다.
“아미타불! 선동(仙童)이 내려왔구나!”
삽시간에 노승들의 시선이 정광에게 모였다.
노승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힘들게 온 보람이 있군.”
“그러게 말입니다. 저런 미남자가 있다니.”
하지만 흐뭇함도 잠시.
그들의 머릿속에 한 별호가 떠올랐다.
“……헌데 저렇게 잘생긴 청년 도사라면…….”
“……곤륜의 진옥룡?”
노승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떨떠름함과 호기심이 뒤섞인 것으로.
그때, 한 노승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무엇 하는가? 어서 들어가세.”
“아. 대사저(大師姐). 알겠습니다.”
왁자지껄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노승들은 조용히 보현전으로 들어갔다.
정광은 노승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대사저라. 곤륜으로 치면 운후 사조 같은 위치인가.’
그의 짐작대로였다.
노승은 천천히 정광에게 다가와 자신의 법명을 밝혔다.
“아미타불. 만년사(萬年寺)에서 밥만 축내는 대원이라 하네. 곤륜의 진옥룡 되시는가?”
“네. 안녕하세요.”
“반갑구먼. 사매들이 철이 없어 소란을 피웠어. 대신 사과할 테니 이해해 주면 고맙겠네.”
“뭘요. 괜찮아요.”
“…….”
대원은 정광을 지그시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쭈글쭈글한 얼굴이 더 쭈글쭈글해졌다.
“자네, 참 독특하군.”
“저요?”
“그래. 보통 사내와는 달라.”
“음. 많이 잘생기긴 했죠.”
“무어라? 하하하하.”
한동안 작게 웃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지. 허나 내 말은 다른 의미였네. 자네, 내 사손이 예쁘지 않은가?”
그녀는 눈짓으로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긴 머리를 한 속가제자였는데 그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
정광도 그렇게 생각했다.
“예쁜데요.”
“전혀 놀란 기색이 없는데.”
“제 단원인 언 소저도 예쁘거든요.”
정광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언의진을 가리켰다.
언의진이 허리를 곧게 펴자 대원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호오. 그렇군. 전혀 밀리지 않아. 혜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혜진이라 불린 여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조님. 저는 무인일 뿐입니다.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남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안목도 없습니다.”
“거참. 이렇다니까.”
대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정광에게 말했다.
“장문인이 불렀으니 빨리 들어가 봐야 할 터. 나중에 또 보세.”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하하. 코앞인데 무슨. 고맙네.”
대원과 혜진은 부축받고 부축하며 멀어져 갔다.
정광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무혈단원들에게 다가갔다.
언의진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마워요 단주. 단원이라고 체면을 세워주셨네요.”
“체면요? 아닌데. 언 소저는 실제로 아름답잖아요. 용모도 그렇지만 저돌적인 무공은 더 그렇죠. 안 그래요, 철월?”
“철월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여자의 주먹은 아프다. 무서운 여자다.”
언의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정광이 빈말을 하는 성품이 아닌 걸 알아서였다.
철월도 표현은 좀 그랬지만 그녀의 무공을 칭찬한 것이라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래도 언의진은 자만하지 않았다.
“교봉(敎鳳)의 검도 날카롭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더 궁금해지네요.”
“아. 사봉 중 교봉이 저분이셨구나. 언 소저와 좋은 적수가 되겠어요.”
언의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교봉의 무공은 사봉 중 제일 뛰어나다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 그녀와 좋은 적수가 될 것 같다고?
‘……단주의 안목은 정확해. 내가 성장하긴 했나 보구나.’
의욕이 솟았다.
어서 빨리 교봉과 자웅을 겨뤄보고 싶었다.
언의진이 주먹을 꼭 쥐고 투지를 일으키자 백승무가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래. 이게 바로 언 소저지. 어찌 이리 아름답단 말인가.’
마음이 흐뭇해지다 못해 행복해지는데 정광이 초를 쳤다.
“사제. 침 좀 닦아.”
“억! 네, 네!”
언의진이 의아한 얼굴로 백승무를 바라봤다.
백승무는 벌게진 얼굴을 숙여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 꼴이 불쌍했는지 공우가 재빨리 나섰다.
“단주. 단주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겁니까?”
“네. 아미파 대회의니까요. 같은 무림맹도라 하나, 외인인 제가 낄 자리가 아니죠.”
정광의 말대로였다.
회의에 참석해라, 참석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나 청신조차 들어갈 생각도 못 하고 보현전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혈단원들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불쌍해 보이는군.’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지 같아.’
정광이 손뼉을 치며 주의를 돌렸다.
“다들 저리로 가서 얘기 좀 하죠.”
