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53화 (153/569)

153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대륙전장(大陸錢莊)은 천하제일전장이다.

장년의 나이로 그런 곳의 사총관이 된 만큼 강소산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여느 상인들처럼 날씨가 어떻니, 정세가 이렇니 하며 빙빙 돌다가 의중을 떠보는 화법을 쓰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빙그레 웃으며 바로 물었다.

“진옥룡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시원시원하시네요.”

“하하. 너무 궁금해서 그럽니다. 인출하려고 하시는 건 아닌 것 같고. 자금 운용에 대해 논의를 하려고 하시는 것도 아닌 듯하고. 편히 쉬시려고 본 전장에 오신 건 알겠는데 나머진 짐작이 안 되는군요.”

“저도 몰라요.”

“네?”

“아직 완전히 정한 건 아니라서요.”

“하하하하.”

강소산은 크게 웃은 뒤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충 이해했습니다. 상황 파악 중이신가 봅니다.”

“네.”

“사마련 섬서 지부에서 대단한 환대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일은 잘 풀리셨습니까?”

“그럭저럭요.”

“진옥룡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아주 잘되었겠군요. 축하드립니다.”

“이제 시작인데요, 뭐.”

“하하. 그럼 다음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사마련을 섬서성에서 몰아내는 거죠.”

“으음. 그 중간 과정과 뒤처리가 문제겠군요.”

정광이 싱긋 웃자 강소산도 미소 지었다.

“제가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만.”

“…….”

역시 재밌는 자였다.

‘본 전장’이 아니라 ‘제가’라니.

대륙전장이 아니라 강소산 자신의 힘으로 돕겠다는 말 아닌가.

어차피 대륙전장의 힘을 쓰는 것이겠지만 자신이 주체라는 걸 강조하고 있었다.

“힘이 있으신가 봐요.”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전장의 힘을 조금이나마 운용할 권한이 있을 뿐이지요. 이곳에서 쫓겨나면 쌀 한 섬 질 힘도 없는 부실한 사내인지라 얼마 안 가 굶어 죽을 겁니다.”

정광은 강소산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는 바보는 아니네.’

이쯤 되면 함께 일할 만하다.

몇 개만 더 확인하고.

“줄을 좀 잘 탔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천하에 영원한 줄은 없지만 지금은 그런 편이라 하셨는데. 정확한 의미를 듣고 싶네요.”

“…….”

강소산은 잠시 침묵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이거, 제 입으로 말하려니 쑥스럽군요. 장주께서 저를 총애하고 계십니다.”

“혹시 둘이 그렇고 그런…….”

“다행히 절대 아닙니다.”

“아. 아드님이세요? 근데 성이 다르신데…… 혹시?”

“그렇게라도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완전히 남이지요. 그저 제 일 처리를 마음에 들어 하실 뿐입니다.”

“장주께선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이순(耳順)에 이르신 지 좀 됐습니다.”

“좋은 것 잔뜩 드실 테니 한동안은 문제없겠네요.”

“얼마 전까진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갑자기 안 좋아지셨어요?”

“아닙니다. 정정하십니다. 다른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장주는 모든 것을 가진 이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후계가 없다는 말이었다.

백방으로 애를 써봐도 안 되니 어쩔 수 있나.

인재를 키워 후계로 삼을 수밖에.

그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던 게 강소산이었다.

“잘나가시는구나. 많은 질시를 받고 계시겠어요.”

정광의 속된 말에 강소산이 웃었다.

“그렇긴 하지만 제가 바닥부터 시작해서 올라온 터라 나름대로 괜찮은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장주께서 작년 이맘때쯤 첩을 구하셨는데 얼마 전에 회임했다 합니다.”

“와. 건강하시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렇게도 되는 건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강소산의 말대로였다.

이순이 넘도록 없던 자식이 생길 판이다.

얼마나 기쁠까?

의심을 내뱉는 자가 있다면 당장 목을 비틀어 버릴 게 뻔했다.

“아들이면 후계로 공표할 것이고 딸이면 데릴사위를 들이겠지요. 꽤 훗날의 일이겠지만 둘 중 어느 쪽이 되든 저는…….”

“쓱싹?”

“…….”

“아. 목을 자를 거란 게 아니라 버림받겠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뒤집어엎으시려고요?”

“그건 아닙니다. 상계(商界)가 무척 더럽고 야비한 면이 많다 하나, 주인의 뒤통수를 치는 자를 반기지는 않지요. 설령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자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출산이 무사히 끝난다면 독립을 하고자 합니다.”

