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소문이 오히려 부족한 놈
시간을 다투며 전력으로 누군가를 쫓는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이는 무림인일 경우에도, 고수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무공을 모르는 이보다 나을 뿐이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단련된 육신과 고강한 내공 덕분에 체력이 급속도로 고갈되진 않으나 심적인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부사(斧邪)가 그랬다.
“가도 가도 보이지 않잖아!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지고한 경지의 고수답지 않은 신경질적인 말투.
그는 말달리는 내내 틈만 나면 투덜거렸다.
원래 그런 성정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오늘도인가. 좋지 않아.’
창사(槍邪)는 내심 한숨을 쉬며 부사를 다독였다.
“조급해하지 말게. 놈들이 다른 곳으로 새면 모를까, 우리가 따라잡게 되어 있어.”
“혹시 벌써 샌 것 아닐까?”
“그래서 관도를 지나다니는 이들에게 확인하고 있잖나. 새면 새는 대로 다시 찾으면 되니 제발 마음 좀 가라앉히게.”
“무슨 소리!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긴.
누가 봐도 열이 머리끝까지 솟은 모습 아닌가.
창사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강호에 나왔는데 모든 게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니…….’
팔사의 일원인데도 애송이를 척살해야 하는 신세.
건량과 육포로 때우는 형편없는 식사, 하늘을 이불로 삼고 땅을 베개로 하는 노숙.
게다가 사냥감은 어찌나 영악한지 꼬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만약 비밀을 요하는 일이 아니었으면 화풀이로 엉뚱한 사람을 몇 번이나 도륙했으리라.
‘게다가…….’
창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서조각 무인들의 힘을 빌려 역용을 해서였다.
그의 짐작이 맞았는지 부사가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내 평생 얼굴을 숨기고 다닌 적이 없었거늘…….”
“…….”
“조금만 더 빨리 가는 게 어떨까?”
“말이 못 버틸 걸세. 경공술을 펼치는 건 놈들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야.”
부사는 욕설을 내뱉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후우우. 평정이다, 평정. 화는 놈을 만났을 때 쏟아내면 돼.’
그렇게 억지로 울화를 삭이는데 복장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바보 제자, 철월(鐵鉞)의 목소리였다.
“사부. 나는 집에 가고 싶다.”
“시끄러워!”
“배고프고 온몸이 결린다.”
“한마디만 더하면 그런 감각도 없게 만들어주마!”
“…….”
철월이 목을 움츠리자 부사의 분노가 더 커졌다.
‘이 천치 바보 새끼. 이 꼴이 될 줄 알았으면 그 고생을 해가며 가르치진 않았을 텐데.’
제 사형들보다 똘똘해서 기대를 걸었었다.
한번 제대로 키워보자 맘먹고 사문의 비전절예(秘傳絶藝)를 전수했건만.
몇 대째 아무도 익히지 못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까.
열과 성을 다해 몰아붙였는데도 돌아온 결과는 철두(鐵頭)였다.
철두대월(鐵頭大鉞)이란 별호로 놀림 받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걸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공은 그대로였다.
정신만 돌아오면 되니 지금껏 기다려 왔는데…….
그래도 제자인지라 철두대월이라 놀리는 놈들의 머리를 쪼개가며 철월이란 별호로 고쳐 부르게 했는데…….
이젠 한계였다.
‘이번 일만 끝내면 정리해야겠어.’
그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은밀했기에 창사만이 느낄 수 있는 살기였다.
창사는 말을 몰며 내심 탄식했다.
‘엉망이군.’
부사와 철월만을 말함이 아니었다.
그의 두 제자도 내색을 안 할 뿐 조급함과 분노에 빠져 있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어. 여유를 가지면 놓치게 된다.’
벌써 섬서성과 사천성의 경계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지나다니는 이들에게 들은 대로라면 정광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속도를 높이면 곧 잡을 수 있을 게야.’
꼭 그래야 했다.
그도 조급해하고 있었다.
스스로는 못 느끼는 사실이었지만.
* * *
오늘도 정광 일행은 천막에서 푹 자고 일어나 배를 거하게 채웠다.
