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미사여구(美辭麗句)
당영중은 정광이 한 말을 되뇌었다.
‘당가를 사천제일(四川第一)로 만들겠다고?’
다른 이가 그랬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터.
하지만 정광이 말했으니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당영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한 말이군.”
“그렇죠?”
“허나 생각보다 어려울 걸세.”
정광도 인정했다.
“네. 사천성이니까요.”
사천성은 네 개의 큰 강이 흐르는 비옥한 성이었다.
서쪽은 고원이고 동쪽은 분지인데 가축을 키우거나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당연히 사람도 많을 수밖에.
한족은 물론 여러 이민족이 공존하고 있었다.
경쟁이 심한 건 당연지사.
심지어 무림문파까지 그랬다.
구파일방 중 두 문파와 칠대세가 중 한 가문이 모여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당영중은 그 점을 지적했다.
“청성파(靑城派)와 아미파(峨嵋派)는 쉬운 상대가 아니야.”
“네. 하지만 당가도 그렇죠.”
“칭찬은 고맙네만 확실히 말하지. 본가는 청성이든 아미든 두려워하지 않으나 둘을 같이 상대할 순 없네.”
당영중은 자존심만 내세우는 여타의 무인들과 달리 당가의 실력에 대해 자신감을 드러내면서도 과신은 하지 않았다.
정광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같은 정파끼리 싸우자는 것도 아닌데요 뭐.”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서 더 문제일세.”
당영중의 차가운 눈이 빛났다.
“싸우면 차라리 낫지. 야밤에 기습의 묘를 살려 각개격파하면 본가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네. 피해는 무척 크겠지만 말이야.”
“화끈하시네요.”
“하지만 싸움 없이 사천제일이 되려면 무력, 금력, 권력에서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야 해. 그들 스스로 본가를 사천의 맹주로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일세. 내 대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정광이 씩 웃자 당영중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은 가네. 하지만 그건 앞에 말한 것들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어.”
“왜요?”
“본가가 혁혁한 공을 세워 사천에서 사마련을 몰아낸다. 그럼으로써 관(官)과 상계(商界)는 물론 민초들에게까지 본가가 사천제일임을 인식시킨다. 이 말 아닌가.”
“네. 그러면 청성과 아미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죠.”
“그만큼 본가의 피해는 막대해지겠지. 나는 가문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식솔(食率)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네.”
당영중의 차가운 눈이 얼음처럼 단단해졌다.
사천제일이라는 명성 따위로는 자신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드러낸 것이다.
정광은 그 눈을 보며 손뼉을 쳤다.
“역시. 이 정도는 되시니까 독존 어르신이 말아 드신 당가를 이만큼이나 일으키셨군요.”
“……알아줘서 고맙군.”
“많이 쌓이셨죠?”
당영중은 이를 지그시 물었다.
그의 잇새로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자네는 모를 걸세. 절대로 말이야.”
아니.
정광은 알았다.
그의 아비는 더 했었으니까.
그래서 원래의 계획대로 말했다.
“사람은 쓰기 나름이죠. 이건 어때요?”
“……무슨?”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당영중의 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그 불길은 너무나 뜨거워 그의 눈을 채우고 있던 얼음을 순식간에 증발시켜 버렸다.
“당가가 아니라 태상가주님께서 희생하시는 거요.”
“자세히 말해보게나. 어서.”
* * *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정광은 당영중의 집무실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거래가 잘 끝나서 그런지 발걸음도 가벼웠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당가의 청년들이 몰려왔다.
무림맹에서 연을 맺은 이들은 물론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당오상 소협. 잘 계셨어요?”
음침한 인상의 청년이 뒤통수를 긁으며 수줍어했다.
“천하의 진옥룡께서 이 몸을 기억해 주고 계셨구려. 영광이오.”
“뭘요. 당오건 소협도 오셨네요.”
순한 얼굴의 청년이 예의 있게 포권했다.
“오랜만이오. 이날만 손꼽아 기다렸소이다.”
“네? 왜요?”
“그간 많은 노력을 했소. 내 독을 드시고 품평을 해주실 수 있소이까? 부탁드리오.”
당오건과 청년들은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며 예를 취했다.
정광도 두 손을 모으며 대답했다.
“아뇨.”
청년들의 별처럼 빛나던 눈이 죽어버렸다.
“지금은 좀 그래서요. 다음에요.”
“아! 미안하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실 텐데 무리한 청을 했소이다.”
“뭘요. 의욕 넘치셔서 좋은데요.”
정광은 기운을 차린 그들에게 독이란 독은 다 준비해 놓으라 한 뒤 숙소로 향했다.
노인들의 것보단 훨씬 못하겠지만 젊음이라는 무기로 만들어냈을 그들의 것도 꽤 기대됐다.