“패기 좋으시네요.”

“더 늦기 전에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입니다.”

“아깐 전장에서 나가면 굶어 죽을 거라 하셨는데.”

“힘을 써서 먹고 산다면 그렇지만 머리를 쓰면 아니지요.”

정광이 피식거리며 두 손을 매만졌다.

“그러니까, 대륙전장의 사총관으로 계신 지금 전장의 힘을 이용해 제게 도움을 주시고, 그 대가로 제 도움을 받아 독립하시겠다?”

“그러면 진옥룡께서 손해지요.”

정광의 두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장주께서도 진옥룡께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조만간 자리를 만들라 하시더군요. 진옥룡께서 말씀만 하시면 기꺼이 도와주실 텐데 뭐 하러 저와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

“장주께서는 대가도 요구하시지 않을 겁니다. 진옥룡과 연이 있다는 걸 천하에 알리기만 하시겠지요.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사총관께서는 뭘 원하시는데요?”

“제가 독립을 한 후의 일입니다. 사업 성과를 지켜보신 뒤, 괜찮다 싶으시면 투자를 부탁드립니다.”

“투자?”

“그렇습니다. 그만큼의 지분을 드리지요.”

“일단 능력을 보여줄 테니 마음에 들면 투자해 달라? 돈이야 여기저기 끌어오실 데가 많을 텐데요.”

“돈이 아무리 많아 봤자 진옥룡의 인맥만 하겠습니까.”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황태손 저하와 각별하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정도 사이는 아닌데.”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과도 줄이 있습니다. 황태손께선 매일같이 진옥룡 말씀을 하시며 기다리신다고 하더군요.”

“흐음. 지금 당장이 아니라 먼 훗날을 위한 포석을 까시겠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상계에서 살아남아 계시리라 어떻게 믿죠?”

강소산의 부드러운 인상과 대비되는 또렷한 눈동자에서 불씨가 피어올랐다.

“그래서 지켜봐 주시라고 부탁드린 겁니다. 머지않은 시간 내에 제 능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

밑도 끝도 없이 믿어달라는 게 아니라 직접 보고 판단하란다.

정광은 강소산이 마음에 들었다.

더 마음에 들게 될지도 몰랐고.

그래서 물었다.

“제 지분은 몇 할인가요?”

* * *

정광은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뒤 숙소로 돌아와 유정풍을 찾았다.

유정풍은 몽롱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우 덕분에 당 소저의 옥음(玉音)을 오랫동안 들을 수 있었어.”

“…….”

“월궁항아(月宮姮娥)가 당 소저와 같을까. 정말이지 당 소저께서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시오, 폐월수화(閉月羞花)이시며, 침어낙안(沈魚落雁)이시라. 나로서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 해도 크나큰 영광…….”

“그런 낯 뜨거운 말은 당 소저께 직접 하시죠.”

“……정신이 확 깨는군. 그래, 무슨 일인가?”

정광은 대륙전장과 장주, 그리고 강소산에 대해 물었다.

유정풍은 그쯤이야 하며 수많은 정보를 풀었는데, 강소산의 말과 대체로 일치했다.

‘개방도 모르는 얘기도 꺼내고, 지분도 괜찮고. 지켜볼 만하네.’

정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유정풍이 은근히 물었다.

“아우. 당 소저도 그렇고 단원들도 그렇고 의아해하는 점이 많아. 얘기 안 해줄 건가?”

“상황 봐서요.”

“거참. 떼쓴다고 알려줄 리도 없고. 이거 영 찜찜한데.”

“점심이나 먹으러 가시죠.”

“어쩐지 찜찜하더라니. 밥시간이었군. 어서 가세나.”

정광과 무혈단은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배가 터지도록 요리를 쓸어 먹은 유정풍이 다시 정보를 모으기 위해 나갔다.

정우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 지었다.

“유 소협은 그래도 할 일이 있구나. 아무것도 안 하고 밥만 축내는 것도 곤욕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밖에라도 좀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요?”

정현이 정광의 눈치를 보며 말하자 단원들도 정광을 바라봤다.

“답답하세요?”

정광이 묻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참으세요.”

“…….”

“곧 바빠질 테니까요.”

“……!”

그로부터 사흗날 아침.

정광은 유정풍이 모아온 정보들로 그림을 그린 뒤 자오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진옥룡.”

“네. 하실 일이 있어서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불구덩이에 뛰어들라 하시면 뛰어들 것이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해요. 우선…….”

