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복
보통 천마신교 하면 마인들이 득실거리는 마굴을 생각하곤 한다.
천마신교로서는 무척 억울한 일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기 마련, 천마신교라고 왜 정상적인 사람이 없겠는가.
전생의 정광은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곤륜의 영향으로 너무 순해진 현생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인성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성품이 엉망인 당기황처럼 사술(邪術) 따위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천요문이라고 했나? 해봐. 맛 좀 보자.’
그의 생각을 읽은 걸까.
기괴하게 넘실거리던 요기(妖氣)가 신중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정광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당기황과 마찬가지로 심마(心魔)에 빠져드는 징조였다.
정광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맛을 음미했다.
‘그래. 이거였지…….’
전생에 꽤 자주, 상당히 오랫동안 느꼈던 느낌이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울 정도였다.
‘돼지가 썼던 것처럼 환각을 보여주는 건 아닌데…….’
대신 더 강하고 직접적이었다.
환술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
과거에 겪었던 괴롭고 슬픈 일들이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유도 모른 채 분노에 빠졌다가 심마에 들 터.
그 끝은 광인이리라.
타는 듯한 분노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 누구라도 당장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죽이면 되지.
내가 죽이고 싶은 놈들을.
정광은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으로 쌓아온 정순한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것을 운룡에 주입하자 눈부신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그에 질세라 좁혀져 오던 요기가 급격하게 덮쳐왔다.
정광은 당황하지 않고 유룡검(遊龍劍)을 펼쳤다.
화려하게 빛나는 금룡이 정광의 주변을 맴돌며 요기를 희롱했다.
금룡에 베인 요기는 바로 사그라들었으나 양이 너무 많았다.
끝없이 밀려오던 요기가 금룡이 그려내는 선을 넘어 정광에게 쇄도했다.
유룡검을 펼치던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인걸. 계속하면 안 될 건 아닌데 시간과 내공만 버리겠어.’
당기황이 그냥 받아버리려고 한 이유가 있었다.
직접 겪어보니 그럴 만했다.
‘들어올 때처럼 쉬우면 좋으련만.’
허를 찔렸을 때와 달리 제대로 방비를 갖춘 놈들은 강했다.
이미 분노가 마음을 잠식한 뒤 머리로 올라가 이성까지 먹어치우려는 상황.
‘그래도 혼(魂)은 못 건드리는 건가.’
혼을 스스로 단련해 마(魔)를 품었던 정광이다.
그 마는 현생의 혼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정광은 마인 중의 마인.
이깟 요기가 흔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심마라. 그에 맞게 상대해 줘야겠지.’
정광의 움직임이 멈췄다.
머릿속을 떠돌던 잡념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죽인다.’
움직임을 멈추자 요기가 그를 삼켜 버렸다.
마음과 머리는 물론 전신에서 살기가 들끓었다.
정광의 눈이 타오를 듯 붉게 변했다.
살기에 잠식당한 것이다.
그 살기가 속삭였다.
-죽여라…….
-죽여…….
-죽여야 한다…….
정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봤다.
함께 있던 당기황은 짙은 요기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 있는 이는 정광이 유일했다.
살기는 그에게 그 자신을 죽이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정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싫은데.
-……죽여. 그래야 네가 편해진다.
-지금도 편한데, 왜?
-……너도 죽이고 싶어 하고 있어.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죽여.
-이번엔 더 오래 살 계획이라 그건 안 돼.
-……네 살기를 따라라. 그게 네 본심이다.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설령 혼을 뺏긴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제일 소중히 여길 그였거늘.
고작 심마에 가까워졌다고 자결을 해?
정광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죽이고 싶은 건 내가 아니거든.
-죽여야 해…… 죽여…….
-그래. 죽여야지. 네놈들을.
-……!
정광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의지.
그것은 살의였다.
세상 그 어떤 살의라 해도 정광의 것을 능가할 순 없는 법.
정광은 본연의 살의로 요기를 겨눴다.
소름 끼치는 살기가 뭉클뭉클 일어났다.
그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요기가 흠칫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살기를!
-요력을 더 밀어 넣어!
당황한 천요문도들의 의념이 흘러들어 온 것일 터.
요기의 속삭임이 고함으로 변했다.
-너를 죽여!
-죽여야만 한다!
-죽여! 죽이라고!
정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남의 말에 휘둘릴 정도로 줏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죽이기로 마음먹은 놈이나 죽여야지, 왜 헛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시끄럽고. 도망갈 생각 말고 가만히 있어. 다 죽여줄 테니까.
