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그럼 안 되겠네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 남양(南陽)에서 섬서성의 성도(省都) 서안(西安)까지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대충 잡아도 천리(千里)가 넘어 꽤 오랜 시간을 가야 했지만, 정광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아니, 넘쳤다.
주위 풍경을 구경하며 걷다가 지겨워지자 재물이 실린 마차 지붕에 드러누웠다.
슬쩍 육포를 꺼내 씹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그렇게 자연스러운지.
그 와중에도 마차를 모는 백승무를 타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제. 상단의 자제가 마차도 제대로 못 몰면 어떡해. 너무 많이 흔들린다.”
“저는 주로 안에 타는 역할이었는지라…….”
“아. 곱게 컸구나. 유모답지 않게 애지중지했나 보네.”
백승무는 실소를 흘렸다.
정광과 함께해 온 세월이 얼마인가. 그가 심심해서 이런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래서 전음을 보냈다.
-사형. 지루하신 것 같은데 술이라도 한 병 올려 드릴까요?
-역시 사제야. 대상단의 자제쯤 되면 마차처럼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지.
그때, 옆에서 걷던 정우가 끼어들었다.
“사제. 너무 천천히 가는 것 같구나. 좀 더 서둘러야 하지 않겠느냐?”
“다른 곳은 몰라도 섬서성은 괜찮아요.”
“양측이 실제로 싸우는 게 아니라 합법적인 선을 지키며 이권 다툼을 하고 있어서?”
“네.”
“맹에서 미리 연락을 보냈으니 화산과 종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우리한테 별 기대 안 하고 있을 텐데요 뭐.”
“……그렇긴 하겠지.”
구대문파의 자리를 수백 년 동안 지켜온 화산과 종남이었다.
그런 그들도 고전하고 있는 판에 십여 명의 후기지수들이 원군으로 오다니, 대체 무슨 기대를 하겠는가?
아니, 그 원군의 수장이 하는 일마다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키는 정광이었으니, 차라리 오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일지도 몰랐다.
“그래. 네 뜻대로 하거라.”
“그런데 대사형 말씀도 맞아요.”
“……?”
“마냥 놀지 말고 할 건 해야죠. 읏차.”
정광이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선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슬슬 시작해야겠네요. 자오.”
“네, 진옥룡.”
“척후를 부탁해요. 우리가 최상의 몸 상태로 서안까지 도착할 수 있게.”
“알겠습니다.”
“정현 사형.”
“응? 나?”
정광은 의아해하는 그에게 임무를 내렸다.
“네. 자오와 함께 척후를 맡아주세요.”
“……!”
무혈단원들은 안쓰러운 눈길로 정현을 바라봤다.
자오와 함께 척후라니.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하지만 정현은 달랐다.
호기심 많은 그에게 자오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존재였다.
출신도 그렇고 경험도 그렇고.
중간중간에 말만 잘 끊어주면 재밌는 이야기를 잔뜩 풀어내는 만담꾼인 것이다.
“좋아. 재밌겠네.”
“……!”
무혈단원들 모두가 놀랐다.
특히 자오는 놀람을 넘어 가슴 벅차 하고 있었다.
“……정현 도장. 고맙…….”
“하하. 도장이라니요. 그냥 정현이라 불러주십시오.”
“하지만…….”
“자. 어서 가시죠.”
“아, 알겠소.”
두 사람은 경공술을 펼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정풍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자오 대협이야 그렇다 치고. 곤륜의 경공술은 명불허전이구나.”
마침 같은 곤륜의 제자인 정광이 신법을 펼쳐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드러누웠다.
“……아우. 우린 무엇을 하면 되는가?”
유정풍의 말에 정광이 답했다.
“걷고 먹고 자면 돼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무혈단은 정말 그렇게 하게 됐다.
한참을 걷다가 배가 고파지면 그 지역에서 가장 평판 좋은 반점에 자오와 정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를 즐기고 걷다 보면 훌륭한 객잔이.
자고 일어나 걸으면 또 맛있는 반점에 가게 되었다.
‘이거 너무 편하게 가는 거 아니야?’
무혈단원들의 마음을 안 걸까?
정광은 조금이나마 힘쓸 기회를 줬다.
종종 시장이나 다른 곳에서 행패를 부리는 흑도패거리들을 징치하게 한 것이다.
고마워하는 민초들을 축원해 주는 건 덤이었다.
이렇게 무혈단은 하남성을 넘어 섬서성으로 접어들었다.
민초들 사이에서 그들의 명성은 커져만 갔다.
소문은 달리는 말보다 빠르다 했던가.
마침내 서안에 도착했을 때, 무혈단을 맞이한 건 화산과 종남만이 아니었다.
많은 민초들이 모여 그들을 환영했다.
* * *
화산파 제자 상원은 입을 떡 벌렸다.
‘이렇게 많이 모이다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이 무혈단을 반기는 것 아닌가.