한동안 듣던 자오가 고개를 끄덕인 뒤 일어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시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옥룡께서 전수해 주신 것들이 있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

자오가 떠나자 정광은 단원들을 모았다.

‘아직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가?’

단원들은 굶주린 맹수와 같은 눈빛으로 정광의 입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죠.”

“네! 단주!”

무혈단은 당당히 대문을 나섰다.

무엇이 앞을 가로막든 부숴 버릴 기세였다.

‘흑도패들을 또 잡으러 가는 건가?’

‘사마련과 싸우려는 것일 수도 있어.’

‘아미타불. 살계(殺戒)를 열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뭐가 됐든 간에 싸우면 될 일.

피땀 흘리며 익혀온 것들로 협을 행하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비싸 보이는 큰 반점에 도착했다.

“뭐 해요? 들어오세요.”

“…….”

“배부터 채워야죠.”

아.

단원들은 그제야 이해했다.

든든히 먹어야 제대로 싸울 것 아닌가.

열심히 먹었다.

정광이 데려온 곳답지 않게 맛은 그저 그랬으나 딱히 흠잡을 만한 점은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정광이 일어섰다.

“가죠.”

“네! 단주!”

“아. 다음부턴 모르는데. 유 소협.”

“음? 나?”

“네. 사마련이 화산과 종남한테서 뺏은 사업장들이요. 안내 좀 해주시겠어요? 되도록 큰 곳들만요.”

아!

단원들은 그제야 이해했다.

‘아우는 사마련의 사업장들을 돌며 시비를 걸려고 하는군.’

‘이 반점은 트집 잡을 만한 게 없으니 그냥 나가는 것이렷다.’

유정풍이 개운한 얼굴로 앞장섰다.

“따라오게. 가까운 곳부터 안내하지.”

“감사합니다.”

무혈단은 한동안 걸어 큰 포목점에 이르렀다.

안으로 힘차게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는데…….

‘……예쁜 옷이 많구나.’

‘……본 방 방도들의 옷을 다 모아도 여기 것 한 벌을 못 사겠군.’

서안 제일의 포목점이라더니.

의복에 별 관심이 없는 당예지와 거적때기면 족한 유정풍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이런.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단원들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싸우러 왔지 옷이나 맞추러 온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정광은 옷을 맞추고 있었다.

“이거 괜찮네.”

“어머 어머. 소신선님, 너무너무 잘 어울리신다.”

“그렇죠? 침의(寢衣)로 쓰면 딱이겠어요.”

“……그, 그 비싼 옷을 잠옷으로……?”

“어? 안 돼요?”

콧소리를 내며 정광의 구매욕을 자극하려고 애쓰던 점원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습니까? 이 정도는 돼야 소신선님께서 주무시면서 걸칠 만하죠.”

“옷감 진짜 괜찮네요. 같은 것으로 세 벌 주세요.”

“가, 감사합니다, 소신선님!”

정광은 옷을 산 뒤 단원들을 둘러봤다.

“뭐 하세요? 다들 옷 지으셔야죠.”

단원들은 황당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그사이, 종업원들이 절세고수처럼 빠르게 달려와 옷감과 옷을 들이밀었다.

“꺄아. 여협께선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무엇을 걸치셔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외모와 걸맞는 걸 입으셔야죠.”

“아아. 이렇게 풍채가 당당하신 걸인(乞人)님은 첨 뵙습니다. 이건 어떠십니까? 대협다운 기상과 딱 맞을 것 같은데요.”

“아미타불. 신승(神僧)께서 와주시길 기다리던 옷감이 있었는데 드디어! 이 품위 있는 회색 비단으로 승복(僧服)을 지으시면……”

결국 단원들은 옷을 한두 벌씩 짓게 되었다.

“가죠.”

“…….”

정광은 그 뒤에 들린 곳들에서도 돈을 펑펑 썼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자 대륙전장으로 돌아왔다.

숙소에 도착한 정광은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무량수불.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도 수고하셔야 하니 푹 주무세요.”

“…….”

정광은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누웠다.

그러고 반 시진이나 지났을까?

허공이 열리며 자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하셨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중장부는 있던가요?”

“물론입니다. 아무리 합법적으로 장사하려 해도 사파의 습성은 어쩔 수 없지요.”

“위치도 다 파악하셨고요?”

“네. 진옥룡께서 이목을 끌어주셔서 쉽게 했습니다.”

정광이 씩 웃었다.

“그럼 내일도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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