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완전 다르거든요
아무리 고수라 해도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다.
강철 같던 육신은 노쇠해지고 심후했던 내공은 새어나가기 마련.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기황은 지금, 자신이 삶과 죽음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도 모르게 치병에 걸린 건 아닐까 하는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나 독존이 명하노니! 사마련 종자들은 사천성을 떠나라! 아니면 죽음뿐이다!”
장내에 내려선 독존은 귀를 의심했다.
‘이, 이건 또 뭐야!’
분명 내 목소리인데.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지?
정말 치병에 걸린 건가?
어이가 없다 못해 참혹했다.
혹시나 환청일까 싶어 일그러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중구난방으로 입을 열어 확인까지 시켜줬다.
“독존! 본련을 무엇으로 보고 이런 행패를!”
“당가의 태상가주가 미쳤다더니 사실이구나!”
당기황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군.’
그렇다면 자신이 말했다는 건데.
평소라면 정말 그랬나 보다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엔 재주가 너무 많다 못해 과할 정도인 정광이 있었기에.
‘내 제자지만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다.’
무림에는 수많은 잡기(雜技)가 있고 놀랄 만큼 잘 쓰는 이들도 많다.
그래도 모방당한 당사자가 인정할 정도로 똑같은 변성술(變聲術)이라니, 이곳에 정광이 있는 걸 몰랐으면 그조차 의심치 않았으리라.
‘허허. 대단하군. 대단해.’
감탄도 잠시.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그 대단한 재주로 제 사부를 농락해?’
전날 성심표국에서 있었던 일이야 화가 나긴 해도 간만에 몸을 풀었기에 대충 넘어가려 했다.
투웅(鬪雄)이라는 애송이를 죽이지 못한 게 아쉬웠으나 홀로 그 많은 인원을 상대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조만간 기회가 되면 성심표국에 다시 들러 제대로 손을 봐줄까 했는데…….
‘또 다른 싸움판을 벌이게 해? 내 몸은 하나란 말이다!’
안 그래도 늙은 몸이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몸을 원 없이 푸는 게 아니라 혹사당하는 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이 고얀 녀석! 어디 있는 거야?’
포위망을 좁혀오는 사마련 놈들은 신경 쓰지 않고 기감(氣感)을 퍼뜨렸다.
꽤 넓게 확장했는데도 정광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내 제자. 못하는 게 없구나.’
당기황은 기꺼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놈의 잠행술(潛行術)과 은신술(隱身術)이 이리도 은밀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놈. 숨어서 내 꼴을 보며 웃고 있는 거 아니야?’
그로선 타당한 추론이었지만 실제론 심각한 오해였다.
정광이 아무리 성품이 그래도 그렇지, 그런 악취미가 있을 리 있나.
정광도 나름 바빴다.
사천성에서도 꽤 규모가 큰 전장, 가릉전장(嘉陵錢莊)을 돌며 탈탈 터느라.
‘바람잡이가 있으니까 쉽네.’
바람잡이도 어디 보통 바람잡이여야지.
자그마치 독존이다.
사마련 무인들은 재물 따윈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강한 대적(大敵)을 만난 것이다.
정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장 곳곳을 뒤졌다.
당기황이 주의를 끌어줘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진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가져갈 것은 많은데 몸은 하나여서였다.
‘철월을 데려왔으면 아예 몽땅 챙겨갈 수 있었을 텐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헛된 바람이었다.
그 덩치가 무슨 잠행술을 펼치겠는가.
아니, 먹는 것 아니냐며 전표고 보석이고 모조리 먹어치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다음엔 자오라도 데려와야지.’
정광은 미련을 털어낸 뒤 부피가 작고 값어치가 큰 것들만 품속에 쑤셔 넣었다.
얼마 안 가 가슴은 물론 배까지 불룩해졌다.
‘배불러라. 슬슬 가볼까.’
장주의 집무실에서 서류 몇 장까지 확보한 뒤 전각 밖으로 빠져나왔다.
장내를 슬쩍 둘러본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도 안 싸우고 뭐 하는 거야?’
당기황은 인상을 찡그렸다 풀기를 반복하며 뭔가 생각하고 있었다.
정광이 어디 있는지,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하는 건지 고민하는 듯싶었다.
‘이쪽은 일단 넘기고. 사마련, 실망인데.’
그들은 포위망만 굳힌 채 당기황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파다운 기백(氣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뭘 저렇게 재고 따지는지. 사파무림의 앞날이 어둡구나.’