특히 정광을 향한 환호는 압도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씁쓸해졌다.
‘여기가 섬서성인지 청해성인지 알 수가 없구나.’
섬서성은 화산파의 텃밭이건만.
민초들은 화산파에 저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최소한 상원이 알기엔 그랬다.
‘그래도 싸지.’
툭하면 눈치 없다고 구박받는 그였지만 알 건 알았다.
화산은 도문이 아니라 세속의 이득을 추구하는 방파(幇派)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민초들이 왜 반기겠는가?
‘하지만…….’
일전에 만나봤을 때도 느꼈지만 곤륜은 달랐다.
‘정녕 도문(道門)이라 불릴 만했지.’
본인의 등선(登仙)을 위해 힘쓰는 게 아니라 세속의 어려움을 보듬는 도문.
수없이 많이 들은 소문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진옥룡은 특별한 존재였다.
‘자신의 평판은 신경 쓰지 않고 협행을 하는 도사라…….’
머나먼 청해성에서부터 그나마 가까운 산서성까지.
정광이 그곳들을 누비며 행했던 일들이 섬서성에서도 회자되고 있었다.
‘헌데 그런 그를 가까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구나.’
무림맹주로 남궁화인을 밀다가 물을 먹은 화산이었다.
팽수관이 맹주 자리에 오르는 데 정광이 큰 공을 세웠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정광을 탐탁지 않아 하는 화산의 웃어른들은 그와 같은 항렬인 상 자 배로 하여금 무혈단을 맞이하게 했다.
푸대접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으나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상 자 배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때가 덜 묻은 데다 눈치까지 없는 상원 한 명만 빼고.
언제나 그랬듯 이런 이득 없는 일은 그의 차지였다.
‘내가 틀린 말을 했던 것도 아닌데…….’
비록 같은 배분이긴 하나 도와주러 온 이를 상 자 배가 맞이하는 건 실례되는 일 아니냐고 했다가 욕까지 먹었다.
지난 일을 떠올리다 보니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빌어먹을. 상원아, 울면 안 돼. 원래 그런 늙은이들이잖아.’
어쨌든 다 지난 일.
인사를 해야 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종남을 대표해서 나온 우만은 꺼림칙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면 나라도…….’
정광에게 다가가려는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아까부터 민초들과 뭔가 대화하던 정광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혈단이 그 뒤를 따랐다.
민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가는 거지?’
정광에게 다가가기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상황.
상원은 사제들을 이끌고 그들을 따라갔다.
커져가는 궁금증을 억지로 누르면서.
그리고 도착한 곳은 적당한 크기의 시장이었다.
‘……이곳엔 왜?’
문득 지금껏 들어왔던 소문들 중 일부가 떠올랐다.
‘서, 설마?’
맞았다.
무혈단은 불량스럽게 보이는 사내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모두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던 흑도패였다.
“갑자기 무슨!”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종남파의 우만이 내공을 끌어 올려 외쳤다.
“진옥룡! 지금 무얼 하는 것이오?”
정광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많은 분께서 부탁하셔서 협행 하는데요.”
“당장 멈추시오!”
“왜요?”
“그야…….”
우만은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민초들이 냉랭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작게 수군대는 소리까지!
“협행을 하는 분을 왜 말려?”
“왜긴 왜겠나? 종남의 세력권이니 나서지 말라는 게지.”
“거참. 그러면 본인들이 직접 협행을 하던가.”
“예끼. 귀한 분들이 이런 곳까지 신경을 쓰실 리가 있나.”
우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수군대던 사람들이 찔끔했다.
그 모습을 본 정광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저기요. 종남 도우(道友)님.”
“……말하시오.”
“왜 죄 없고 선량한 분들에게 겁을 줘요?”
“……내가 언제…….”
“아까요. 지금도 그러고 계시네요.”
“……후우우…….”
우만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무량수불. 설마 내가 그러겠소이까.”
“어? 분명히 화내고 계셨는데? 다들 보셨죠?”
우만은 눈동자를 굴려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모두 정광의 말이 맞다는 기색이었다.
‘어쩐다.’
아니라고 해봐야 꼴만 우스워질 터.
우만은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 대답했다.
“사실 화가 난 것이 맞긴 하오.”
“거봐요.”
“하지만 대상을 오해하지 마시오. 빈도는 죄 없는 이를 괴롭히는 흑도패에게 화가 난 것이외다.”
“아. 그래요?”
“그렇소.”
“그러면…….”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그럴듯한 대답을 해놓고 만족해하던 우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같이 잡죠.”
“……!”
“무량수불! 다들 길 좀 틔워주시겠습니까! 종남의 협객께서 악인들을 때려잡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판국에 어찌 몸을 뺄 수 있겠는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우만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민초들에게 종남의 협의를 보여줘야 했다.