‘숙소도 꽤 괜찮단 말이지.’
당가는 부자라고 불릴 만했다.
배정된 방에 들어간 정광은 만족한 얼굴로 낮잠을 잤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침상에 누워서 그런지 아주 달콤한 잠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백승무가 찾아왔다.
“사형. 일어나십시오. 연회가 있다고 합니다.”
연회라.
또 내 탁자에는 풀만 있는 거 아니야?
천만다행스럽게도 당가는 칠대세가에 낄 만한 자격이 있는 가문이었다.
갖가지 소채로 만든 요리들 사이에 윤기 나는 고기 요리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향긋한 향을 풍기는 술까지!
정광은 당가를 인정했다.
‘남궁 놈들이랑은 비교가 안 되네.’
손만 좀 빨리 놀리면 될 터.
그의 젓가락과 손이 탁자 위를 질주했다.
무혈단만 있다면 편히 먹고 마시겠지만 당가의 노인들에게 굳이 책잡힐 필요는 없어서였다.
‘맛도 괜찮고, 이게 연회지.’
철월도 동의했다.
“맛있다. 철월은 기분 좋다.”
그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먹고 마셨다.
어찌나 많이 먹는지 사람들이 놀라 먹는 것도 잊고 지켜볼 정도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의 사문인 쇄혼문(碎魂門)이 좀 산다 해도 당가와 어찌 비비겠는가.
이런 진수성찬을 처음 접한 그는 무척이나 행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손과 입이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멈춰 버렸다.
철월은 아쉬운 얼굴로 장이를 바라봤다.
“철월은 역시 자장이의 밥이 좋다.”
“……네?”
장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름대로 요리에 자신이 있긴 했지만 이런 고급스러운 것들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다. 자장이의 요리는 질리지 않는다.”
“……아!”
장이는 철월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유정풍도 그랬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네. 걸식(乞食)하며 수없이 많은 요리를 먹어봤네만, 아무리 맛있는 곳도 많이 먹으면 지겨워지더군. 허나 장이 자네의 요리는 훌륭한 집밥 같은 맛이랄까? 질리지가 않아.”
그에 이어 무혈단원들도 하나둘 동의하기 시작했다.
장이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철월이 또 말할 때까지는.
“자장이. 야식은 자장이가 만들어줘라.”
“헉!”
무혈단원들이 크게 웃었다.
지켜보던 당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먹이려면 돈깨나 들겠네.’
정광이 철월을 보며 주판알을 튕기는데 당영중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직 안 나타나셨는가?
-네.
-흐음. 이럴 리가 없는데.
-가주님이 그만큼 무서우신가 보죠.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그럼 이렇게나 고생 안 했을 테니 말일세.
정광은 빙그레 웃어 보인 뒤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연회가 끝나고 사람들은 길었던 하루를 마감하게 됐다.
하지만 정광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침상에 눕자 당기황의 전음이 들렸다.
-제자야. 잘 먹고 푹 쉬었느냐?
-네. 태상가주님은요?
-……이 녀석이. 사부를 놀려?
-설마요.
창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더니 당기황이 들어왔다.
정광은 침상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깊은 어둠도 그의 얼굴에 떠오른 불만을 가릴 수는 없었다.
“성격 나쁜 아들놈 때문에 이게 웬 고생인지.”
“가주님께 직접 말씀하시죠.”
“……됐다. 그냥 늙은 내가 참으마.”
당기황은 몸을 부르르 떤 뒤 지나가듯 물었다.
“그래, 그 녀석과 무슨 얘기를 나누었느냐?”
“이것저것요.”
“……하아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제자한테까지 괄시를…….”
입으로만 탄식한 당기황이 눈을 굴렸다.
“내 얘기는 없었느냐? 너를 구하기 위해 좀 빨리 달려간 걸 놓고 뭐라 했다던가…….”
“화 많이 나셨던데요.”
“……망할.”
어깨를 늘어뜨렸던 당기황이 화난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우란 놈들이 고작 그런 것에 꽁해서 고자질을 해? 내 이놈들을 당장!”
“그보다 더 화나신 게 있던데.”
“……더? 내가 또 뭘 잘못했지?”
정광은 기억을 더듬는 당기황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마련이요.”
“아!”
“야금야금 세력을 뻗치다가 노골적으로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고 분노하시던데요.”
“그리고?”
“당장 내쫓고 싶으나 전력이 부족해서 망설이는 중이라고…….”
“망설이다니!”
당기황의 눈에 노기가 떠올랐다.
“당가의 가주가 어찌 그런 놈들을 보고 망설이기만 한단 말인가!”
“아. 당가의 가주는 그러면 안 돼요?”
“말이라고!”
“그럼 어떡해야 하는데요?”
