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75화 (175/569)

175화

미끼

복호사(伏虎寺)가 비구니만 있는 사찰이라 하나, 드나드는 참배객 중에는 사내도 많았다.

그러니 비구니가 사내를 봤다고 놀랄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긴 머리를 한 젊은 속가제자들은 달랐다.

참배객이 들어갈 수 없는 금지(禁地)에서 생활하는 그녀들은 사내를 언제 봤는지 기억조차 못 할 정도.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여럿이!

“남자다!”

“남자가 나타났다!”

난리가 났다.

몇 명의 속가제자가 울부짖듯 외친 소리에 수많은 속가제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어디! 어디!”

“농이면 가만 안 둘…… 헉! 지, 진짜잖아!”

“아미타불! 내 생에 이런 날이 오다니! 보현보살(普賢菩薩)께서 도우셨구나!”

천하제일미남이든.

머리를 빡빡 민 중이든.

곱상한 부잣집 도련님이든.

심지어 말에 꽁꽁 묶인 거인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사내.

그녀들과는 다른, 사내라는 것만이 중요했다.

세세한 외모 같은 건 눈에 들어올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들이! 썩 물러나지 못해!”

대연이 호통을 질렀으나 소용없었다.

그래도 존장의 명인지라 물러나긴 했으나 정말 개미 한 걸음만큼이었다.

“허어. 이런 꼴을 보이다니. 미안하네, 진옥룡. 이 녀석들이 한참 혈기왕성할 때인지라…….”

대연이 탄식한 뒤 사과하자 오히려 정광이 위로했다.

“뭘요. 그럴 수도 있…….”

순간, 함성이 터졌다.

“우와아!”

“남자가 말했다!”

“그래! 사내는 이런 목소리였지!”

“…….”

정광이 어이없어하자 대연이 벌게진 얼굴로 고함을 쳤다.

“갈! 지금부터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들은 마보 한 시진이다!”

그 정도쯤이야.

오랜만에 사내를 봤는데 까짓것 웃으며 하면 되지.

속가제자들이 계속 떠들 기세이자 대연이 재빨리 덧붙였다.

“측간 청소 추가! 명상 두 시진!”

“…….”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과연.

대연은 그녀들을 순식간에 침묵시켰다.

정광은 내심 감탄했다.

‘대단한걸.’

그라면 검이라도 휘둘러야 가능한 일을 별것 아닌 것들로 협박해 해결하다니.

사태(師太)쯤 되니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은가.

“훌륭하십니다, 사태님.”

“…….”

“한 수 배웠네요.”

“…….”

대연은 정광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어서 가세나. 그게 낫겠어.”

“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정광 일행을 이끌었다.

뒤에서 속가제자들이 졸졸 따라오며 수다를 떨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면서.

정광은 걸음을 옮기며 당영중이 말했던 아미의 단점을 떠올렸다.

‘속가제자들이 많아서 다소 시끄러운 편이라더니. 그 정도가 아니잖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진옥룡 수호단에게 단련된 그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공우는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불경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백승무는 시뻘게진 얼굴로 땅만 보며 걸었다.

철월은 아혈을 풀어준 지 오래건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태.

그나마 제일 제정신인 언의진이 황당한 얼굴로 정광에게 물었다.

“단주. 산에서 살면 이렇게 되나요?”

“저는 아닌데 사형들은 모르겠네요.”

“흐음. 정우 도사님은 아니겠지만 정현 도사님은 그럴지도…… 아. 공우 스님. 소림은요?”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바쁘신데 미안해요.”

정광 일행은 한동안 걸어 절벽 앞에 있는 작은 암자에 도착했다.

대연이 먼저 들어가자 정광도 따라 들어가려 했다.

백승무가 다급히 물었다.

“사, 사형. 저희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다른 분들도요.”

백승무는 물론 모두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아미파의 속가제자들이 눈을 빛내며 그들을 둘러쌌다.

‘설마 해치진 않겠지.’

정광은 피식 웃으며 암자 안에 들어갔다.

단아한 분위기가 풍기는 작은 방.

후덕한 인상의 노승이 앉아 있었다.

대연이 그녀에게 정광을 소개했다.

“사저(師姐). 곤륜의 진옥룡이 왔습니다.”

복호사의 주지이자 아미파의 장문인을 맡고 있는 대정은 푸근한 미소로 정광을 환영했다.

“어서 오시게. 아미산에 오른 걸 환영하네.”

“안녕하세요.”

“진옥룡을 직접 보게 되다니, 나도 덕을 좀 쌓은 것 같군.”

“그러게요.”

“하하하. 듣던 대로 재밌구먼. 장문 진인과 운후 진인은 잘 계신가?”

“아마도요.”

