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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169화 (169/569)

169화

이건 또 뭐야

무림인치고 독존 당기황의 고강한 무위와 지랄 맞은 성격을 모르는 이는 없다.

진옥룡 정광의 놀라운 무공과 종잡을 수 없는 성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둘이 왔다고?

사마련 무인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란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미쳤을 줄이야…….’

야밤에 습격한 주제에 역용은커녕 의복조차 안 갈아입었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혹시 사칭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기엔 너무 딱딱 들어맞았다.

말라빠진 체구에 푸르뎅뎅한 얼굴, 손끝까지 뒤덮는 짙은 녹의(綠衣)를 걸친 노인.

얼핏 봐도 독존이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흰 옷감에 금사(金絲)로 구름 문양을 수놓은 우아한 도복, 역시 정교한 구름 문양이 새겨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려한 금빛 검.

아니, 다 필요 없고. 누가 봐도 천하제일미남인 청년 도사다. 정말 진옥룡 아닌가!

게다가 그들은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었다.

“악을 용서치 않는 독존 어르신께서 악행을 일삼는 사마련 여러분을 응징하러 오셨어요!”

“협객의 길을 걷고 있는 진옥룡이…… 후우우. 협의를 품고 사마련을 멸하러 왔다!”

“모두 병기를 놓으시고 개과천선하세요! 대자대비한 독존 어르신께서 가볍게 징치하고 끝내주실 겁니다!”

“그래! 항복해라! 그러면 온유하고 동정심 많은 진옥룡이…… 어쨌든 죽이진 않을 것이야!”

뻔뻔하기로 따지자면 정광이 한 수 위였다.

마음에도 없는 미사여구를 쓰다가 멈칫하는 당기황과 달리 담담하게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그래도 둘 다 양심은 있는지, 서로 간에 금칠하는 짓은 곧 끝났다.

대신 서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어르신. 자꾸 소리치시니까 저분들이 겁먹으셨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녀석 때문에 그런 거잖아!”

“제가 왜요? 저 혼자 왔으면 차나 한잔하면서 토론으로 풀었을 텐데요.”

“차아아? 토오론? 대문부터 부숴놓고 그게 할 말이냐?”

“밤이 깊어서 깨우려고 그랬죠. 대신 사람은 안 해쳤잖아요.”

“……무어라?”

당기황은 기가 막힌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정말 정광의 말이 맞는 것 아닌가.

정광에게 맞은 이들은 기절만 했을 뿐 피를 흘리는 이도, 죽은 이도 없었다.

‘이, 이놈이!’

당기황은 싸한 기분을 느꼈다.

정광이 그 기분을 확인시켜 줬다.

“저는 그랬는데 어르신은…… 휴우. 이런 참상이라니…….”

당기황에게 맞은 이들은 피가 낭자한 건 기본이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이건…… 이건…….”

당기황이 더듬거리자 정광이 덧붙였다.

“그나마 제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어르신 홀로 오셨으면 벌써 독을 푸셔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겠네요. 성심표국(誠心鏢局) 여러분.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사마련 무인들이 살기 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기황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이놈이 진짜! 사부를 함정에 빠뜨려?”

“함정이라뇨. 어르신,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왜 자꾸 어르신이야! 사부라고 해! 사부!”

“하아…… 이렇게 손속이 독한 분을 어떻게 사부라고…….”

정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기황이 대노해서 폭발하려는 그 순간!

침중한 얼굴로 지켜보던 중년인이 끼어들었다.

“진옥룡 그대는 언제 사천성에 들어왔는가?”

“사천성에 온 건 며칠 되죠. 성도(成都)에는 오늘 왔고요.”

“부지런하기도 하군. 오자마자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다니.”

“사부께서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고 하셨거든요.”

이번엔 당기황이 끼어들었다.

“내가 언제!”

“어르신 말고 진짜 사부님이요.”

“허청을 말하는 게냐? 나도 네 사부야!”

당기황이 길길이 날뛰자 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 노선배(老先輩)! 조용히 좀 해주시오! 굳이 여기까지 오셔서 이런 촌극을 펼치는 건 무슨 의도요? 깊은 뜻이 숨어 있을 것 같소만.”

“……!”

어이없어하고 있던 사마련 무인들의 표정이 변했다.

중년인의 말대로였다.

천하에 악명 높은 두 노소(老少)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당기황의 입을 주시하는데.

그 입이 열리며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너 이 새끼! 어린놈이 왜 그리 말이 짧아? 내가 네 친구냐?”

“그래서 노선배라 하지 않았소?”

“않았소? 그 말투를 말하는 거다 이놈아! 너, 누구야?”

“귀주원가(貴州元家)의 원자형이라 하오.”

중년인이 가슴을 펴며 대답하자 당기황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네가 투웅(鬪雄)이라는 싸움꾼이로구나.”

사파무림에서 팔사(八邪)의 뒤를 이을 것이라 기대받는 십이웅(十二雄) 중 하나.

투웅 원자형은 놀라운 투지와 싸움 실력으로 명성을 떨치는 고수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팔사에 비하면 아래 배분의 인물.

