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58화 (158/569)

158화

증명

마치 현인(賢人)처럼 담담한 후위진과 달리, 그를 호위해 온 사마련 무인들은 원독에 가득 찬 시선으로 정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해쓱한 얼굴과 안 어울리는 모습인지라,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정광은 우물에 풀었던 독이 꽤 효과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되는 대로 쏟아부었는데 되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더니.

정광이 바로 그랬다.

사마련 섬서 지부의 측간들은 이미 넘쳐흐른 지 오래리라.

‘그건 잘된 일이긴 한데.’

문제는 후위진이었다.

과도한 자신감을 꺾어 자아도취 병을 고쳐주려 했건만, 현인이 되어 나타날 줄이야.

그 현인이 홀로 다가와 인사했다.

“잘 있었느냐.”

정광은 눈을 또 크게 떴다.

눈빛뿐만 아니라 목소리에도 현기(賢氣)가 어려 있어서였다.

“네. 그쪽은요?”

“아니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다.”

“네?”

“잃은 게 있고 얻은 게 있다는 말이지.”

후위진의 깊은 눈이 더 깊숙이 가라앉았다.

“네 짓인 걸 안다. 너만이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지.”

“칭찬이죠?”

“역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구나.”

후위진은 허허로운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그의 마음처럼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정광은 얘가 왜 이러나 싶었다.

“많이 변했네요. 혹시 그게 죽어서?”

“차라리 그것 말고 날 죽이지 그랬느냐.”

“에이. 합법적인 선 안에서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어떻게 그래요.”

“그래. 참 갑작스러웠지.”

“네?”

후위진은 고개를 내려 정광을 바라봤다.

그의 현기 담긴 눈에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항상 홀로 우뚝 서는 존재가 될 것이라 믿었다. 매일 아침 눈을 떠보면 실제로도 그랬고.”

“정말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주저앉더군. 첫날에는 부정했지. 너를 물 먹였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한잔 걸쳐서 그런 거라 생각했어.”

“많이 드시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곧 너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무척 분노했지. 너와 이 녀석에게.”

“지금은 화 안 나신 것 같은데.”

“단계가 있더구나. 금방 괜찮아질 거라 되뇌며 나 자신과 협상하게 됐다.”

“잘됐어요?”

“아니. 체념하게 되더군.”

“저런.”

“결국 받아들였다. 현실을 수용하게 됐다고 할까. 그러자 시야가 달라지더군.”

어쩐지 현인처럼 보이더니 과연.

무량수불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무량수불. 깨달음을 얻으신 걸 축하드려요.”

정광이 두 손을 모으자 후위진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장부와 서류들을 제법 챙겨 갔더구나.”

“전표도요.”

“그건 잘 쓰고. 이것만 알아라.”

“……?”

후위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일이 네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을 것이야.”

* * *

마침 날씨도 좋겠다, 아름다운 후원에서 섬서평화논의회(陝西平和論議會)가 시작됐다.

당연히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정파와 사파가 마주 앉은 자리다.

싸우면 싸웠지 무슨 논의를 하겠는가?

피해 측인 화산의 자엽과 종남의 구성은 매섭게 요구했다.

상대가 배분상 한참 아래인 후위진이었으나, 사마련 섬서 지부의 수장임을 고려해 반말은 하지 않는 중이었다.

“사마련은 지금까지의 잘못을 사과하고 본거지로 물러나시오!”

“적절한 배상은 물론 다시는 섬서성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약조도 해야 하오!”

후위진은 담담히 거절했다.

“사과라니요. 본련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물러날 이유도, 배상할 이유도 없지요.”

“허어. 무림의 법도를 우습게 아시는군. 본문의 터전을 침입해 놓고 그게 할 말이오?”

“진인들께선 오해하고 계십니다. 본련은 무림 패권이 아니라 상업 활동을 위해 섬서성에 투자를 했을 뿐입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다니!”

“저도 제 속을 모르거늘, 진인께서 어찌? 도가 정말 높으시군요.”

“무어라?”

양측의 대화는 끝없는 평행선을 그렸다.

평화 논의는 개뿔.

오히려 칼부림이 일어날 판 아닌가.

지켜보던 이들은 지루함과 함께 불안함을 느꼈다.

이 자리를 마련한 네 사람은 더욱 그랬다.

혹여나 사고라도 터지면 체면이 엉망이 될 판이었다.

그들 중 안찰사와 더불어 유이하게 무공을 익힌 도지휘사(都指揮使)가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보게, 진옥룡. 분위기가 너무 과열됐네. 나서도 되겠는가?

도지휘사는 원래의 고리눈이 아니라 순하디순한 눈망울로 정광을 보고 있었다.

