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64화 (164/569)

164화

다 잡아놨는데

도주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

약하면 항복하든가 튀어야지, 끝까지 맞서 싸워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문제는 감히 정광에게서 도망쳤다는 것이다.

‘가균 그놈을 따라 하는 건가.’

그는 귀물이라도 있었는데.

저놈은 대체 뭘 믿고 뜀박질을 하는 건지 원.

정광은 진기를 끌어 올려 경공술을 펼치려다가 말았다.

이미 점으로 보일 만큼 멀어진 창사에게 한 인영이 달려드는 걸 봐서였다.

‘그래도 많이 늦지는 않았네.’

정광은 창사에게서 신경을 끊고 참고 있던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우웩. 쿨럭. 쿨럭.”

기침까지 몇 번 하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나아졌다.

그대로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진기를 움직여 내부를 관조해 보니 대단한 내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빨리 치료하고 소모한 진기도 보충해야 했다.

전생에서부터 살아남기 위해 지켜왔던 철칙이었다.

‘무혈단은…….’

아직도 한창 싸우는 중이다.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 상황.

‘알아서 잘하겠지.’

품속에서 무각사룡의 내단을 꺼내 조금 떼어내니 비릿하고 눅눅한 향이 퍼졌다.

정광은 코를 찡그리며 내단 조각을 씹어 삼켰다.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동시에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을 운기했다.

단전에 남아 있던 진기가 솟았다.

그것은 격전 때문에 막히거나 손상된 기혈을 뚫고 보듬어가며 전신을 돌았다.

운기는 면면부절(綿綿不絕)하게 계속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은 작게 날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부드러운 빛이 감돌다가 사라졌다.

한쪽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사투를 벌이며 단전을 비우고, 살아남은 뒤 다시 채운 쾌감 때문이었다.

‘가균과 싸웠을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창사와 부사를 한꺼번에 상대해서 그러리라.

그들이 원래의 상태였다면, 정광이 전생의 경험을 오롯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필패였을 터.

‘흠. 그래도 내가 질 리가 없지.’

어쨌든 전생에 천하제일인의 경지에 오른 뒤 잊고 있던 것을 다시 느끼자 기분이 좋아졌다.

뭐 그건 그거고.

‘아. 따가워.’

그 좋은 기분을 몸에 난 상처들이 망쳤다.

정광은 베이고 찔린 상처들을 살펴보며 투덜거렸다.

‘도복이 엉망이 됐잖아.’

깊은 상처는 싸우는 와중에도 혈도를 눌러 지혈을 했었으나 잔상처가 꽤 많았다.

도복을 훌렁 벗은 뒤 금창약을 꺼내 아낌없이 발랐다.

봇짐에서 새 도복을 꺼내 입자 원래의 정광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무혈단원들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가 운기행공한 시간이 꽤 길었는지 움직임이 다소 둔화돼 있었다.

그걸 본능적으로 느낀 걸까.

철월이 승부를 걸었다.

“꾸와와와악!”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도끼를 사방팔방으로 휘둘렀다.

도끼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천하를 쪼갤 기세로 날았다.

무혈단은 물러서지 않았다.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린 그들은 철월의 공세를 간발의 차이로 흘려내며 맞불을 놓았다.

검, 봉, 도, 권 등 수많은 공격이 철월의 온몸을 두들겼다.

그러자.

“쿠와아아아!”

철월의 괴성이 조금 달라졌다.

마치 고통을 못 이긴 비명 같았다.

그는 그 와중에도 당 씨 남매의 암기만큼은 남김없이 쳐내고 있었다.

당오군이 눈을 빛내며 누이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체를 노려라!

당예지는 의문도 표하지 않고 오라비의 말을 따랐다.

두 사람의 암기가 철월의 하체에 집중됐다.

철월은 갖은 병기와 권장, 암기까지 막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지금!’

당오군이 속으로 부르짖은 순간, 철월의 머리 위 공간이 갈라지며 자오가 나타났다.

그는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높이 치켜들고 있던 쌍단봉을 내려쳤다.

그것들은 묵직한 곡선을 그리며 철월의 안면으로 향했다.

쌍단봉이 맺힌 철월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까앙!

“꾸워억!”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비명이었다.

자오가 바닥에 착지한 뒤 다시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무혈단원들도 총공세를 가하려는 그때.

철월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거대한 도끼를 놓은 채.

“철월은 싸우지 않는다!”

느닷없는 언행에 무혈단원들이 입을 떡 벌렸다.

쿵!

도끼가 땅에 떨어지며 둔중한 소리를 낸 뒤에도 그랬다.

침묵을 깬 건 철월이었다.

“좋은 승부였다.”

“…….”

“그럼 철월은 간다.”

“…….”