짐을 정리하고 출발하기 전, 정광이 단원들에게 말했다.
“오늘부턴 속도를 좀 높이죠. 그간 관리를 잘했으니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언제부턴가 무혈단은 사마련의 척살대가 있다는 가정하에서만 얘기하게 됐다.
“그러세.”
“좋아요.”
단원들이 동의하자 정광이 빙긋 웃었다.
“지금까진 운을 잘 만들었으니 앞으로도 그래 보죠.”
“운이라?”
당오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뜻인지 알려주게, 아우. 우형은 이해가 안 가는군.”
“별것 아닌데.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 하죠? 많이 과장되긴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죠.”
운이 칠이요, 재주가 삼이란 말이다.
재주로 모든 게 정해지지는 않는다는 강호의 유명한 격언이었다.
“칠을 차지하는 운은 싸울 때의 상태라 생각하면 돼요.”
약조를 한 뒤 벌이는 비무나 생사결의 경우, 양측 모두 결전의 그 날에 맞춰 몸과 마음의 상태를 최고로 끌어올린다.
승산을 조금이나마 높이기 위함이다.
이는 하수가 아닌 고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생긴 싸움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
그 상황이 어느 쪽에 유리하느냐에 따라 운이 있거나 없다고 말하곤 한다.
“잘 먹고 잘 잔 데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 못 먹고 못 잔 데다 마음까지 불안정한 사람. 어느 쪽이 유리할까요?”
마(魔)를 품은 마인(魔人)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전자다.
“무공의 고하야 어쩔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격차를 줄여야죠. 적들은 분노하고 조급해하고 있을 거예요. 그럴수록 우리에겐 좋은 일이고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정한 마음은 형세 판단, 내공 운용, 초식 연계 등에 그릇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럼 가죠.”
“네! 단주!”
무혈단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쥐고 작은 산을 한참 오르는데…….
그들이 온 길에서 작은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정광의 말에 무혈단원들이 뒤를 돌아봤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기수들의 용모가 뚜렷해졌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꼴을 보니 고생깨나 했구나.’
푸석푸석한 얼굴에 퀭한 눈.
그런데도 선두에서 말달리는 두 노인의 기도는 대단했다.
‘역시 가균의 반열인 팔사인가 보네. 나머지 녀석들도 제법 하고.’
꽤 인상적인 덩치도 있었다.
그들도 정광 일행을 발견했는지 말을 버리고 신법을 펼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광 일행이 급히 말을 버리고 산을 내려간다 해도, 저들에게 얼마 안 가 따라잡힐 게 분명했다.
‘마침 오가는 사람이 없어 다행인가.’
놈들이 목격자들을 베어버릴 일은 없었다.
‘얼추 시간도 맞을 것 같네. 뭐 아니어도 상관없고.’
붙어야 할 때였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정광이 단원들에게 명했다.
“병기만 챙기고 산 아래로 뛰어요!”
“네! 단주!”
그들은 말과 짐을 내팽개치고 산 아래로 달렸다.
그리고 평평한 지역으로 나오자 정광이 가리키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진을 펼칠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정광이 또 명했다.
“개진(開陣)!”
“무혈진(無血陣), 개진!”
무혈단은 순식간에 무혈진을 펼쳤다.
나한진의 묘리를 바탕으로 단원 개개인의 특성을 살릴 수 있게 고안된 무혈진.
진세를 굳힌 단원들은 투지 어린 눈빛으로 산을 노려봤다.
얼마 안 가 그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 저런 신법을!’
‘대단한 고수다! 정말 팔사인가!’
선두의 두 노인은 산길을 뛰어 내려오는 게 아니라 나뭇가지들을 밟아가며 비조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나머지 셋도 만만치 않았다.
중년의 막바지에 이른 듯한 두 사내와 장년의 한 덩치는 무혈단원들 중 경공술이 가장 뛰어난 유정풍보다 훨씬 더 나은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가 저 세 명을 이기고 단주를 도와야 하는데…….’
‘……가능할까?’
그야 붙어보면 알 일.
아니, 반드시 해내야 했다.
한편, 정광의 앞에 내려선 부사는 살기를 쏘아내며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댔다.
