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복호사(伏虎寺)
아미파 여승들이 뛰어들자 청성파 도사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특히 정광에게 말을 걸었던 노도사는 더 그랬는데, 날카로운 검기(劍氣)를 줄기줄기 뽑으며 사마련 무인들을 베어갔다.
아까와는 기세 자체가 달랐다.
검에 제대로 된 살기가 실려 있었다.
정광은 그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음흉한 놈. 진작에 좀 그렇게 싸우지.’
죽음을 도외시하고 싸우던 다른 청성 제자들과 달리 여력을 남기고 있던 놈이다.
최후엔 제 한 몸이라도 빼내려던 생각이었거나, 생포되었을 시 받을 대우를 염려해서 그랬을 터.
그 외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전세가 역전될 것 같자 날뛰어?’
무혈단이 싸움에 뛰어들자 조금.
정광까지 손을 쓰니 더.
마지막으로 아미파가 합세하자 아주 젖먹던 힘까지 쓰고 있다.
‘계산 한번 확실하네. 가만. 그놈도 그랬잖아.’
무림맹에서 봤던 청성파의 장로 청해가 떠올랐다.
남궁신건에게 뇌물이 든 벽곡단(辟穀丹) 항아리를 받았다가, 정광이 몰래 털자 바로 지지 대상을 바꿨던 자.
지금껏 봤던 이들이 모두 이 모양이니 청성의 기풍 자체가 그런 건지 의심이 들었다.
‘젊은 녀석들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 봐야 청해나 이런 놈 밑에서 크면 똑같이 물들게 자명한 일.
정광은 청성의 미래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에 비하면…….’
아미파는 달랐다.
나이가 많은 이나 적은 이나 맑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행동도 시원시원하고.’
정파치곤 아주 호쾌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자신도 죽을 각오로 상대를 해치우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을 쓰는 건 아니었다.
나는 살고 너는 죽이겠다는 의지가 실린 강맹한 일격들. 그 사이사이를 채워주는 정교한 초식이 마음에 들었다.
‘수빈이랑 잘 맞겠는데.’
지금껏 봐왔던 정파 무공들 중, 팽수빈에게 전수한 수빈패검(秀彬覇劍)과 가장 비슷한 무리를 품은 무공이었다.
‘수빈이가 더 크면 아미파에 들러보라 해야겠어. 얻는 게 있겠지.’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갸우뚱했다.
당영중의 말에 의문을 품어서였다.
‘정파의 기준으로 봤을 땐 호쾌함이 다소 지나치다 할 만도 한데. 고작 이런 게 단점이라고?’
그가 말했던 단점이 하나 더 있긴 한데, 첫 번째 것이 이 정도인 걸 보면 그것도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뭐 가보면 알겠지.’
그러려면 눈앞의 싸움부터 끝내야 할 터.
정광이 다시 운룡을 움켜쥐고 빨리 치우려 하는데…….
아미파의 한 노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미타불! 악적들이 불리함을 알면서도 물러나지 않는구나!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리! 제자들은 살계(殺戒)를 열어라!”
사마련 무인들은 황당해하다가 이를 악물었다.
이미 충분히 살계를 열고 있었으면서 무슨!
아미파 기준으론 아니었나 보다.
“네!”
여승들은 일제히 외치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공세가 변했다.
나는 살고 너는 죽이겠다가 아니라, 내가 조금 다치더라도 너는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공격!
정광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리란 게 저런 의미였군.’
타인의 죽음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
그렇게 보면 꽤 괜찮은 표현이었다.
‘아미파라. 재밌는데.’
정광도 운룡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재밌는 건 재밌는 거고, 슬슬 밥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였다.
싸움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형편없이 밀리던 사마련이 퇴각한 것이다.
정광이 쫓아서 다 죽이려는데.
청성파 노도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제자들은 악적을 주살하라!”
“네!”
청성파는 퇴각하는 사마련 무인들을 향해 질풍처럼 달렸다.
정광은 흥이 식어버렸다.
‘저런 놈과 같이 놀기는 영…….’
차라리 무혈단원들을 치료해 주는 게 낫지.
흘깃 보니 아미파도 추적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리들 오세요.”
정광은 무혈단원들을 모아 상처를 살피고 금창약을 발라줬다.
공우가 단원들을 대표해 감사를 표했다.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단주.”
“왜 제 명령도 없이 싸움판에 뛰어드셨어요?”
“먼저 달려가셔서 뒤를 쫓느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단주께서도 싸우고 계신 줄 알고 경솔하게 손을 썼습니다.”
정광은 공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아하니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뭐 그렇다면야.’
청성이 공격을 당하고 있어서 끼어들었다고 말했으면 실망했을 것이다.
공우는 판단을 잘못했을 뿐, 정광의 명을 어긴 건 아니었다.
“앞으론 더 조심하세요.”
“아미타불. 명심하겠습니다.”
공우는 물론 언의진과 백승무도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
평상시에는 어떤 의견이라도 다 듣고 고려하는 정광이었지만, 싸움 앞에서만큼은 아니었다.
그의 명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다.
