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57화 (157/569)

157화

현인(賢人)

정광이 먼저 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하자 서안사분의 아비들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침묵이 시작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장주의 체면을 생각해서 오긴 왔다만 저런 자와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제법 명성이 높다 들었으나 그래 봐야 무림인 아닌가?’

높은 관직(官職)에 있는 세 사람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들에게 무림인이란 무공이 강한 무뢰배일 뿐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데다 자존심은 또 얼마나 강한지. 걸핏하면 칼부터 휘두르고 보는 망종인 것이다.

세 사람이 침묵을 지키자 남은 한 사람이 나섰다.

살집이 투실투실한 상인이었다.

“그래, 강호를 떨어 울리는 진옥룡께서 갑자기 무슨 일이시오? 세이공청(洗耳恭聽) 할 테니 말씀해 주시오.”

정중하면서도 살짝 비꼬는 말투.

그의 기분 역시 별로란 의미였다.

정광은 육가상단의 단주 육대만을 바라보며 내심 웃었다.

‘관직에 오른 친인척들이 많다고 했지. 게다가 관부와 긴밀히 엮인 사업만 하는 놈이라 그런지 남다른 면이 있네.’

대부분의 상인은 무림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힘들게 쌓아온 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광 앞에서 나대는 육대만은 달랐다.

그는 관을 이용해 자신과 사업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래 봤자 대륙전장만큼의 정보력은 없구나.’

꼴을 보아하니 네 명 모두 정광과 황태손의 친분을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이렇게 뻣뻣할 터.

어쨌든 질문에 대해 대답부터 해야 했다.

“대인들을 뵙고자 한 건…….”

“……?”

“섬서성에 평화를 되찾아올 방법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예요.”

“……!”

네 사람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사(正邪) 간의 분쟁을 멈출 방도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수로?’

‘이자는 진옥룡 아닌가?’

그들도 귀가 있었다.

소문대로라면 정광은 분쟁을 멈추는 게 아니라 일으키는 자였다.

“……흥미롭군. 아주 흥미로워.”

육대만이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으나 정광의 표정은 진지했다.

“흥미로운 정도가 아니라 급하실 텐데요. 여러모로 곤란하시던 참 아닌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오?”

“사마련과 화산, 종남이 날을 세워서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있잖아요.”

육대만이 겨우 그거냐는 듯 웃었다.

“허허허. 난 또 뭐라고. 그렇기야 하지만 다른 성들보단 낫소. 칼을 들고 싸우는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요?”

“그래서 더 문제죠. 아주 오래 갈 테니까.”

“……무슨 의미인지?”

“정파와 사파. 즉 무림맹과 사마련은 중원 전역에서 반목하고 있죠. 최근에는 피를 뿌려가며 싸우고 있고요.”

정광이 붙인 불씨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싸움은 점점 치열해질 것이고 오래지 않아 결판이 날 거예요. 윗분으로선 그나마 빨리 끝나는 게 낫겠죠.”

“……윗분이라 함은?”

“황제 폐하요.”

정광의 말대로였다.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였으나 무림까지 통치할 수는 없는 일.

안 그래도 싫어하던 무림인들 때문에 자신의 백성들이 고통받는다.

황제의 위엄이 손상되는 것이다.

그 꼴을 무슨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황군(皇軍)을 일으켜 쓸어버리고 싶으시겠죠. 하지만 관과 무림의 관계상 그러긴 또 곤란하실 테고요.”

무엇보다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차라리 그럴 바엔 무림인끼리 죽이고 죽여서 빨리 끝내라.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양측의 힘도 약해질 것이니 마냥 나쁜 일은 아니겠네요.”

“…….”

“그런데 섬서성은 그게 안 될 거란 말이죠. 시간이 흘러 다른 성들은 다 정리가 됐는데 섬서성만 아직도 서로 으르렁대고 있다? 황상께선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실 것 같은데.”

“…….”

네 사람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하지만 정광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왜 섬서성만 그런지 궁금해하실 것도 같고.”

“……!”

네 사람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정광은 그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마련이 사파답지 않게 적법한 방법으로 화산과 종남의 사업들을 뺏었다고 들었어요.”

“……그렇소. 찜찜하지만 책잡을 순 없는 일 아니오?”

