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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162화 (162/569)

162화

입이 무거워야 사내

정광은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으로 쌓아온 단전의 내공을 끌어 올려 뇌전보(雷電步)를 펼쳤다.

동시에 운룡을 불러내 그대로 휘둘렀다. 강맹하기 짝이 없는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의 일식이었다.

운룡이 금룡으로 변하며 창사의 장창을 가르려는 순간.

창사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양발을 지면에서 떼지 않고 움직이는 신묘한 보법이었다.

물론 두 손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장창 끝에 매달린 창촉(槍鏃)이 무수한 점을 찍어댔고 그 점들은 벽이 되었다.

수많은 가시가 촘촘히 박힌 날카로운 벽!

‘까칠하네.’

정광은 계속 전진하며 금룡을 쭉 뻗었다.

금룡의 이빨이 가시 벽과 부딪히기 직전, 그의 손목이 회전했다.

금룡은 우아하게 몸을 뒤틀며 가시들 사이의 미세한 틈을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온몸으로 꿈틀대 미세한 틈을 더 크게 벌렸다.

주먹만 한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 사이로 창사의 깊게 가라앉은 눈이 보였다.

‘이 정도는 괜찮다? 그럼 이건?’

정광은 그 눈을 향해 싱긋 웃으며 금룡을 밀어 넣었다.

금룡은 유룡검(遊龍劍)의 묘리에 따라 창대를 타고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잡고 있는 창사의 두 손을 노리는 그때.

정광의 등 뒤에서 강렬한 살기가 다가왔다.

아까 헛물을 켠 부사의 쌍도끼 중 하나이리라.

“하압!”

그에 맞춰 창사도 움직였다.

뒤로 더 물러나 거리를 확보하며 창을 내질렀다.

전후 양쪽에서의 공격.

정광은 선택을 해야 했다.

하던 대로 어떻게든 창사에게 일격을 먹이고 부사에게 등을 내어주느냐.

아니면 옆으로 물러나 둘의 합공을 흘리느냐.

다른 이라면 이랬겠지만.

정광의 선택은 달랐다.

아니, 그의 몸은 원래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제일 분노하고 조급해하고 있던 먹잇감을 잡기 위해서.

‘마침 도끼라 더 좋지.’

몸을 돌리자 부사의 도끼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도끼는 단병기이니만큼 둘의 간격은 무척 좁은 상태.

정광은 왼발을 비스듬히 내디디며 정면의 도끼와 후방의 창을 흘렸다.

동시에 그의 손이 회전하며 운룡을 거꾸로 쥐었다.

그리고 운룡의 검파(劍把) 끝으로 부사의 가슴을 찔렀다.

쩡!

부사는 다른 도끼의 검면으로 재빨리 막아냈다.

“죽어!”

뒤이어 헛손질했던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그 호선의 끝에는 정광의 목이 있었다.

휘이잉-

정광의 머리가 사라졌다.

어느새 고개를 숙여 도끼를 피한 그는 반보를 나아가며 왼팔 팔꿈치를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큭!”

부사는 재빨리 고개를 뒤로 젖혀 간신히 피해냈다.

그래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던 걸까.

턱살이 갈라지며 핏방울이 튀었다.

그의 눈이 분노로 뒤집혔다.

“감히!”

평소의 정광이었다면 논리정연하게 대꾸해 복장을 뒤집어놓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새가 없었다.

그의 등을 꿰뚫으려 하는 창사의 창 때문이었다.

창이 찔러오는 만큼 앞으로 더 나아가며 운룡을 찔렀다.

부사는 우뚝 버티고 서서 도끼를 휘둘렀다.

정광이 더 전진하는 걸 막고 운룡을 찍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생각보다 더 성가신 합공.

‘예전이었으면 그냥.’

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

그리고 전생에도 젊었을 적엔 지금보다 더 불리한 싸움만 하며 살았었다.

그때의 그나 지금의 그나 본질은 같은 존재.

정광은 그답게 움직였다.

운룡으로 부사를 찔러가던 상황.

운룡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검파 끝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운룡은 유성이 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헉!”

부사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찔러오던 검을 놓고 던지듯 밀어내다니!

명문정파의 검객이 어떻게 이런 짓을!

그래도 부사는 사파에서 구르고 구른 고수 중의 고수였다.

재빨리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을 펼쳤다.

무릎이 굽혀지고 상체가 뒤로 누웠다.

간발의 차이로 운룡이 그 위를 날아갔다.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확인한 부사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기회!’

날아간 검에 맞았는지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으나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검을 잃은 검객쯤이야.