“당장 쓸어버려야지! 녀석이 나를 말리지만 않았으면 진작 해치웠을 게야!”
“그럼 가시죠.”
“……뭐?”
정광은 운룡을 허리에 차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사마련을 치러요.”
“……지금?”
“네.”
“……우리 둘이?”
“네. 사람이 모자라나요?”
당기황이 코웃음 쳤다.
“흥. 모자라기는. 나만 가도 충분하지.”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충분하긴 한데. 아들놈이 못 나가게 해서…….”
“역시.”
“……?”
“태상가주님은 힘이 없으시구나.”
“……무어라?”
“하긴. 그만 쉬실 때도 됐죠.”
“……!”
“다녀올게요. 푹 주무세요.”
정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저, 저…….”
창밖을 보며 더듬거리던 당기황이 화를 토하며 신법을 펼쳤다.
“감히 나를 뭐로 보고!”
격장지계(激將之計)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고얀 놈 같으니.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정광이 아무리 막 나간다 해도 사마련 사천 지부로 쳐들어가지는 않을 터.
자잘한 곳 하나를 지워 버릴 생각인가 본데 그 정도야 충분히 놀아나 줄 수 있었다.
아들인 당영중이 달려들겠지만 항상 그래왔듯 며칠만 피하면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테니까.
‘녀석은 이미 나를 버린 아비 취급하고 있으니…….’
당기황은 이를 악물었다.
‘……제자한테만큼은 우습게 보이면 안 돼!’
똑똑히 보여주리라.
자신이 왜 독존이라 불리는지.
수많은 사고를 치면서도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지!
‘그런데 이놈 왜 이렇게 빨라!’
정광은 비조처럼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빠르기만 한 게 아니었다.
‘곤륜 놈들은 겉멋만 들었나. 무슨 놈의 신법이…….’
어찌나 우아하고 멋진지 당기황도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운해비영(雲海飛影)? 비붕신법(飛鵬身法)? 듣던 것과 다른데. 대체 뭐지?’
둘 다였다.
정광은 자신의 색을 더해 변형시킨 곤륜 신법을 펼치며 놀라운 속도로 멀어져 갔다.
당기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익!’
단전에서 막대한 내공이 솟구쳤다.
그의 신형이 쭉쭉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어둠 속에 잠긴 거대한 장원에 이르렀다.
‘……여긴? 성심표국(誠心鏢局)?’
성심표국은 그 이름처럼 성실하고 정성스럽게 표행을 하던 표국이었다.
‘……얼마 전에 사마련에게 먹혔다고 들었는데. 여기를 친다고?’
그의 생각대로였다.
신법을 펼치던 정광은 성심표국의 현판을 확인하자마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달리던 기세를 더해 거대한 대문을 후려쳤다.
콰아앙!
대문이 수없이 많은 나뭇조각으로 변해 사방으로 비산했다.
“뭐, 뭐야!”
그 좌우에서 번(番)을 서던 무인들이 ‘어? 어?’ 하다가 놀라서 외쳤다.
정광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표국 내부로 뛰어들었다.
뒤를 따르던 당기황이 어이없는 얼굴로 소리쳤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야밤에 왔어!”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표국 여기저기에서 화톳불이 켜졌다.
당기황이 대문을 통과할 때쯤엔 이미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으아악!”
“웨, 웬 놈이냐! 커헉!”
정광은 성난 호랑이처럼 날뛰고 있었다.
기가 찬 표정으로 바라보던 당기황도 그에 질세라 날뛰었다.
정광이 돌아보도록 우렁찬 기합까지 질러가며!
“타하앗!”
콰장창창!
표국은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다.
사람이 날아가고 전각이 무너졌다.
용맹하게 달려들던 사마련 무인들이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때, 거대한 전각의 문이 열리며 한 중년인이 범상치 않은 기세의 무인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그는 웅혼한 내력을 담아 외쳤다.
“어디에서 오신 고인(高人)들이시오!”
정광이 답했다.
“정파무림의 정신적 지주이시자 천하에 짝을 찾을 수 없는…… 어쨌든 강자, 독존 당기황 어르신이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앞부분의 말도 안 되는 미사여구(美辭麗句)야 그렇다 치고, 독존 당기황이 난입했다는데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당사자인 당기황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이! 나한테 다 뒤집어씌울 심산이구나!’
밤을 틈타 몰래 암수를 쓰고 뜰 줄 알았거늘, 이게 뭐하는 짓인지.
이대로 당할 순 없는 일.
그도 공력을 끌어 올려 외쳤다.
“그리고 중원의 떠오르는 태양이자 천하제일미남 진옥룡이시다!”
“…….”
사마련 무인들은 멍한 얼굴로 정광과 당기황을 번갈아 봤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뭐야? 이 미친놈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