-……!
-어라? 왜 요기가 살짝 약해져? 튈 준비 하냐?
그냥 보내줄 수는 없는 일.
정광은 놀고 있는 녀석을 불렀다.
-역천경 인마, 밥값해야지.
-……!
역천경은 어이가 없었다.
밥값이라니.
여태껏 뭘 줬다고?
동남동녀(童男童女)의 피는 바라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상소운이라는 돼지의 피였는데, 다 굳은 핏자국에 문대기만 해놓고 무슨!
-접힐래?
-우웅! 우웅! 우웅!
역천경은 격렬하게 부정하며 마음을 바꿨다.
그래, 요기라도 먹어치우자.
잡스럽지만 엉망은 아닌 요기니까 배라도 채우는 거야.
-우우우우웅!
화아아아악-
역천경은 힘차게 진동하며 눈부신 빛을 쏘아냈다.
정광에게만 보이는 그 빛은 요기가 만든 어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어둠은 범을 만난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며 사그라들었다.
요기에서 복잡한 의념이 흘러들어왔다.
-서, 설마!
-조요경(照妖鏡)인가!
-그렇게 찾아도 없던 귀물이 하필이면 저자에게!
정광도 놀랐다.
귀물?
요놈이?
모자란 동경 가지고 무슨.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지? 뭐 하러 찾고?’
정광이 의아해하는데 역천경이 코웃음 치듯 진동했다.
조요경 같은 하급 놈들과 같은 취급을 받자 불쾌해서였다.
-우우우와앙!
진동이 강해지고 빛도 더 밝아졌다.
어둠 곳곳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뚜, 뚫린다!
요기가 미친 듯이 저항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
역천경이 낸 수많은 구멍 중 제일 큰 구멍 사이로 당기황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눈은 붉었으나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 보였다.
“이, 이런 기사가 있나!”
정광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뒤 짧게 부탁했다.
“어르신. 비켜주실래요.”
“……비, 비키라고? 왜?”
“그쪽으로 뚫으려고요.”
“……뚫어? 뭘?”
정광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본연의 살기에 요기가 키워준 살기까지 더했다.
그의 것이 뼈대가 되고 요기의 것은 살이 됐다.
‘죽어라.’
정광의 붉어졌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에 어렸던 살기까지 뽑아낸 것이다.
거대해진 살기는 그의 의념(意念)대로 움직였다.
찬란히 빛나는 운룡에 실려 눈부신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요기로 엮인 벽을 뚫어버렸다.
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옅은 어둠이 비췄다.
현실의 어둠이 드러난 것이다.
굳어 있던 당기황이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 바로 옆에 현실로 이어지는 구멍이 나 있었다.
정광이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기가 생각보다 끈적끈적해서 삐끗했네.”
당기황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정광을 향해 돌았다.
잠시 달싹거리던 그의 입술이 간신히 열렸다.
“……혹시 삐끗해서 빗나갔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정광이 대답하려는데 그를 감싸고 있던 요기가 흩어졌다.
그것은 뚫린 구멍을 막고 정광과 당기황을 감싸고 있는 벽에 달라붙었다.
‘나를 못 먹으니 우리 둘을 못 나가게 하려는 건가?’
보나 마나 시간을 끌려는 수작일 터.
아쉽지만 나쁘진 않았다.
사술의 중심이 되는 윗놈들은 사술을 깸으로써 혼내줄 수 있었기에.
정광은 아예 왼손으로 역천경을 꺼내 들었다.
-내가 가리키는 곳을 집중해서 먹어.
-웅!
역천경은 오랜만에 신이 났다.
하릴없이 놀다가 날뛰게 됐는데 왜 그렇지 않겠는가.
정광이 가리키는 곳마다 힘차게 진동하며 빛을 쏘았다.
정광은 그곳을 향해 의념이 실린 검격을 내질렀다.
두 행동을 번갈아 한 지 얼마나 됐을까.
끈질기게 버티던 요기의 벽에 큰 구멍이 생겼다.
주위의 요기가 몰려들어 구멍을 메우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것은 결국 사람과 귀물의 합격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끈질기기는.’
정광의 입가에 호선이 생겼다.
그 미소에 맞춰 요기로 이루어진 어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끼기기긱-
점점 균열을 키워가던 어둠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콰장창창!
