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무운을 비마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 나대던 자들은 더 그렇다.
그중에서도 본인의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배경만 믿고 설쳐대던 놈들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 훌륭한 예가 바로 서안사분이었다.
행패를 부리다가 얻어맞고 침상에서 골골댔으면 반성부터 해야 하련만.
정광이 콩을 또 먹여줄까 묻자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부터 솟구쳤다.
‘이놈이 감히!’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당장 요절내야 했다.
체면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들을 바라봤다.
‘지금 뭐 하시는 것입니까!’
‘당장 저놈을 오체분시해서 소자의 원한을 갚아주십시오!’
이렇게 외치려고 하는데.
아비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정광의 전음을 듣고 있어서였다.
-사내라면 지난 일은 잊어야죠. 앞으로가 중요하잖아요. 헛소문이 적힌 책자는 입수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걱정하게 될 거란 의미 아닌가.
버럭 화를 내려던 아비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정광은 채찍만 후려갈기진 않았다.
-이제 사마련을 몰아내 분쟁을 종식한 첫 번째 관리가 되시겠네요. 그것도 공명정대하게 법대로 따져서요.
-…….
-옥기린의 죄를 밝힌 공은 세 분이 가져가세요. 저와 미리 계획을 세웠다고 하시면 될 거예요.
-…….
-이야. 자제분들의 잘못을 드러내 백성들을 지키게 됐다. 황상께서 네 분의 성함을 기억하게 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제대로 얘기를 꾸미려면 여기저기 돈깨나 뿌려야겠지만 그 정도야 해볼 만한 일 아닌가.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자제분들을 생각하셔야죠. 좋은 기회 아닌가요?
-…….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몸이 회복되면 또 망나니짓을 하고 다닐 게 뻔해.’
‘대체 언제 사람이 될지.’
‘이러다간 이놈의 자식 때문에 나까지 물어뜯길 판 아닌가.’
높은 관직에 있거나 부를 움켜쥐고 있는 만큼 그들을 시기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기회만 된다면 아귀처럼 달려들어 자신들을 끌어내릴 자들이었다.
‘보통 명문가의 자제들쯤 되면 크고 작은 행패는 부리기 마련.’
‘아예 이참에 드러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자.’
‘공을 세우며 같이 털어버리는 거지.’
‘진옥룡이 말했던 대로 하는 거야.’
정광이 그들에게 제안했던 내용은 간단했다.
망나니를 갱생시키려면 환경을 바꿔줘야 한다.
놀거리 가득한 중원이 아닌 깡촌에 박아버리는 거다.
곤륜산은 천하에서 손꼽힐 정도로 훌륭한 깡촌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러려니 마음이 불편했다.
어찌 됐든 소중한 아들 아닌가.
막상 보냈다가 잘못되지는 않을지.
그 황량한 곳에서 얼마나 고생할지.
무엇보다 효과가 있을지.
한참 고민하는 그때, 정광의 전음이 네 사람의 귀에 꽂혔다.
-치료까지 해드린다니까요.
-…….
-아. 정말 사람이 될지가 걱정이시구나. 곤륜을 믿으세요. 저도 이렇게 훌륭히 키워서 변모시킨 곳이니까요.
……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치고 다니면서 뭐가 어째?
그게 훌륭히 키워서 변모시킨 거면, 네 전생이 진천마쯤은 된다는 말이냐!
그랬다.
그만큼 곤륜은 대단한 곳이었다.
하지만 서안사분의 아비들이 알 수는 없는 일.
‘어쩐다…….’
시간을 끌며 정광을 설득할 수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있는 자리였기에 쓸데없는 소문만 부채질할 게 뻔했다.
‘이래서 이 자리에서 옥기린의 죄를 밝히겠다고 했구나.’
두 손을 들 수밖에.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아들들을 척박한 곤륜산으로 보내 반성시키는 모습을 세상에 보이는 게 최상의 수였다.
-……알겠네. 그렇게 하세.
