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48화 (148/569)

148화

출진(出陣)

정우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했다.

“사정을 봐주어 고맙소.”

남궁력도 약간 창백한 얼굴로 포권했다.

“제가 드릴 말씀이군요. 감사합니다.”

다음 대화는 전음으로 이루어졌다.

-사제에게 좀 전에 듣고야 알았소이다. 몸이 완전치 않으신 걸 모르고 내가 과욕을 부렸소. 미안하오.

-……괘념치 마십시오. 오늘의 후의, 잊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무혈단과 지룡단에 이어 정우와 남궁력의 비무가 끝났다.

지켜보던 원로들은 두 후기지수의 정정당당하고 수준 높은 대결에 만족했다.

“허허. 그래, 이게 바로 무림맹이지.”

한 원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자 다른 원로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하하. 찝찝했던 기분이 날아가 버렸소이다.”

“도호가 정우라 했지요? 곤륜의 앞날을 책임질 만하더군요.”

“검룡은 또 어떻소.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다고 들었거늘, 저리도 훌륭히 떨치고 일어나지 않았소이까?”

무공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오.”

“흘흘. 상대를 해쳐야 승부가 날 것 같자 양쪽 모두 조금씩 내공을 거두며 물러선 것 말이오?”

“그렇소이다. 정파무림의 정영(正英)들다운 모습이었소.”

“후후. 마치 과거의 우리를 보는 듯하더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팽수관은 어이가 없었다.

‘뭐? 과거의 우리?’

옛날부터 쥐새끼 같던 놈이 무슨!

팽수관은 마지막 말을 한 원로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려다 간신히 참았다.

‘잠깐.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광이 낀 일이 이렇게 모양새 좋게 끝나다니.

마치 꿈을 꾸는 듯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해.’

팽수관은 무혈단과 지룡단을 치하한 뒤 장내를 정리할 것을 명했다.

“부상자는 바로 의약당(醫藥堂)으로 옮기시오. 군사, 모두 수고했는데 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맹주.”

팽수관이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던 걸까?

제갈문형은 마치 준비했다는 듯 전낭 두 개를 꺼내 정광과 남궁력에게 건네줬다.

정광은 전낭을 받아서 무게를 가늠하더니 이맛살을 모았다.

“이거 너무 적은…….”

순간 팽수관이 내공을 끌어모아 외쳤다.

“자! 자! 모두 그만 갑시다! 논의할 일이 무척 많소!”

“알겠습니다, 맹주.”

팽수관은 제갈문형, 허청과 함께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원로들이 기꺼운 웃음을 흘리며 그 뒤를 따랐다.

정광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쏠쏠하네.’

전낭은 꽤 무거웠다.

그런데도 너무 적다고 말한 건 팽수관과 원로들을 빨리 보내기 위함이었다.

‘얘기를 마저 끝내볼까.’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복잡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는 남궁력이 보였다.

정광은 빙긋 웃으며 제안했다.

“다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죠.”

“……!”

* * *

장이 모친의 반점은 젊은 무인들로 꽉 채워졌다.

무혈단 전원에 부상이 가볍거나 비무에 참여하지 않은 지룡단원들이었다.

“요자전계(料子全鷄), 호랄탕(胡辣湯), 낙양연채(洛陽燕菜)요!”

“백주(白酒)도 양껏 부탁드립니다!”

좋아하는 요리와 술을 주문하는 무혈단원들과 달리 지룡단원들은 조용했다.

정광은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보며 물었다.

“배 안 고프세요?”

“……!”

지룡단원들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 같으면 배가 고프겠냐?’

형편없이 깨졌는데 밥이 넘어갈 리가 있나.

그것도 자신들을 깬 적들과 마주 보고 먹어야 한다니.

차라리 의약당에 실려 가 치료를 받는 게 낫지.

부러진 뼈마디에 부목을 대고 누워있을 동료들이 부러워질 정도였다.

정광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눈치채고 어루만지긴커녕 불을 붙였다.

“아. 깨져서 그러시는구나.”

“……!”

“하하. 질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

지룡단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데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맞아요. 뭘 그런 걸 가지고.”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꽂혔다.

제갈린이었다.

“눈빛들이 왜 그래요?”

그녀는 지룡단원들을 탓한 뒤 정광에게 두 손을 모았다.

“덕분에 정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비꼬는 것이 아닌 예의를 갖춘 행동과 정중한 말투.

그러면서도 당당한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한쪽 눈이 웅묘(熊猫)처럼 검게 멍들었는데도 말이다.

정광도 진지한 얼굴로 답례를 표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지금 한 번 더 할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런. 아쉬워라.”

“다음에 감탄으로 바꿔 드리지요.”

정광은 제갈린의 빛나는 눈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가 자식 복이 있네.’

머리도 있는 데다 감정도 조절할 줄 안다.

거기에 투지까지 있으니 경험만 더하면 꽤 괜찮게 성장하리라.

“그럼 맛있게들 드세요.”