어둡지만 사술로 이루어진 어둠보다 밝은 어둠이 완전히 드러났다.
‘시원하네.’
신선한 바람이 느껴졌다.
요기에 찌들었던 기분이 상쾌해지는데…….
당기황이 분통을 터뜨렸다.
“다 튀었잖아! 내 이놈들을 그냥!”
그의 말대로 그 많던 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사술을 깨고 나오는 동안 도주한 것이다.
정광이 당기황을 위로했다.
“그래도 몇 명 남았잖아요.”
“겨우 세 놈이잖아!”
“성품이 왜 그러세요. 셋이나 있다고 생각하셔야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그래! 네 녀석까지 합치면 넷이나 있군!”
당기황은 붉은 눈으로 정광을 쏘아보다가 흠칫했다.
자신이 과하게 분노하는 걸 느껴서였다.
‘이런 망할 놈의 요기가…….’
사술이 깨졌는데도 떨어져 나가지 않다니.
당기황의 붉은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한동안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려야겠군. 말년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차라리 전장에서 피를 흘리면 흘렸지, 명상 따위는 절대 하기 싫은 당기황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런 꼴이 됐으니 할 수밖에.
‘후우우. 대체 얼마나 걸릴지…… 응?’
정광이 그를 향해 작은 동경을 내밀고 있었다.
‘저것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키면서 검을 휘둘렀는데…… 설마?’
나한테도 그러려는 거 아니야?
에이. 아니겠지.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정광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제, 제자야. 대단한 무위였다. 이 사부는 네가 자랑스럽…… 오오!”
깜짝 놀란 당기황이 역천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건 대체 뭐야? 어떤 귀물이길래 이렇게 간단하게…….’
그는 역천경에서 나오는 빛도, 그 빛이 그의 마음속에 있던 요기를 먹어치우는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을 잠식하고 있던 이질적인 분노가 사라진 건 확실히 느꼈다.
“……그, 그건 무엇이냐?”
“동경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그리 놀라세요? 동경에 비친 어르신 얼굴이 흉악해서요? 하긴, 그럴 만도 하죠.”
“…….”
당기황이 입을 떡 벌렸으나 정광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역천경을 품속에 넣은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곳에 멈춰 쪼그려 앉았다.
“저기요.”
그곳에는 미동도 안 하는 두 노인과 피를 토하며 꿈틀거리는 한 노인이 있었다.
사술의 중심이었던 천요문도들이었다.
“계속 떠드시던 세 분이죠? 다른 분들이 도주할 때까지 시간을 버신 거예요?”
꿈틀거리던 노인이 기침을 토했다.
“쿨럭. 쿨럭.”
“의외로 의리가 있으시네요.”
“크흐흑. 그, 그대는 누군가?”
“진옥룡이요.”
“아니…… 커헉. 진짜 이름을 묻는 것이다.”
“아. 정광이죠.”
“우웩. 우욱.”
더 이상 토할 피도 없는지 헛구역질을 하던 노인이 다시 물었다.
“대, 대체 어떻게 조요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우웅! 우웅!
품속의 역천경이 거칠게 부정했다.
정광도 부정했다.
“조요경 아닌데.”
“아니야. 그건 분명 조요경이다.”
정광이 역천경이라고 정정해 줄까 생각하는데 노인이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천하를 뒤져도 없던 것이 이렇게 나타나다니. 쿨럭. 쿨럭. 그것도 다른 이의 것이 되어서…… 허허. 본문의 복은 여기까지인가…….”
정광을 향해 뭐라 또 말하려던 그는 그대로 죽어버렸다.
뭐가 그리도 원통한지 두 눈을 부릅뜬 채.
정광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일어섰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저럴까.’
도주한 천요문도들을 추적해서 문초하기엔 심력을 너무 소모한 상태.
오늘은 여기까지가 딱 좋으리라.
하지만 당기황은 아니었다.
아주 귀찮게 달라붙었다.
“제자야. 그 동경 말이다. 설마 전설로 전해지는 조요경이냐?”
“그냥 동경인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사부마저 속이려고? 어서 말해다오! 어서!”
정광은 바람이 거세지자 돛을 돌렸다.
“그보다 다른 게 더 궁금하시지 않으세요?”
“무엇 말이냐?”
“어르신께서 왜 이렇게 고생하시는지요.”
당기황이 눈을 부릅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하던 것 아닌가!
“그래! 차라리 그걸 말해라.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게야!”
정광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