무슨 개소리를!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다 잡은 참인데!

무혈단원들은 병기를 고쳐 쥐며 그를 포위했다.

철월이 당황한 표정으로 한쪽을 바라봤다.

“사부! 철월은 집에 가고 싶…… 엉?”

머리와 몸이 분리된 부사는 제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철월의 눈이 커지더니 습기가 고였다.

그 습기는 곧 눈물방울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 구슬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철월은 사부가 죽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 * *

“수고하셨어요.”

정광은 단원들을 칭찬한 뒤 운기조식할 것을 명했다.

단원들이 명을 따르자 정광이 호법을 섰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엉엉 울고 있는 철월을 바라보며.

이마에 난 작은 혹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웃기는 놈이네.’

팔사 중 둘과 싸우면서도 전황을 살폈던 정광이다.

철월의 재밌는 사공(邪功)에 호기심이 끌렸다.

‘아직도 피부가 검게 물들어 있어. 지속력이 꽤 긴걸.’

아군인 창잡이까지 날려 버릴 정도로 이성을 뺏어가는 듯했으나 상당한 효능이 있는 사공이었다.

‘어디 한번.’

정광이 다가가자 울고 있던 철월이 화들짝 놀랐다.

“네, 네가 사부를 죽였지? 철월은 죽기 싫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안 죽일 테니까.”

‘아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안 걸까.

그는 정광이 마주 앉아 단전으로 손을 뻗는데도 반항하지 못했다.

미웠지만 거역할 생각조차 못 했던 사부. 그를 죽인 이에게 감히 항거할 수 없어서였다.

대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광은 그의 단전에 손을 대고 진기를 밀어 넣었다.

철월이 어찌나 떠는지 정광의 몸도 같이 떨렸다.

한 소리 하려던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단전이 비었어?’

아주 텅텅 비어 있었다.

‘단전의 크기나 형태를 보면 내공을 쌓아온 몸인데.’

내공을 모두 썼거나 다른 곳으로 돌렸다는 의미.

진기를 퍼뜨려 더듬어보자 후자임이 드러났다.

철월의 내공은 남김없이 흩어져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적지 않은 내공이었으나 아까와 같은 효능을 보일 정도는 아니거늘.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이거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그 외문기공 수련할 때요. 햇빛이 안 들어오는 암굴에 갇혀서 대나무로 맞아가며 악(惡)을 키웠어요?”

“……!”

“실컷 맞은 뒤엔 거무스름한 고약을 전신에 바르고요.”

“……!”

“나중에는 철편으로 맞으면서 악을 증폭시키는 심법을 익혔을 것 같은데. 진기 운용법과 함께.”

“……!”

“눈만 크게 뜨지 말고 대답을 해보세요.”

철월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철월은 그랬다.”

망할.

설마 설마 했는데 이게 무슨.

그래도 또 혹시 모르니까.

“무공 이름이 뭐죠?”

“사, 사혼철신신공(邪魂鐵身神功)이다.”

철월이 겁먹은 얼굴로 대답하자 정광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혼철신신공(魔魂鐵身神功)이 맞잖아!’

마(魔)를 사(邪)로 바꿨을 뿐, 전생에 서책에서 봤던 마혼철신신공임이 분명했다.

‘이게 여기서 왜 나와?’

황궁에 있는 응삼이 북천호가의 진전을 잇고, 감숙성에서 몽고군과 싸우고 있을 황웅이 합밀오가의 무공을 익힌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 둘은 전생의 정광이 살아 있을 때, 또는 죽은 후에 그렇게 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철월이 배운 마혼철신신공은 천마신교에서 수백 년 전 맥이 끊긴 무공.

그게 사파 무인의 손에 들어가 있을 줄이야.

‘나도 모르는 아륵태마가(阿勒泰馬家) 무공을 엄한 놈이 쓰고 있네. 대체 어떻게?’

정광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일단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고. 이놈, 제대로 배우진 못했어.’

전생에 봤던 서책의 내용대로라면 신공을 펼쳐도 이성을 잃는 일은 없었다.

‘아니지. 천마신교에 미친놈이 좀 많아. 원래 미친놈이라 펼친 뒤에 미쳐도 티가 안 났을 수도 있어.’

이건 일단 넘어가고.

자오에게 안면을 맞자마자 바로 정신을 차렸던 게 떠올랐다.

‘얼굴이 조문인가?’

그렇다기엔 자오의 쌍단봉을 맞고도 멀쩡한 얼굴이 걸렸다.

‘경지가 낮아서 그런 걸지도.’

뭐 그거야 물어보면 될 일.

정광이 지나가듯 물었다.

“조문이 어디예요?”

“철월의 조문은…… 헉! 대답 안 한다.”

