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자신만만한 미소
정광의 설명을 듣던 당기황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열이 받아서였다.
“……그러니까, 내가 가문을 말아먹었다?”
“네.”
“……그러니, 양심이 있으면 가문을 위해 희생해라?”
“그렇죠.”
“……본가를 사천제일로 만들기 위해서?”
“정리 잘하시네요.”
정광이 칭찬하자 당기황이 발광했다.
“고얀 놈! 제가 가주면 다야?”
“그렇게 생각하시던데요.”
“나는 태상가주다!”
“에이. 왜 그러세요. 말이 태상(太上)이지, 솔직히 뒷방 늙…….”
“갈!”
소리를 빽 지른 당기황이 씨근덕거리다가 한탄했다.
“내가 그놈을 어떻게 키웠는데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혼자 크다시피 하셨다고 소문이 자자…….”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럼요?”
“……어쨌든 아니다!”
당기황이 계속 부정하자 정광도 동조했다.
“사실 가주님 말씀이 좀 심하시긴 하더라고요.”
“……응?”
“태상가주님께서 계시니까 지금의 당가가 있는 건데 왜 그걸 몰라주시는 건지.”
당기황의 눈이 빛나고 말은 빨라졌다.
“내 말이. 내가 든든히 받쳐주니까 제 놈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너라도 알아줘서 다행이다.”
“그러게요. 그러니 가주님도 알게 만드시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
“근래 하신 것처럼 사마련의 주의를 끄시는 거죠. 그럼 어르신 말씀처럼 가주님도 운신의 폭이 늘어나실 거고. 자연히 고마워하시지 않겠어요?”
“싫다.”
당기황은 단칼에 거절한 뒤 코웃음 쳤다.
“흥. 그런 감언이설로 나를 부려먹으려고?”
“좋으시면서.”
“……무어라?”
정광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음껏 손을 쓰신 게 얼마 만이시죠? 이런 기회, 흔치 않으실 텐데요.”
“마음껏이 아니라 허리가 휠 것 같은데 무슨!”
“이제 어르신께서 적절히 조절하면서 하시면 되죠.”
“……음?”
“제가 좀 급하게 움직여서 빡빡하셨던 거잖아요. 제가 빠질 테니 원하는 대로 하시는 겁니다.”
“…….”
“직접 조절하실 수도 있고. 싸웠다고 잔소리 들으실 일도 없고. 얼마나 좋아요.”
“…….”
잠시 생각하던 당기황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꼭두각시 노릇은 성미에 안 맞는데…….”
“그럼 그냥 무림맹에라도 가셔서 좀 쉬다 오시던가요.”
“……날 보내고 뭐 하려고?”
“뭐 하긴요. 사마련을 몰아내고 당가를 사천제일로 올려야죠.”
당기황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힘 없이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정광이 싱긋 웃자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건방진 놈.”
“자신감이죠.”
“아주 격장지계가 입에 붙었구나.”
당기황은 정광을 노려보며 머리를 굴렸다.
‘분명 나쁘지 않은 제안인데…….’
한 성에서 최고의 가문이 된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청성(靑城)과 아미(峨嵋)가 버티고 있는 사천성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사실 진작 얻었어야 할 칭호지.’
그는 오만한 만큼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당가가 천하제일이라 불리기엔 부족할지 모르나 사천제일이란 칭호를 가지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 정도는 되어야 자신의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마침 이 녀석도 있겠다, 청성과 아미를 누르려면 지금이 적기야.’
몸이 근질근질했다.
아들놈도 등을 떠밀겠다, 맘껏 날뛰어도 된다는 얘기.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으며 묶여 지내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얕은수에 놀아나는 걸 빤히 알면서도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본가의 일에 내가 빠질 수야 있나. 이번 한 번만큼은 네 도발에 넘어가 주지.”
“좋으시면서 왜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세요.”
“후우우. 내가 너와 무슨 말을 하겠느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당기황이 무거운 표정으로 당부했다.
“조요경(照妖鏡)에 대한 건 약조한 대로 묻지 않으마. 대신 이것만 기억해라. 사람들 앞에서 너무 많은 걸 드러내면 안 돼.”
“별것 아닌데요.”
“네 검만 해도 신검이라 할 수 있거늘, 조요경 같은 귀물까지 가졌다? 사람들이 알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
“강탈하려는 자가 나오겠죠.”
“그걸 말하고 싶은 거다. 숨겨.”
“왜요?”
“사람의 욕심을 얕보지 말아라. 보물 앞에서는 목숨도 도외시하는 게 사람이야. 왜 굳이 번거로운 일을 만들려 하느냐?”
“번거롭지 않게 와주면 고맙죠. 제가 털어도 정당방위니까요.”
“…….”
당기황은 입을 떡 벌린 채 그의 제자를 바라봤다.