“대인들께서 사마련을 밀어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던데…….”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금껏 듣고만 있던 고리눈의 사내가 외쳤다.

섬서성의 군권을 쥔 도지휘사(都指揮使)였다.

자식인 서안사분이 다친 걸 핑계로 화산과 종남에게 불이익을 주고 사마련을 밀어준 건 사실이었지만, 그걸 인정할 순 없는 일이었다.

“자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는가?”

“들은 걸 말씀드린 건데요.”

“그래서 하는 말일세. 헛된 소문을 입에 담지 말게나!”

“그냥 소문이라기엔 상당히 구체적이던데.”

“무어라?”

“말 나온 김에 몇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정광은 머리에 담긴 내용을 읊었다.

백승무가 풀이해 준 사마련 섬서 지부의 비자금 사용 기록 대장이었다.

듣고 있던 네 사람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걸 어떻게!’

‘대체 어떤 놈이 흘린 거야!’

정광은 그들의 얼굴을 살핀 뒤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 그런 내용을 기록한 서책이 있다더라고요. 진짜 말도 안 되죠?”

“……무, 물론이지. 대체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나온 건가?”

도지휘사가 침을 꿀꺽 삼킨 뒤 묻자 정광이 대답했다.

“사마련 무인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걸 개방 사람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허어…….”

“뭐 말도 안 되는 얘기니까 믿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 그렇지.”

“황제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물론일세.”

“그런데…….”

“……?”

“황제 폐하를 보필하는 관리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

“괜히 분란을 일으켜서 대인들을 곤란하게 만들지도. 아. 육 대인께서도 피해를 입으시겠네요. 관과의 거래가 많으시니까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관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 법.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위에 있는 자를 끌어내려야 한다.

관에는 기꺼이 그런 일을 할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상계 또한 마찬가지.

네 사람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오직 정광만이 담담했다.

“쓸데없는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사마련을 몰아내면 좋을 텐데.”

“…….”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고 그 증거가 있으면 완벽한데.”

“…….”

“그렇게만 되면 그들이 또 헛소리를 해대도 누가 믿겠어요? 나쁜 놈들이 또 발광하는구나 하지. 아예 그 서책이라는 것도 찾아서 불태워 버리면 더 깔끔하겠죠.”

정광의 말이 이어질수록 네 사람의 표정이 또 변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무척이나 똑똑했기에 높은 관직에 오르고 큰 사업을 하는 자들이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안찰사(按察司)가 나섰다.

“그럴 만한 방법이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군.”

정광은 말없이 뒤에 놓여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섬서 지부에서 가져온 이중장부들과 서류들이었다.

“한번 보시겠어요?”

잠시 후.

네 사람의 눈이 커졌다.

사마련이 섬서성에서 행한 불법적인 일들에 대한 증거 아닌가.

“허어. 이런 짓들을 하고 있었다니…….”

“죄를 물어 사업장들을 압수하고 관련자들을 잡아들일 수 있겠소이다.”

“섬서성에서 사마련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오.”

정광이 덧붙였다.

“하는 김에 머리인 옥기린까지 잡아야죠.”

안찰사가 고개를 저었다.

“보나 마나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할 걸세. 아랫것들이 제멋대로 벌인 일이라 하겠지. 잡아들일 방도가 없어.”

“근데 자네가 말한 대로 사업장들을 압수해 봐도, 다시 합법적인 선에서 분쟁이 일어날 것 같네만.”

네 사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기대를 했다가 실망해서였다.

그들에겐 참 다행인 게, 정광은 방법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

경악한 네 사람이 질문을 쏟아내려고 했으나 정광이 더 빨랐다.

“사마련, 화산, 종남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어요?”

“……그 자리에서 잡겠다는 건가? 왜 굳이? 어떻게?”

“그냥 믿고 해주세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시잖아요.”

“…….”

내내 침묵을 지키던 포정사(布正使)가 물었다.

“그 헛소문이 기록돼 있다는 책자 말일세. 그것도 그날까지 회수하려는 겐가?”

“네.”

포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지만 퍼져봐야 좋을 게 없겠지. 다른 데 쓰지 않고 우리에게 줄 거라 믿겠네.”

“그날 조건만 맞으면요.”

“……무어라?”

“아마 별문제 없을 거예요. 저를 믿으세요. 산서성 얘기 들으셨죠? 분쟁이 정리된 거.”