“그거 다행이군. 아마도가 어딘가. 하하하.”

잠시 웃음을 흘리던 대정이 대연에게 물었다.

“사매(師妹). 청성은?”

“청신 그 늙은이가 왔더군요. 목숨은 구해줬습니다.”

“같이 올라왔나?”

“아닙니다. 사마련 잔당을 쫓는답시고 갔는데, 지금쯤이면 꽁무니를 뺀 뒤 산을 오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수고했네. 웬만하면 안 오면 좋을 텐데…….”

대정은 말끝을 흐리고 정광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청성보다 궁금한 건 자네일세. 맹주와 제갈 군사에게 서신은 받았네만 자세한 내용은 없더군.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대단한 건 아닌데요.”

“자네야 그렇겠지만 우리는 아니겠지. 말해보게나.”

정광은 간단하게 말했다.

“당가를 밀어주십사 부탁드리려고요.”

“당가를 밀어달라?”

“네.”

“흐음…….”

대정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정광은 그녀를 보며 기운을 느꼈다.

생각외로 별다른 흔들림이 없었다.

‘욕심이 없긴 없나 보네.’

아미는 누군가의 위에 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인 듯 대정은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머리 위에 서는 것도 싫어한다 했지.’

마치 정광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대정이 눈을 뜨며 물었다.

“당가를 사천의 맹주로 삼아 사마련을 몰아내자는 말인가?”

“네.”

“안 될 건 없네만 모양새가 좀 그렇군.”

“왜요?”

“잘 모르는 이들은 본파가 당가에게 허리를 숙였다고 말해댈 것 아닌가.”

“불문에 귀의하신 분이 그런 헛된 명성을 신경 쓰시다니요.”

대정이 빙그레 웃었으나 눈만큼은 날카롭게 빛났다.

“본파는 사찰이기도 하나, 무림문파이기도 하네. 우리는 그 사실을 명확히 직시하고 있어.”

“소림과는 많이 다르시네요.”

“그들은 그들의 길이 있고 우리는 우리의 길이 있지. 그래서 무공에도 차이가 있네. 혹 본파의 무공을 보았나?”

“네. 아까요.”

“느낌을 말해보게.”

“자신은 살고 상대는 죽인다. 맞죠?”

“바로 보았네. 불문치곤 좀 과격한 편이지.”

“좀이요?”

“하하하. 어쩔 수 없어. 원래부터 그랬는걸.”

한동안 웃던 대정이 깊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아미산엔 예부터 범이 많아 근방 사람들이 호환(虎患)을 당하곤 했지. 본파의 무공은 이를 막기 위해 발전했네.”

복호사라는 이름에도 복호(伏虎)가 들어 있다.

무공도 그랬는데 복호검(伏虎劍), 복호권(伏虎拳) 등 범을 때려잡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이름투성이였다.

“범을 잡으려다 보니 과격해질 수밖에.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 주게나.”

정광은 당연히 이해했다.

무공이라면 그쯤은 되어야지.

시원시원하고 좋지 않은가.

“네. 장문인께서도 저를 이해해 주실 거죠?”

“그건 좀 곤란하다니까.”

“와. 받기만 하시네요.”

“하하하하.”

대정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옆에 조용히 있던 대연도 우스웠는지 입을 실룩거렸다.

“사저.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나.”

“감사합니다.”

대정에게 양해를 구한 대연은 진지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이보게 진옥룡. 사저나 나나 무림맹주인 팽 대협과 군사인 제갈 대협을 존중하네. 대협이라 불려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어서야. 그들이 자네의 말을 경청해 달라 부탁했기에 웬만한 것이면 들어주려 했네. 이해하겠나?”

정광의 대답은 의외였다.

“맹주께서는 너무 막무가내고 군사 그분은 좀 잘난척하지 않나요?”

“아하하하하!”

듣고 있던 대정이 배를 잡고 웃었다.

대연은 억지로 웃음을 참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 살짝 그런 감이 없진 않지만 협을 품고 있지 않나? 어쨌든 내 힘써보겠다고 했으나 이건 곤란하네. 당가와 동등하게 손잡는 건 좋지만 위에 놓을 순 없어. 오늘의 미안함은 다음에 반드시 갚지. 사과를 받아주게나.”

정광이 잠시 생각에 빠지자 대정이 덧붙였다.

“사마련의 악행은 우리도 분노하고 있다네. 그래서 벌써 맞서고 있고. 당가가 욕심을 버리면 기꺼이 하나처럼 움직일 테니 우리 입장을 전해주게나.”

“이해가 안 가네요.”

“부끄럽군. 쓸데없는 고집이지만 어쩔 수가 없어.”

“아뇨. 자존심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알겠는데 다른 게 이해가 안 가서요.”

“음? 무슨 말인가?”

