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쓸 때는 쓰고 할 때는 한다
사파는 사파다.
겉으로 보기엔 완전히 합법적인 사업장도 갖은 부정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악명 높은 정광과 무혈단이 들이닥치면?
깜짝 놀라 뒤가 구린 장부와 서류부터 챙기려 할 수밖에.
그 모습을 은신한 자오가 지켜본다.
첩보와 암살을 위한 전문적인 수련을 받은 그에겐 무척이나 쉬운 일이리라.
그렇게 쉬우면…….
“계속하겠지. 그리고 때가 되면 한 번에 털 심산이야.”
사마련 섬서 지부의 한 화려한 전각.
옥기린 후위진이 중얼거리자 수하들은 어리둥절해했다.
“표정들 하고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후위진은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왜 모르지? 진옥룡 그놈이랑 무혈단인지 뭔지가 사업장들을 들쑤셨다며.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돈을 펑펑 쓰기만 하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오 그 쥐새끼는 없었다. 그게 뭘 의미할까?”
“…….”
수하들이 멀뚱거렸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후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나니까 알지. 오늘 그놈들이 지나간 사업장의 이중장부와 서류. 깨끗한 것들로 바꿔놓으라고 해.”
“……그러면 원본은……?”
“잘 보관하고 있다가 상황 봐서 동시에 옮긴다.”
“……그럼 다른 사업장의 것들도 미리 바꿔놓을까요?”
“그러면 보자마자 의심할 게 뻔하잖아. 그놈들이 지나간 뒤에 바꿔.”
수하들은 영문도 모른 채 복창했다.
“존명!”
더없이 힘찬 외침이었지만 후위진은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목청만 크면 뭐 해. 이 많은 수하들 중에 말이 통하는 녀석이 하나도 없구나.’
그나마 통하던 녀석은 적이 되어 나타났다.
후위진은 자신보다 아주 조오오금 잘생긴 정광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거라 했겠다? 한번 해봐라. 어서. 흐흐.’
세상이 진옥룡, 진옥룡 해대도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기껏 한다는 짓이 불법적인 일이나 캐는 것 아닌가.
‘하여간 정파 놈들이란…….’
정광이 정파치곤 막 나가는 면이 있었으나 그래 봐야 정파였다.
사파의 종주(宗主) 사마련.
그 정점에 오를 자신과는 상대도 안 되리라.
‘음. 무공만 빼고. 아니, 다른 것들 중에도 조금이나마 비등한 게 있는 듯도 한데…….’
이렇게 후위진은 객관적인 사내였다.
정광이야말로 자신에게 걸맞는 적수라고 생각할 만큼.
* * *
자오는 해가 뜨자마자 먼저 떠났다.
‘슬슬 가볼까.’
정광도 단원들을 이끌고 출발하려 하는데…….
벽에 부딪혔다.
단원들이 거부한 것이다.
“사제. 어제처럼 또 돈을 쓰러 가려는 것이냐? 너무 과하구나.”
“이보게 아우. 어제 것만 해도 분에 넘쳐. 나 같은 거지한테 옥(玉)이 주렁주렁 달린 장포가 가당키나 하냔 말일세.”
“아미타불. 소승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승복이라니. 생전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던 곤륜, 찢어질 것조차 없는 거지인 개방, 돈은 많지만 청빈한 소림의 후기지수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는 운 좋게 부잣집에서 태어난 팽강휘와 당오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렇게 쓸데없이 과한 옷을 지어봐야 누가 지금 입겠는가? 누이, 너도 말 좀 해다오. 이러다 또…….”
당오군은 당예지를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어제 지은 옷을 입고 있는 것 아닌가.
시선을 돌리니 옆에 있는 언의진도 마찬가지였다.
당예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떨떠름한 얼굴로 딴청을 부리고 있다는 것.
당오군은 직감했다.
‘……둘 다 옷이 아주 마음에 드나 보군.’
쓸데없이 과한 옷이라 말했던 게 후회됐다.
그는 누이의 옷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릴 만큼 훌륭한 오라비였고, 그녀들의 기분이 썩 좋지 않으리란 걸 짐작할 정도로 냉정하고 세심한 사내였다.
하지만 이 상황을 수습할 능력은 없었다.
‘……차라리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는 게 나아.’
원래 동조를 구하려고 말했던 것이니 다른 동조자를 찾으면 되리라.
하지만 남은 사람들이 그리 좋지 못했다.