그의 아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의 기분을 그도 느끼고 있었다.
“……그만 가마.”
“잠시만요.”
정광은 품속에서 전표와 보석을 한 움큼 꺼냈다.
그래도 그의 가슴과 배는 여전히 불룩했다.
“군자금 가져가셔야죠. 용돈도 못 받는 처지시라고 들었는데.”
“……못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원래 청빈해서…….”
“아. 그럼 계속 청빈하셔야겠네요.”
당기황의 손이 번뜩이고 정광의 손이 비었다.
“흠. 흠. 제자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지. 잘 쓰마.”
“이것도요.”
당기황은 정광이 내민 작은 죽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리연화(百里煙火)?”
그것은 백리 밖에서도 보이는 연기와 불꽃을 쏘아 올리는 기물이었다.
당가의 식솔이 위험에 처했을 시,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쓰는 것이었는데 정광이 이걸 어떻게?
“가주님이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
“성도(成都) 안에서만 움직이시고, 위험에 처하시면 꼭 쓰시라고요.”
“…….”
말없이 죽통을 바라보던 당기황이 귀찮다는 듯 낚아챘다.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말이야.”
말과 다르게 죽통을 품속에 넣는 그의 손길은 정성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만 가마.”
“네. 수고하세요.”
몸을 돌리려던 당기황이 생각난 듯 물었다.
“너는 이제 무엇을 할 생각이냐?”
“알고 싶으세요?”
“……아니. 모르는 게 낫지.”
당기황의 신형이 사라졌다.
정광도 당가로 향했다.
당가타(唐家陀)에 도착한 그는 당가 사람들이 번(番)을 서는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지키고 있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당영중의 집무실로 갔다.
당영중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겼다.
“어서 오게. 수고했어.”
“뭘요.”
“그래. 어떻게 됐는가?”
정광은 가릉전장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신중한 얼굴로 듣고 묻던 당영중이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역시 쉽지 않군. 사마련에서 준비를 많이 했어.”
“우리도 그런데요, 뭐.”
“그렇지. 백리연화는 전해 드렸나?”
“네. 은근히 좋아하시던데요.”
“그걸 쓰실 일이 있을까?”
“당연하죠.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벌이실 게 분명하니 얼마 안 가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을 맞닥뜨리실 거예요.”
당영중의 눈이 빛났다.
“그때 그걸 쓰시면…….”
“근방에 있던 적들까지 원군이 되어 몰려들겠죠.”
“좋아. 기대되는군. 아주 기대돼.”
그의 나무토막 같은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평생 몇 번 지어본 적이 없는 밝은 미소였다.
‘이거 설마…….’
정광은 당영중의 기괴한 미소를 바라보다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원래 계획대로 구해 드리긴 하실 거죠?”
“숙부님들께서 준비하고 계시네. 쌓인 게 많으실지라도 외인이 본가의 식솔을 해치는 걸 용납할 분들은 아니야.”
“구하신 다음에 한풀이를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형제지간의 싸움을 내가 말릴 수야 있나. 순리대로 흘러가겠지.”
정광은 내심 감탄했다.
‘그래도 죽는 꼴은 못 보겠다? 꽤 사이좋은 집안이네.’
전생의 그와 아비가 당 씨 부자의 십분지 일만 닮았어도 삶이 훨씬 편했을 것을.
‘다 그 영감 탓인데 어쩔 수 있나.’
어차피 지나간 일, 정광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당가는 대단하네요.”
“무슨 의미인가?”
“말 그대로예요.”
“왠지 더 묻기 불안하군. 뭐 본가가 시간을 벌었으니 상관없네.”
당기황이 성도에서 난동을 피우면 사마련은 하루하루를 긴장하며 보내야 한다.
당가를 칠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한 일.
설령 친다 해도 당가는 독과 암기의 가문이다.
당가타에 설치된 진과 그것들이 만나면 천하의 그 어떤 무림 문파보다 단단한 방비를 갖추게 된다.
기관진식(機關陣式)으로 명성을 떨치는 제갈세가만큼이나 안전한 곳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가 있으니 아버님이 땀 좀 흘리시는 게 좋지.’
당기황도 고생시키고 당가도 당분간 평안해지는 일거양득의 훌륭한 수였다.
“본가는 그렇다 치고. 청성과 아미, 어디부터 가려는가?”
“아미요.”
“그래. 청성보다 좀 멀어도 협조적인 아미가 났겠지.”
당영중은 정광을 보며 진지하게 당부했다.
“조심하게.”
“걱정하지 마세요. 가는 길에 덤벼드는 놈들은 다 패면 되니까요.”
정광이 웃자 당영중이 정정했다.
“내 말은, 아미를 조심하란 말일세.”
“네? 아미는 협(俠)을 표방하고 실천하는 문파라 하시지 않았나요?”
