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50화 (150/569)

150화

상황 파악

상원과 우만은 입을 떡 벌렸다.

마냥 홀대할 순 없어 객잔을 잡아뒀건만.

호의를 무시하고 다른 곳에 가겠다?

이렇게 체면을 무시하다니.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짓이냔 말이다.

황당해하는 상원과 달리 우만은 분노했다.

‘이런 건방진 놈이 있나! 그렇게 망신을 줘놓고 또 줘?’

역시 성현들의 말씀은 틀린 게 없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던가.

곤륜은 터부터 안 좋았다.

마교 놈들과 부대끼며 살았으니 제자 놈의 심성이 이따위일 수밖에!

이런 판국에 말이 곱게 나올 리 있나.

우만의 목소리에 가시가 담겼다.

“그래도 성의껏 준비했는데 아쉽소이다. 어떤 곳에 가려고 하시길래 그러시오?”

이 예의 없는 망나니 새끼야!

얼마나 대단한 곳을 가려고 그따위로 나오는 거냐!

무척 순화해서 말했으나 못 알아들으면 바보였다.

똑똑함을 넘어 천재인 정광은 당연히 알아들었다.

“같이 가서 보시죠.”

화산과 종남은 정광 일행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광이 발걸음을 멈췄을 때…….

양 문파의 제자들은 경악했다.

“여, 여기는!”

“개, 객잔 따위가 아니잖아!”

그랬다.

그들의 눈앞에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긴 담장에 둘러싸인 거대한 장원이 있었다.

우만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륙전장(大陸錢莊)…….”

전 중원은 물론 청해성 같은 오지까지 명성을 떨치는 전장.

정광이 묵을 거라 선언한 곳은 신용 높기로 이름난 천하제일전장이었다.

“……여기에서 묵는다고?”

우만이 황당해할 만했다.

전장은 객잔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천하제일전장인데.

“……말도 안 돼.”

우만의 혼잣말에 정광이 대꾸했다.

“되는데요.”

“……어떻게?”

“돈 좀 있으면 돼요.”

“……좀?”

정광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덧붙였다.

“좀 많이요.”

* * *

정광과 무혈단은 먼저 마차를 몰고 도착한 자오 덕분에 대륙전장의 문을 바로 통과할 수 있었다.

‘오. 넓네.’

정광은 안내인을 따라 걸으며 감탄했다.

환생한 뒤로 본 곳들 중 손꼽힐 정도로 큰 규모였다.

‘백가상단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정말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정도.

그만큼 대륙전장은 거대했다.

‘무인들 수도 많고. 수준도 낮지 않네.’

드러나 있는 이들과 숨어 있는 이들의 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왔구나.’

정광은 이곳을 추천한 백승무를 칭찬했다.

“사제 말대로네. 잘했어.”

“감사합니다, 사형.”

“끝까지 잘해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광은 비장한 얼굴로 대답하는 백승무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최선만 다하는 게 아니라 잘할 거지?”

“……네, 사형.”

“좋아. 가자.”

그들은 꽤 오랫동안 걸어서야 또 다른 안내인을 만날 수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장년인이었는데 눈동자가 또렷한 게 인상적이었다.

“본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사총관(四摠管)을 맡고 있는 강소산이라 합니다.”

“안녕하세요. 곤륜 제자 정광입니다. 이쪽은 무혈단이고요.”

“진옥룡께서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정영들과 함께 방문해 주셨군요. 영광입니다.”

“무혈단을 아세요?”

“얼마 전에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

무혈단이 만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총관은 무림 견문이 꽤 넓어 보였다.

아니, 대륙전장의 견문이 넓은 것이리라.

‘무공을 전혀 모르는군.’

그런데도 전혀 위축됨이 없다.

정중함이야 일 때문에 몸에 밴 것이겠지만 당당함은 선천적인 것일 터.

‘괜찮네.’

그래서 좀 더 알아보고자 했다.

“사총관이시면 네 번째 총관이시란 건데. 대륙전장에는 몇 분의 총관이 계세요?”

“열둘입니다.”

“그중에 네 번째라. 그 연배에 대단한 능력을 갖고 계신가 봐요.”

“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뭔데요?”

사총관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줄을 좀 잘 탔습니다.”

정광이 눈을 빛냈다.

“튼튼한 줄인가요?”

“천하에 영원한 줄은 없지만 지금은 그런 편이지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니어도 괜찮고.

“좋아요. 거래하죠.”

“하하.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모르는 척 듣고 있던 무혈단원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무슨 저렴한 대화란 말인가.

하지만 정광과 사총관은 만족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큰 창고 앞에 이르렀다.