“……자네가 그랬지.”

“이번엔 섬서성 차례예요. 그것도 황제 폐하께서 흡족해하실 만큼 평화로운 방법으로. 대인들께도 도움이 되겠죠.”

자꾸 토 달지 말고 실적을 올릴 기회니 닥치고 따라라. 이런 의미였다.

그냥 받아넘기기엔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

도지휘사가 정광을 고리눈으로 쏘아보며 경고했다.

“아까부터 자꾸 황상을 입에 올리는데 적당히 하게나. 함부로 불릴 분이 아니야.”

“아. 그래요? 역시 황태손 저하와는 다르시구나.”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저하께서는 참 편하게 대해주셨었거든요.”

“……자네가 저하와 친분이 있다고?”

“네.”

“……얼마나?”

“매일같이 저를 기다리신다고 하던데요.”

정광은 어처구니없어하는 그들에게 조언했다.

“대륙전장 장주님께 물어보시면 알려주실 거예요.”

네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광이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가.’

‘일단 알겠다 하고 장주를 만나 물어봐야겠군.’

그들이 승낙하자 정광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서안사…… 수 그분들은 잘 계세요?”

안 그래도 어두웠던 네 사람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비록 망나니라 하나 아들이었다.

벌써 몇 개월째 침상에 누워 있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실력 있다는 의원들을 불러 진료케 해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아!”

순간 도지휘사가 감탄성을 터뜨렸다.

정광에 대한 소문이 떠올라서였다.

“자네의 의술이 무척 신묘하다 들었네만, 혹 상세를 봐줄 수 있겠는가?”

“일이 잘 끝나면 못 할 것도 없죠.”

“고, 고맙네. 정말 고마워.”

“그런데 다 나으면 또 전처럼 그러고 다니려나.”

“…….”

밝아지던 네 사람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게 걱정이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닐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네 사람의 눈이 빛났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말씀드릴까요?”

* * *

섬서성 최고 권력자인 정이품(正二品) 도지휘사, 종이품(從二品) 포정사, 정삼품(正三品) 안찰사가 민초들을 위해 크게 떨치고 일어섰다.

섬서성의 평화를 위한 논의를 하자며 사마련, 화산, 종남을 초청한 것이다.

이름하여 섬서평화논의회(陝西平和論議會).

소문은 달리는 말보다 빨리 섬서성 전역에 퍼졌다.

민초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도적 중의 도적인 관원들이 웬일로 옳은 일을 하네.”

“그러게 말일세. 보나 마나 숨은 뭔가가 또 있겠지만 빨리 조용해졌으면 좋겠군.”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정파 사파 모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광과 네 명의 권력자들이 모인 날로부터 여드레 후, 중립지역인 대륙전장에서 논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사마련, 화산, 종남의 주요 참석자는 후위진, 자엽, 구성이었다.

섬서가 본거지인 화산과 종남에서 장문인이 아니라 장로가 참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마련에서는 섬서 지부장인 옥기린이 나올 텐데, 본문에서 어찌 장문인이 나서시겠소?’

이른바 격을 맞추기 위함.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관(官)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동안 정광은 대륙전장에서 편하게 먹고 마셨다.

‘후위진 그 녀석. 장부와 서류가 없어진 걸 알아챘을 텐데 조용하네. 당 소저 독 때문에 경황이 없나?’

논의회에 참석하겠다고 답신이 왔으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뭐 보면 알겠지.’

정광은 아예 신경을 끊었다.

후위진이 아무리 열 받았다 해도 대륙전장의 담을 뛰어넘진 못한다.

이곳은 천하의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들의 현물이 있는 곳. 공격하는 순간 무림공적(武林共敵)이 아니라 천하공적(天下共敵)으로 찍히게 되는 것이다.

정광이 하릴없이 놀자 정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사제.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걸까?”

“사형도 편히 쉬세요. 여기 일이 끝나면 무척 바쁘고 위험해질 거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사마련주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서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논의회 당일.

정광은 대륙전장의 대문으로 들어서는 후위진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기억 속에 있는 자아도취 상태의 바보가 아니었다.

후위진은 천하의 그 어떤 이보다 깊은 눈으로 정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현인(賢人)의 모습이라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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