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56화 (156/569)

156화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정광은 사마련 섬서 지부를 향해 달렸다.

십리추종향(十里追從香)은 십리 안에서만 맡을 수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전생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신법을 펼쳐서 그런 걸까.

쓸데없는 기억들이 몰려왔다.

전부 아비와 관계된 것들이었다.

‘이거야 원. 차라리 그놈이 낫지.’

정광은 아비의 얼굴을 밀어내기 위해 다른 이를 떠올렸다.

차라리 나은 놈, 후위진이었다.

‘하아. 그나마 좀 낫지만 짜증 나긴 매한가지네.’

못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자아도취에 빠진 것 하며.

약한 주제에 자신감만큼은 천하제일이다.

아들인 정광보다 아비를 더 닮은 후위진이었다.

‘이거 혹시 이놈도 백오십 살까지 사는 거 아니야?’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재난이 따로 없지, 정광 자신과 천하를 위해서 녀석의 수명을 적당히 줄여 줘야 하리라.

‘그냥 지금 죽여 버리는 게 나으려나.’

성미대로라면 이게 맞건만.

지금껏 그려온 그림 속에서 후위진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오늘은 적당히 손봐주자.’

물론 적당히도 급이 있다.

감히 잔머리를 썼겠다.

‘한 방 먹였다며 좋아하고 있겠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정광은 한 방이 아니라 수백 방은 먹여줄 생각이었다.

‘혹시 지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빼돌렸으면…….’

다 필요 없고, 그냥 목을 날려 버릴까 했는데.

후위진은 운이 좋았다.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후딱 해치우자.’

진기를 끌어올려 발을 더 빠르게 놀렸다.

얼마 안 가 며칠 전에 들렸던 큰 장원이 나타났다.

사마련 섬서 지부였다.

어찌나 화려한지 야밤인데도 눈살이 찌푸려질 지경.

전처럼 과장된 환대는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읏차.’

정광은 칠야마영(漆夜魔影)을 펼쳐 어둠과 동화됐다.

담벼락에 올라서자 곳곳에 은신해 있는 무인들의 기척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이놈들은 됐고.’

십리추종향의 냄새는 작은 전각에서 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후위진의 처소가 있었다.

정광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뭐야, 이건.’

사람마다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는 다르다.

의심이 많은 자는 가까이.

스스로 똑똑하다 자부하는 이는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이런 어중간한 위치에 놓는 건 특이한 경우였다.

‘의심도 많은 데다 자기가 똑똑한 줄 알아서 이러나 보네.’

일단 물건부터 확인하고 패줘야 할 터.

정광은 냄새가 풍기는 작은 전각으로 향하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밤이라 다 발동시켰구나.’

당예지가 보고 놀랐었던 후천팔괘(後天八卦)와 선천팔괘(先天八卦)의 방위를 조합한 진식(陣式)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정광에겐 별다른 장애가 되지 못했다.

시간 감각과 공간 지각 능력에 혼란을 줘봐야 뭐하는가.

어차피 팔팔에 육십사, 육십사괘(六十四卦) 안인데.

‘무망(无妄), 대축(大畜), 이(頤), 대과(大過)…… 어쭈. 여기서 역으로 꼬았네. 여(旅), 점(漸), 귀매(歸妹), 풍(豊)…….’

정광은 진(陣)을 금방 돌파했다.

그리고 전각 안으로 스며든 뒤 내부를 둘러봤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바늘을 숨기려면 바늘 더미에 숨긴다, 이건가.’

전각은 서고(書庫)였다.

갖가지 서책들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정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니네. 이것도 눈속임이잖아.’

아직도 향이 희미했다.

저 서책들 사이에 있는 건 아니란 얘기였다.

“이거 혹시…… 킁킁.”

십리추종후각신공(十里追從嗅覺神功)을 더 끌어 올리며 냄새를 맡았다.

얼마 안 가 정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향은 바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 땅을 파고 묻었어?’

후위진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그런 짓을 할 리가.

넣기도 귀찮고 꺼내기도 귀찮지 않은가.

‘비밀 공간이 있는 거군.’