안에 들어가자 자오와 마차가 눈에 띄었다.

“그럼 함께 확인해 볼까요?”

“네.”

정광이 승낙하자 사총관이 장한들을 불렀다.

그들은 마차에 실린 재물들을 꺼내 바닥에 깔린 천 위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설전(舌戰)이 시작됐다.

사총관과 백승무의 싸움이었다.

“산서성 대흥전장(大興錢莊)의 전표군요. 팔푼(八分)은 값어치를 낮춰서 쳐드려야겠습니다.”

사총관이 전표 뭉치를 가리키며 말하자 백승무가 되물었다.

“팔푼이나 깎으신다고요?”

“대흥전장(大興錢莊)은 넉 달 전 장주가 귀천(歸泉)한 뒤 두 아들이 대립하여 반으로 갈라졌습니다. 전표의 신용도도 그만큼 떨어진 상태지요.”

“발행받은 전표를 가져와 현물로 돌려달라 하는 이들이 많아졌겠군요.”

“그렇습니다.”

백승무의 눈이 빛났다.

“대륙전장에서 그걸 보고만 있을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대흥전장을 인수하시려고 그들이 발행한 전표를 모으고 계신 건 아닌지…….”

“그렇긴 하나 이미 충분한 상태입니다.”

“지분이 높을수록 인수하시기 편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하. 금권검협이라 불리신다더니 명불허전이군요. 그럼 칠푼만 낮추지요.”

백승무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할 말은 했다.

“이곳까지 온 성의를 쳐주십시오. 오푼만 내리는 게 어떻습니까?”

“대흥전장에서 현물로 바꾸기도 어렵고 소문이 퍼져 쓰기도 힘드셨지요? 그래서 이곳까지 가져오신 것 같습니다만. 육푼으로 하시지요.”

“좋습니다.”

백승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용을 의심받기 시작한 전장의 전표에서 구할 사푼씩이나 챙기게 되었으니 선방한 것이라 할 만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또다시 설전이 시작됐다.

무혈단원들은 질린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백승무를 상대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던 걸까?

사총관이 그들의 마음을 알아채고 권유했다.

“지루하실 텐데 편한 곳에서 여독을 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광, 백승무, 자오를 제외한 전원이 찬성했다.

그들이 안내인과 함께 사라지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까진 백승무의 체면을 생각해 봐주고 있었다는 듯, 사총관의 맹공이 시작됐다.

백승무는 고전했다.

상재가 뛰어난 그로서도 경험의 폭을 메우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자오가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시위를 좀 할까요?

-비수라도 꺼내서 혀로 핥으며 겁주시려고요?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

사파의 본성이 어디 가겠는가.

정광은 그대로 말하려다가 덕으로 대하기로 했던 걸 떠올렸다.

-그냥요.

-여, 역시 진옥룡이십니다.

-어쨌든 그런 게 통할 상대가 아니니 그냥 보세요. 사제도 마냥 밀리진 않을 테니까.

정광의 말대로였다.

백승무는 투지를 발휘해 아득바득 달려들었다.

결국 거래는 나쁘지 않은 내용으로 마무리되었다.

“하하. 백 소협. 수고하셨습니다.”

“헉. 헉. 사총관님이야말로…….”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데 정광이 끼어들었다.

“근데 발행 수수료는 얼마예요?”

“아. 미처 말씀을 못 드렸군요. 통상적으로는 오푼이지만…… 사푼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전표의 편리함과 그에 대한 신용은 물론 천하 곳곳에 지점을 열어 언제 어디서든 금원보나 은자를 비롯한 현물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 비용이었다.

“사제. 어때?”

정광의 물음에 백승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비율이라는 의미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전표는 어떻게 발행해 드릴까요? 원하시는 금액대로 나눠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사제, 알아서 해.”

“네, 사형.”

전표 발행까지 끝나자 사총관이 빙그레 웃었다.

“대륙전장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요.”

“바로 떠나실 겁니까?”

“아뇨.”

“하하. 그러셨으면 했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지요.”

“그게 아니라 여기에서 묵으려고요.”

사총관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가 짙어졌다.

“좀 전 것은 거래의 시작이었군요. 꽤 오래 논의해야 할 것이 있으신가 봅니다.”

대륙전장에는 큰 고객을 위한 최상의 숙소와 식당이 있었다.

하지만 큰 고객의 기준이 높은 터라 아무나 이용할 수 없었다.

다행히 정광은 그 기준을 충족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사총관의 시선이 그 자격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눈에 띄었습니다만…… 그것과 관계된 것이겠군요.”

정광의 왼손 중지(中指)에 끼워져 있는 거무튀튀한 철환(鐵環).

