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반푼이 심법
서안사분(西安四糞)은 한마디로 개망나니들이었다.
그런데도 서안사수(西安四秀)라는 가당찮은 별호로 불리며 서안을 활보했던 건 아비들 덕분이었다.
섬서성의 재정을 주무르는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 사법을 담당하는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 군(軍)을 지휘하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에다 서안에서 내로라하는 대부호까지. 섬서성 최고의 권력자들이 아비였으니 허구한 날 패악을 부리면서도 무사했었을 수밖에.
그런데 그런 거물들을 만나게 해달라?
그것도 한꺼번에?
금의형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나?”
“역시 못 한다고는 안 하시네요.”
“자네 대답에 따라 안 할 수는 있네.”
정광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섬서성의 평화를 되찾아올 방법에 대해 논의하려고요.”
“……자네가 그들을 만났다간 있던 평화도 무너질 것 같네만.”
“무량수불. 저에 대한 헛소문을 들으셨나 봐요.”
“……헛소문?”
“음. 손이 아니라 말로 논의할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흘흘.”
금의형은 헛웃음을 흘리며 정광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황당하다 못해 경악할 만한 얘기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죄 없는 이에게 무도한 짓을 한 적은 없지. 관원들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아니, 관원들과는 오히려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것도 굵직굵직한 이들과.
‘그들을 예로 들면 되겠군.’
금의형은 두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청해성의 연 대인은 물론 감숙성의 방 대인과도 연을 맺고 있다 들었네.”
“조금요.”
“그들을 대할 때처럼 언행에 주의하겠다고 약조하게나. 아니, 황태손 저하를 대할 때처럼 하는 것으로 하지.”
“할 때는 하신다더니 무척 조심스러우시네요.”
“주선자로서 당연한 일 아닌가.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야. 자네가 사고를 치면 나도 무사하진 못할 걸세. 그러니 도사답게 행동해 주게나.”
“도사다운 게 뭔데요? 화산이나 종남 분들처럼 하면 돼요?”
금의형은 헛웃음을 흘렸다.
“흘흘. 곤란한 질문이군.”
화산이나 종남이나…….
솔직히 비리투성이였다.
돈과 관계된 게 많다 보니 정광이 유정풍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것보다 금의형이 아는 게 더 많았다.
“어쨌든 황태손 저하를 대하듯 주의하겠다고 약조하겠는가?”
정광은 순순히 승낙했다.
“네. 그럴게요.”
사실 이것저것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그게 그건데 뭐가 대수랴.
금의형의 견문이 아무리 넓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광이 황태손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정광에겐 황태손이나 반점의 점소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런 조건을 걸지 않았으리라.
“좋아. 약조는 항상 지킨다고 들었네. 내 힘써보지.”
이번엔 정광이 물었다.
말이 나온 김에 궁금해서였다.
“청해성주님이랑 감숙성주님이요. 인사이동은 어떻게 됐나요?”
“흐음. 연 대인은 청해성에 남게 될 분위기고. 방 대인은 중앙으로 돌아올 것 같네. 모두 자네 덕이지.”
“네?”
“자네가 모은 무림의용군 있지 않나. 별동대로 편성된 의용단. 그들이 상당한 활약을 하고 있다네.”
“…….”
정광은 감숙성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을 황웅과 그 수하들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두들겨 패며 감숙성까지 끌고 간 보람이 있어서였다.
‘그건 그렇고. 아는 게 꽤 많네.’
눈앞의 노인은 천하제일전장의 장주다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남도 최대한 빨리 주선할 수 있을 터.
정광은 일 얘기로 돌아갔다.
“그 네 분요.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당장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안 했다.
섬서성의 거물들이 그렇게 한가할 리도 없고 정광 역시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저 열흘 단위로 넘어가는 것은 싫어서 물은 것이었는데…….
금의형은 정광의 생각보다 더 능력 있는 자였다.
“언제 보길 원하나? 자네 뜻대로 맞춰보지.”
* * *
이틀 뒤를 얘기하자 금의형은 알겠다고 답했다.
그만한 이가 허언을 할 리는 없을 터.
정광은 그사이에 할 일을 해야 했다.
‘굵직굵직한 곳은 다 돌았고. 나머지도 훑어볼까.’
