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일관성
당기황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무림맹 군사 제갈문형으로부터 서신을 받고 얼마나 분노했던가.
사천성으로 향한 정광 일행이 사마련에게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가주이자 아들인 당영중을 닦달해 가솔(家率)을 이끌고 달렸다. 중간에 문제가 생겼으나 무시하고 질주했다.
분명 그랬는데…….
손주들 때문에도 그랬지만 제놈을 걱정해서 노구를 끌고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뭐가 어째!
‘생포했어야지, 왜 죽였냐니…….’
창사였단 말이다, 창사!
사파무림에서 제일 세다는 팔사 중 한 놈!
생포할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되냐고.’
놈이 비록 살짝 다치고 지친 상태였지만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생포하려면 독, 암기, 독장(毒掌)까지 봉하고 싸워야 하는데 당가 무인으로서 그게 할 짓이냔 말이다.
그래서 손발을 바삐 놀리다 보니 조금 화가 나서 그랬다고 말했건만.
‘이놈 보게. 아직도 인상을 찡그려?’
이대론 안 된다.
당가의 품으로 완전히 끌어안지는 못했으나 자신의 깨달음을 전수한 제자 아닌가.
당가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려줘야 했다.
당기황은 위엄 있는 얼굴로 당당히 말했다.
“한번 손을 쓰면 반드시 피를 보고, 상대가 숨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게 바로 당가의 율법이다.”
“피가 난 상처는 다 제가 낸 거고. 독으로 죽이셨잖아요. 율법이라면서 반만 지키셨네요.”
“…….”
이놈을 진짜 어찌해야 할지.
사부에게도 한마디를 안 지려 하다니.
당기황은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졌다.
“내가 어쩌다 너를…… 너도 무기명제자(無記名弟子)를 들였다 들었다. 그런데도 사부의 마음을 몰라주는구나.”
“수빈이는 착하고 말도 잘 들어서요.”
“…….”
당기황은 땅이 꺼져라 탄식한 뒤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을 하는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어떻게든 억누르기 위해!
마침 운기조식을 하던 무혈단원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그들은 당기황을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봤다.
손주인 당오군과 당예지도 마찬가지였다.
‘독존 어르신이라면 우리가 운기조식 중인 걸 멀리서도 보셨을 텐데.’
‘왜 쓸데없이 내공을 실은 휘파람을 불고 고함을 지르시는지 원.’
‘할아버님 때문에 놀라서 위험해질 뻔했어. 단원들에게 미안하구나.’
운기조식할 때는 무방비 상태가 되기 마련.
미세한 변화가 큰 탈을 만들어낼 수도 있기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뭔지.
호법을 선 정광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 그렇다 치자.
독존씩이나 되는 이가 이리도 경망스럽게 행동해서야 되겠는가.
‘이놈들이…….’
독존씩이나 되는 당기황이었기에 눈을 감고 있어도 무혈단원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담긴 감정까지도 어렴풋이.
‘명상이고 뭐고 그냥 콱!’
따끔한 교훈을 내리려고 눈을 번쩍 뜨는데.
코앞에 쭈그려 앉은 정광과 시선이 마주쳤다.
“당가는 의술에 능하죠?”
“……당연하지.”
“웬만한 건 다 고칠 수 있겠네요?”
“물론이다. 본가의 의술은 천하제일이야.”
오만한 얼굴로 으스대던 당기황은 무혈단원들이 빤히 바라보자 한마디 덧붙였다.
“굳이 따지자면 무한의가(武漢醫家)와 함께.”
“거기가 더 잘하는 건 아니고요?”
“허튼소리! 본가가 고치지 못하는 병은 그들도 고칠 수 없어!”
정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철월을 가리켰다.
“그럼 이분도 고쳐주실 수 있으세요?”
“흥.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당기황은 철월의 몸에 난 상처와 멍을 보며 코웃음 쳤다.
하지만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입을 떡 벌려야 했다.
“역시 당가. 조금 모자란 분도 정상으로 고치실 수 있군요.”
“……무어라? 그게 아니라…….”
다급히 말을 바꾸려 했으나 정광은 이미 철월의 허리를 두드려 주고 있었다.
원래는 등을 두드리려 했으나 그의 키가 너무 컸다.
“당가의 태상가주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철월은 모자라지 않다. 그래도 도움은 받겠다.”
“제 덕분이니까 잊지 마시고요.”
“철월은 도사의 도움을 잊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꽤 감격한 걸까.