검법 명문 곤륜의 제자이니만큼 다른 무공은 취약할 터.

도끼로 난자해 주는 거다.

오체분시를 넘어 갈가리 찢어버리리라!

상체를 퉁기듯 일으키며 양손의 도끼를 휘두르려는데.

“……!”

정광이 없었다.

대신 창사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밑을 보게!”

밑?

눈동자만 내려서 보자 바닥에 주저앉은 정광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비수?’

천하에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예리한 비수, 소운룡.

재빨리 근육에 힘을 주고 내공으로 보호해도 소용없었다.

그것은 부사의 왼발을 뚫고 땅까지 파고들었다.

스으윽-

“크아악!”

동시에 정광은 소운룡을 뽑으며 옆으로 굴렀다.

그래도 조금 늦었다.

정광의 도복 등줄기가 창사의 창에 길게 베였다.

도복 속에 입은 철혈무쌍용갑(鐵血無雙龍甲)이 아니었으면 등뼈까지 갈라졌을지도 모를 일.

창사의 놀란 외침이 들렸다.

“신검이야 알고 있었다만 보의까지 입고 있었나!”

정광이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도마뱀 내의인데요.”

발을 움켜쥐고 주저앉은 부사가 고함질렀다.

“가균 개새끼! 이런 비수에 저런 걸 입고 있다는 걸 감춰?”

부사는 물론 창사도 분노했다.

분명 가균도 저 두 귀물의 맛을 봤을 터.

하지만 그가 올린 보고에는 언급조차 없지 않았는가.

“그 새끼가 련을 배반했구나!”

부사의 말을 정광이 부정했다.

“그게 아니라 그분이 사내여서 그렇죠.”

“무어라?”

“입이 무거워야 사내잖아요.”

“……이, 이놈이 진짜!”

부사가 분노하면 할수록 정광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흘깃 보니 창사의 이마에도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창잡이도 열 좀 받았네. 이쯤이면 할 만하겠어.’

가균을 살려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나에 대해 제대로 얘기 안 했구나. 기특한 놈.’

요상한 수를 써서 도주할 때부터 느꼈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놈이었다.

차라리 잘 구슬려서 배후를 캐는 게 나을지도.

말로 구슬리든 주먹으로 구슬리든 말이다.

‘뭐 그건 나중 일이지.’

먼저 운룡부터 회수하고.

정광은 비룡축전(飛龍逐電)을 펼쳐 무혈단을 향해 달렸다.

무혈단은 창사와 부사의 제자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밀리고 있었으나 당장 떼죽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광이 수를 하나 줄여준 덕분이었다.

창사의 두 제자 중 한 명이 불시에 날아온 운룡에 가슴을 꿰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정광은 운룡을 뽑으며 무혈단을 응원했다.

“힘내세요!”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창사와 부사를 마중 나갔다.

단전의 내공이 폭발하듯 솟았다.

화아아아악-

운룡은 다시 금룡이 되어 화려한 황금빛을 토해냈다.

이번에도 그의 목표는 왼발을 절뚝거리는 부사였다.

부사가 분노하며 절규했다.

“왜 나만! 크흑!”

운룡을 간신히 피해낸 그의 귀에 정광의 목소리가 꽂혔다.

“비수에 독 발라져 있었는데 독 기운 안 돌아요?”

“도, 독? 어떤 독을 쓴 거냐!”

정광이 창사의 창을 쳐내며 빙긋 웃었다.

“현인(賢人)이 되는 독이요.”

“현인?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그들은 정신없이 싸우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그게 뭐냐면요…….”

사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상태.

그래도 격장지계로 써먹긴 딱이었다.

* * *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오군은 무혈단의 부단주를 맡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의 냉정하고 적절한 지휘 덕에 버티던 무혈단은 정광이 한 명을 줄여주자 한시름 놓게 됐다.

하지만 그래 봐야 밀리는 상황.

당오군은 정광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형세를 가늠했다.

‘아우도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긴 한데 확실치는 않군.’

정광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팔사 중 둘을 맞아 저렇게까지 싸울 수 있을 줄이야.

경악스러움이야 일단 밀어두고.

그의 안목으로는 그들의 싸움이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수비만 하면 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길게 내다보면 눈앞의 적들을 최대한 빨리 처리한 뒤 정광을 도와야 했다.

개개인의 실력으로는 팔사의 손짓 한 번에 날아갈지도 모르나 무혈진으로 덤빈다면 약간의 시간이라도 끌 수 있으리라.

무혈진은 수비에 특화된 진이었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물론 공격에 소용없는 진도 아니었다.