오만한 당기황의 눈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고작 그 명성을 믿고 이리도 빳빳하게 구는 것이냐?”

“물론 아니오.”

“네 뒤에 늘어선 병풍을 믿는 것도 아니겠지?”

당기황이 범상치 않은 기세의 무인들을 눈짓하자 원자형이 고개를 저였다.

“본문의 문도들은 병풍이 아니외다. 허나 내가 이들을 믿고 이러는 것도 아니오.”

“그럼? 원군이 오기로 돼 있어?”

원자형이 한 걸음 나섰다.

그의 단단해 보이는 몸에서 무거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내 실력을 믿을 뿐이지. 대답이 됐소이까?”

“……하하하.”

기가 차다는 듯 웃어 보인 당기황이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의 두 눈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지금 도발하는 것이냐? 나 당기황을?”

원자형도 받은 만큼 돌려줬다.

“요즘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진옥룡을 믿고 이러시는 것이오? 아니면 당가?”

“……나, 독존이야! 독존! 언제나 홀로 싸워왔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

노호성을 터뜨린 뒤 소매 속의 암기를 떨쳐내려던 당기황은 또다시 싸한 기분을 느꼈다.

‘서, 설마?’

맞았다.

정광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내 이놈을 그냥!’

몹쓸 제자 놈을 쫓을까, 원자형부터 혼쭐을 내줄까 고민하는데.

원자형의 수하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들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미쳤구나.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당기황이 살기를 담아 이죽거렸다.

원자형은 양손에 권갑(拳甲)을 끼며 어깨를 으쓱했다.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 같소만.”

“……해볼 만해? 내가?”

“그렇소.”

이번엔 원자형이 이죽거렸다.

아주 점잖은 말투로.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노친네에게 겁먹을 이유가 없지 않소?”

정광이 왜 이런 일을 꾸몄는지, 아니면 정광과 당기황이 짜고 이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십존의 일원인 독존을 제거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

그래서 원자형은 물러서지 않았고…….

당기황도 마찬가지였다.

“……갈!”

격돌이 시작됐다.

그 싸움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가로 돌아가서 잠든 정광이 아침 먹으란 소리에 깼을 때까지.

* * *

사천요리는 다른 성들의 것과 많이 달랐다.

향이 강하고 맵기로 유명했기에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한동안 고생하기 일쑤였다.

전날의 연회에서는 당영중의 배려로 무난한 요리들만 나왔었는데 둘째 날인 오늘부턴 가차 없었다.

“사천에 왔으면 사천의 맛을 봐야지.”

당영중도 은근히 꼰대 같은 면이 있었다.

사천요리에 큰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 자부심이 이해될 정도로 훌륭한 요리들이 줄줄이 나왔다.

마랄향과(麻辣香鍋), 궁보계정(宮保雞丁), 수자어(水煮魚) 등 많은 요리를 맛본 정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수 중의 고수인 그였기에 물을 정신없이 마시거나 땀을 뻘뻘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좋은 맛과 신선한 자극을 느낄 뿐이었다.

‘아. 배불러.’

그렇게 기분 좋은 경험을 하고 숙소로 향하는데.

당기황은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전음에서조차 느껴질 정도로.

-당장 장원 밖으로 나와라!

-오셨어요?

-그래! 어서 나와!

-낮잠 잘 건데요.

-날 이용만 해놓고 도망간 녀석이 뭐가 어째? 영원히 재워주랴?

-항상 홀로 싸우신다길래 그랬죠. 혹시 외로우셨어요?

-……이 녀석이 진짜!

순간, 정광의 눈앞에 당기황이 나타났다.

옷이 찢기고 피칠갑을 한 모습을 보면 보통 고생을 한 게 아닌 듯싶었다.

정광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치셨어요?”

“당연하지!”

“십존이신데도요?”

“십존은 사람이 아닌 줄 아냐!”

“상대가 팔사도 아니고. 십이웅이라 안 다치실 줄 알았죠. 투웅은 어떻게 됐어요?”

“흥. 아무리 잘나봐야 햇병아리지. 나를 상대하고도 무사하겠느냐?”

“죽이셨어요?”

“……투웅만 있었던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놈, 꽤 강했어!”

“얼마나요?”

“그야…….”

대답하려던 당기황이 한쪽을 바라봤다.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자 사천당가의 가주. 다음 대의 십존(十尊)이라 일컬어지는 십오군(十五君) 중 독군(毒君)으로 꼽히는 당영중이었다.

“……저 녀석 정도는 되겠더군. 그나저나 제 놈을 욕하려던 것도 아닌데 표정이 왜 저리 살벌해?”

어느새 가까이 온 당영중이 나무토막 같은 얼굴로 물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신 겁니까?”

“사고라니. 그냥 몸 좀 풀고 왔지.”

“투웅이라는 소리가 들리던데. 설마 성심표국을 치신 겁니까?”

“치기는. 인사 좀 하고 왔을 뿐이다.”

