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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152화 (152/569)

152화

생각보다 더 재밌는

무림에서 사승(師承) 관계는 부자(父子) 관계와 마찬가지다.

아니, 무인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소중한 무공을 나누는 사이였기에 혈육으로 이어진 부자 사이보다 더 중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삼자(三者)가 제자에게 스승이 싫지 않냐고 묻는다?

바로 칼질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무례한 짓 아닌가!

이렇듯 제정신을 가진 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짓이었으나…….

정광은 그러고도 남을 이였다.

후위진은 그런 말을 듣고도 태연할 자였고.

거기에 한술 더 떠 호기심 어린 얼굴로 되묻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실이니까요.

-이번 건 틀렸군. 나는 사부를 공경해.

그의 진지한 말에 정광이 콧방귀를 뀌었다.

-공경은 무슨. 화산과 종남이 버티고 있고 무림맹이 코앞인 섬서성에 사석(捨石)으로 떨궈졌으면서.

-묘수(妙手)로 쓰인 거라고 했었잖아!

-제가 알려 드린 대로 관(官)과 거래해서 살아남으신 거잖아요.

-그렇게 안 봤는데 과거에 너무 집착하네. 그 대가로 옥패 줬던 것 잊었어?

-옥패 그거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고 말했죠. 운룡에서 기성품을 뺀 가격만큼 내놓으시죠.

-…….

-말이 자꾸 새네. 공을 세워서 잠시 인정받아서 그래요? 그게 얼마나 간다고.

후위진이 두 손을 들었다.

-그래. 사부, 솔직히 마음에 안 든다. 됐냐?

-진작 그러시지. 부련주가 밀려났으니 그를 따르던 이들도 흔들리고 있겠죠?

-…….

-그들의 마음을 잡으세요.

-……지금 내게 반란을 일으키라는 말이냐?

후위진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와 달리 정광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럴 능력은 있으시고요?

-없지.

무심코 대답했던 후위진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직은. 아직은 말이야.

-그러니까 나중을 얘기하는 거예요. 미리 씨를 뿌리고 준비를 하시라는 거죠.

-…….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던 후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부는 준비 조금 한다고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누가 그쪽보고 죽이래요?

-……그럼?

-제가 죽일 건데.

-……!

-그때 사마련을 수습하세요.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죠?

눈을 크게 뜨고 정광을 바라보던 후위진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네 말에 따른다 치자. 네가 해낸다 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전에 사부가 나를 죽일 것 같군.

-그럴지도 모르죠.

-내가 바닥까지 떨어져서 답이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이런. 의욕이 없으시네.

-네가 내 입장이 돼봐! 할 마음이 나겠냐?

-걱정하지 마세요. 의욕이 솟게 해드릴 테니까.

-……어떻게?

정광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바닥으로 떨어뜨려 드릴게요.

* * *

정광은 당예지와 함께 전각을 나왔다.

후위진의 전음이 귀를 찔렀다.

-네가 감히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겠다고? 마음대로 해봐! 내가 당할 것 같냐!

정광은 깔끔히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고 있던 안내인이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

정광은 그를 따라 걸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뒷일은 대충 됐고.’

사마련 산서 지부장 송훈에 이어 후위진에게도 씨앗을 심었다.

부련주 가균도 마냥 밀려난 채로만 있지는 않을 터.

사파치곤 괜찮은 이들이다.

제대로만 되면 훗날의 사마련은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 되리라.

‘그래도 가균 그놈은 역시 죽이는 게 나으려나.’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장원의 대문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아까의 무인들이 여전히 도열해 있었다.

정광과 당예지는 왔을 때처럼 요란한 환송을 받으며 떠나게 됐다.

“진옥룡과 독봉의 무운(武運)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다음에 뵙게 되면 맘 놓고 때릴게요!”

“…….”

장원에서 조금 떨어지자 지금껏 묵묵히 있던 당예지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돌아가다니 의외군요.”

“다음에 싸우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옥기린과 전음으로 무슨 얘기를 나눴나요?”

“음. 좀 긴데.”