이는 다른 세 사람도 비슷했는데 대륙전장 장주에게 정광과 황태손의 관계를 들어서였다.

-네. 그러세요.

도지휘사가 눈짓하자 안찰사(按察司)가 입을 열었다.

“양측 모두 그만하시오. 논의를 통해 평화적으로 타협하기를 바랐거늘 아무 소용이 없구려. 이제 우리 쪽도 할 일을 해야겠소이다. 여봐라, 가지고 오너라.”

그의 명에 관리들이 서책들과 서류들을 가져왔다.

정광에게 받은 이중장부들과 불법 서류들이었다.

“지부장. 한번 읽어보고 감상을 말해주시겠소?”

“그러지요.”

후위진은 담담한 얼굴로 그것들을 살펴봤다.

안찰사는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전음을 보냈다.

-유감이 있어서가 아니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것이니 이해해 주게나.

-진옥룡이군요.

-죄를 인정하면 그간의 정을 생각해 형을 감해주겠네. 어떤가?

-인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요.

-……무슨?

-사실이니까요.

후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며 포권했다.

“수하들이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모두 제 불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후위진은 그들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지금 어떤 점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증거가 얼마나 명백하길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순순히 죄를 인정한다고?’

하지만 황당함도 잠시.

물이 들어온다 싶자 자엽과 구성이 노를 저었다.

“역시 사파는 어쩔 수 없군.”

“정말 수하들만의 잘못이오? 지부장은 전혀 몰랐다고?”

물은 금방 빠져나갔다.

“그렇습니다. 장부와 서류를 보십시오. 제가 관여됐다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혹시 두 분이 따로 가지고 계신지요?”

의혹이야 제기할 수 있지만 증거를 내놓으라 하면 할 수 없는 상황.

자엽과 구성은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입을 열지 못했다.

후위진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 없이 인정할 건 인정했다.

그리고 안찰사를 바라봤다.

“법대로 집행해 주십시오.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

“논의는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

안찰사, 도지휘사, 포정사는 일이 너무 쉽게 되자 당황했다.

후위진에게 받아온 뇌물도 있겠다, 그들이 역으로 도움을 줘야 뒤가 깨끗해지는데 이렇게 쉽게 인정해 버리면 어쩌라고?

지켜보던 정광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불과 며칠 전의 후위진이었다면 뺀질뺀질 웃으며 어떻게든 죄를 부정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현인 그 자체.

내줄 건 내주는 대범함을 보였다.

얼마 안 가 섬서성 전역에 소문이 퍼질 터. ‘역시 사파 놈들이란 어쩔 수 없네’ 하며 욕 좀 먹겠지만, 후위진의 됨됨이만큼은 괜찮다는 평을 받게 되리라.

‘그럼 타격이 거의 없다시피 한 거지. 밑의 놈들 잘못으로 돌리고 다른 사업장을 먹으면 되니까.’

사부인 사마련주에 의해 무림맹 코앞인 섬서성에 사석(捨石)으로 놓였던 후위진이다.

지원도 얼마 못 받았기에 화산과 종남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정광이 조언했고 후위진은 그 말을 따랐다.

피를 안 흘리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기반을 다진 것이다.

‘사업장과 관련된 수하 몇 놈 내놓는 것 정도야.’

본래 후위진이 하고자 하는 건, 섬서성을 먹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여전히 섬서성 최고 권력자들에게 빚을 지워놓은 상태.

이런 식이라면 끝도 없이 시간을 끌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 곤란하지. 사마련 본거지로 보내서 할 일을 하게 해야 하는데.’

전에 말했던 대로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면 의욕이 솟을 터.

정광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잠깐. 이미 떨어뜨렸는데 현인이 됐잖아.’

어쨌든 섬서성에서 쫓아내는 거다.

“안찰사님.”

“…….”

“안찰사님!”

“음? 아! 그, 그래. 왜 그러는가?”

“지부장님이 본인은 죄가 없다 하셨잖아요.”

“그렇네만.”

“죄 있어요.”

“……무어라?”

안찰사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오직 후위진만이 담담했다.

“내가 죄를 지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

“네.”

“한번 말해보아라. 나도 궁금하군.”

정광은 시선을 돌려 서안사분의 아비들을 바라봤다.

“전에 아드님들이 살짝 다치셨죠?”

살짝이라니.

의원들이 일이 년은 침상에 누워서 지내야 한다고 했는데.

아니, 그보다 왜?

“그때 화산과 종남의 제자가 때렸다고 지부장님 수하들이 증언했는데.”

“……?”

“사실 제가 때렸어요.”

“……!”