무혈단을 이끌고 서안을 누볐다.
단원들은 여전히 뻣뻣했지만 일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음 날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점포들을 돌고 대륙전장 근처의 큰 반점에 도착했다.
정광은 아예 별채 하나를 빌렸다.
“시간도 많겠다. 배불리 먹죠.”
거창한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단원들은 오늘따라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창밖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뒤늦게 온 자오가 천 꾸러미를 풀어 단원들에게 나눠줬다.
정광이 단주로서 명했다.
“쓰세요.”
단원들은 어색한 얼굴로 꾸물댔다.
진작 듣고 각오했던 일이지만 막상 하려니 손이 안 가서였다.
“그냥 가시려고요?”
“…….”
“뭐 그것도 좋죠. 뒷감당하실 수만 있으면요.”
단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여나 일이 잘못되면 사문과 가문에 누를 끼치게 된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냥 하면 되는 거란 말이다!
“하아압!”
팽강휘가 기합을 지르며 복면을 썼다.
그에 질세라 다른 단원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이렇게 무혈단은 양상군자(梁上君子)로 새롭게 태어났다.
자오야 뭐 원래 양상군자에 가까웠고.
“잘하셨어요.”
지켜보던 정광이 손뼉을 치면서 칭찬했다.
“기분이 어때요?”
“…….”
“그리 나쁘진 않죠?”
“…….”
이럴 수가.
정광의 말대로였다.
어색함이 조금씩 사라지며 묘한 기분이 피어오르는 것 아닌가.
대체 왜?
정광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 뭘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되거든요.”
뭐 이런!
사마외도(邪魔外道)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다니!
불쾌한 마음에 복면을 벗어버리려는 순간, 정광의 목소리가 그들의 손을 잡았다.
“근데 그건 약한 자들이나 하는 생각이에요.”
“……?”
“그럴수록 더 냉정해져야죠. 기분에 취한다고 강해지나요? 자신을 잃지 않으면 실수도 없습니다. 이해하셨죠?”
얼굴 가렸다고 마구 날뛰지 말고 똑바로 해라, 이런 말이었건만.
단원들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그래. 어차피 나는 나다.’
‘아미타불. 스스로를 마(魔)에 빠지게 하여 극복하는 것이로구나.’
‘나는 사마외도와는 달라. 할 수 있어.’
단원들은 옷까지 갈아입은 뒤 반점을 떠났다.
남은 건 정광과 장이 단 두 명이었다.
‘내가 아직 부족해서…….’
장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자 정광이 술을 권했다.
“드시죠.”
“……죄송합니다, 단주. 저는 짐만 되고 있군요.”
“짐이라뇨. 장 소협은 요리를 잘하시잖아요.”
“……무공에 비하면 하찮은 재주일 뿐입니다.”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네?”
“지금이야 서안 같은 성도에 있으니까 모르죠. 장 소협의 가치는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마음 편히 가지세요.”
“…….”
“그렇다고 노시라는 얘긴 아닌 거 알죠? 무공도 열심히 닦고 요리 재료도 확실히 준비하고 계셔야 합니다.”
“…….”
“어? 또 울어요?”
장이는 소매로 눈을 훔친 뒤 씩 웃었다.
“피를 흘리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하지만 웃음도 잠시.
그의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보다 다른 분들이 걱정입니다. 행여나 적에게 들켜 싸우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괜찮아요. 사마련에서 사업장에 나가 있는 자들은 무인보단 상인에 가까운 자들이니까요. 그리고…….”
정광이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무혈단은 약하지 않거든요.”
“아!”
“피는 무슨. 지루해서 소변이나 안 보고 오면 다행이죠.”
정광이 이렇게 호언장담하고 있는 그 순간.
사마련의 한 미곡상(米穀商)에 숨어 들어간 백승무는 깜짝 놀란 나머지 오줌을 찔끔할 뻔했다.
‘뭐야 이건!’
잘못 본 걸까?
눈을 비비고 서류와 장부를 다시 봤다.
그래도 똑같았다.
‘깨끗하잖아!’
뒤가 구린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건실한 미곡상의 표본 아닌가.
‘이거 혹시!’
백승무는 서류와 장부를 원래 자리에 넣은 뒤 미곡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아까의 반점으로 향했다.