“네? 단주는……?”

“아. 저는 그쪽 단주와 할 말이 있어서요.”

묵묵히 앉아 있던 남궁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광이 그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는데 제갈린의 전음이 들려왔다.

-저는 들으면 안 되는 대화인가요?

-네. 심심하시면 자오와 얘기하고 계세요.

정광은 눈뿐만 아니라 안색까지 시커메진 그녀를 두고 남궁력과 독방에 들어갔다.

“앉으시죠.”

문을 닫으며 권하자 남궁력은 그대로 따랐다.

“…….”

“왜 말이 없으세요?”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기다려 드려요?”

남궁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말투가 변했다.

“괜찮소. 다 됐소이다.”

“어라? 둘이 있는데 반말 안 해요?”

정광이 의아해하자 남궁력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두 번이나 당한 주제에 자존심을 세워서 뭐 하겠소.”

“그렇긴 하죠.”

“……굴복한 게 아니오. 그대를 낮춰봐야 내가 더 낮아질 뿐이기에 그러는 것이오.”

“그것도 그렇고요.”

남궁력은 매서운 눈빛으로 정광을 쏘아봤다.

“언젠가 내 그대의 위에 서서 다시 하대할 날이 올 것이오.”

“기대되네요. 힘내세요.”

“……결론부터 얘기합시다. 비무 중 그대가 요구한 대로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전부 다요?”

“지룡단은 사문에 사마련과의 싸움에 내보내 달라고 계속 간청한다. 사마련과의 일이 정리되면 천룡단과 함께 청해성으로 가, 마교를 막겠다고 주장한다. 되었소이까?”

“네.”

정광이 빙그레 웃자 남궁력은 이마를 좁혔다.

“우리를 이용해 사문을 움직여 사마련은 물론 마교와의 싸움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려는 속셈인 걸 아오.”

“마침 지룡단이 원하던 것 아닌가요?”

“이렇게 급박히는 아니지.”

“아직 모자란 걸 아시네요.”

“…….”

“하지만 모자라니까 더 해야 한다는 것도 아시잖아요.”

남궁력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렇소?”

“그래야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수 있을 테니까.”

“…….”

“부족한데도 나서서 피를 흘린다.”

“…….”

“위 배분 분들처럼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어지겠죠.”

정광의 말대로였다.

남궁력의 아비인 남궁화인은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을 넘어 이순(耳順)으로 가고 있는 나이.

그 배분의 사람들도 대동소이했다.

“평화가 너무 길었죠? 그 나이가 되어서야 전면에 나설 수 있고.”

“…….”

“손주 볼 때잖아요. 품고 있던 뜻도 다 사그라지겠네.”

“…….”

“싸우다 다치거나 죽는 분들이 나와야 남궁 소협도 뭔가 할 만한 틈이 생길 텐데.”

“……말씀이 심하구려.”

“완화해서 걸러 들으세요.”

“……그대도 그렇소?”

“저요?”

정광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었다.

“아뇨. 사부님 대에서 계속 죽어라 일하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래 봐야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다고…….”

“그다음엔 사형들이 떠맡고요.”

“……그대는? 정녕 원하는 것이 없단 말이오?”

정광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가슴을 활짝 폈다.

“놀러 다닐 건데요.”

“……!”

“어? 표정하고는. 소협의 야망은 존중해 드릴 테니, 제 것도 존중해 주시죠.”

남궁력은 정광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놀러 다니시겠다? 어디 두고 보겠소이다.”

“따라다니시려고요?”

“……됐소. 어쨌든 그대의 뜻대로 할 테니 더는 얘기하지 맙시다.”

“그러죠. 근데 제갈 소저나 다른 단원들을 통제할 자신은 있어요?”

“통제가 아니라 같이 걸으면 되오. 그녀도 단원들도 품고 있는 야망이 크니까. 나처럼 거칠진 않지만…….”

제갈린뿐만이 아니었다.

평화로운 무림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또래들은 명성을 빨리 쌓아 높이 올라가길 원했다.

자신들의 피를 밟고서라도.

“좋아요. 믿을게요. 지룡단이 아니라 유혈단(有血團)이라 불리실 정도로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윗분들도 적극적으로 싸울 테니까? 얼마나 피를 흘리란 거요?”

“벅차면 적들의 피도 합치세요. 맹을 위해선 그게 더 낫겠네요. 아. 청성의 청룡 그분은 웬만하면 쉬시라 하죠. 무룡(無龍)은 아니더라도 반룡(半龍)쯤은 됐을 테니까.”

남궁력은 정광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만 가보겠소이다.”

그리고 일어서려는 순간 정광이 덧붙였다.

“아까 싸시기 직전이라 하나는 말씀 못 드렸는데.”

남궁력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들어나 봅시다.”

“흠. 이제 와서 마냥 해달라 하기도 뭐하고. 그거 고쳐 드릴 테니 주고받는 거로 하죠.”

“……!”