바닥을 샅샅이 살펴보자 실처럼 가는 틈이 있는 공간이 있었다.

‘어디 보자. 기관이…….’

틈 주변을 두드리니 소리가 났다.

두드리는 범위를 넓히자 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동시에 심법을 운공했다.

도박장에서 상하점(上下點)을 할 때 써먹었던 육청술(六聽術)이었다.

통, 퉁, 퉁, 탕.

바닥을 두드리는 범위를 넓혀가며 소리를 구분했다.

그중 일관된 소리를 내는 방향으로 쭉 따라갔다.

기관이 연결된 방향이다.

그 끝에는 서책으로 가득 메워진 책장이 있었다.

‘이거군.’

책장을 밀자 뒤에 숨겨져 있던 기관 장치가 드러났다.

그것을 잡고 당기자 아까의 틈이 있던 바닥이 갈라졌다.

걸음을 옮겨 그곳으로 갔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돈도 많네. 원래 이런 기관이 있었던 건 아닐 텐데.’

후위진이 헤프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안 그래도 밤이라 어두웠는데 지하는 더했다.

하지만 내공을 일으켜 안력을 돋우자 그런대로 볼만했다.

정광은 내부를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물건들 넘어, 십리추혼향의 냄새가 나는 장부와 서류들이 탁자 위에 쌓여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일이 하나씩 집어 들어 냄새를 확인했다.

‘맞네. 일단 이건 다 가져가고.’

마침 근처에 있던 끈으로 묶어서 등에 짊어졌다.

그냥 가자니 벽면에 있는 문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건 후위진의 처소와 연결돼 있으려나.’

그야 확인해 보면 될 일.

바닥을 여는 기관을 찾았을 때처럼, 문 주변의 벽을 두드려서 기관 장치를 찾아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작은 방이 나타났다.

정면의 벽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흐음.’

후위진의 처소가 괜히 옆에 있는 게 아닐 터.

저 문을 열면 그의 처소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리라.

‘그렇다면 여긴 녀석의 개인 창고란 말인데.’

아니나 다를까.

탁자 위의 상자들을 뒤지던 정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짭짤하네.’

보석에다가 전표까지.

전표들은 신용 높은 대륙전장에서 발행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정광은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품속에 쑤셔 넣었다.

‘이 서책들은 또 뭐지?’

책장 가득한 서책 중 아무거나 뽑아서 펼쳤다.

내용을 훑던 정광의 눈이 못 볼 것을 본 듯 불쾌한 빛으로 물들었다.

‘춘화(春畵)잖아.’

한심한 녀석 같으니.

꼴에 사내라고 이런 취미가 있었나?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이런 것도 춘화라고.’

생생함도 예술성도 없었다.

소림의 신승(神僧)이자 천하제일 화공(畫工)이라 할 수 있는 현오.

그의 역작을 가지고 있는 정광에게 이런 수준의 춘화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품속에서 화섭자(火攝子)를 꺼내 불을 밝혔다.

그림이 더 제대로 보였다.

‘……쓰레기 맞네.’

몇 개 더 펼쳐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만 보고 후위진을 혼내주러 갈까 하는데 마지막 서책은 아니었다.

‘호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확인 안 했으면 후회할 뻔했다.

백승무에게 보여주면 신이 나서 떠들어댈 게 분명했다.

‘좋아. 그럼 가볼까.’

챙길 건 다 챙긴 상태.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으로 기관 장치를 찾아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정광은 지체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 * *

후위진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수많은 이들이 학을 떼는 정광에게 한 방 먹여서였다.

“지금쯤이면 장부와 서류가 가짜라는 걸 발견했으려나.”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자신이 한 수 위라는 걸 증명한 것이다.

본 적이 없어 상상이 가진 않지만, 정광의 고고한 얼굴도 조금쯤은 일그러졌을 게 분명했다.

“이런 날 술이 빠지면 안 되지.”

후위진은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빈 병이 늘어났다.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하아아…… 대작할 만한 상대도 없다니…….”

외롭다 못해 아팠다.

대화가 통할 만큼 똑똑한 이가 없는 슬픔.

천하의 그 누가 이 괴로움을 알까?