몸을 사리는 거야 그렇다 치자.
어제 성심표국에서 그 난리가 났었는데 제대로 된 준비를 해놨어야지.
‘사천 지부에 제법 영리한 놈이 있다더니 영리하긴 개뿔.’
정광이 내심 혀를 차는 그때.
품속의 역천경(逆天鏡)이 울었다.
-우우우우웅.
‘……이건!’
정광이 깜짝 놀라 다급히 물었다.
-너 아직도 살아 있었냐?
-……웅.
-하도 오랫동안 미동도 안 해서 죽은 줄 알았네. 아니, 갖고 있는 것도 까먹고 있었잖아.
-…….
-왜 울었어?
-…….
-반으로 접어줄까?
-우웅! 우웅! 우웅!
역천경은 격렬히 부정하다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말도 안 통하는 놈에게 진동해 봐야 뭐할까.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우우우우웃!
힘찬 진동과 함께 눈부신 빛을 쏘아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도복은 장애가 되지 못했다.
오직 심령(心靈)으로 연결된 정광에게만 보이는 그 빛은 짙은 어둠을 먹어치우며 전면을 밝혔다.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것들은.’
요사한 기운을 품은 인영들이 담장 밖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새 거리가 가까워져서 정광의 기감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영리하긴 한가 보네. 준비를 꽤 했는걸.’
비슷한 순간 당기황도 그 기운을 느꼈다.
하얗게 센 눈썹이 하늘로 솟구쳤다.
‘이렇게 사악한 요기(妖氣)가! 함정이었구나!’
놀람도 잠시.
그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는 그의 푸르뎅뎅한 얼굴과 맞물려 기괴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렇게 강렬한 요기라. 천요문(天妖門)이라는 그놈들인가 보군.’
천요문은 장강(長江) 이남(以南)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사파였다.
각 성을 유람하며 갖은 요악(妖惡)을 피우는 자들이었는데 같은 사파무림의 문파들조차 꺼릴 정도로 요사한 짓거리를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저런 놈들까지 장강을 넘어 사천성에 들어오다니. 사마련에서 준비를 단단히 했구나.’
자신들의 영역과 맞닿아 있고 황실이 있는 하북성과 가장 멀면서도 쓸 만한 땅이 널린 사천성.
사마련으로선 이만한 투자를 하기에 충분할 터.
사천 토박이인 당기황은 그들의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마음은 심후한 내공에 실려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천요문 따위로 나 당기황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웅혼한 외침에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울렸다.
하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포위한 사마련 무인들은 진기가 들끓는 걸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
동시에 꽤 많은 인영이 흐느적거리며 담장을 넘어왔다.
천요문도들이었다.
‘……정말 볼썽사납군.’
당기황은 그들을 노려보다가 씹어뱉듯 물었다.
“옷에 무슨 그림을 그리 그렸느냐? 하나같이 얼굴이 창백한데, 네놈들의 피로 그린 건가?”
그의 말대로 천요문도들의 백색 장포는 붉은 그림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문자나 부적 같기도 했는데 서책과 담을 쌓은 당기황으로서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지? 네놈들도 모르는 걸 그린 것이냐?”
“…….”
“귓구멍이 막혔는지 혀가 잘렸는지 모르겠군. 귀찮다. 한꺼번에 덤벼!”
그들은 귀도 안 막혔고 혀도 멀쩡했다.
당기황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손을 모으고 묘한 주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ꠝꠈꠒꠖꠟ…….”
당연히 참을성 없는 당기황은 주문이 완성되길 기다리지 않았다.
“느려!”
그의 양 소매 속에서 암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놀라운 빠르기로 날아가 천요문도들의 몸에 박혔다.
‘음? 피하지 않아?’
당기황이 의아해할 만큼 천요문도들은 반응조차 안 했다.
계속 입술만 놀릴 뿐이었다.
“ꠏꠄꠀꠟꠒ…….”
“…….”
당기황은 그들을 면밀히 주시했다.
‘분명 암기에 맞아 중독이 됐는데도 계속 저런 짓을…….’
정상인이라면 주문이나 외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암기가 박히거나 꿰뚫고 지나간 상처에서 검게 변색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통을 못 느끼는 건가?’
설령 그렇다 해도 사람인 건 분명해 보였다.
중독된 천요문도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흥미롭군.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전신의 근육이 수축됐다.