오래전 청해성주에게 받은 그것을 말함이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정광의 물음에 사총관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이곳에서 만든 것인데 당연히 알지요. 청해성주이신 연 대인의 인장(印章) 아닙니까?”

“딱 보자마자 아시네요.”

“하하. 연 대인뿐만 아니라 통주연가(通州燕家)는 본 전장의 큰 고객이십니다. 기억할 수밖에 없지요. 연 대인께서 진옥룡께 인장을 양도했다고 말씀을 전하신 지 오래입니다. 언제쯤 방문해 주시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광의 머릿속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의복과 장신구로 온몸을 휘감은 청해성주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중앙으로 안 끌려가고 잘 있으려나.’

청해성주 대신 감숙성주가 가야 하는데.

뭐 그건 그거고.

정광은 사총관에게 따졌다.

“기다리시긴요. 좀 전까지 모르는 척하고 계셨으면서.”

“이해 부탁드립니다. 얼마나 인출해 가실지 겁이 나서 말입니다. 하하. 헌데 말씀을 들어보니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사총관의 너스레에 정광이 피식 웃었다.

“일단 좀 쉴게요. 묵어도 되죠?”

“물론이지요. 편하게 쉬십시오.”

사총관은 미소 띤 얼굴로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본 전장은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이니까요.”

* * *

무혈단원들은 물론 정광까지.

숙소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정광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백승무와 자오가 따라 들어갔다.

근질근질한 입을 겨우 참고 있던 자오가 낮게 속삭였다.

“사총관이라는 자. 우리가 이곳에 묵으려는 이유를 아는 것 같습니다.”

백승무도 합세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말하는 게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더군요.”

그들의 말대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시다시피 본 전장은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이니까요’라고 말할 연유가 없지 않은가.

“심계가 깊은 자인 것 같습니다.”

“너무 큰 사고를 치면 내쫓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일까요?”

“사고를 치고도 편히 자려고 온 것인데 곤란하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터놓고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떨는지요?”

정광은 두 사람의 수다를 듣다가 고개를 저었다.

“사제.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 자오도 그렇고요.”

“……?”

“그만 나가서 쉬세요. 저녁 먹을 때 보죠.”

“……알겠습니다.”

정광은 두 사람이 나가자 사총관을 떠올렸다.

‘왜 내게 자신의 가치를 드러냈지? 역시 튼튼하다는 줄에 결함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더 좋다.

서로 이용할 수 있게 되니까.

물론 손해를 볼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정광은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을 생각했다.

‘숙소는 괜찮은데 밥도 맛있으려나?’

맛있었다.

그를 비롯한 무혈단원들은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술까지 몇 잔씩 걸치자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공우와 함께 유이하게 차를 마시던 정우가 정광에게 물었다.

“사제. 이제 어떡할 셈이지?”

“먼저 정보를 모아야겠죠.”

‘정보’라는 말에 유정풍이 반색했다.

“아우. 우형(愚兄)이 활약할 때인가?”

“네. 화산, 종남, 사마련 섬서 지부. 세 세력의 높은 이들에 관한 정보를 캐주세요.”

“캐낼 것까지야. 본방의 방도들이 이미 취합했을 걸세.”

“전체적인 것 말고 그들의 비리에 관한 것만요.”

“……비리?”

“네. 그것만 중점적으로.”

의욕에 가득 차 있던 유정풍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정보라는 것이 비리가 포함될 수밖에 없으나 그것만 콕 집어서 말하자 기분이 좀 그래서였다.

게다가 화산과 종남의 것까지 캐라니. 모양새가 영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모양새 따위는 상관없게 되었다.

“힘드시면 하오문(下汚門)에 의뢰하고요.”

“아우! 본 방을 두고 어찌 그런 자들을 찾는가!”

“하오문이 어때서요?”

“어떻긴! 돈 몇 푼에 팔려 이쪽에 불었다 저쪽에 불었다 하는 염치없는 자들이잖아!”

유정풍은 씩씩대다가 승낙했다.

“내 그냥 격장지계에 넘어가 주겠네.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시작하지.”

“네. 수고하세요.”

유정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정우가 또 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무얼 하면 되느냐?”

“일단 푹 쉬시면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세요.”

“그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낫겠지. 사제도 푹 쉬어라.”

“전 자고 일어나서 사마련에 갈 건데요.”

“그래. 사제도…… 무어라? 어딜 가?”

“사마련 섬서 지부요.”

정광을 제외한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정우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왜?”

“지부장을 만나려고요.”

“……오, 옥기린?”

정광이 씩 웃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사악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시작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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