‘알 만한 그 녀석은 내가 물을 먹였으니까 됐고. 크크크.’

술을 계속 마시자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어어. 취한다.”

고수라 자부하는 그가 정말로 취했을 리가.

기분에 취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의는 그가 고수라고 차별하지 않았다.

“으으. 갑자기 급해지네.”

후위진은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벽면에 있는 책장이 열리며 정광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안쓰러운 기색으로 가득했다.

‘자아도취 병이 있는 것만 해도 불쌍한데 외톨이였구나.’

처량한 한숨과 한탄을 들으니 팰 의욕도 사라졌다.

저런 놈을 패서 뭐 하겠는가.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순 없는 일.

‘좋아. 협행 한번 하자.’

후위진의 과도한 자신감을 꺾어 자아도취 병을 고쳐주는 거다.

그러면 앞으로 성장하는 데도 도움이 될 터.

그려놨던 그림과도 들어맞는 일이었다.

‘마침 딱 좋은 게 있지.’

정광은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신중하게 마개를 열자 투명한 액체가 드러났다.

무미무취(無味無臭)를 넘어 무색의 특성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

당예지가 강호의 음적(淫賊)들을 단죄하기 위해 만든 독이었다.

‘애가 은근히 무섭다니까.’

효능을 확인해 달라며 두 눈을 빛내던 모습이라니.

어지간한 독은 웃으며 마실 수 있지만.

아무리 그런 정광이라 해도 이건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성의가 있겠다, 호기심도 일어 맛만 봤었는데…….

어찌나 악랄한 독인지.

독이 있다는 확신 없이는 잘 찾아지지도 않는 은밀함을 갖추고, 특정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징조조차 나타나지 않아 당하고도 모를 판이었다.

쉽게 말해 정광이 맛만 보고 멈출 정도로 께름칙한 독.

사내라면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독!

물론 후위진은 먹어도 상관없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정광은 술이 들어 있는 술병마다 독액을 조금씩 넣었다.

‘아니야. 부족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넣었다.

정광은 빈 병을 품속에 넣은 뒤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깨달음을 얻기를.’

할 일을 끝냈으면 떠나야 하는 법.

정광은 들어온 비밀 문을 통해 서고로 나왔다.

‘온 김에 당 소저가 못 한 일도 하고 갈까.’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게 했으니 이 정도는 돌려줘야 할 터.

정광은 장원에 있는 우물로 향했다.

번(番)을 서는 무인들이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직 효능을 모르는데. 뭐 나쁘진 않겠지.’

병을 하나 꺼내 우물 속에 쏟았다.

남궁력에게서 뽑아냈던 독액이었다.

‘잠깐. 이거, 강물에 오줌 누는 격인데.’

여기에 사람이 몇인데 이걸로 무슨 효과를 본다고.

정광은 가지고 있던 독들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우물물에 희석될 테니 사람이 죽진 않을 터. 딱 적당한 효과를 낼 것이다.

‘무량수불. 다 같이 깨닫기를…….’

할 일을 마친 정광은 장원을 떠났다.

그리고 단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반점으로 달렸다.

그들에게 떠들썩한 환대를 받은 뒤 백승무를 불렀다.

“사제. 이것 좀 봐봐.”

“이게 무엇입니까?”

정광은 그에게 춘화도 사이에 있던 서책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던 백승무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어때?”

“대단하군요!”

정광은 잔뜩 흥분한 백승무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계의 용어가 가득해서 긴가민가했는데 맞나 보네.”

“네. 사형. 짐작하셨겠지만 이건 사마련 섬서 지부의 비자금 사용 기록 대장입니다. 주로 관에 뿌린 내용이 적혀 있는데…….”

백승무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정광은 그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대륙전장 장주 금의형의 주선하에 섬서성을 떨어 울리는 권력자들을 만나게 됐다.

포정사(布正使).

안찰사(按察司).

도지휘사(都指揮使).

마지막으로 섬서성에서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부자라는 노인이었다.

‘뻣뻣하기는.’

하나같이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뭐 상관없지.’

나긋나긋하게 만들어주면 될 일이다.

정광은 두 손을 모으며 부드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곤륜의 정광입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