그들은 사람이 없는 공터로 갔다.
정광은 내공을 일으켜 소리를 차단한 뒤 입을 열었다.
“계획대로 사마련이 쫓아왔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며칠 더 버티는 겁니다.”
“아미타불. 단주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정말 저렇게 와서 길을 막는군요.”
공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언의진이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요. 단주와 독존 어르신께서 성도를 휘저었으니 사마련이 얼마나 열 받았겠습니까.”
“언 소저 말씀대로입니다. 사형이 당가를 떠나자 옳다구나 할 수밖에요. 홀로 되신 독존 어르신을 잡는 데 방해가 안 되도록 사형을 못 움직이게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헌데 사형.”
“응? 왜?”
“그래도 너무 많이 온 것 같습니다만…….”
백승무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정광이 웃었다.
“사천 지부에 똑똑한 놈이 있다고 했잖아. 언 소저 말대로 독존 어르신을 잡을 기회라 판단하고 일을 벌였겠지.”
청성을 조이는 한편 당기황의 동정을 살핀다.
눈엣가시 같은 당기황을 처리하자마자 청성을 바로 친다.
그 후 당가가 분노하여 나서면 당가와 싸운다.
전력을 집중해서 사천성의 명문정파들을 하나씩 꺾으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정광과 아미를 간과할 순 없어서 세력의 일부를 이렇게 보냈을 터.
산 밑에 모인 자들의 임무는 시간을 끄는 것임이 분명했다.
“어쨌든 푹 쉬면서 준비 잘하세요. 신호가 오면 바로 떠날 테니까요.”
무혈단원들은 사마련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정광에 대해 너무 모르기에 이런 잘못된 수를 둔 것이다.
‘단주가 도사 가균을 잡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홀몸으로 가균은 물론 천랑대까지 몰살시켰다는 걸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적지.’
물론 정광의 놀라운 무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자는 없었다.
허나 정광 홀로 그랬고 창사와 부사까지 잡았다는 걸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알아봐야 무혈단, 당가 정도나 될까.
무림맹주와 군사도 전서구를 받을 때가 되었으니 곧 알게 되리라.
‘그에 비해 사마련은…….’
애초에 체면 떨어지는 일이라 비밀리에 팔사 중 둘을 보냈던 사마련주도 연락이 없어 의아해하고 있을 터.
당기황과 당가의 노인들을 막아섰던 자들은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기에 창사와 부사의 죽음을 알 도리가 없었다.
무혈단원들은 감탄한 눈으로 정광을 바라보다가 한 명씩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단주의 덕이 무척 높습니다.”
“네?”
“사형도 참 어지간하시군요. 왜 굳이 숨기시는 겁니까?”
“뭘?”
“단주. 팔사 중 둘을 또 잡으셨잖아요. 엄청난 명성을 떨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숨기셔서 감탄하는 겁니다.”
“철월도 도사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사부를 죽여줘서 고맙다.”
정광은 철월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단원들에게 말했다.
“아니, 당연히 숨겨야죠.”
“……?”
“겨우 그런 놈들을 상대하며 고생했는데 창피하잖아요.”
“……!”
다들 어이없어하는데 정광이 씩 웃었다.
“그리고 그걸 몰라야 적들이 부나방처럼 몰려오지 않겠어요?”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는 철월을 빼고 무혈단원들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악귀다.’
‘아수라인가.’
‘역시 사형은…….’
그때, 한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청성파의 청년 도사였다.
그는 감히 악귀를 대할 용기는 없는지 악귀의 사제에게 말했다.
“무량수불. 청성의 진형이 인사드리오.”
“반갑습니다. 곤륜의 백승무입니다.”
“금권검협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허명일 뿐입니다. 헌데 무슨 일로……?”
진형은 정중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회의가 언제 끝날지 몰라서 말이오. 실례가 안 된다면 비무를 요청해도 되겠소이까?”
백승무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왜 하필 나요?”
“……그냥 마음이 가서 말이오.”
백승무의 눈이 빛났다.
순진했던 과거의 그라면 믿었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아니었다.
‘해볼 만한 게 나밖에 없어서겠지.’
자존심이 상했으나 갚아주면 될 일.
백승무는 정중히 두 손을 모았다.
“감사히 응하겠소. 나도 내 실력이 궁금하던 참이외다.”
순간 그의 귀에 정광의 전음이 들려왔다.
-사제. 무시당한 거 알지?
-네. 압니다.
-어떻게 할 거야?
백승무가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은 정광의 것과 닮아 있었다.
-사형께 배운 대로 해야지요.
-그래. 밟아버려. 다시는 못 덤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