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동정심
전생에 진천마였던 시절에도 수하를 버리지 않았던 정광이다.
마음에 안 들면 좀 패곤 했으나 웬만하면 죽게 내버려 두진 않았단 말이다.
그런데 수하도 아니고 가솔을 내팽개쳐?
가솔이 정광의 아비와 비슷한 인간들이어서 꼴 보기 싫어 그랬을까?
‘그렇다면 납득이 되는데.’
그럴 리가 있나.
그의 아비 같은 이가 그렇게 많을 순 없다.
만약 그랬다면 당가는 이미 한참 전에 망해 존재하지도 않을 터.
잠시 생각해 보니 당기황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원래 제정신이 아니었지. 어쩌다 이렇게 이상한 자들만 꼬이는지 원.’
논리적으로 생각해선 안 되는 자였다.
그냥 그러려니 해야 했다.
정광이 이렇게 이해하는데…….
당 씨 남매는 아니었나 보다.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가솔을 버리고 오시다니요.”
당기황의 눈썹이 하늘로 솟았다.
이 많은 후인들 앞에서 할아비에게 또박또박 따지다니.
아비인 당영중을 빼닮아 귀여운 맛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들 아닌가.
“너희들을 걱정해서 그런 것 아니냐!”
흥분한 그와 달리 당 씨 남매는 냉정했다.
“바로 말씀을 해주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서 가서 도와야 합니다.”
당기황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 정도 놈들도 해치우지 못하면 어찌 당가의 무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녀석들이 알아서 할 터. 신경 쓸 것 없다.”
무혈단원들은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며 당가의 허리를 휘게 해놓은 장본인이 뭐가 어째?
‘명불허전이라더니.’
‘정말 제멋대로구나.’
당 씨 남매가 또 따지려 하는데 정광이 끼어들었다.
“거기 남은 분들은 싸울 줄 아시는 분들인가 봐요.”
“큼. 본가의 사람 치고 안 그런 이가 없지.”
“잘됐네요. 그럼 오늘은 푹 쉬고 천천히 가죠.”
“……응? 천천히?”
“네. 당가는 멀리 있잖아요. 길게 봐야죠.”
당가는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 근처에 있었다.
이곳에서 대략 팔백리(八百里) 정도의 거리.
말을 타고 간다 해도 당장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뭐 그러자꾸나.”
당기황이 아리송한 얼굴로 동의하자 정광이 덧붙였다.
“그깟 사마련쯤이야 남은 분들이 벌써 쓸어버리셨겠죠.”
“……그렇지.”
“한 분도 다치지 않고요.”
“……으음. 살짝 긁히긴 하지 않았을까?”
“에이. 설마요. 천하의 사천당가인데.”
“…….”
“돌아가시면 가주님께서 반갑게 맞이하시겠네요. 태상가주님 무척 수고하셨다고.”
“……!”
당기황의 눈빛이 변했다.
나무토막 같은 얼굴로 스산한 살기를 내뿜을 아들이 떠올라서였다.
“……생각해 보니 좀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군.”
“왜요?”
“그야…… 그래,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노숙은 영…… 빨리 가서 푹신한 침상에서 자야지. 집만큼 좋은 데가 없는 법이란다.”
무혈단원들이 기가 찬 얼굴로 당기황을 노려봤다.
동시에 정광에게 감탄했다.
‘변덕이 죽 끓는 듯한 독존을 이렇게 쉽게 다루다니.’
‘기억해 뒀다가 나도 써먹어야겠군.’
그들은 알지 못했다.
정광의 아비에 비하면 당기황은 성인군자와 같다는 걸.
그래서 이렇게 쉽게 설득해 냈다는 걸 말이다.
정광이 씩 웃으며 단원들에게 명했다.
“가죠.”
“네! 단주!”
그들은 말을 몰아 질풍처럼 달렸다.
마혈이 짚인 채 안장에 꽁꽁 묶인 창사의 제자 우이정, 거대한 체구와 대월의 무게 때문에 말 세 마리를 번갈아 타는 철월도 함께였다.
말이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며 하루를 꼬박 달린 그들은 야트막한 언덕에 도착했다.
당기황이 사마련 무인들을 만났다는 곳이었다.
‘흐음.’
정광은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핏자국과 함께 부러진 병기들과 암기들이 널려 있었다.
시신도 꽤 있었는데 당가의 상징인 녹의(綠衣)를 입은 자는 없었다.
‘아까운 독을 많이도 뿌렸네. 사람은 물론 근방의 초목까지 다 죽어버렸잖아.’