당영중의 눈이 아비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그렇게 피를 뒤집어쓰는 인사를요? 제 승인 없이는 안 하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려고 한 게 아니고. 정광 저 녀석을 따라갔다가 어쩔 수 없이…….”

당영중은 아미자(峨嵋刺)를 꺼내 들었다.

“이젠 까마득한 후인의 핑계를 대시는군요. 진옥룡의 도복에는 핏방울 한 점 없습니다만.”

“……나 진짜 억울해. 나도 이 녀석한테 당한 거라니까.”

기이한 색으로 번들거리는 아미자가 당영중의 손가락을 타고 회전했다.

“숙부님들을 버리고 가시더니 이젠 싸움을 키우시는군요. 남기실 말은 없습니까?”

“……아비보고 유언을 하라니. 이거 너무하잖아!”

“너무한 건 아버님이시지요. 휘이익!”

당영중이 자세를 낮추며 휘파람을 불었다.

사방에서 녹의를 입은 노인들이 나타났다.

“……너, 너희들마저…… 내가 너희를 그렇게 키웠느냐?”

당기황이 그들을 둘러보며 한탄하듯 중얼거렸지만, 노인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분노했다.

“키우다니! 두들겨 패기밖에 더 했소?”

“패기만 했나? 조잡한 독을 만들어 수시로 먹여댔으면서!”

당기황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다 네놈들 잘되라고 그랬던 거잖아!”

노인들의 수장인 칼자국 노인이 받아쳤다.

“우리도 형님 잘되시라고 갚아드리리다!”

“이, 이놈이!”

“덤비시오! 어서!”

당기황이 노한 얼굴로 달려들려는 그때.

당영중이 먼저 달려들었다.

당기황은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난 억울해! 억울하다고! 정광 너 이 녀석! 두고 보자!”

그의 억울한 외침이 멀어져갔다.

당영중은 깨끗이 무시하며 정광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수고했네.”

“뭘요.”

칼자국 노인도 반대편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고생은요. 마실 나갔다 온 건데요.”

정광의 계획을 당영중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칼자국 노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양반을 너무 가볍게 보지 말거라. 수틀리면 눈이 돌아서 제자든 뭐든 사생결단을 내려고 들지도 몰라.”

“그렇게까지는 아닐걸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태상가주님, 은근히 즐기고 계신 것 같은데요.”

“…….”

당영중과 칼자국 노인은 부정하지 못했다.

당기황이 화를 내면서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 사실이어서였다.

그들이 아는 당기황은 그런 이였다.

‘사파 놈들을 마음껏 때려잡았으니 그러시겠지.’

‘하아아. 어쩌다 저런 인간이 본가에 태어나서…….’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정광이 그렇게 만들어줄 것이었다.

“오늘은 조심하게. 공격을 받은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네.”

“본가도 비상사태에 들어갈 거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정광은 두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숙소로 돌아갔다.

시간은 금방 흘렀다.

날이 어두워지자 정광은 신법을 펼쳐 당가를 벗어났다.

그리고 점찍어둔 곳을 향해 달렸다.

기다렸다는 듯 희미한 기운이 그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미약하지만 익숙한 기운, 당기황이었다.

‘빨리 따라와. 밤은 짧으니까.’

정광의 생각을 읽은 듯 당기황이 열심히 따라왔다.

그들은 얼마 안 가 한 장원 앞에 이르렀다.

‘가릉전장(嘉陵錢莊). 맞네.’

현판을 확인한 정광은 바로 칠야마영(漆夜魔影)을 펼쳤다.

그의 몸이 어둠 속에 녹아들자 쫓아오던 당기황의 기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당황했구나. 좋아.’

정광은 손목에 찬 항마주(降魔珠)를 잠시 바라봤다.

녀석이 칠야마영에서 흐르는 마기를 막아주고 있었다.

‘어디 한번 볼까.’

정광은 전장 안으로 스며들어 주변을 살폈다.

전날 성심표국에서 일어난 일 때문인지 많은 무인이 삼엄한 기세로 번(番)을 서고 있었다.

‘전각 안에 일일이 안 들어가도 돼서 편하네.’

정광은 품속에서 작은 병들을 꺼냈다.

당가의 노인들과 청년들이 준 독병들이었다.

‘아까워라. 쓰고 더 달라고 해야지.’

정광은 장원을 돌며 독을 뿌렸다.

삽시간에 비명이 터져 나오며 아수라장이 됐다.

“으아악! 도, 독이다!”

“어, 어떤 놈이냐! 당가의 습격인가?”

비명은 어둠을 뚫고 멀리멀리 퍼졌다.

그 소리를 듣고 놀란 당기황이 장원의 담을 뛰어넘어 내려서기 직전!

‘음. 큼. 오랜만이네.’

목을 가다듬은 정광이 변성술(變聲術)을 펼치며 외쳤다.

“나 독존이 명하노니! 사마련 종자들은 사천성을 떠나라! 아니면 죽음뿐이다!”

동시에 당기황이 사마련 무인들 중앙에 착지했다.

그의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이건 또 뭐야!’

별의별 일을 다 겪은 그였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광이 외친 목소리는 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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