“음. 완전 바보는 아니시구나.”

“철월은 바보가 아니다!”

정광은 철월을 훑어봤다.

아둔한 얼굴과 흐릿한 눈동자를 보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대체 천마신교의 무공이 어떻게 사파에까지 흘러 들어갔는지 생각하는데…….

철월은 그게 문제였다.

“도사야. 너는 사혼철신신공을 아는구나.”

“대충요.”

“철월은 사혼철신신공 때문에 바보가 됐다. 치료해 줘라.”

“부탁하는 사람 태도가 아닌데.”

철월이 크게 깨달은 표정을 짓더니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물론 말투는 그대로였다.

“철월은 사혼철신신공 때문에 바보가 됐다. 치료해 줘라.”

“그보다 사문내력 좀 말해주세요.”

“말하면 고쳐줄 거냐?”

“사부님 곁으로 보내 드릴까요?”

철월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정광의 말뜻을 깨달았다.

새카맣게 물들어 있던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광이 두 손을 매만지자 입도 열렸다.

“처, 철월은 쇄혼문(碎魂門)의 십일대 제자다.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아 사문 어르신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사부를 잘못 만나서…….”

그의 말은 두서가 없었으나 참고 들으면 이해할 만했다.

‘사조의 사조의 사조보다 더 전의 사조가 어느 날 갑자기 얻은 깨달음으로 창안한 무공이라? 사조는 물론 아무도 익히지 못했다니 말이 돼? 창안한 게 아니라 주웠다는 말이잖아.’

정광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때 되면 알겠지.’

무공을 빼돌린 놈이 누구든지 간에 만나기만 하면 콱.

연유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때 또 정하면 되고.

그때, 철월이 또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도사야. 철월을 치료해 줘라. 부탁이다.”

“흐음.”

정광은 잠시 고민했다.

‘지난 일들을 기억하는 걸 보면 아주 바보는 아니네. 방해가 되진 않을 것 같긴 한데.’

무엇보다 튼튼한 몸뚱이가 쓸 만했다.

마혼철신신공을 썼을 때 이성을 잃는 건 아까처럼 얼굴에 한 방 먹이면 고쳐질 듯하고.

‘그래도 시험해 봐야지.’

정광은 바닥에서 일어서며 손짓했다.

“그 신공 풀었다가 다시 운공해 보세요.”

“아차. 아직 안 풀고 있었다. 철월은 바보가 됐다.”

철월은 머리를 긁다가 기합을 질렀다.

“하아아앗!”

검게 물들었던 그의 피부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기합 안 지르고 푸셔도 되는데.”

“이렇게 배웠다.”

“네. 다시 펼치시죠.”

“안 된다.”

“네?”

“하루에 한 번. 한 시진 반밖에 유지 못 한다.”

“…….”

“진짜다. 철월은 거짓말 안 한다.”

거짓말이 아닌 건 얼굴만 봐도 알았다.

저 바보가 저렇게 간절한 표정을 어떻게 연기하겠는가.

‘얼마나 엉망으로 배웠기에 이런 제한까지 있는 거야.’

정광이 혀를 차자 철월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 짐작한 그는 솥뚜껑 같은 손을 들어 정광의 양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제발 치료해 달라고 빌려는 순간.

휘이이이익-

귀를 찢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웅혼한 내력이 담긴 고함이 천지를 울렸다.

“누가 감히 내 제자를 괴롭히는가!”

한 인영이 나는 듯 달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철월이 두려워할 정도로.

얼마 안 가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푸르딩딩한 안색을 한 노인이 철월의 앞에 섰다.

노인의 몸에서 산악보다 무거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네가 감히 내 제자를 핍박해?”

“처, 철월은…… 철월은…….”

벌벌 떠는 철월 대신 정광이 말했다.

“아니. 제갈 군사한테서 한참 전에 연락이 갔을 텐데 늦으신 거 아닌가요?”

“그, 그건 사정이 있어서…….”

“늦게 오신 건 그렇다 치고. 죽이시면 어떡해요? 생포하셨어야죠. 쓸모가 많은 분인데.”

정광은 노인의 어깨 위를 가리키며 타박했다.

그곳에는 독에 중독되어 죽었는지 노인처럼 푸르딩딩한 안색을 한 창사의 시신이 얹혀 있었다.

노인은 당황한 얼굴로 변명했다.

“생포하기에는 좀…… 이놈이 이래 봬도 팔사에 꼽히는 놈이라…….”

“제가 다 잡아놨는데.”

“아니. 내 절기가 독과 암기 아니더냐. 그것들을 빼놓고 싸우자니 좀 그래서…….”

정광이 눈살을 찌푸리자 노인 당기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권각술로 한참 투덕거리다 보니 화가 치솟아서 그랬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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