‘어느 쪽을 먼저 쳐야 할까.’

장창을 귀신처럼 다루는 중년인.

무지막지한 크기의 대월(大鉞)을 젓가락처럼 쉽게 다루는 덩치.

선택은 뻔했으나 한 번 더 숙고했다.

다른 이가 봤을 땐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을지도 모르나 당오군의 판단력과 실행력은 그 시간을 줄일 정도로 빨랐다.

그의 입에서 명령이 터져 나왔다.

“삼조! 공(攻)! 창(槍)!”

그의 외침에 정우와 정현이 망설이지 않고 진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창잡이를 공격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감히!”

창잡이가 분노하며 창을 휘둘렀다.

삽시간에 수많은 창영(槍影)이 그의 주변을 휘돌았다.

정우와 정현은 두려워하지 않고 검을 찔렀다.

채챙!

창잡이의 실력은 대단했다.

단 일합(一合)에 두 사람의 검을 쳐낸 그는 진각을 크게 내디디며 정우의 목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언제나 사람 좋게 보이던 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몸까지 굳은 건 아니었다.

피잉-

고개를 꺾자 창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에 가는 실선이 생기고 핏물이 배기도 전에 그는 용형보(龍形步)로 옆으로 돌아가며 운룡십삼검(雲龍十三劍)을 펼쳤다.

순후한 내공이 담긴 정우의 검이 구름에 몸을 감춘 용이 되어 창잡이에게 쇄도할 때, 그의 사제 정현은 정반대의 수법으로 적을 분노케 했다.

“차핫!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정현은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뛰어올라 창잡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 급박한 와중에도 정우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정광이 창피하니까 무공명 좀 외치지 말라고 그렇게 핀잔을 줬는데도 꿋꿋이 행하는 정현이었다.

‘그래도 운룡대팔식만큼은 정현 사제가 정 자 배 중 제일!’

당연히 정광을 제외하고였지만 정현의 신법은 대단했다.

특히 허공에서 몸을 움직이는 운룡대팔식 같은 부류의 신법은 발군이었다.

창잡이가 보기에는 겉멋만 든 미친 짓이었지만.

‘창을 쓰는 내 앞에서 허공에 몸을 띄워?’

제발 죽여달라고 목을 내미는 격이다.

이걸 가만 놔두면 철월처럼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판이었다.

‘꼬치로 만들어주마!’

창을 크게 휘둘러 정우를 밀어낸 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정현을 향해 찔렀다.

그야말로 거저먹는 격이었다.

그러나 정현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합!”

짧은 기합과 함께 그의 도복 소매가 펄럭였다.

마치 바람을 받은 듯한 그의 신형이 좌측으로 이동하며 창잡이의 창을 피했다.

“……!”

창잡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현의 실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진기를 소모하는 미친 짓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가서였다.

그 이유는 곧 알게 됐다.

쐐애액-

“큭!”

옆에서 들리는 파공음에 고개를 틀었다.

시린 한기와 함께 비표(飛鏢)가 뺨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무거운 기세가 담긴 검격이 날아왔다.

창잡이는 창을 돌려 그 검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쨍!

“훅!”

공격했던 정우가 숨을 크게 토하며 세 걸음 물러났다.

그사이 정현이 또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검을 내리긋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창잡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내공을 끌어 올렸다.

마치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비표 세 개가 그의 하체를 노리고 날아왔다.

창잡이는 내공의 일부만 끌어 올린 채 창을 바람개비처럼 휘둘렸다.

채채챙-

비표를 튕겨낸 그는 그것을 던진 자를 노려봤다.

차가운 인상의 귀공자, 당오군이었다.

한편, 대충 계산을 끝낸 당오군은 싸움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창잡이는 나, 정우, 정현으로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무혈단원들 중 최강자인 공우가 합세하면 아예 잡을 수 있을지도.

‘그사이 대월을 든 거한을 막아야 하는데…….’

당오군은 곁눈질로 거한을 살펴봤다.

그는 아까부터 그랬듯이 아무런 의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대월을 휘두르고 있었다.

‘혹시 저자가 힘을 숨기고 있는 거라면…….’

다시 공격을 거두고 진을 굳히면 될 일.

당오군이 공우에게 명을 내리려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으아아아! 철월! 똑바로 싸워라! 다 죽여 버려!”

정광에게 뭔가 들은 부사가 미친 듯이 분노하며 외쳤다.

지금까지 입이 무거워야 사내라는 듯 아무런 말도 안 하던 장한이었는데.

부사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더니 이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알았다, 사부! 철월은 똑바로 싸우겠다!”

그리고 거한의 기세가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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