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겸사겸사
정광이 홀로 사마련 소굴로 간다고 하자 난리가 났다.
말이 인사지.
앞으로 잘해보자며 덕담이나 나누다 올 녀석이 아니지 않은가.
당연히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정광의 고집을 누가 꺾으랴.
결국 정우가 굳은 얼굴로 나서서 절충안을 내놨다.
“혼자서 가는 건 절대 안 돼.”
정광의 무위가 아니라 성품을 못 믿어서였다.
누가 됐든 말릴 사람이 필요했다.
“최소한 한 명은 함께 가야 한다.”
언성을 높여가며 다툴 생각까지 하며 말했건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뭐?”
정광은 한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 소저.”
“……?”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
놀람도 잠시.
차가운 당예지의 얼굴에 고운 미소가 피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기쁨 때문이었다.
“물론입니다, 단주.”
“그럼 저와 함께…….”
그 순간.
유정풍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감히 당 소저에게 시간이 어쩌고 저째?
이러려고 나를 밖으로 돌리는 건가!
그의 입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 돼! 절대 안 돼!”
“왜요?”
“그야 당연히…… 허억!”
거칠게 떠들던 유정풍이 헛바람을 토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시선을 느껴서였다.
그것은 당예지의 것이었다.
“유 소협. 제가 단주를 보필하기 부족합니까?”
“나, 나는…….”
“그렇다면 합당한 이유를 말해주십시오.”
“나, 나는…….”
유정풍은 ‘나는’ 만 반복하다가 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실언을 했소이다. 미안하오.”
당예지는 그의 사과를 받은 뒤 다른 단원들을 둘러봤다.
불만 있는 놈 있으면 나와라, 이런 의미로.
단원들은 서슬 퍼런 기세에 질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렇게 정광과 함께 사마련 섬서 지부에 갈 단원이 정해졌다.
시간이 흘러 다음 날 아침.
정광은 단원들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뒤로하고 당예지와 함께 대륙전장을 나섰다.
문에서 나오자마자 감시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뭐야, 이 어설픈 놈들은.’
정광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히 돌렸으나 당황해서 흔들린 기(氣)는 감출 수 없었다.
‘느껴지는 기로 봐선 화산과 종남인데. 속가제자인가.’
평복을 입은 사내들이 정광의 뒤를 쫓았다.
몇 명은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진산제자(眞山弟子)에게 알리러 간 것이리라.
‘뭐 그러든 말든.’
정광은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정파 녀석들보다는 조금이나마 나은 놈들에게.
‘자오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네.’
날카롭고 요사한 기운을 미약하게나마 지우며 따르고 있었다.
나름의 수련을 거친 무인들인지 앞서가는 모습도 꽤 자연스러웠고.
정광은 그들을 그냥 보낼 생각은 없었다.
“저기요, 앞에 사파분.”
“……!”
“놀랐으면서 왜 뒤도 안 돌아보세요.”
앞에서 걷던 한 중년인이 의아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소, 소인 말입니까?”
“네.”
그는 정광의 허리춤에 있는 운룡을 보고 몸을 떨었다.
“도, 도사님. 무, 무슨 일로 저를……?”
정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부장님께 말씀 좀 전해주실래요?”
“……!”
겁먹은 척하던 중년인이 얼굴을 굳혔다.
이미 정체도 들켰겠다, 정광의 말을 전하는 게 옳은 상황이었다.
“말해보시오.”
“지금 지부장님을 만나러 가고 있으니까…….”
“……!”
정광은 경악하는 중년인의 눈을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아침상 좀 푸짐하게 차려달라고 해주세요.”
* * *
사마련 섬서 지부는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西安)에 있었다.
아주 대놓고 자리 잡은 것이다.
이에 분노한 화산파와 종남파가 항의했으나 옥기린(玉麒麟) 후위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의 신경을 긁었다.
‘부럽소? 그럼 화산과 종남산을 서안으로 옮기시던가.’
두 정파는 당장 칼부림을 벌이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명분은 정당한 값을 치르고 장원을 매입한 후위진에게 있었다.
합법적인 선에서 움직이고 관의 비호까지 받는 그를 어찌 치겠는가?
어쨌든 정광은 그 덕에 먼 거리를 걷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얼마 안 가 큰 장원이 눈에 띄었다.
‘취향하고는. 아주 딱 어울리네.’