‘……하필이면 백 소협과 장 소협이라니.’
정광의 절대적인 추종자들이다.
정광이 ‘나 사실 진천마였는데 환생한 거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해도 한동안은 고민해 볼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정광뿐.
그래, 어차피 해야 할 말이었다.
“아우. 자네가 아무 연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알겠지. 무슨 속셈인가? 우형(愚兄)을 깨우쳐 주게나.”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알려 드렸다간 일을 망치게 될 것 같은데요.”
당오군이 가슴을 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믿게. 아우만큼은 아니나 모두 정파무림의 인재들이야.”
“음…….”
잠시 고민하던 정광이 시원하게 말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묘리를 쓰는 중이에요.”
“……동쪽에서 소리를 낸 뒤 서쪽을 친다?”
“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바람잡이를 하는 동안 자오가 터는 거죠.”
“……!”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지금 바로 터는 게 아니라 확인만 하는 거니까요.”
사마련이 화산과 종남으로부터 빼앗은 사업장들.
그곳들이 감추고 있는 치부의 위치를 파악하고 때가 되면 일거에 턴다.
그게 정광의 계획이었다.
무혈단원들은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들을 드러내 사마련의 악행을 천하에 알리겠다는 말이군.”
“명분을 더 잡게 되겠어.”
“그뿐입니까? 화산과 종남이 억울하게 빼앗긴 사업들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광은 분분히 의견을 나누는 단원들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황당해서였다.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데?’
앞은 그럴듯하더니 뒤가 엉망이다.
화산과 종남이 뭐 예쁘다고 그것들을 되돌려 준단 말인가?
‘이렇게 시야가 좁아서야 원.’
꽤 가르쳤거늘, 정파는 정파일 수밖에 없는 걸까.
사고의 폭이 좁다 못해 아주 꽉 막혀 있다.
‘별수 있나. 말을 강가로 끌고 갈 순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순 없지.’
무혈단으로선 억울한 생각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사파라 해도 도둑질을 한다?
정파인으로서 거부감을 느낄 일이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미 마음이 검게 물든 상황이었으나 정광의 기준이 높고도 높아 한참이나 부족할 뿐인 것이다.
‘일이나 하러 가자.’
정광은 그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태연하게 행동하셔야 해요. 어색해하실까 봐 말씀 안 드렸던 거니까요.”
“…….”
겨우 그런 걸 걱정해서 말을 안 했다니.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단원들은 호언장담(豪言壯談)했다.
자신들만 믿으라고.
더없이 자연스럽게 해내겠다고!
그리고 나온 결과는…….
딱딱히 굳은 얼굴과 서책을 읽는 듯한 말투였다.
“……와아아. 이 장신구 봐. 정말 예쁘구나. 누이는 어떻게 생각해?”
“……오라버니 말씀대로네요. 참 아름답습니다.”
냉정한 당 씨 남매조차 이 지경이었다.
무혈단원들은 정대(正大)하게 살아온 세월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정광은 내심 탄식했다.
‘텄네.’
이런 수상한 모습을 보고도 의심하지 않으면 바보다.
‘오늘은 이만 철수하고 다시 교육한 뒤에…… 응?’
그 순간,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점원들이 환한 안색으로 달려든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무혈단원들에게 달라붙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날 정광과 무혈단원들이 돈을 펑펑 뿌렸다는 소문을 들어서였다.
윗사람이나 사마련이지.
점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호구들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는데 탈탈 털어야지,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수당을 제대로 챙길 기회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돈이야!’
고객의 언행이 경직되어 있으면 혀로 부드럽게 풀어주면 될 일.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입을 놀렸다.
“이렇게 헌앙하신 귀공자님은 처음 뵙는군요. 따르는 소저들이 셀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셀 수도 없긴 하오.”
“역시. 그래도 유달리 마음이 끌리는 소저가 계시지요?”
“……그렇소만.”
“그럼 빨리 정착하셔야지요. 바로 이겁니다. 이 가락지만 선물하시면 바로 백년해로(百年偕老)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아닌가.
백승무는 언의진을 흘깃 본 뒤 점원에게 속삭였다.
“정녕 효과가 있을 것 같소?”
“그야 당연히…….”
점원들은 노련하게 호구들을 구워삶았다.
비록 크나큰 불효를 저지르고 왔으나 모친을 각별히 생각하는 장이는 그녀를 위한 장신구들을 이미 몇 개나 손에 쥐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던 정광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쓸 때는 써야 하는구나.’
