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73화 (173/569)

173화

번쩍번쩍

당가에 남는 무혈단원들은 수련을 병행하며 자오를 돕기로 했다.

정광은 선발한 단원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모두 말을 타고 있었는데 예비마(豫備馬)까지 함께였다.

정광이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죠.”

“네! 단주!”

“알았다, 도사.”

정광, 공우, 언의진, 백승무.

마지막으로 철월.

다섯 명은 질풍처럼 말을 몰았다.

당가의 동정을 살피던 자들이 깜짝 놀라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달렸다.

‘전서구를 날리든, 인편으로 알리든 알아서 하라지.’

아미산(峨嵋山)은 그리 멀지 않았다.

한 사백리쯤 되려나.

사마련이 급하게 움직인다 해도 뿌리치고 갈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아미산 근처부터인가.’

아미파를 견제하기 위해 자리를 튼 놈들이 있을 것이다.

‘영 귀찮은데.’

들어가려면 힘을 좀 써야 할 게 분명했다.

‘철월을 데려왔으니 그나마 편해지려나.’

마혼철신신공(魔魂鐵身神功)을 펼치게 한 뒤 앞장세우면 귀찮은 일을 상당히 덜게 될 터.

정광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채 한 시진도 가지 못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녀석이 징징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철월은 배고프다.”

정광은 어이가 없어 고개만 뒤로 돌려 말했다.

“장이 소협이 준 육포 있잖아요.”

“다 먹었다. 철월은 배고프다.”

“…….”

“배고프다. 배고프다.”

정광은 다시 정면을 보며 말달렸다.

한 보따리나 되는 육포를 한 시진도 안 돼 다 처먹은 놈한테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철월은 할 말이 무척 많았다.

“도사. 살려줘라. 철월은 견디기 힘들다.”

“…….”

“도사. 나를 죽일 셈이냐?”

정광은 정말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했다.

‘아니지. 그래도 결과는 봐야 할 것 아냐.’

철월의 머리를 고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당기황은 아들인 당영중이 처리할 거라며 대놓고 떠넘겨 버렸다.

당영중이 분노한 건 당연한 일.

아미자를 꼬나 쥐고 덤비려 했으나 그의 아비는 도주한 지 오래였다.

당영중은 어쩔 수 없이 철월을 책임져야 했는데, 진맥을 하고 이곳저곳을 살핀 그는 당가의 원로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이를 갈며 꽤 오랫동안 토의했다.

그리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완치는 장담할 수 없다지만 손을 써볼 방도라도 있다는 게 어디인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그때까지는 살려둬야 했다.

‘대충 뭐라도 먹이자.’

말이 대충이지 정광이 아무 데나 갈 리가 있나.

관도를 따라 달리다가 마주친 사람들에게 물어 유명하다는 반점에 들렀다.

점소이에게 자신 있는 것으로 내오라 했는데…….

‘……무슨 자신감이야 이거?’

맛이 별로였다.

아주 엉망은 아니었으나 정광의 미각을 충족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할 정도였다.

‘향이 너무 강해서 맛이 부족해지다니.’

사천성 동부는 분지 지형인 데다 큰 강들이 있어 무척 습했다.

땀을 배출시키고 기분을 올리기 위해 매운 요리가 발달했는데 이 반점의 것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정광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절에서 사느라 담백한 요리에 익숙한 공우는 진작 젓가락을 놓았고, 그리 까다롭지 않은 언의진과 백승무도 식사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철월은…….

“도사. 철월은 실망했다.”

“잘 드시면서 무슨.”

“아니다. 진짜다. 당가 요리가 그립다. 장이 요리는 더 그립다.”

정광을 만나고 입맛이 고급스러워진 걸까?

계속 먹고는 있으나, 요리를 입에 쓸어 담는 속도가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정광은 그로선 흔치 않은 후회를 했다.

‘자오를 데려올걸 그랬나.’

그랬으면 제대로 된 반점을 금방 알아냈을 텐데.

‘장이도 괜히 두고 왔네.’

그가 있었으면 철월의 입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백승무가 있었기에 흥정만큼은 제대로 할 수 있었으나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전생에도 항상 사람이 부족했는데 현생에서까지 이러다니.’

사실 엄밀히 말하면 달랐다.