후위진의 성품처럼 극도로 화려한 장원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 좌우로 도열한 무인들도 인상적이었다.
‘문이 닫혀 있으면 박살 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있나.
이미 지난 일인데.
수틀리면 후위진의 머리라도 박살 내면 되지.
‘일단 상황부터 보고.’
이렇게 태연한 정광과 달리 당예지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이는 장원이 대낮인데도 어둡게 느껴졌다.
‘……호굴(虎窟)이 따로 없구나.’
힐끗 곁눈으로 보니 정광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역시 단주.’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단주를 믿어야 해.’
그리고 자신을 믿어준 그에게 보답해야 했다.
-이대로 들어가실 건가요?
그녀의 전음에 정광이 되물었다.
-왜요? 문제 있어요?
-아닙니다.
그녀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때, 문 양측으로 도열해 있던 무인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진옥룡과 독봉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내공을 실은 강렬한 외침!
무슨 일인가 싶어 길거리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틀거렸다.
그리고 정광은 해맑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밥 잘 먹을게요!”
“…….”
정광은 당예지와 함께 무인들 사이를 걸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두 손을 모았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네.”
장원 내부는 외부에서 보던 것보다 더 화려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전각은 물론 갖가지 기화요초(琪花瑤草)까지. 보통 공을 들인 모습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돈지랄.
정광은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미친놈이네. 여기에서 평생 살 것도 아니면서 무슨 헛짓거리야?’
당예지도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마련. 후천팔괘(後天八卦)와 선천팔괘(先天八卦)의 방위를 조합해 방비를 하고 있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녀가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진식(陣式)이 여기저기 얽히고설켜 있는 듯했다.
‘이렇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으면 일을 벌이기 힘든데…….’
정광이 인사만 하러 왔을 리가 있나.
한바탕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한몫해서 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
‘아! 저건!’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신중한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단주. 저 우물에 독을 풀까요?
정광이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안 돼요.
-…….
-밥은 먹고 해야죠.
-아!
당예지가 자책했다.
-성급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밥을 먹을 때 저 우물물을 마시게 될 텐데 마음이 급해서 그만…….
-하하. 괜찮아요. 의욕이 넘쳐서 보기 좋네요.
정광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데려온 이유를 아는구나. 할 땐 할 줄도 알고.’
정파에 이런 인재가 있다니.
정파는 그녀 같은 인재들로 인해 부흥하게 되리라.
“하하하.”
그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당예지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이곳의 어떤 전각보다, 기화요초보다도 화려한 미소였다.
그들의 사악한 생각을 모르는 안내인은 내심 감탄했다.
‘진옥룡, 진옥룡 하더니 과연. 독봉도 마찬가지. 배포가 대단하군.’
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숫자 앞에서는 답이 없는 게 무림이다.
그런데 단둘이서 사마련 지부에 들어와 웃는다?
비록 적이지만 같은 무인으로서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정광과 당예지는 이상한 오해에 빠진 안내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얼마 안 가 그들은 한 전각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대한 탁자가 비좁아 보일 만큼 수많은 산해진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있었다.
당예지의 미소만큼 화려한, 옥기린이란 별호가 부끄럽지 않게 잘생긴 후위진이었다.
“이게 누구야! 천하에 위명(偉名)이 자자한 진옥룡이군!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기다리고 있었…….”
두 팔을 벌리고 과장스럽게 외치던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은 당예지에게 꽂혀 있었다.
* * *
정광은 맛있게 먹다가 후위진을 칭찬했다.
“솜씨 좋은 숙수를 구하셨네요. 부러워라.”
“…….”
“저기요.”
“……으, 응?”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죠.”
당예지를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후위진이 정신을 차렸다.
“그래. 많이 먹어라.”
“그쪽은요?”
“아. 나도 먹어야지.”
후위진은 젓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당예지를 보느라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외면했다.
“쯧쯧.”
정광은 후위진을 보면서 혀를 찼다.
“저러니 그렇게들 걱정하시지.”
“……걱정? 누가?”
“철혈장 장주님과 소장주님요.”
“……뭐라 하셨길래?”
“옥기린은 무슨. 사람 되려면 한참 멀었다. 이러시던데요.”
후위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그 눈으로 당예지의 눈치를 살핀 뒤 정광을 노려봤다.