그게 가장 옳은 방법이라는 걸 지금까지의 결과가 보여주고 있었다.
‘이쯤이면 됐고.’
정광은 시선을 돌렸다.
아미파 여승들이 서로의 상세를 살피며 치료하고 있었다.
죽거나 크게 다친 이는 없어 보였는데 이런 때일수록 생색내기가 쉬웠다.
‘미리 밥값이나 해둘까.’
정광은 살계를 열라고 했던 마른 노승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곤륜의 정광이라고 합니다.”
“오. 자네가 그 유명한 진옥룡이군. 이 늙은이는 대연일세. 반갑네.”
“저도요.”
대연은 정광을 뜯어보다가 감탄했다.
“소문대로 정말 잘생겼구먼. 중원의 복이야.”
“네? 사태(師太)께서도 외모를 따지세요?”
“아무렴. 불제자는 사람 아닌가? 못생긴 걸 비난하는 건 못난 짓이지만 아름다운 걸 칭찬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 자네 성품도 그랬으면 좋겠군.”
“설마 이상한 소문을 믿으시는 건 아니죠?”
대연이 피식 웃었다.
“이 늙은이는 의심이 많아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판단하네. 그렇다고 좋아하진 말게나. 자네에 대해 좋은 소문도 꽤 있는데 그것도 머릿속에서 지우겠다는 얘기야.”
“도가 높으시네요.”
“무어라? 하하하하.”
정광은 크게 웃는 대연에게 금창약을 건넸다.
원래 주려던 적당한 효능의 것이 아니라 제일 좋은 것이었다.
그는 그만큼 대연이 마음에 들었다.
‘좀 아깝긴 한데.’
아직 많으니 이 정도야 뭐.
지를 땐 제대로 질러야 하는 법.
그 이상으로 뽑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이거 쓰세요. 꽤 좋은 거예요.”
“흘흘. 진옥룡이 의술에도 능하다는 소문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 잘 쓰겠네. 이런. 좋은 소문도 안 믿겠다 해놓고 금방 이래 버리다니…… 아미타불.”
대연은 그러면서도 사양 한번 없이 고맙게 받았다.
그리고 나이 어린 제자부터 손수 발라주기 시작했다.
정광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출혈이 심한 제자의 혈도를 짚어 피를 멈추게 하고 깨끗한 천으로 묶는 등 갖은 수고를 다했다.
그러자 대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자네, 귀찮은 일을 피하는 편이라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 다르구먼.”
“사실 좀 그렇긴 해요.”
“그런데 이렇게 애를 쓴다고? 이런. 무슨 일로 본파를 찾았는지 물어보기가 겁나지 않는가.”
“아. 노고는 참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어라? 와하하하.”
대연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사마련과 싸울 때와는 달리 두 눈을 둥글게 휜 채.
‘참 재밌는 녀석이구나.’
정광은 말하는 이에 따라 평가가 극단적으로 바뀌는 인물이었다.
아미파가 신뢰하거나 연이 깊은 이들은 대부분 칭찬했는데, 그 칭찬 중 하나가 바로 솔직함이었다.
‘진인들이 우글대는 곤륜파에서 괴협(怪俠)이 나왔다더니…… 한번 제대로 뜯어봐야겠군.’
적들과 싸우느라 제대로 못 봤으나 무공도 대단한 것 같았다.
‘말도 안 될 정도의 경지라고 들었는데 그거야 확인하면 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남이 보기엔 파격적이라 해도 협을 품고 있다면 혼탁한 천하에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바람이 맞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맹주와 제갈 군사의 서신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네. 좋아. 무엇을 원하는진 모르지만 내 힘써보지.”
“감사합니다.”
“치료도 대충 끝났으니 올라가세. 아차. 다른 소협들에게 감사를 표하지 못했군. 소개해 주겠나?”
정광이 손짓하자 무혈단원들이 다가왔다.
그새 타고 온 말들을 챙겨온 모습을 보니 정신을 단단히 차린 것 같았다.
그들의 소개가 이어질수록 대연의 표정이 흐뭇해졌다.
“구룡사봉 중 고룡과 권봉, 거기에 금권…… 검협이었던가? 무림의 동량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네. 헌데 저 시주는 왜 말에 묶여 있는가?”
그녀가 철월을 가리키며 묻자 정광이 간단히 답했다.
“밥투정해서요.”
온화해졌던 그녀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잘했네. 그것만큼 몹쓸 짓도 드물지.”
“그렇죠.”
“키우고 요리하는 노고를 무시하고 투정을 부리다니. 저런 꼴이 돼도 싸.”
“제 말이요.”
정광은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면서 생각했다.
‘아미산에서 밥 먹을 땐 맛없다고 하면 안 되겠네.’
까짓것 눈 딱 감고 씹어 삼키면 될 일.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언제 올라가실 거예요?”
“지금 가야지. 그보다 먼저…….”
대연은 아미파 제자들을 둘러보며 고함을 질렀다.
“이것들아! 진옥룡과 소협들께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여야지!”
무시무시한 기세였으나 아미파 여승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아니. 사백께서 계속 붙잡고 얘기 중이셔서 못한 건데.”