철월은 습기가 가득 찬 큰 눈으로 당기황을 바라봤다.
눈이며 표정이며 어찌나 바보 같은지.
당기황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모자란 정도가 아니라 바보잖아! 이런 낭패가 있나!’
바보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건 의술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원시천존이나 부처쯤은 나서야 했다.
‘그냥 입 싹 씻어?’
평생 살아온 대로 할까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손주를 비롯한 새카만 후인들이 빤히 보고 있었다.
아무리 낯가죽이 두꺼운 그라 해도 어떻게 그러겠는가.
무엇보다 그랬다간 정광이 어찌 나올지 걱정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당기황은 눈동자만 슬쩍 굴려 머리와 몸이 분리된 부사의 시신을 훔쳐봤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창사가 죽기 전 토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무하구나, 허무해. 평생 무공을 닦아 높은 명성을 쌓았는데…… 약관이 될까 말까 한 꼬마가 부사를 죽이고 나를 패퇴시키다니. 하늘이 진천마를 거두고 진옥룡을 내렸도다.’
창사가 독에 중독돼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다.
대체 어찌 된 연유인지 몰라 급히 달려왔건만.
‘……전부 사실이었어.’
정광이 잘난 거야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더 강해졌는지.
‘하아아. 어쩔 수 없지.’
당기황은 아들인 당영중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제자를 아껴서 이러는 것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암. 사부 된 도리로 제자의 부탁은 들어줘야지.’
잘난 아들이 언제나 그래왔듯 잘해내리라.
잘난 아들인 당영중이 혹시 독을 바른 아미자를 꼬나 쥐고 달려들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그때.
정광은 당기황을 보면서 내심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가서였다.
‘가주에게 넘기면 개인이 아니라 가문의 일이 되지. 그래도 당가다. 이제껏 쌓아온 역사가 있으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야.’
철월을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좋은 기회여서였다.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뇌를 다친 자를 고칠 순 없는 법.
소림의 현오가 치병에 걸린 척했을 때 손을 쓸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자연적인 병이 아니라 사술 때문이라면…….’
호기심이 솟았다.
이것도 안 될까?
만약 된다면 꽤 재밌는 경험이 되리라.
고친다고 한 것이 상태를 더 안 좋게 만들 수도 있었으나 철월은 이미 안 좋은 상황이었느니 무슨 상관이랴.
‘몸뚱이도 단단하니까 데리고 다니면 쓸모가 있을 거야.’
흡족한 미소를 짓는데 철월이 구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철월은 배고프다.”
정광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밥시간이었고 한바탕 몸을 풀어서 그런지 더 시장했다.
정광이 시선을 돌리자 눈이 마주친 장이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무혈단원들은 알아서 움직였다.
자신들이 산에 두고 온 말과 짐은 물론 창사 일행의 것들도 챙겼다.
토끼와 사슴도 사냥했다.
땔감을 모아 불까지 지피자 장이의 현란한 손놀림이 시작됐다.
이렇게 다들 고생하는 동안 철월은 우두커니 서서 침만 질질 흘렸다.
단원들이 그를 흘깃거리며 경계를 풀지 않자 정광이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철월 대협은 해치지 않아요.”
단원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대협?
사술에 미쳐 날뛰던 저 덩치가 대협이라고?
철월도 부정했다.
“철월은 대협이 아니다. 철월은 철월이다.”
남이 나를 재단하는 걸 원치 않는다.
나는 바로 나다.
다른 이가 말했다면 이렇게 멋지게 들렸으련만.
사파인이라 대협이라는 호칭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일 뿐이리라.
“그럼 앞으로 철월이라고 부를게요.”
“철월은 좋다.”
“모두 동료니까 해치지 말고 지켜줘야 해요.”
“철월은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
짧지만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
무혈단원들의 눈에 안쓰러운 빛이 떠올랐다.
운기조식을 하며 철월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들어서였다.
‘악독한 사부 때문에 바보가 되다니.’
‘그렇게 당하면 누구나 앙심을 품을 만하지.’
사부가 죽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며 운 것도 그래서일 터.
단원들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최소한의 경계심은 남겨둔 채로.
그들은 좀 전까지만 해도 사투를 벌이던 사파인을 바로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협행을 하며 스스로를 증명한 자오와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그때, 장이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다 됐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장이의 솜씨가 빛을 발했다.
단원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식사를 즐겼다.