이런저런 흔적들과 바닥에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들을 합해 어떤 싸움이었는지 그려봤다.
머지않아 명확한 그림이 떠올랐다.
‘당가가 밀렸어.’
당기황이 허풍을 친 건지 사마련이 강했는지 몰라도 당가가 패퇴한 건 확실했다.
‘질은 뛰어나나 중과부적이었겠지. 그런데도 사천 지부 놈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는 건…….’
창사와 부사가 정광을 습격하기 위해 사천까지 들어왔다는 걸 모른다는 의미다.
‘여기까지는 군사와 내 예상대로야.’
사마련주는 수하들도 모르게 창사와 부사를 자객으로 보냈다.
사천 지부가 당가를 막아선 건 당가의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뭔가 있는가 싶어 찔러본 것이리라.
‘그렇다기엔 숫자를 충분히 보냈나 보네. 나름 똑똑한 놈이 있다더니.’
아마도 당가 무인을 생포해 왜 갑작스럽게 움직였는지 문초하려 할 터.
패퇴한 당가를 쫓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정광은 말안장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당기황을 흘깃 본 뒤 단원들에게 명했다.
“가죠.”
“네! 단주!”
정광은 일행을 이끌고 달렸다.
흔적이 너무 많아 쫓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나자 너른 평야에 도착했다.
두 무리가 한창 싸우고 있었는데, 수가 적은 녹의를 입은 무리가 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당기황이 대노하여 외쳤다.
“멍청한 놈들! 저깟 놈들한테 밀리냐!”
그는 바로 말에서 뛰어내려 신법을 펼쳤다.
얼마 안 가 반대편 무리 속에 뛰어든 그는 양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꺼내 떨쳤다.
암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악!”
무혈단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정광의 명을 받은 그들은 사마련 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잔뜩 지쳐 있던 당가 무인들이 힘을 얻었는지 손발을 바삐 움직였다.
물론 정광도 놀지는 않았다.
“장이 소협.”
“네, 단주.”
“곤(棍) 꺼내서 두 손으로 꽉 쥐실래요?”
“아, 알겠습니다.”
장이는 영문도 모른 채 정광의 말을 따랐다.
“좋아요. 제가 말하면 철월의 얼굴을 곤으로 때리세요.”
“……네?”
“아주 힘껏요.”
“……네?”
장이만 황당해하는 게 아니었다.
맞을 당사자는 더했다.
“철월은 맞는 거 싫다. 얼굴은 더더욱 싫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요.”
“철월은 이유를 듣고 싶다.”
“그 사혼철신신공이라는 거. 펼치면 이성 잃는 거 아시죠?”
“철월은 안다. 그래도 상관없다.”
“제가 상관있어요. 되는 대로 도끼 휘두르다가 동료를 해치면 어떡해요.”
“철월은 원래대로 하고 동료가 피하면 된다.”
정광은 철월을 두들겨 패려다 참았다.
곤륜산에서 이십 년 가깝게 쌓아온 수양 덕분이었다.
“철월의 친우인 장이 소협은 무공이 약해서 못 피할걸요.”
“……자장이. 너는 약하냐?”
철월이 퉁방울 같은 눈을 끔뻑이며 묻자 장이가 붉어진 얼굴로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아직은요.”
“으음. 철월은 자장이가 죽으면 곤란하다. 맛있는 밥 못 먹는다.”
철월이 정말 곤란한 표정을 짓자 정광이 부추겼다.
“그러니까 좀 맞아보세요. 자오한테 얼굴 맞고 정신 차리셨었잖아요. 신공도 안 풀린 채로.”
“…….”
“저한테 맞을래요, 아니면 장이 소협한테 맞을래요.”
“자장이!”
철월은 바로 승복했다.
정광한테 맞으면 머리가 날아갈지도 모를 일. 약하다는 장이에게 맞는 게 낫지 않겠는가.
게다가 장이에겐 호감을 느끼던 차라 맞아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장이를 선택한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싸울 때마다 내가 패기는 번거로우니 장이에게 시켜야지.’
철월은 빨리하라고 재촉하기도 전에 기합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사이(邪異)한 기운이 뭉클뭉클 솟았다.
그 기운은 삽시간에 그의 몸을 검게 물들였다.
눈까지 죽어버린 그는 두 손을 치켜들며 괴성을 질렀다.
“꾸와와와락!”
동시에 정광이 외쳤다.
“때려요!”
“……이야아!”