“사부. 사백조께서 들으십니다. 좀 작게 말씀하시지요. 그나저나 사백조께서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꽃밭에 있으시잖니. 얼씨구? 너는 또 왜 그리 함박웃음을 짓느냐?”
“사부께서야말로 입이…….”
여기저기서 별의별 말이 다 나오자 대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외인 앞에서 부끄럽게 무슨 짓이냐!”
여승들은 찔끔했다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이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아름다운 일인데…….”
“같은 무림맹도인데 외인이라 할 수 있나?”
대연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장탄식했다.
“아미타불. 저것들을 어찌 교화시켜야 한단 말인가.”
정광이 보기엔 그녀도 똑같았다.
“사태님. 그만 가시죠.”
“그러세나. 못난 꼴을 보여 미안하네.”
“뭘요. 솔직하셔서 좋죠. 무림맹에 계시던 분들은 무척 조용하셨는데 본산은 다르네요.”
“아. 그거?”
대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치질에 심력을 써서 뭐하겠는가? 중원에 나가 이곳저곳 구경도 하고 식도락을 즐기고 싶은 사람을 보내는 게 본파의 전통일세.”
“오오. 멋진데요. 소림, 무당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네요.”
“저마다 처한 사정이 있고 바라는 바가 있는 거지. 그래서 분란이 끊이질 않는 것이지만…….”
대연은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지금까지의 호탕함과는 거리가 먼 자애로운 얼굴로.
하지만 정광이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묻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청성파는 어떡하실 거예요?”
“흥. 청신 그 늙은이 말인가?”
노도사의 도호가 청신이었나 보다.
그에 대한 감정이 무척 안 좋은지 대연의 목소리가 한층 더 카랑카랑해졌다.
“그 수로 쫓아서 뭘 할까. 좋다고 달려갔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겠지.”
“안 도와주시려고요?”
“다짜고짜 전서구만 보낸 뒤 막무가내로 찾아온 이들일세. 목숨을 구해줬으면 됐지 뭘 더 해줘?”
정광은 그녀의 말을 듣고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청성은 아미가 거절했는데도 온 거구나. 나와는 상황이 달라.’
그들이 왜 그랬을지는 뻔했다.
당영중이 무림맹에서 발언권을 높인 한편, 당기황의 희생으로 당가의 명성이 올라가고 있는 상황.
사천성에서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아미에 연합을 제의하려는 것이리라.
‘아미파의 풍조를 알면서도 이런다?’
대연의 말처럼 아미파는 정치질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누가 머리 위에 서는 건 싫어했지만 자신들이 올라서는 것도 원치 않는 이들이었다.
‘그만큼 다급하다는 말인데.’
청성의 사정이 드러난 것보다 더 안 좋을지도 모를 일.
정광이 한참 생각하는데 대연이 재촉했다.
“뭐 하는가? 가세.”
“아. 네.”
정광은 단원들과 말을 끌며 따랐다.
아미산은 높은 명성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높이가 천장(千丈)쯤 된다고 했나? 아담한 게 예쁘네.’
이천사백장(二千四百丈)에 이르는 곤륜산에 비할 바는 아니나 충분히 큰 산이다.
한 산에서 사계절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는 게 꽤 볼만했다.
게다가 사람의 손길이 더해진 모습이라니.
‘무슨 놈의 절이며 암자가 이리도 많아.’
아주 산 전체가 사찰 아닌가.
보국사(報國寺), 선봉사(仙峰寺), 화장사(華藏寺), 만년사(萬年寺) 등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었는데, 깊은 역사를 증명하듯 고풍스럽기 짝이 없었다.
곤륜처럼 낡아빠진 게 아니라 제대로 보수해서 고풍스러운 것이었다.
‘마을도 있어?’
정광이 남녀노소가 모여 있는 작은 촌락을 쳐다보자 옆에서 걷던 대연이 설명했다.
“아까 그 마을에 사는 시주들이시네. 사마련에게 해를 당할까 봐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시게 하고 있지.”
“아미파는 돈이 많네요. 마음도 곱고.”
“무어라? 하하하. 앞엣것은 맞네만 뒤엣것은 글쎄. 우리 때문에 터전에서 쫓겨난 이들일세. 병을 주고 약을 주는 꼴인데 선행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마저도 안 하는 문파들이 허다한데요, 뭐.”
“그런 비교는 무의미하지. 아미타불. 정말 우리의 죄가 깊어.”
정광은 그녀의 한탄을 귓등으로 흘리며 목적지가 어디일지 유추했다.
‘금정봉(金頂峰)에 있다는 복호사(伏虎寺)로 가는 건가.’
아미파는 한 사찰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미산에 있는 수많은 사찰을 묶어서 부르는 호칭이었는데 그중 제일 유명한 곳이 복호사였다.
‘맞네.’
한동안 걷던 정광은 복호사라 쓰인 현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보단 못했으나 그 규모가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더 인상적인 것은 따로 있었으니.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승복을 입은 여인들이 죽어 있던 눈을 부릅뜨며 외치는 것 아닌가.
“이, 이럴 수가!”
“나,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