도지휘사가 대표로 말하자 정광이 싱긋 웃었다.
-최선을 다할게요. 시주는 적당히만 하시고요. 적. 당. 히.
네 사람은 당연히 알아들었다.
그들도 남을 대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었기에.
-알겠네. 섭섭지 않게 할 테니 안심하시게. 그리고 그 헛소문이 적힌 서책 말인데…….
-이따 드릴게요. 그리고 그런 게 있었다는 건 까먹겠죠.
-…….
네 사람으로서는 정광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손이라는 뒷배가 있는 그를 다그칠 순 없지 않은가.
아니, 황태손을 떠나 혹시라도 그랬다간 정광이 검무를 출지도.
‘그래, 차라리 더 긴밀한 사이가 돼서 진옥룡의 덕을 보자.’
‘황태자 전하의 건강은 그리 좋지 못해. 황상께서 붕어(崩御)하시면 황태손 저하의 세상이 열릴지도 몰라.’
네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뭉쳤다.
-고맙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그리고 자식들을 노려봤다.
쓸데없이 입을 열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의지가 실린 시선이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서안사분이 꼬리를 내렸다.
그들은 서안사수라는 되지도 않는 별호가 어울릴 정도로 조용한 군자가 되었다.
‘이쪽은 됐고.’
정광은 한쪽 정리가 끝나자 다른 쪽을 바라봤다.
화산의 자엽과 종남의 구성이었다.
-아까 말씀드렸던 거, 농인 거 아시죠?
농이라…….
무슨 놈의 농이 그리도 정확할까.
자엽과 구성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마음 편히 가지세요. 같은 정파끼리 무슨. 어느 정도 일은 서로 못 본 척해주는 게 정이잖아요.
그야 그렇다만 믿음이 안 갔다.
다른 이도 아닌 정광 아닌가?
-의심하는 건 아니네만 믿기 힘드네.
-약조라도 해주게나. 어서.
정광은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사마련부터 몰아내죠. 그게 제일 급하니까요.
두 노도사는 속으로 깊이 탄식했다.
-……일단 알겠네.
-……나중에 얘기 좀 하세나.
-네. 상황 봐서요.
정광은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후위진뿐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할 말 있어요?
-내가 아니라 수하들이 위증한 것이다.
-그러라 시키셨으면서.
-아니라면?
-현장에서 다 보셨잖아요. 수하들이 위증했다는 걸 알고도 입을 다물고 계셨으면 위증 방조죄가 되겠네요.
-하긴. 너처럼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주장하는 건 말이 안 되지. 나는 계속 서안에 있었으니까.
후위진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구나. 내가 졌다.
-조심히 가세요. 말씀드린 거 잘하시고요.
-네가 사부를 죽인 후의 일을 준비하란 말이냐? 별로 마음이 안 내키는데.
-왜요? 옥(獄)에라도 들어가고 싶으세요? 안 받아줄 건데.
정광의 말대로였다.
관과 무림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 사이. 법 좀 어겼다고 옥에 가야 한다면 무림인 대다수는 이미 그래야 했다.
대역죄까진 아니더라도 큰 죄를 지었으면 모를까, 사소한 구타 사건에 대한 위증 정도로 옥에 갇힐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 관에 성의를 보인 뒤 섬서성을 떠나는 것으로 정리가 될 테지.
-뇌물도 잔뜩 먹여놓으셨으니 불법을 자행했던 수하들도 선처받을 거고요. 아쉽겠지만 많이 나쁘진 않은 결과잖아요. 그 전력으로 그 정도면 오래 버텼어요.
-흐음. 가긴 가야 하는데. 네 말을 따르긴 싫구나.
-속 좁으시기는. 그걸 잃은 대신 현명해지셨으면서.
-그것 때문이 아니다. 나는 너와 아주 다른 삶을 살았어. 더는 필요 없을 정도로.
-……현인이 되어도 허세는 없어지지 않네요.