“싫어요? 그럼 말고요.”

남궁력의 눈동자가 폭풍을 만난 조각배마냥 흔들렸다.

“……그 후유증을 고칠 수 있단 말이오?”

“네.”

“……그런데 왜 완전히 치료해 주지 않았었지?”

정광은 분노하는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거든요. 지금은 가능해졌고요.”

꾸준히 먹어온 영약과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 덕분에 늘어난 내공, 그만큼 세밀해진 진기의 수발(受發)이 그걸 가능케 했다.

정광으로선 당연한 일이었지만 남궁력으로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벽을 뛰어넘었다고?’

말도 안 된다.

차라리 할 수 있었으면서 안 했던 게 더 말이 되리라.

‘……하지만 그게 더 무섭군.’

저 나이에 그런 경지라니.

남궁력은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뜬 그의 두 눈은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오?”

그 순간, 정광이 두 눈을 번뜩이며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쉿.”

긴장한 남궁력이 전음으로 물었다.

-누가 우리의 얘기를 엿듣고 있소?

정광은 문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문이 열렸다.

장이의 모친과 점소이들이 고기 요리와 술병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이야. 푸짐하네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에구머니. 감사라니요. 은공,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편하게 하는 건데요.”

탁자 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요리와 술이 놓였다.

“그럼 편히 즐기십시오.”

“하하. 네.”

장이의 모친과 점소이들이 나갔다.

정광은 황당해하는 남궁력에게 선심 쓰듯 권했다.

“일단 드시죠. 이 집, 꽤 맛있거든요.”

* * *

정광은 주즉시공으로 뽑아낸 독을 빈 병에 잘 넣었다.

그리고 남궁력과 방에서 나와보니 장내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술기운에 젖은 상당수의 청년들이 아까의 비무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것 아닌가.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어찌 됐든 비겁한 수 아닌가!”

“비겁? 실전에 비겁이란 게 있나?”

“뭐가 어째?”

“왜? 한 번 더 할까?”

이대로 가다간 패싸움이 일어날 판이었다.

그 모습을 둘러보던 정광은 흡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저 나이 때는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지.”

남궁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정광은 손뼉을 쳐서 시선을 집중시킨 뒤 친절한 얼굴로 제안했다.

“말로만 토론하니 이해가 잘 안 가죠? 이쪽으로 나오시죠. 몸에 새겨 드릴게요.”

“…….”

토론은 조용하게 진행됐다.

밥값과 술값은 남궁력이 전부 냈고.

“……나만 맹주께 돈을 받은 게 아니오만.”

“그래서 조금 깎아드렸잖아요. 저 이 반점 전주(錢主)거든요.”

“……?”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광은 육포로 가득 찬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온 장이에게 물었다.

“어? 또 우셨어요?”

전과 달리 장이는 의연한 얼굴로 답했다.

“피를 흘리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눈물도 아예 안 흘리는 게 좋은데.”

정광의 말에 장이를 포함한 모두가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허청이 정광에게 물었다.

“저것은 어쩔 셈이냐?”

자오가 등에 메고 있는 가균의 한풍도(寒風刀)를 말함이었다.

“흐음. 글쎄요.”

팽강휘가 망설이다가 끼어들었다.

“단주. 내게 주면 안 되겠소?”

“어? 괜찮겠어요?”

“……?”

“이거 들고 다니시면 사마련의 척살(刺殺) 대상 일 순위에 오르실 텐데.”

“……하하. 노, 농이었소이다.”

한풍도는 애물단지였다.

정광이면 모를까, 사마련이 눈에 불을 켜고 회수하려 할 텐데 누가 무슨 담량(膽量)으로 그걸 갖고 다니겠는가.

허청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청했다.

“내게 주겠느냐? 긴히 쓸데가 있구나.”

팔기도 마땅찮겠다, 정광은 그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허청은 한풍도를 챙긴 뒤 정광, 정우, 정현, 백승무를 한 번씩 꼭 안았다.

그리고 무혈단원들 한 명, 한 명에게 포권했다.

“조심하게. 무운을 비네.”

“감사합니다!”

거대한 무림맹의 정문이 열리며 무혈단이 출진(出陣)했다.

맹주 이하 전 맹도들은 엄숙한, 또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들을 배웅했다.

“자! 가죠!”

정광은 기운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산서성에서부터 끌고 온 마차와 단원들이 따랐다.

목적지는 하남성 바로 옆에 있는 섬서성이었다.

* * *

화려한 방에 홀로 앉아 있던 잘생긴 청년이 두 눈을 빛냈다.

‘이것은!’

무언가 거대한 기운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

낯설지 않은 기운이었다.

“후우우…….”

청년은 확신에 찬 얼굴로 한탄했다.

“또 어떤 소저들이 찾아오려고 이러는지 원.”

사마련 섬서 지부장.

옥기린(玉麒麟)이란 별호로 명성을 떨치는, 사마련주의 막내 제자 후위진의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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