‘사마련 산서 지부와는 달라. 섬서 지부 놈들은 흑도에 손을 안 대고 있지. 악소 몇 놈 잡아봐야 문제가 생길 일은 없어.’
우만은 협객의 가면을 쓴 뒤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종남은 도문이자 협을 행하는 문파! 미처 이곳 상황을 몰랐으나 알게 되었으니 악인을 징치할 것이오!”
지켜보던 정광은 속으로 웃었다.
‘늦었어, 인마.’
민초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힘이 없는 만큼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었다.
우만이 등을 떠밀려 이런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명분도 세웠고 주도권도 잡았네.’
하남성에서부터 이곳까지 협객행을 한 보람이 있었다.
서안 민초들의 지지를 얻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하든 협객행으로 비칠 터.
민초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준 종남은 정광이 하는 일에 제동을 걸기 힘들어지리라.
‘그럼 화산도 끌어들여 볼까.’
마침 전에 봤던 얼굴이 있었다.
정광은 상원을 향해 소리쳤다.
“화산파 도우님들도 함께하실 거죠?”
“……!”
좌중의 시선이 상원을 비롯한 화산파 제자들에게 꽂혔다.
“어? 아니에요? 그럼 실망인데.”
정광의 말과 달리 사람들의 시선에는 실망을 넘어 적의까지 담기기 시작했다.
침묵하던 상원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불가하오.”
“……!”
민초들도, 우만도, 심지어 정광까지 놀랐다.
“왜요?”
상원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껏 못 본 체하던 일을 이제 와서 나서기 부끄러워 그러오.”
“와. 지금 하신 말이 더 부끄럽지 않아요?”
“사실인데 어쩌겠소.”
“…….”
그는 정광을 향해 포권했다.
“화산의 제자 상원, 진옥룡 덕분에 눈이 뜨였소이다. 그대의 협행을 똑똑히 보고 돌아가 본문의 어르신들께 고하겠소. 섬서성엔 화산이 있는데, 왜 외지에서 온 분이 협행을 해야만 하는지 말이오.”
말을 마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세속의 이익만 챙기려 하지 말고 어려움을 도와야 하거늘…….’
그런 것을 위해 화산에 오른 게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도사다운, 그리고 협객다운 화산이었다.
한편 정광은 상원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재밌는 녀석이네.’
우울증 걸린 훗날의 협객쯤 되려나.
이제껏 보지 못한 유형의 녀석이었다.
‘겉으로만 협이 어쩌고 하는 놈들보다야 백배 낫지.’
소맷자락에 매화 좀 수놓고 다니면 어떤가.
가슴이 화끈하면 사내지.
정광은 흡족한 얼굴로 제안했다.
“밥이나 같이 먹죠.”
“……밥?”
“네. 나중에요.”
정광은 시선을 우만에게 돌렸다.
우만은 정광에 의해 한번 물먹고, 상원에 의해 두 번 물 먹은 상황.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가는데, 정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남 도우님. 서안에서는 종남의 세력이 더 크지 않나요?”
서안과 종남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흑도의 행패를 못 본 척하셨어요?”
“……못 본 척한 적 없소.”
“아. 그럼 능력이 없어서 모르셨구나.”
“……!”
우만은 진퇴양난이었다.
세 번이나 물을 먹은 것이다.
정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천하의 종남인데.”
“…….”
“어라? 그러면 말이 안 되는데?”
“…….”
“뭐 지난 일은 접어두고. 오늘 협행 한번 제대로 해보시죠.”
안타깝게도 우만에겐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무혈단이 눈부신 속도로 흑도패들을 해치워 나간 것이다.
우만과 종남 제자들은 무혈단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기도 벅찼다.
정광이 무혈단을 이끌고 서안에 도착한 당일.
반나절도 안 되는 사이, 크고 작은 흑도패가 여섯이나 날아갔다.
“종남 도우님. 수고하셨어요.”
“헉. 헉 헉…….”
“그럼 또 봬요.”
“헉. 헉. 헉…….”
정광이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간신히 숨을 고른 우만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무혈단은 본문과 화산의 손님. 숙소를 잡아놨소이다.”
“어딘데요?”
“인근의 객잔 하나를 빌렸소.”
정광은 시선을 돌려 상원을 바라봤다.
“혹시 전에 묵었던 거기에요? 그 화산의 속가 문파에서 운영하신다는 곳이요.”
상원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그곳이 아니라 다른 곳이오.”
“어? 왜요?”
“그, 그것이…….”
“아. 사마련에게 뺏겼나 보네요.”
“……맞소이다.”
“무량수불. 객잔을 위해 제(祭)라도 지내 드리죠. 근데 이번에 잡은 곳은 그곳보다 더 좋은가요?”
“비, 비슷한 것 같소만.”
“그럼 안 되겠네.”
“……?”
정광은 상원과 우만에게 포권했다.
“미리 생각해 놓은 곳이 있거든요. 거기서 묵다가 필요할 때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