전생에는 싸우기 위한 머릿수만이 필요했으나 현생인 지금은 다른 종류의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는 전생의 삶과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

보다 인간적이고 소소한 관계의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나, 정광은 그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적절한 해결책을 생각해 낸 뒤 시행했다.

“도사. 육포는 왜 사는 것이냐? 철월은 여기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들어도 드시게 해드릴게요.”

“도, 도사. 왜 내게 다가오냐?”

“시끄러워서요.”

정광은 철월의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을 짚은 뒤 말에 묶었다.

그리고 예비마에 육포 뭉치와 물이 가득 든 가죽 주머니를 올리고 길을 떠났다.

“힘 좀 내라. 빨리 가야 하거든.”

정광은 말갈기를 어루만지며 재촉했다.

그의 말을 이해했는지 말은 안간힘을 쓰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도 빨리 달리다 보니 정광을 따르는 무혈단원들도 곤욕이었다.

백승무는 철월이 묶인 말의 고삐를 쥐고 달리다가 정광에게 말했다.

“사형. 너무 급히 움직이시는 것 같습니다.”

“왜? 투자할 만한 곳을 찾을 겨를이 없어?”

“철월이 먹었던 것을 토하고 있어서 그럽니다.”

“그래? 맛이 영 아니라더니 잘됐네.”

그 후로 철월은 밥투정을 안 하게 되었다.

그래도 정광은 달렸다.

그답지 않게 노숙을 하고 육포로 허기를 때우며 달렸다.

어차피 만족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할 것 같았기에 그냥 빨리 가기로 한 것이다.

아미산은 사대불교명산(四大佛敎名山) 중 하나.

게다가 구파일방에 속한 아미파가 있는 곳이다.

너무 유명해서 사천성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덕분에 정광 일행은 사람들에게 묻는 것만으로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아미파로 갔다고 소문이 금방 퍼지겠지.’

어차피 원하던 바다.

오히려 더 빨리 퍼지길 원했다.

‘그래도 목숨이 중한 줄은 아는구나.’

사마련 무인들이 종종 보였으나 함부로 덤비진 않았다.

숫자를 불리며 정광의 뒤를 쫓을 뿐이었다.

‘애쓰네. 이걸로 밥값이라도…….’

정광은 철전(鐵錢)을 던져서 그들의 숫자를 줄였다.

그들은 이를 악물며 속도를 늦췄다.

거리가 벌어지긴 했지만 추적을 멈추진 않는 모습이라니.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올 기세였다.

‘그래. 계속 와라. 그래야 빨리 끝내지.’

정광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산 근처에 이르렀다.

정확히 말하면 아미산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마을 근방이었다.

그곳에선 의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시끄러운 고함, 날카로운 비명이 마을 쪽에서 들려왔다.

‘저기에서 싸워? 무공을 모르는 이들이 휩쓸리면 어쩌려고?’

관(官)이 무림에 관여하지 않는다 하나 무림인들끼리 싸웠을 때의 얘기다.

무공을 모르는 백성들이 큰 해를 입거나 죽기라도 하면 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최소한 법대로 처리하려고 시늉 정도는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을에서 대규모의 살상이 일어난다?

시늉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일이었다.

나라에 세금을 내는 이들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어떤 관리가 가만히 있겠는가?

‘사마련과 아미파일 텐데. 어쩐다.’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지나가면 되지.

정광은 말고삐를 움직여 마을을 돌아가려 했다.

그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확연히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잡아! 죽여 버려!”

“도주하게 둬선 안 된다! 포위망을 풀지 마!”

거친 사내들의 음성이었다.

정광은 호기심을 느꼈다.

‘아미파가 밀리나 본데.’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희미했던 소리들이 분명해졌다.

기합 소리에 비명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만, 무공을 모르는 이가 부르짖는 단말마의 비명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민초들이 없어?’

그렇다면 귀찮은 일도 안 생길 터.

그대로 말달렸다.

그리고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려 신법을 펼쳤다.

그의 신형이 쭉쭉 나아갔다.

앞을 가로막는 집을 가볍게 뛰어넘어 건너편 집의 지붕에 내려섰다.

밑을 둘러본 정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응?’

큰 공터에서 푸른 도복을 입은 도사들과 갖가지 복장을 한 사내들이 병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여승이 아니고 웬 도사?’