“헛소리가 늘었구나. 두 분이 나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기린을 새긴 옥패를 주신 게 그 증거다.”
“그게 아니라 기린과 같은 이가 되어 돌아오라고 줬더니, 사람들을 패고 협박해서 강제로 옥기린이란 별호를 퍼뜨리게 했다던데요.”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발끈한 후위진이 정광의 허리춤에 있는 운룡을 가리켰다.
“은혜도 모르는 녀석! 내 덕에 신검을 얻어놓고 이러기냐?”
“덕이라뇨. 원래 소장주께선 미리 만들어놨던 기성품을 주려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건 제 능력으로 얻어낸 거라는 거죠.”
“아니, 그래도…….”
“옥패만 내밀면 된다면서요. 아니던데.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운룡에서 기성품을 뺀 가격만큼 그쪽이 저한테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말이 안 되면서도 뭔가 되는 듯한 논리.
눈살을 찌푸리던 후위진이 피식 웃으면서 전음을 보냈다.
-그만 흔들어라. 왜 찾아왔지?
-인사도 할 겸 겸사겸사.
-그놈의 인사는 그만 끝내고. 겸사에 대해서 말해.
-한번 맞춰봐요.
-…….
-대답에 따라서 제가 할 일이 달라지거든요.
-…….
후위진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전음을 보냈다.
-네 성품에 그냥 왔을 린 없고. 한바탕하려고 왔겠지.
-그래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린 거예요? 적의 없이 환영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알면서 왜 물어. 그러는 너야말로 밥 먹으러 왔을 뿐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외쳤잖아.
-실제로 먹었는데.
-……됐다. 안 어울리게 그놈의 명분 따지려니 피곤하네.
-제 말이. 왜 법을 지켜가며 일을 벌인 거예요? 덩달아 그래야 하니까 답답하잖아요.
-네가 그렇게 하라고 해놓고 무슨!
-아. 그랬지.
두 사람은 이맛살을 모으며 다투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흔적이 곧 사라지는 산공독(散功毒)이라도 지부 전체에 뿌리려는 거군. 어쩐지 당 소저와 함께 왔더라니. 그리고 네가 먼저 당한 것처럼 시비를 일으켜 싸우려는 거지?
-와. 사람을 뭐로 보고. 선을 넘으시네.
-독존과 있었던 일을 들었거든. 그때도 그랬던 것 아니야?
정광은 살짝 놀랐다.
단 한 번 어울려 봤을 뿐이거늘, 귀동냥한 소문과 합쳐 자신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짐작하는 것 아닌가.
-으음. 그냥 죽일까?
-……무슨 혼잣말을 전음으로 하냐.
-생각보다 상상력이 풍부하셔서요.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상상력 따위가 아니라 통찰력. 그리고 나는 원래 천재였어.
으스대던 후위진이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하려고?
정광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정광의 시선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땀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애쓰시네. 말이 꽤 통하니 다른 쪽으로 가죠.
후위진은 그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안도의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말해봐.
-부련주 얘기 들으셨죠?
장난스럽던 후위진의 말투가 변했다.
-……정말 너 홀로 그런 것이냐?
-저랑 한 번 붙어보셨으면서 의심이 많으시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물어봐야겠군. 이사형도 네가 그 꼴로 만들었지?
-음? 왜 그렇게 생각해요?
후위진의 전음에 힘이 실렸다.
-흉수를 쫓던 부련주가 산서성까지 가서 네게 당했으니까.
-저도 궁금하네요. 왜 쫓아왔지? 자오 때문인가?
-웃기는 소리. 흉수는 마공을 썼다. 그래서 그 흔적을 쫓은 거야.
-마공요? 대체 어떤 마인이길래 그런 짓을.
후위진은 정광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안 넘어오네.
-뭘 알아야 넘어가죠.
-이상하게 네가 계속 의심된단 말이야. 부련주를 패퇴시킨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니, 마공을 써서 이사형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거든.
-만약 그렇다면요?
-살짝 고마우면서도 짜증 나지. 더러운 돼지 새끼. 언젠간 반드시 죽이려고 했는데.
-무량수불. 귀천하신 분한테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말 돌리지 마.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정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부련주는 당분간 힘을 못 쓰겠죠.
-당연하지.
-련주에게 힘이 더 기울었을 거고요.
-……그래서?
정광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전음을 이었다.
-사마련주. 마음에 안 드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