당기황은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며 그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마침내 주문이 완성되자.
그들이 풍기고 있던 요기가 한데 뭉쳐 귀신같은 형상을 띠더니 덮쳐왔다.
‘그래 봐야 사술!’
호승심을 느낀 당기황이 쌍장(雙掌)을 떨쳐 요기를 흩어버리려는 그때!
요기가 사방으로 갈라지며 당기황을 둘러쌌다.
삽시간에 주위가 어두워지며 그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착시인가? 잔재주를!’
당기황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독장(毒掌)을 날렸다.
요기는 내공이 실린 독장에 녹아버리면서도 계속 밀려왔다.
‘보통 술법이 아니구나!’
당기황의 눈이 깊어졌다.
요기가 다가올수록 가슴 깊은 곳에서 열기가 솟았다.
그것은 순수한 분노였다.
이 상황에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요기가 그를 심마(心魔)에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가까이 온 것만으로도 이런 영향을 끼치다니…….’
당기황은 억지로 분노를 누르며 쌍장을 휘저었다.
장력을 맞은 요기가 녹아내렸으나 뒤를 따르던 요기가 그 자리를 금세 채웠다.
‘이익!’
당기황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피어올랐다.
내공을 한층 더 끌어모은 그는 다가오는 요기를 향해 장력을 난사했다.
허공이 터지며 귀청을 때리는 듯한 소음이 났다.
요기가 흩어지며 그의 마음도 흔들렸다.
‘……이것들이…….’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억눌렀던 울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이런 헛짓거리를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아니야. 마음을 가라앉혀야 해.’
당기황은 머리를 잠식해 오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방법을 강구했다.
그럴듯한 생각은 안 났으나 이대로 가다간 요기에 잠식될 게 확실해 보였다.
‘그냥 받아버려?’
어차피 사술이다.
그대로 받아내고 이겨내면 되는 것 아닌가.
고수치고 의지가 약한 이는 없다.
십존에 꼽힐 만큼 강한 고수인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만 견뎌내면 확!’
사술을 깨자마자 모두 죽여 버리리라.
사람은 물론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남김없이!
‘와라!’
당기황은 쌍장을 내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요기가 기다렸다는 듯 밀려왔다.
그의 전신이 요기에 휩싸이려는 그 순간!
사아악-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베었다.
그 틈을 비집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멋들어진 자세로 검을 검집에 넣는 미남, 정광이었다.
“네 이놈! 어떻게 들어왔느냐!”
“검으로 베어서요.”
“그 말이 아니잖아!”
“음…… 잘?”
정광은 대충 대답한 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요기를 둘러봤다.
그가 들어오자 후다닥 물러났던 요기가 기괴한 모양으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하북성에서 돼지가 사혼사로(邪魂四老)라는 놈들과 펼쳤던 것보다 짙은 요기네.’
역천회귀멸혼대법(逆天回歸滅魂大法)이라고 했던가?
그것보다 깨기 어려워 보였다.
정광은 요기를 노려보며 눈을 빛냈다.
‘그래도 깨야지.’
설령 당기황이 이겨낸다 하더라도 엄청난 심적 타격을 받을 터.
훌륭한 일꾼인 그를 그렇게 버릴 수는 없었다.
당기황은 앞으로도 뼈마디가 부서지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무량수불. 이게 바로 대자대비(大慈大悲)로구나.’
이렇게 좋은 마음을 먹었건만.
당기황은 알아주지 않았다.
“나가라! 내가 해치운다!”
“어르신. 위험해서 안 돼요.”
“네 녀석이 위험하게 만들어놓고는 뭐가 어째!”
“지난 일은 잊으셔야죠. 그게 바로 사내잖아요.”
“시끄럽다! 사마련 놈들을 요절내면 다음은 네 차례야!”
당기황은 정광에게까지 살기를 쏘았다.
붉게 물든 눈빛이 그가 정상인 상태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있었다.
‘빨리 끝내야겠네.’
정광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사술이 아니에요. 어르신 같은 성품으로는 힘들 만큼.”
“내가 어때서?”
“심보가 고약…….”
“너나 나나 비슷하잖아!”
당기황이 길길이 날뛰려 하자 정광이 정색했다.
“완전 다르거든요.”
동시에 운룡을 뽑았다.
운룡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어둠에 몸을 담갔다.
정광은 검파(劍把)를 단단히 고쳐 쥐며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제 인성을 보여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