까탈스러운 당기황도 군소리 없이 먹을 정도였다.
철월은 대월(大鉞)을 휘두를 때보다 빠르게 입에 요리를 쑤셔 넣었고.
“맛있다. 철월은 맛있다.”
어찌나 많이 먹는지 평소 대식가라 자부하던 유정풍은 호승심을 느꼈다.
그래서 호기롭게 도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철월은 사람이 아니었다.
장이가 팽강휘보다도 훨씬 큰 철월의 체구를 생각해 양껏 만들었으나 철월의 위장은 체구 이상이었다.
얼마 안 가 요리가 다 사라졌다.
철월은 만족스러우면서도 아쉬운 눈빛으로 장이를 바라봤다.
“더, 더는 없습니다만…….”
장이가 더듬거리자 철월은 처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철월은 잘 먹었다. 고맙지만 조금 모자라다.”
“그, 그럼 다음에…….”
순간 철월의 눈이 눈부시게 빛났다.
전시(殿試)에 급제한 학사보다 총명해 보일 정도로.
“철월은 네 이름을 알고 싶다.”
“자, 장이입니다.”
“지금부터 자장이는 철월의 친우다.”
“자, 자장이가 아니라 장이…….”
한편의 촌극을 지켜보던 당기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당영중의 능력이 뛰어나다곤 하나 저런 바보까지 고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아서였다.
그는 잠시 다른 곳을 보다가 정광에게 물었다.
“죽은 척하고 있는 놈은 어떻게 할 것이냐?”
“데려가야죠.”
정광은 당기황이 보던 곳을 향해 외쳤다.
“그만 일어나세요! 슬슬 가야 하거든요!”
“…….”
“목을 잘라서 머리만 같이 갈까요?”
“아, 아니다! 내 발로 가마!”
좀 먼 곳에 쓰러져있던 중년인이 튕기듯 일어서며 대답했다.
철월이 날려 버렸던 창사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진작 일어나시지. 같이 식사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중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래전에 정신을 차렸으나 도망갈 엄두가 안 나 귀식법(龜息法)을 펼치고 있던 참이다.
죽은 체하고 있다는 게 발각됐다는 걸 알았다면 그도 요리를 먹었지 왜 안 먹었겠는가.
그런 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당기황이 도발했다.
“선 자세를 보아하니 창을 수련했군. 창사의 제자일 터. 네 사부처럼 죽여주랴?”
일그러져 있던 중년인의 얼굴이 빳빳이 펴졌다.
반면에 그의 혀는 무척이나 부드럽게 움직였다.
“강호를 떨어 울리는 독존 어르신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사부와 소인은 별 관계가 없으니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허어. 사제지간인데도 별 관계가 없다?”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기황과 무혈단원들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무림에서 사제지간은 부자지간과 같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걸 부정하는 이를 어찌 사람으로 보겠는가?
오직 정광만이 좋게 봤다.
“문초할 필요도 없이 다 말씀하시겠네요.”
“물론이…… 물론입니다, 진옥룡.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럼…….”
정광의 물음에 중년인은 열정적으로 답했다.
지켜보던 당기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사가 비록 사파인이라곤 하나 무위만큼은 대단한 자였거늘. 어찌 저런 제자를 거뒀는지.’
한심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원래 이런 자인지, 이런 자가 아니지만 죽음이 코앞에 닥치자 숨겨져 있던 본성이 드러난 것인지, 뭐가 됐든 보기 싫긴 마찬가지였다.
하도 싫다 보니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던 정광이 너무 좋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 제자는 참 일관성 있지.’
누구에게나 버릇없고 자기 멋대로 군다.
저런 놈보단 훨씬 낫지 않은가.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상가주님.”
“어허. 사부라고 해야지.”
점잖게 타일렀으나 정광은 일관성 있는 사내였다.
“아까 태상가주님께서 사정이 있어 늦게 왔다고 하셨잖아요. 무슨 사정이예요?”
당기황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사마련 놈들이 막아서더구나.”
“사천 지부요?”
“그래.”
“어떻게 하셨는데요?”
당기황이 냉소를 머금었다.
“바빠 죽겠는데 귀찮게 해서 뚫고 왔지. 제깟 놈들이 나를 어찌 막겠느냐.”
“다른 당가분들은요?”
당기황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알아서 싸우고 있겠지. 벌써 끝났을 수도 있고.”
철월을 제외한 모든 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당기황을 쳐다봤다.
심지어 정광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