당영중은 탁자에 놓여 있던 아무 서류나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노파심에 하는 소리일세. 단점 없는 문파나 가문은 없지 않나.”
정광이 당영중과 서류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 단점. 말씀해 주셔야겠는데요.”
* * *
다음 날 아침, 정광은 무혈단을 모았다.
부단주인 당오군이 그간 행했던 일을 보고했다.
“수고했어요, 부단주. 자오, 교육은 잘 되고 있나요?”
정광의 물음에 자오가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철월이 좀…….”
“좀?”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정광은 철월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의 말도 이해하기 힘들 텐데 자오의 장광설(長廣舌)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는 어쩔 수 없죠. 다른 이들은요?”
“다들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특히 우이정이 아주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우이정과 생포된 사마련 무인들은 당가타에 오자마자 당 씨들에게 끌려갔다.
당 씨들과 무척 진한 대화를 나눈 그들은 매우 고분고분해진 상태로 자오에게 인계됐다.
자오는 그의 경험을 살려 ‘협객이 되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그게 쉬울 리가 있나.
사마련 무인들은 고분고분해진 와중에도 자오를 배신자라며 멸시했다.
그때 그들의 잘못된 언행을 꾸짖은 자가 있었으니.
바로 창사의 제자인 우이정이었다.
‘옳은 방향으로 돌아서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먼저 돌아선 선배를 무시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냔 말인가!’
그는 말로만 꾸짖지 않았다.
창사의 제자답게 창으로 두들겨 팼다.
나이나 신분이나 무위나 당가에 있는 사마련 무인들 중 최고를 자랑하는 우이정이었다.
잔뜩 얻어터진 무인들은 자오를 극진히 떠받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우이정도 열 살 가까이 어린 자오에게 존칭을 썼다.
‘선배. 다들 준비가 됐으니 시작하시지요.’
덕분에 자오는 편하게 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뒤떨어지는 이는 우이정이 따라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철월만큼은 답이 없었다.
‘어떡할까.’
잠시 고민하던 정광은 철월을 데려가기로 했다.
여기 둬봐야 하릴없이 밥만 축낼 터, 그럴 바엔 밖에서 굴리는 게 훨씬 나았다.
‘자오는 남아서 계속 교육하는 게 낫겠지. 그러면…….’
정광은 단원들의 얼굴을 보며 떠오르는 대로 호명했다.
“공우 스님, 언 소저, 사제. 앞으로 나오실래요.”
세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정광의 말에 따랐다.
정광은 의아해하는 단원들에게 설명했다.
“아미파에 갈 건데, 이 세 분도 같이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미파? 그곳엔 왜 가려는 것이냐?”
정우의 물음에 정광이 답했다.
“지금 당가, 아미, 청성이 다 따로 움직이고 있어서 효율이 안 나더라고요. 제가 돌아다니면서 긴밀하게 협력하도록 요청하려고요.”
무혈단원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문파들이다. 그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하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게다가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한 성에서 패권을 다투는 문파들 아닌가.
그래도 같은 정파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정광이 하겠다고 나선 이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이러다 정파끼리 내전이 벌어지는 거 아닐까?’
부단주인 당오군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단주. 혹시 힘으로 요청하려는 것이오?”
“상황 봐서요.”
“이건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소만.”
정광은 그의 아비인 당영중과 이미 끝낸 얘기라고 말함으로써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거 영 불안하군.’
‘사람을 뽑은 기준은 뭐지?’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니까 소수만 가는 게 맞긴 한데…….’
단원들은 선발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왜 뽑혔는지 직접 물어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세 사람 중 낯가죽이 제일 얇은 공우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공우 스님. 왜 그러세요?”
“단주. 소승을 선발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정광은 공우의 민머리를 가리켰다.
“아미파 비구니 분들처럼 머리를 미셨으니 친근감이 있을 것 같아서요.”
옆에 있던 언의진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저는 같은 여자라서 뽑은 건가요? 통할 것 같아서?”
“그렇죠.”
정광을 제외한 모두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어이없어하는 건 백승무였다.
“사, 사형. 저는 왜 데려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어? 몰라?”
“도, 도저히 알 수가…….”
백승무의 의문은 타당했다.
공우와 언의진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라도 있지, 그는 아미파와 아무런 접점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정광과는 있었다.
“사제. 가는 길에 흥정도 하고 투자할 만한 곳을 찾아야지. 검협(劍俠)만 하려고 하지 말고 금권(金權)도 신경 좀 써.”
모두 입을 떡 벌렸다.
‘협조를 요청하러 간다며.’
‘그런데 고작 그런 이유들로 인선을 해?’
‘이래서 일이 제대로 될까?’
다들 불신의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정광은 그런 그들을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단원들은 그게 더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