“괜찮으니 말해주세요.”

정광은 요점만 간단히 말했다.

“제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겠다고 했어요.”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마음대로 해봐. 내가 당할 것 같냐?”

당예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단주. 겨우 그런 대화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정광은 두 팔을 살짝 벌렸다.

그게 다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제가 뭐 하러 온 건지 모르겠군요.”

“헛걸음은 아니에요.”

“……?”

“장원 내부를 보셨죠? 얼마 안 가 그곳에서 싸우게 될 테니 독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해 두세요.”

“아!”

“못 알아보신 진식(陣式)은 말씀하시고요.”

“…….”

정광은 생각에 빠진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 봤던 상원과 우만이었다.

‘늙은이들한테 꽤 시달렸나 보네.’

상원은 우울해 보였고 우만은 짜증이 난 듯했다.

짐작대로 그들의 목소리에서도 감정이 묻어나왔다.

“무량수불. 진옥룡, 청이 있소이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오?”

“존장들께서 그대를 만나고 싶어 하시외다.”

* * *

그 존장들은 정광도 아는 자들이었다.

상원과 우만을 따라 다관(茶館)에 들어가자 곤륜산에서 무림맹으로 오며 봤었던 화산의 자엽과 종남의 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대뜸 따지기 시작했다.

“사마련 소굴에 단둘이 들어가는 무모한 짓을 하다니.”

“대체 무슨 일로 들어갔었는가?”

정광은 솔직히 대답했다.

“인사도 할 겸 겸사겸사요.”

“안에서 무엇을 했나 소상히 말해보게.”

“거짓을 말하면 안 될 것이야.”

정광은 당예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옥기린에게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겠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해봐, 내가 당할 것 같냐?’ 하던데요.”

“…….”

“…….”

황당한 표정을 짓던 두 노도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시정잡배 같은 대화를 나눴다?”

“지금 그걸 믿으라는 겐가?”

“네.”

정광이 당연하다는 듯 답하자 그들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있나.’

‘감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어찌 대응할까 고민하는데 정광이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부르신 거예요?”

“자네가 걱정돼서 그렇지.”

“그래도 무탈해 보이니 다행일세.”

“그럼 이제 가도 되죠?”

“…….”

두 노도사 중 성격이 더 급한 자엽이 나섰다.

“아니. 할 말이 있으니 듣게나.”

“네. 되도록 빨리 부탁드려요.”

자엽은 끓어 오르는 울화를 가까스로 삼켰다.

‘이런 망할 녀석 같으니. 소문은 익히 들었다만 적응이 안 되는군.’

무림의 노선배로서 따끔히 혼내주고 싶었으나, 정광은 무림맹에서 파견 나온 무력단의 수장이었다.

급조된 단의 단주지만 그 지위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민초들 사이에선 협객을 넘어 소신선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불린다지. 이놈과 척져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자엽은 그간 쌓아온 수양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정광의 성품과 가균을 잡은 말도 안 되는 무위를 생각하자 더 도움이 되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줬으면 하네.”

“경거망동이라뇨?”

“우리의 일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 지켜봐 달란 말일세.”

“계속 밀리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세요?”

자엽은 물론 구성의 얼굴까지 벌게졌다.

“미, 밀리다니. 소문이 와전됐나 보군.”

“허허. 그런 낭설은 흘려듣게나. 다른 곳도 아닌 섬서성에서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별문제 없고 알아서 하실 테니 가만히 있어라. 이 말씀이시죠?”

“그럼. 그럼.”

“바로 그걸세.”

“상대는 사마련뿐만이 아니잖아요. 화산과 종남의 제자가 섬서성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대상인의 자제들을 때려 관(官)으로부터도 시달리고 계시다던데…….”

“그게 바로 터무니없는 헛소문이란 말일세!”

“우리 제자들 중 그런 짓을 저지를 망종은 없어!”

그들의 말이 맞았다.

자칭 서안사수(西安四秀)라는 망나니들을 두들겨 팬 건 정광이었으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저희도 도와드려야죠.”