장이는 공력을 끌어올려 철월의 이마를 갈겼다.
카앙!
“꾸억?”
철월이 시선을 내려 장이를 노려봤다.
여전히 죽은 눈이었다.
“으으으…….”
장이가 몸을 떠는데 정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죠! 반드시 죽이겠다는 각오로 다시!”
“……이야아아앗!”
장이는 단전 바닥에 들러붙은 내공까지 끌어 올려 곤을 휘둘렀다.
“꾸워어어……!”
철월은 장이를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양손은 정광에게 잡혀 있었다.
“……워엉?”
도대체 언제?
두 눈을 끔뻑거리는데, 이마에 장이의 곤이 닿았다.
깡-
“꾸워억!”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철월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장이는 알아채지 못했다.
이번에도 너무 약했나 싶어 다시 후려쳤다.
까앙-
“크악! 자, 자장이! 나다! 철월은 정신 차렸다!”
“아!”
정광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장이 소협. 잘했어요. 이제 철월도 확실하게 싸울 수 있게 됐네요.”
“다, 다행입니다.”
“다음에는 잡아주지 않을 테니까 한 방에 끝내세요.”
“네!”
“좋아요. 철월, 가서 동료들을 도와야죠.”
철월은 꽤 아팠는지 이마의 혹을 매만지다 고개를 저었다.
“처, 철월은 싸우지 않는다.”
“장이 소협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 놓을 건데요.”
“철월은 동료를 돕는다!”
사기충천한 철월이 대월을 꼬나 쥐고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그를 발견한 사마련 무인들이 두 눈을 치떴다.
“처, 철두(鐵頭)다!”
“이 새끼! 감히 련을 배신해!”
철월이 대월을 휘두르며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철월은 철두가 아니다! 철월이다!”
부우우우웅-
“끄아아악!”
무인 두 명이 한꺼번에 두 조각났다.
당기황에 무혈단에 철월까지.
전세는 삽시간에 정파 쪽으로 기울었다.
정광도 해야 할 일을 했다.
“장이 소협. 식사 준비하죠.”
“아, 알겠습니다. 허, 헌데 단주께서는 왜 안 싸우시고…….”
“금방 끝날 거니까요.”
정광의 말대로 고기죽이 끓기도 전에 싸움이 끝났다.
정파의 완승이었다.
* * *
“에잉. 진짜 남부끄러워서 살겠나. 사파 떨거지들한테 고전이나 하고.”
당기황이 고기죽을 먹다가 투덜대자 뺨에 칼자국이 새겨진 노인이 소리쳤다.
“숫자가 너무 많았잖소!”
“내가 나서니까 금방 끝나던데?”
“진작 그러시지! 우릴 버리고 떠나놓고 그게 할 말이오?”
“버리다니! 아우들을 믿은 거지!”
“하!”
“하? 많이 컸네?”
당기황이 이죽거리자 칼자국 노인이 죽 그릇을 놓고 일어섰다.
당가의 다른 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쭈. 니들. 해보자는 거냐?”
당기황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노인들은 묵묵히 사슴 가죽 장갑을 꼈다.
일촉즉발의 순간.
정광이 끼어들었다.
“죽 식으면 맛없어요. 다 드시고 싸우시죠.”
“도사의 말이 맞다. 자장이, 철월도 한 그릇 더 줘라.”
“여, 여기 있습니다.”
서로를 노려보던 당기황과 노인들은 힘이 쭉 빠졌다.
그들은 다시 앉아 죽을 먹기 시작했다.
정광은 노인들을 바라보며 경지를 가늠했다.
‘독존에게는 한참 못 미치나 같은 배분이구나. 소수 정예만 온 건가.’
주위에 가득한 사마련 무인들의 시신과 달리, 다친 이는 많았으나 죽은 이는 없는 이유였다.
‘그러면 당가의 방비가 약해졌을 텐데.’
둘 중 하나였다.
가주인 당영중이 생각 없이 일을 저질렀거나 당가의 저력이 생각 이상이거나.
‘당연히 후자겠지.’
정광이 아는 당영중은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제법 뛰어나다 할 수 있었다.
‘이런 아비를 두고도 화병(火病)으로 죽지 않다니.’
전생의 정광만은 못해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정광은 당영중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주 작은 동정심을 느꼈다.
그런 정광을 훔쳐보는 시선이 있었다.
칼자국 노인을 비롯한 당가의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저 녀석이 진옥룡이란 말이지. 망할 괴물의 제자…….’
그들의 눈에 감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동정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