“지부장님이 수하들에게 위증을 하게 한 거죠. 이름하여 위증(僞證) 교사죄(敎唆罪).”

모두가 경악했다.

서안사분의 아비들은 더더욱 그랬다.

‘후위진을 잡을 방법이 있다더니 이거였냐!’

‘말도 안 돼!’

‘이 말은 또 어떻게 믿느냔 말이다!’

화산과 종남은 서안사분의 아비들과 달리 정광의 말을 바로 믿었다.

‘그래, 저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괜한 모함을 받아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내 저놈의 자식을 당장!’

자엽이 먼저 고함질렀다.

“진옥룡! 네가 한 짓을 왜 우리에게 뒤집어씌웠느냐!”

“네? 제가 언제요? 점소이가 호, 혹시 화산파? 종남파? 이렇게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요.”

이미 서안에서는 유명한 얘기였기에 자엽은 더 이상 따질 수 없었다.

대신 구성이 나섰다.

“자네 때문에 우리가 오해를 받았네!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왜 나서지 않았는가?”

“몰랐는데요.”

“……무어라?”

“서안사수란 사람들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제가 잠시 친분을 쌓았던 분들은 끝의 글자가 달랐거든요.”

서안사분을 말함이었다.

“최근에야 두 별호가 같은 분들을 이르는 것임을 알게 됐지요.”

“……이…… 이……! 말도 안 되는 궤변을!”

그 순간, 정광은 구성과 자엽에게 전음을 보냈다.

-종남에서는 여색으로 도를 얻나 봐요. 진인께서 가까이하시는 분들이 앵화, 춘심, 화영, 셀 수도 없더군요. 곧 우화등선하시려나?

-……그, 그걸 어떻게!

-화산에서는 상재도 수련하나요? 그 유명한 만화루(萬化樓)에 지분이 꽤 있으시다던데?

-……허억!

구성과 자엽이 저지른 부정과 비리 아닌가!

두 사람은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던 현인 후위진이 물었다.

“진옥룡 네가 그들을 때렸고, 내가 그 사실을 위증했다는 말이냐?”

“잘 아시면서.”

“증거는?”

정광이 서안사분의 아비들에게 부탁했다.

“아드님들을 불러주시겠어요?”

아비들은 탄식했다.

무조건 대기시켜 달라더니 이런 이유였을 줄이야.

정광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

그들은 사람을 시켜 아들들을 데려오게 했다.

잠시 뒤, 파리한 안색의 서안사분이 들것에 실려 나타났다.

그들은 난데없는 일에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아, 아버지?”

“대체 여기는 왜……?”

아비들은 아들들의 의혹을 풀어주지 않고 먼 산만 쳐다봤다.

하지만 정광의 말에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들. 아드님들께 질문 좀 할게요.”

“……그, 그러게나.”

도지휘사가 작게 말하자 정광은 서안사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안일미(西安一味)에서 살짝 다치셨을 때요. 여러분에게 교훈을 내린 협객…… 그냥 그 사람이라 하죠. 그 사람, 방립을 쓰고 있어서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죠?”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서안사분은 재깍 대답했다.

평소 오만하기 그지없던 아비들이 정광에게 한 수 접어주는 걸 봐서였다.

“그, 그렇습니다.”

“저분은 본 적 있나요?”

정광이 후위진을 가리켰다.

서안사분은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른 탁자에 있던 분이군요.”

“워낙 잘생기셔서 기억이 납니다.”

정광은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요?”

“……저분보다 훨씬 잘생기셨는데 기억이…….”

“그거야 당연하죠. 방립을 쓰고 있었으니까.”

“……네?”

“목소리 기억 안 나세요? 아. 아.”

정광은 목을 가다듬은 뒤에 외쳤다.

“여기요! 서봉주(西鳳酒) 한 병 더요!”

“……!”

서안사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 목소리는!’

‘서, 설마!’

이렇게 영롱한 목소리는 절대 흔치 않다.

게다가 서봉주는 일이 터졌었던 서안일미의 대표적인 술.

그리고 그때 그들을 팼던 도사가 외쳤던 말이기도 했다.

‘아, 아닐 거야!’

‘그 악귀가 다시 왔을 리 없어!’

부정은 짧았다.

맞았을 때의 아픔과 침상에서 지내온 지루한 시간이 그들의 분노를 끌어냈다.

“네가 감히 우리를!”

“천벌을 받을 것이다!”

“아버님! 이놈을 벌해주십시오!”

네 청년은 들것에 누운 채 길길이 날뛰었다.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힘이 넘치시네. 그때 콩을 많이 먹여 드려서 그런가.”

“……!”

“또 먹여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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