어제 평소와 달리 흥정을 안 했던 것은 최대한 많은 점포를 빨리 돌기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돈이 아까워 속이 살짝 쓰렸었는데.
그게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게다가…….’
살짝 시선을 돌리자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서 있는 사내가 보였다.
사기(邪氣)가 느껴지는 게 사마련 무인임이 분명했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장내를 살피고 있었다.
무혈단원들의 경직된 언행 때문에 더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시비를 걸러 온 것이라 확신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자오가 일하기 더 편해질 터.
‘좋아. 이대로 가자.’
정광은 목각인형 같은 무혈단원들을 이끌고 사마련의 사업장들을 훑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자오가 돌아와 만족스러운 보고를 했다.
“굵직굵직한 곳들은 모두 파악이 끝났습니다.”
“수고했어요.”
“내일도 움직일까요?”
“아뇨.”
정광이 씩 웃었다.
“내일은 약조가 있거든요.”
* * *
정광은 해가 뜨고 중천에 걸리자 숙소를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총관 강소산이 빙그레 웃으며 맞이했다.
“하루 전날 전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만큼 시간을 내기 힘드신 분이라 그러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뭘요. 괜찮아요.”
“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지요.”
그가 안내한 곳은 대륙전장에서 제일 고풍스러운 전각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십시오.”
“네.”
정광은 문을 열려다가 뒤돌아봤다.
“사총관님. 장주님, 똑똑하시죠?”
“물론입니다.”
“그럼 사총관님께서 곤란해질 만한 질문을 하실 수도 있겠네요.”
강소산이 허허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 때문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진옥룡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정광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전각과 안 어울리는 초라한 탁자.
그 앞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설마 했더니!’
대륙전장의 장주일 것이 분명한 노인은 종잇장처럼 깡마른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가 이순(耳順)을 넘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첩을 회임시켰단 말인가?
‘불쌍해라.’
정광은 치밀어 오르는 동정심을 담아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곤륜의 정광입니다.”
“반갑소. 이곳의 장주인 금의형이라 하오.”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럼 그렇게 하지. 앉으시게나.”
정광이 앉자 금의형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먼저 이 말부터 해야겠군. 나도 할 때는 하는 사내일세.”
“…….”
“그러니 아까와 같은 눈으로 보진 말게나.”
“……무량수불. 그런데 왜 보자고 하셨어요?”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금의형은 허리를 다시 구부정하게 굽혔다.
그의 두 눈에서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광채가 일었다.
“소산에게 무엇을 부탁하려고 하는 겐가?”
“비밀인데요.”
“내 다른 뜻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닐세. 자네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 분명 쉽지 않은 일을 맡기려고 하는 것일 터. 소산이 그 일을 해내려면 누군가에게 신세를 져야 할 걸세. 빚이란 말이지.”
“그래서 장주님께서 대신해 주시려고요?”
“그렇네.”
“사총관한테 주시는 작별 선물인가 봐요.”
“말이 통하니 편하군. 이것 말고도 몇 개가 더 있지만 자네한테 말할 것까진 없고.”
금의형이 추억을 더듬듯 중얼거렸다.
“소산을 후계로 삼으려 했던 건 진심일세. 그만한 자격이 있는 녀석이고. 하지만 어쩔 수 없게 되어버렸어.”
“회임 때문에요?”
“그렇지.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니까. 내 아이가 확실해. 이제껏 아이를 보지 못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네.”
정광은 금의형을 빤히 바라봤다.
느낌상 거짓이 아니었다.
“그럼 저한테만 알려주시죠.”
“……흐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제 말해보게나. 무엇을 원하는가?”
“…….”
“잠깐. 다른 생각 말게. 소산 대신에 해주는 것이니 녀석에게 다른 걸 요구하면 안 돼.”
“아까워라. 양쪽에서 받을 수 있었는데.”
금의형은 아쉬워하는 정광을 보며 웃었다.
“흘흘. 그래도 여비는 챙겨줌세.”
그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정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네요. 우선 최대한 빨리…….”
“우선? 하나가 아닌가 보군.”
“걱정하지 마세요. 뒤엣것들도 별것 아니니까요.”
“……일단 들어보지.”
“서안사분(西安四糞)…… 아니, 서안사수(西安四秀)의 부친들 있죠?”
“……음?”
“전부 만나게 해주세요.”
“……!”
“한꺼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