비붕신법(飛鵬身法)을 펼치자 몸이 쭉쭉 나아갔다.
‘나야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이 있지만 다른 단원들은 아니야.’
아무 소용없는 것들을 들고 올 게 뻔했다.
‘사마련이 눈치채고 수작을 부린 거겠지. 사형께 빨리 알려야 해.’
떠나올 땐 안 그랬는데 돌아가는 길은 왜 그리 먼지.
죽어라 달린 백승무는 반점 별채 문을 박차듯 열고 들어갔다.
“사형! 큰일 났습니다!”
이미 도착한 단원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가져온 것들을 보고 있던 정광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다 가짜잖아.”
심각하게 지켜보던 단원들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유정풍이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간신히 물었다.
“정말인가?”
“네.”
“미치겠군. 어찌 이런 일이…….”
정광 역시 조금은 감탄했다.
‘제법 똑똑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눈곱만큼 더 똑똑하네.’
덕분에 기분이 나빠졌다.
번거롭게 직접 움직여야 할 판 아닌가.
“옥기린, 이놈이 진짜…….”
“이보게, 아우. 그의 머리가 비상하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귀찮지만 진짜를 찾아서 가져와야죠.”
“큰일이군.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나.”
“괜찮아요. 따라가면 되니까.”
“……응? 무슨 의미인가?”
마침 백승무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사형. 상가의 지식이 없으면 그 서류와 장부들을 판별하기 힘든데 어떻게 가짜라는 걸 아신 겁니까?”
“눈이 아니라 코로 알았거든.”
“……네?”
정광은 자오를 바라봤다.
“제대로 뿌렸었죠?”
“물론입니다, 진옥룡.”
자오가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정광은 그것을 건네받고 마개를 열었다.
‘첫날부터 자오를 제외하고 움직였으니, 자오를 아는 옥기린이라면 우리가 뭘 노리는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 쓰게 될 줄이야.
혹시 몰라 만들어두었고, 혹시 몰라 사용했던 하얀 가루에서 미세한 향이 올라왔다.
가루를 보고 향을 맡은 당 씨 남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정광의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저 가루는 그것임이 분명했다.
“천리추종향(千里追従香)!”
사람이나 사물에 묻히면 천리가 넘게 향이 퍼진다는 전설적인 가루!
독에 능하다는 건 알았지만 저런 전설적인 귀물까지 만들어낼 줄이야!
당 씨 남매는 경악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정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그런 게 정말 있어요?”
“…….”
“와. 신기하네. 중원은 넓구나.”
“…….”
한동안 침묵하던 당오군이 겨우 입을 열었다.
“나도 전설로만 들었네. 그건 대체 무엇인가?”
“십리추종향(十里追従香)이요.”
“……천리가 아니라 십리?”
“네. 왜요?”
왜요라니.
천리나 십리나 그게 그거지.
그 먼 거리까지 향이 퍼져?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것도 대단한 기물인 것 같네만.”
“뭘 또 그렇게까지야.”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데요.”
정광은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든 말든 병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았다.
보나 마나 사마련 섬서 지부 어딘가에 빼돌렸을 터.
꽤 넓은 공간이니 냄새를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흐으읍. 윽.”
미세하지만 퀴퀴한 향 때문에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 짜증 나.’
참아야지 별수 있나.
장부와 서류를 보며 운공했던 심법을 다시 끌어올렸다.
십리추종후각신공(十里追従嗅覺神功).
말이 신공이지 십리추종향만 십리 안에서 맡을 수 있는 반푼이 심법이었다.
소량만 사용하면 심법 없이는 냄새를 맡을 수 없기에 귀찮아하면서도 공들여 창안하긴 했었다.
‘그래도 만들어두면 다 쓸데가 있다니까.’
전생에 아비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가루와 심법.
덕분에 아비가 그를 찾을 때마다 미리 알고 도망칠 수 있었다.
귀찮은 일들을 떠맡지 않기 위해서였다.
‘쓸데없는 기억을…….’
정광은 냄새를 머릿속에 새긴 뒤 병마개를 닫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신법을 펼쳤다.
그의 짜증으로 물들어 있던 눈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옥기린, 넌 뒤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