부우욱-
그의 얼굴을 덮고 있던 인피면구(人皮面具)가 찢어졌다.
“갑갑해 죽는 줄 알았군.”
“저…… 갑갑하더라도 쓰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
“생각해서 드린 말씀인데.”
“…….”
“그리고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인피면구를 쓰세요. 역용술 조금만 익히면 되는걸.”
“……네놈이 진옥룡이냐?”
“보면 몰라요?”
“……보면?”
“딱 봐도 그렇잖아요.”
“…….”
광오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더니 과연.
천하에 이런 놈이 또 있겠는가?
이놈이 바로 진옥룡이지.
하도 어이가 없어 늘어졌던 부사의 살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장난질 좀 치더구나. 그 대가로 오체분시를 해주마.”
“그럼 산 아래 놓고 오신 말부터 끌고 오셔야죠. 오체분시는 말 다섯 마리로 사지와 머리를 묶어서 당기는 거잖아요.”
“……하하. 으하하하!”
“무식함을 웃음으로 넘기시네.”
하도 어이가 없어 광소를 터뜨리던 부사가 눈을 부릅뜨는데.
산길을 다 뛰어 내려온 그의 제자가 동의했다.
“맞다! 사부도 바보다!”
“닥쳐! 닥치라고! 목 움츠리지 말고 저기 있는 햇병아리들이나 상대해!”
“아, 알았다, 사부.”
철월이 무혈단에게 향하자 정광이 혀를 찼다.
“그 사부에 그 제자네. 팔사 맞으세요?”
“저놈과 나는 별개야! 내가 바로 부사다!”
“팔사 안에서도 급이 있나? 도사 그분은 안 이랬는데.”
“……지금 나와 가균 그놈을 비교하는 게냐?”
“아뇨.”
“그럼 대체 무슨…….”
“비교가 되나요. 그분이 훨씬 낫죠.”
“…….”
부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느새 그의 양손에는 짧은 도끼가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창사. 자네는 가만히 있어. 내가 죽이지.”
옆에서 정광을 지켜보고 있던 창사가 답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몇 마디만 묻고.”
“묻기는 뭘 묻는…….”
“이보게. 내 언제 이런 소리를 또 했었나? 낯 좀 세워주게.”
“……후우. 그러지.”
창사는 부사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정광을 노려봤다.
“우리가 널 쫓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안 것이냐? 후 공자에게 들었느냐?”
“옥기린요? 아뇨.”
“그럼?”
“그럴 것 같아서요.”
“무엇을 근거로?”
“제가 사마련주라면 그랬을 테니까요.”
“…….”
창사의 눈이 깊어졌다.
그만큼 생각도 깊어졌다.
‘일반적인 정파의 후기지수와는 완전히 다르다더니…….’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정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였다.
‘게다가 경지를 가늠할 수가 없군.’
이는 최소한 그와 비슷한 무위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
사파를 대표하는 노고수와 맞먹는 후기지수라.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믿지 못할 일이었다.
부사가 홀로 상대하겠다고 나설 만하지 않은가.
도발을 당해서도 그렇지만 이런 무인과 겨루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창사는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소문이 오히려 부족한 놈이야. 후 공자가 배반을 한 건 아닌 듯하고. 련주와 같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놈이라면 반드시 제거해야 해.’
련주 하나만 해도 끔찍한데 비슷한 놈을 놔둘 순 없다.
지금이 기회였다.
시간이 더 지나면 천하에 누가 있어 저놈을 죽일 수 있으랴.
창사는 등에 메고 있던 장창을 양손으로 쥐었다.
창자루의 서늘한 느낌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그대로 창끝을 돌려 정광에게 겨눴다.
지켜보던 부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몇 마디 물을 게 있다더니?”
“아까의 하나로 충분하더군.”
“대체 뭐라는 건지…….”
고개를 젓던 부사가 씩 웃었다.
그 웃음에는 소름 끼치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내가 먼저야!”
그는 말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정광을 향해 그의 신형이 쭉 늘어났다.
‘음?’
하지만 정광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창사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허리춤에 있던 운룡을 뽑으며.
화아아아악-
창사의 눈에 들어 있던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