“어허. 괜찮다니까. 맹에도 굳이 도와줄 필요 없다고 말했었네.”

“그래도 왔으니 어쩔 수 없네만 우리를 믿고 푹 쉬게나.”

정광은 속으로 웃었다.

‘한사코 사양한다? 찔리는 게 많은가 보네.’

후위진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화산과 종남의 속가들이 경영하는 사업장을 삼켰다.

관을 등에 업고 있더라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단단히 방비를 굳혔을 터.

그것을 화산과 종남이 되찾는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는 방법이겠지.’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겠지만, 혹여나 들킬까 봐 필사적으로 사양하는 것이리라.

정광은 한참 고생하고 있을 유정풍을 떠올렸다.

‘뭐 그거야 정보를 받으면 알게 될 거고.’

이들에게 못 박아야 했다.

“아까 화산과 종남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신다고 했죠?”

“……그렇네만.”

“……왜 그러는가?”

정광은 자엽과 구성을 번갈아 보며 포권했다.

“무혈단의 일은 무혈단이 알아서 할게요.”

* * *

자엽과 구성은 불쾌한 얼굴로 돌아섰다.

우만 역시 마찬가지.

오직 상원만이 정광과 당예지를 배웅했다.

“두 분 모두 조심히 돌아가시오.”

정광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우울해 보이시네요. 무슨 일 있으세요?”

“……진옥룡께 큰소리쳐 놓고도 이룬 게 없어서 그러오.”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요, 뭐.”

“……그렇지. 겨우 하루. 단 하루일 뿐…….”

상원은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럴수록 그의 표정이 변해갔다.

마침내 우울함을 모두 털어낸 그가 정중한 자세로 예를 표했다.

“오늘도 가르침을 줘서 고맙소. 이만 가보겠소이다.”

“뭘요. 또 봬요.”

상원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사숙조인 자엽이 있는 다관으로 들어갔다.

정광도 당예지와 함께 대륙전장으로 돌아갔다.

숙소로 가자 기다리고 있던 무혈단원들이 달라붙었다.

“사제. 어떻게 됐느냐?”

“아우. 말해보게나.”

정우와 당오군의 물음에 정광이 답했다.

“당 소저가 얘기해 주실 거예요.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정광은 귀찮은 일을 당예지에게 떠넘긴 뒤 숙소 밖으로 나왔다.

마침 지친 얼굴로 걸어오는 유정풍이 보였다.

정광은 주위의 이목 때문에 전음을 보냈다.

-수고하셨어요.

-끙. 아우는 병 주고 약 주는 재주가 있군.

-근데 조금만 더 수고 부탁드리려고요.

-……약은 무슨. 아주 병으로 두들겨 패는구만.

유정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좀 추가로 조사를 부탁드릴 분들이 계셔서요.

-말해보게.

-화산의 자엽 진인과 종남의 구성 진인요.

-이미 하고 있잖는가.

유정풍이 의아해하자 정광이 설명했다.

-아뇨. 그분들은 비리는 물론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 가시는지도 알아봐 주세요.

-……그러지. 지금껏 한 것만 해도 사부님께 맞아 죽을 판인데 매 몇 대 더한다고 달라질까.

-감사합니다. 아. 빨리 숙소로 들어가세요. 당 소저가 한참 오늘 일을 얘기하고 있을 거예요.

-……!

영약을 먹으면 이럴까.

지쳐 있던 유정풍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모하는 이를 당당히 바라보고 목소리까지 들으며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 아닌가!

-고맙네, 아우! 그럼 이만!

유정풍은 신법을 펼쳐 숙소로 뛰어 들어갔다.

‘그럼 다음은…….’

정광은 숙소 주변을 지키고 있는 대륙전장 무인에게 사총관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무인은 기다렸다는 듯 앞장섰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분, 이렇게 만나기 쉬운 분이셨어요?”

“아닙니다. 진옥룡께서 만나길 원하시면 즉시 안내해 드리라고 말씀하셔서 그렇습니다.”

정광은 사총관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생각보다 더 재밌는 녀석인가.’

실제로도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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