도사들은 모두 열 명이었는데 훨씬 많은 적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정광은 도사들의 기운을 느끼며 한 문파를 떠올렸다.

‘청성이구나.’

무림맹에서 봤던 청성파 도사들처럼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겠는걸.’

저들이 왜 여기에서 싸우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저대로 뒀다간 전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광은 느긋했다.

‘민초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네. 모두 마을을 비운 건가?’

그렇다면 사마련이 마음 놓고 일을 벌일 만했다.

인명이 아닌 피해보상이야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조금 더 구경해 볼까.’

정광은 편하게 앉아 양측의 싸움을 바라봤다.

‘나쁘지 않네.’

청성파는 구파일방의 한자리를 차지할 만큼 괜찮은 검법을 구사했다.

사마련 무인들도 잡다하지만 쓸 만한 무공으로 청성파 도사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더 볼 건 없군.’

아미도 아니고 청성인데 거들 이유가 없다.

정광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려 하는데.

그의 일행이 들이닥쳤다.

“아미타불!”

공우가 무겁게 불호를 외치며 쌍장을 내질렀다.

“하압!”

언의진이 짧은 기합과 함께 권법을 펼쳤다.

“이야앗!”

백승무가 과도하게 소리 지르며 흑우를 휘둘렀다.

“…….”

철월은 말에 꽁꽁 묶인 채 아무런 말도 못 했고.

“원시천존이시여!”

청성파 도사들은 철월을 제외한 세 사람을 보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중 제일 날카로운 검법을 펼치던 노도사가 웅혼한 음성으로 외쳤다.

“협객들이 돕는다! 제자들은 마음을 꺾지 말고 끝까지 싸워라!”

“네!”

청성파는 있는 내공 없는 내공 다 끌어 올려 검을 휘둘렀다.

죽음을 도외시한 공격에 사마련 무인들이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공은 급속도로 소모됐고 수의 불리함은 뒤집을 수가 없었다.

공우, 언의진, 백승무마저 위태로워질 상황이었다.

‘그러게 왜 끼어들어서.’

정광은 혀를 차며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운룡을 검집째 휘두르자 사마련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으아악!”

“누, 누구냐?”

정광은 대답 없이 무혈단원들 주위의 적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사마련 무인들은 그제야 정광의 정체를 알아챘다.

“저, 저자는!”

“차림새로 보나 얼굴로 보나 진옥룡!”

“듣던 대로 악독하구나!”

내가?

정광은 어이없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싸움을 멈춘 사마련 무인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그렇다는 눈빛으로.

‘무슨 그런 오해를.’

정광이 항변하려는데 청성파 노도사가 끼어들었다.

“자네가 곤륜의 진옥룡인가?”

“그런데요.”

“구해줘서 고맙네. 악적들을 모두 멸하세!”

누구 마음대로.

나는 그만 빠질 테니 너희들끼리 멸하라고 말하려는데.

‘원군인가?’

맑은 기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보나 마나 정파의 인물들일 터.

정광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자네, 왜 대답을 안 하나?”

“잠시만요.”

“잠시라니, 도대체 무슨…….”

그때, 머리를 파르스름하게 깎고 회색 승복을 입은 비구니들이 들이닥쳤다.

“악적들을 멸해라!”

“남김없이 쓸어버려!”

그녀들은 맑은 기운과 안 어울리게 입이 거칠었다.

행동은 더했는데 검을 움켜쥐고 사마련 무인들을 바로 덮쳤다.

사아악-

“끄아악!”

“이것들이 감히!”

사지가 날아가며 피가 튀었다.

그래도 사마련 무인들은 용감하게 맞섰다.

하지만 여승들의 무위는 보통이 아니었다.

정광은 그녀들을 보며 감탄했다.

‘아주 번쩍번쩍하군.’

비구니들이 휘두르는 검과 민머리에서 빛이 번뜩였다.

그 때문인지 사마련 무인들은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한데.’

정광은 당영중의 말을 떠올렸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호쾌함이 다소 지나치다더니.’

호쾌함은 무슨.

그녀들은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 테니, 그냥 네가 죽으라는 일격필살의 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호쾌함을 넘어 무시무시한 여승들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