“평상시라면 모를까, 당가가 희생하겠다고 나서는데 굳이 자존심을 세우실 필요가 있을까요?”

“……당가가 희생한다고?”

“네.”

정광은 당가타에 도착한 뒤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했다.

당가의 태상가주이자 십존인 당기황의 영웅적인 희생이었다.

그 엄청난 미담을 전해 들은 대정과 대연은 입을 모아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진짠데요.”

“독존이 희생을 해? 이제껏 들었던 농 중에 제일 황당하군.”

대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대연이 도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천하를 희생시켰으면 시켰지, 그 못된 늙은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광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 인간. 아미파에겐 또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이렇게 학을 떼는 거야?’

사람은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걸 오늘도 깨우쳐 주는 당기황이었다.

‘양념을 살짝 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나으려나.’

정광은 그래도 살짝 치기로 했다.

“독존께서는 지금 자신을 미끼로 삼아 고군분투하고 계시거든요.”

“그럴 늙은이가 아니라니까.”

“당가에서는 기회를 봐서 사마련을 칠 것이고요.”

“독존이 죽고 나면 그러겠군. 당 가주가 쌓인 게 좀 많아야 말이지.”

“와. 잘 아시…… 모르시네요. 꽤 돈독한 부자 사이던…… 죄송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두 노승이 눈을 부릅뜨자 정광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

“당가가 희생하기로 한 건 사실이에요. 독존 어르신을 희생시키고 자신들도 희생하려고 하죠. 협과 사리사욕을 동시에 채우기 위해서요.”

“희생에 대한 대가로 명성을 원한다?”

“네.”

“자네는 왜 그들을 돕는 건가? 무엇을 받기로 했지?”

정광이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곤륜이 위험해질 때 당가가 사천성 정파들을 이끌고 돕기를 원해서요.”

“…….”

대정은 정광을 한참 동안 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듯하군. 마교가 발호하면 무림맹이 달려가기엔 너무 멀지. 사천성은 그나마 제일 가까운 축에 들고.”

“그렇죠.”

“괜찮은 거래야. 곤륜과 당가 사이에는 말일세.”

새롭게 탈바꿈한 무림맹은 앞으로 곤륜만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천마신교는 공공의 적.

정파 모두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는 아미파 역시 동의하는 바인지라 문제가 생겼을 시 곤륜을 도울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곤륜과 돈독한 사이인 당가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을 터.

정광은 당가를 앞세워 사천성에서 더 많은 조력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정광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아미에도 좋은 거래가 될 거예요.”

“본파는 무엇을 얻게 되길래?”

“청성파. 마음에 안 드시죠?”

“……거참. 부끄러운 말을 계속하게 하는군. 그렇긴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미는 예부터 청성과 사이가 안 좋았다.

불문과 도문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청성이 아미의 영역을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이다.

아미가 평소 청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었다.

‘도사 주제에 무슨 욕심이 그리도 많은지.’

그런데 사마련이 밀고 들어오자 청성의 태도가 바뀌었다.

꽤 힘든지 힘을 합치자는 것 아닌가.

부처도 짜증이 날 판이었다.

‘역시 감정이 안 좋구나.’

정광은 속으로 웃었다.

‘아니, 소문보다 더 안 좋을지도.’

그렇다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정광은 두 여승을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독존 어르신께서 미끼가 된 건 통쾌하시죠?”

“그렇다마다.”

“아미타불. 부처께서 굽어살피신 일이지.”

피식거리던 두 노승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작은 미끼죠. 청성을 진짜 미끼로 해서 사마련과 싸울 계획인데. 어떠세요?”

별 유감이 없는 자를 돕는 대신 꼴 보기 싫은 놈을 힘들게 한다.

정광의 제안에 두 노승은 흔들렸다.

‘……아미타불. 이리도 달콤할 수가 있나.’

‘……확 그래 버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들은 어찌 됐든 불문의 제자들이었다.

“감정이 있다 해도 그럴 순 없지. 같은 정파 아닌가?”

“사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너무 심한 처사예요.”

정광은 두 사람을 설득하려다 말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구나.’

조금 지나자 두 노승도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중년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먼저였다.

“청신 진인! 장문인께서는 손님과 대화 중이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손님이라는 게 진옥룡 아닌가. 급하니 들어가겠네.”

“안 됩니다! 기다리십시오!”

“무어라? 자네 정말 너무하다 생각지 않나?”

정말 누가 너무한 건지.

급하면 제가 급하지 누가 또 급하다고.

청신이 배분을 내세워 강짜를 부리자 대정과 대연의 눈썹이 곤두섰다.

‘감히 어디서 행패를!’

‘내 저 늙은이를 그냥!’

정광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생각이 좀 바뀌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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