-그래. 그렇게 믿고 싶겠지. 이해한다.
-……사람 없는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요?
정광이 주먹을 쥐자 후위진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네가 날 높이 산 건 마음에 들어. 내가 훗날의 사마련을 이끌길 원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네 뜻에 맞춰 춤을 추다간 영원히 네게 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서요?
정광의 눈이 가늘어지는 만큼 후위진의 눈매도 매서워졌다.
-거절하면 어떡할 것이냐?
-…….
정광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정말 잠시였다.
‘어쩌긴. 다른 적당한 놈을 찾아봐야지.’
굳이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이쯤은 알 만한 머리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후위진은 정광의 기대에 부응했다.
-후우우. 눈빛만 봐도 알겠구나. 아직 죽을 순 없지.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평온히 말했다.
-사부가 죽은 뒤 본련을 수습하는 데까지다. 그 후론 내 행동을 제약할 생각 따위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건 그때 다시 얘기하죠.
-거참. 네가 그를 죽일 수 있을 거라 단정 짓듯이 말했군.
말은 그랬지만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정광은 그만큼 측량할 수 없는 존재였다.
‘꽤 오랫동안 이 녀석에게 끌려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후위진은 고개를 미미하게 젓다가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를 인정하겠습니다.”
* * *
정광은 섬서평화논의회가 끝나자마자 서안사분을 치료했다.
바로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발휘한 건 아니지만 눈에 띄게 상세를 호전시켰다.
물론 훗날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곤륜에서 사고 치시면 아시죠?”
서안사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광의 살기는 그들 같은 파락호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 물론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서안사분이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자 정광이 다독였다.
“에이. 너무 겁먹지 마세요. 이제 한 식구인데.”
“……한 식구?”
“네. 저도 곤륜파. 여러분도 곤륜파잖아요.”
“……아!”
네 청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 우리가 가게 될 곳이 곤륜파였지!’
‘구대문파 중 제일 신비스러운 곤륜파라고!’
변방 중에서도 변방에 있어 신비한 것이었으나 일단 제쳐두고.
구대문파의 당당한 일원임이 중요했다.
‘비록 속가제자지만 그들의 무공을 배우는 건가!’
‘나도 고수가 되겠구나!’
‘곤륜의 무공을 익히면 누가 우릴 막을 쏘냐!’
파락호 치고 주먹을 안 쓰는 이는 없다.
그들 역시 그랬는데 무공 몇 수는 익힌 상태였다.
문제는 그 무공이란 것이 형편없는 삼류라는 사실.
아무리 돈이 좋다 해도 그렇지, 제대로 된 무인이 이런 망종들에게 무슨 무공을 전수하겠는가?
간혹 몇몇 이들이 돈에 혹해 시도해 봤으나 자질도 없는 주제에 노력도 안 하는 모습을 보자 학을 떼고 도주해 버렸다.
그런데 구대문파에 입문하게 되다니!
지난 과거 따위는 사내답게 흘리기로 마음먹었다.
서안사분은 포권을 하며 우렁차게 외쳤다.
“사형!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견마지로를 다 할 것이니 어여삐 봐주십시…….”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네?”
“입문하시는 게 아니라 도동(道童)으로 오시는 거예요.”
“……!”
서안사분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나이가 몇인데 도동이냐!’
‘도사들 심부름이나 하라고?’
‘난 못해! 때려죽여도 안 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정광은 그것을 가능케 만들었다.
“불만 있으신 분?”
“…….”
살기나 거두고 묻지.
누가 감히 있다고 말할까.
“좋아요. 꽤 머니까 조심히 가세요.”
“……네.”
“밥상엔 풀밖에 없으니까 힘을 기르시려면 콩 많이 드시고요.”
“코, 콩!”
“으아악!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만 주십시오!”
정광으로 인해 콩에 안 좋은 기억만 가득해진 서안사분이 경기를 일으켰다.
정광은 이해한다는 듯 위로했다.
“콩은 진짜 맛없는데 어쩌겠어요. 그거라도 드셔야지.”
“흑흑흑.”
그것 때문이 아닌데.
변명할 새도 없이 그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마차에 실렸다.
그리고 과도한 시주와 함께 과도한 호위를 받으며 곤륜으로 떠나게 됐다.
이는 아비들이 내린 결정이었는데 한시라도 빨리 보내 버려야 마음이 나아질 것 같아서였다.
도지휘사는 멀어져 가는 마차들을 보며 한숨 쉬다가 정광을 바라봤다.
“서찰까지 써줘서 고맙네. 자네의 도움은 잊지 않을 걸세.”
“뭘요. 저도 이만 가볼게요.”
“음? 벌써?”
아비들의 눈이 커졌다.
비리가 적힌 서책도 받았겠다, 굳이 더 볼 이유가 없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난다니.
“무슨 일 있는가?”
“아마도 생길 예정이라서요. 그럼 갈게요.”
“자, 잘 가게나!”
정광은 대륙전장 장주와 사총관도 만나본 뒤 말에 올랐다.
화산과 종남은 일부러 넘겼다.
사마련에게 빼앗겼던 사업장들이 국고로 귀속되게 되었으니 얼마나 우는소리를 하겠는가.
“대사형. 제갈 군사에게 전서구 날리셨죠?”
“물론이지.”
정우의 대답에 정광이 정문을 가리켰다.
“가죠.”
“네! 단주!”
무혈단 전원이 외치며 말을 타고 따랐다.
지난 여드레 동안 자오에게 특훈을 받은 장이도 제법 그럴듯한 자세로 말을 몰고 있었다.
대륙전장 정문을 나가 말달리려 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가느냐?”
후위진의 물음에 정광이 되물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지부를 정리하려면 며칠 걸려서 말이다.”
“근데 무슨 일이세요?”
후위진은 말을 탄 무혈단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아니다. 하나 말할 게 있었는데 그럴 필요 없을 것 같군.”
“무슨 말 하시려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네요.”
“……어떻게 안 것이지?”
“그럴 것 같았으니까요. 아, 맞다.”
정광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말도 전음으로 바뀌었다.
-제대로 하시면 해약 드릴 테니 이 악물고 하세요.
-……있기는 하고?
-차차 만들죠 뭐.
-…….
후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정광이 손을 흔들었다.
“가요.”
“그래. 무운을 비마.”
정광은 바로 말을 몰았다.
무혈단원들이 그 뒤를 질풍처럼 따랐다.
장이는 언제 말에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어떻게든 따랐고.
그들이 사라지자 후위진도 발걸음을 돌렸다.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사부를 만나서부터가 걱정이군.’
섬서성에 와서 이룬 게 아예 없지는 않으니, 목이 달아나지는 않을 터.
본인의 앞가림이야 대충 해놓은 상황이기에 정광이 더 걱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정광이 사부의 목을 따줘야 하는데…….
‘대체 누가 왔으려나.’
궁금증은 오래 지나지 않아 풀렸다.
반 시진쯤 지났을까?
몇 개의 인영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들 중 작달막한 키에 기이할 정도로 긴 창을 든 노인이 물었다.
“그놈이 갑자기 떠나 버렸군. 그것도 말을 타고. 공자가 언질을 준 것이오?”
후위진은 빙그레 웃었다.
“그럴 리가요. 할 말이 있어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이미 말을 타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호리호리한 몸에 도끼 두 자루를 허리에 찬 늙은이가 말했다.
“놈을 잡아서 족치면 알겠지. 헌데 공자는 우릴 보고도 놀라지 않는구려.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고.”
“안 놀라기는요. 내색 안 하려고 참고 있을 뿐입니다. 어르신들께서는 서안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설마 진옥룡 때문에……?”
두 노인이 오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위진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녀석이라도 힘들지 모르겠군.’
아니, 힘들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