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진퇴양난(進退兩難)
‘요놈 봐라?’
정광은 흥미로움을 느꼈다.
남궁력이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아닌가.
매서운 눈빛만큼은 숨길 수 없었지만 평정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가상했다.
‘이 나이에 이 정도라. 아비보단 나아질지도 모르겠네.’
남궁화인과 비교해 보던 정광은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다시 생각해봤다.
‘일단 밟아주고.’
어떻게 도발할까.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좀 점잖게 해야 하리라.
정광은 남궁력에게 포권했다.
“지룡단주. 수고하셨어요.”
남궁력도 어쩔 수 없이 포권했다.
“무혈단주야말로 수고했네.”
“조금 더 같이 수고할까요?”
“……무슨 뜻인가?”
정광은 눈짓으로 원로들을 가리켰다.
“사파나 마도의 수법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의 수를 익혀야 하지만 무림맹의 본질은 정파 아닙니까?”
“……그래서?”
“어르신들께선 은근히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이렇게 가는 건 정파의 본질을 저버리거나 변질시키는 게 아닐까 하고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중구난방 떠들고 있던 원로들은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내심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야 그렇다 쳐도 아직 어린 배분이 걱정이구나.’
‘적을 알기 위함이라 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런 수법에 젖게 되면 어쩐단 말인가.’
남궁력도 그들의 안색을 보고 걱정하는 바를 눈치챘다.
그러자 정광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궁금해졌다.
“……자네의 고견을 말해주게.”
“고견까진 아니고요. 우리가 보여 드리면 어떨까요?”
“……보여 드린다?”
“네. 사(邪)와 마(魔)의 사특한 수법을 접한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란 것을요. 정(正)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한 것 아니겠습니까.”
맞장구치긴 싫었으나 어쩔 수 있나.
안 쳤다간 사파라고 손가락질당할 판이다.
“……그렇지.”
“좀 전엔 어르신들의 눈을 어지럽혔으니 이번엔 정(正)과 정의 비무를 하는 겁니다. 우리 배분의 강함과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보여 드리는 거지요.”
“…….”
남궁력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황한 말이었지만 결국 한 번 더 붙어보자는 것 아닌가.
“비무를 하자?”
“네. 일대일로요.”
“정정당당하게?”
정광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의 강함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 쪽에선 융통성을 조금 섞어가며 할까요?”
남궁력은 순간적으로 계산을 마쳤다.
‘날 바보로 보는 거냐.’
간교한 수법들을 꽤 오랫동안 상대해 보고 난 다음이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수락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래도 패배를 설욕할 기회. 물러설 순 없어.’
좌중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모여져 있었다.
비무를 하고,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렇다면…….’
남궁력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기로 했다.
“그 융통성이란 건 아까 봤으니 또 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 둘이 해보자는 건가?”
“네. 단주끼리 해야 모양새가 살겠죠.”
“내 생각은 다르네.”
“네?”
남궁력은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았다.
“나는 자네의 상대가 되질 않아. 가균을 꺾고 한풍도(寒風刀)를 빼앗은 자네를 내가 어찌 상대할 수 있겠는가?”
지켜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광은 후기지수가 아니라 경지를 측량할 수 없는 고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사실이긴 하나 검룡 저 아이도 대단하군.’
‘호승심이 넘칠 나이인데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깨끗하게 인정할 줄이야.’
과거 남궁력의 오만했던 언행을 떠올리며 속으로 비웃는 자들도 있었으나 호감을 느끼는 자들이 더 많았다.
남궁력도 장내의 분위기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지룡단을 대표해 내가 나서는 것은 맞네. 하지만 자네는 너무 과해. 비무가 끝난 지 꽤 지났으니 무리는 없을 터. 다른 단원이 나서는 게 좋을 것 같군.”
“이거야말로 모양새가 좀 그런 것 같은데요.”
“별문제 없는 것 같네만. 무혈단에는 나와 같이 묶여 불리는 구룡사봉이 다섯이나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무혈단에는 지룡단에 비해 고수가 무척 많았다.
“흐음.”
“나는 준비가 되어 있네. 비무할 단원을 정하게나.”
남궁력은 아예 정해진 것처럼 말하며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 나쁘지 않군.’
노회한 이들 중엔 그가 치졸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머리를 쓸 줄 안다고 인정하는 자가 더 많으리라.
‘자. 분위기는 만들어졌다. 어서 말해라.’
그의 바람대로 정광이 바로 답했다.
약간은 다른 방향으로.
“그럼 아무나 고르세요.”
“……아무나?”
“네. 입맛대로.”
“…….”
남궁력은 울컥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음을 다스리고 냉정하게 따져봤다.
최대한 체면을 차리며 반드시 이겨야 했기에.
‘구룡사봉 중 다섯에 당가의 소가주…….’
하루 전이었으면 그 누구에게도…… 아니, 공우 정도만 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이 아까의 비무에서 보여준 무위는 이제껏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을 빼면…….’
사마련 출신인 자오는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연배도 다른 데다 범상치 않은 실력, 비열한 수법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금권검협이라는 허명을 듣는 저놈은…….’
곤륜의 막내 제자라고 했던가.
장이라는 일반 무인처럼 싸워봐야 체면만 깎이는 놈이다.
그렇다면 남는 건 곤륜의 정우와 정현인데…….
‘정현 저자는 나보다 두어 살 어렸지.’
그와 반대로 정우는 네다섯 살 많았다.
‘둘 다 제법 하는 것 같긴 했지만…….’
잠시 지룡단에 있었을 때는 물론 아까의 비무에서도 구룡사봉에 비해 뛰어나 보이진 않았다.
‘좋아. 곤륜 정 자 배의 대사형인 정우, 저자를 꺾는다.’
나이도 다소 많은 명문의 대사형을 꺾는 거다.
모양새도 차릴 수 있겠다, 정광에게 화풀이도 할 수 있는 기회!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최상의 그림이었다.
“……무혈단주. 그대의 대사형과 겨뤄보고 싶네.”
“어라? 괜찮겠어요?”
남궁력은 정광을 쏘아보며 대답했다.
“물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맹주와 원로들의 승인하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목검을 들었다.
얼결에 싸우게 된 정우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서로 무공명을 알려주며 겨루지 말고 간결하게 가는 게 어떻겠소?”
“……왜 굳이?”
“그게 익숙해서 그러오.”
“……그렇게 하지요.”
“기수식도 빼는 게 좋을 것 같소만.”
“기수식(起手式)을 말입니까?”
“그렇소. 그게 서로 좋을 것이오.”
남궁력은 내심 혀를 찼다.
‘촌구석에 박혀 살아 그런가. 예의를 모르는군.’
그렇다면 가르쳐 주면 될 터.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즉시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으로 쌓아온 순후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목검에 내공이 담기자 원래 있던 자신감이 더 강해졌다.
‘태연한 척하고 있는 얼굴을 박살 내주마!’
정우 역시 남궁력을 박살 낼 생각이었다.
유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아는 비무는 그런 것이었다.
무엇보다 곤륜의 정 자 배 대사형으로서, 정광뿐만 아니라 곤륜 역시 강하다는 것을 구룡 중 상위에 꼽히는 검룡을 꺾어서 증명하고 싶었다.
비무 전에 정광이 적당히 상대해 주라고 했었지만…….
‘한 달 침상행이면 괜찮겠지.’
설렁설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먼저 움직인 건 남궁력이었다.
그는 일직선으로 짓쳐 들며 일검을 내질렀다.
천풍검법(天風劍法)의 군더더기 없는 일초식이었다.
정우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 대응했다.
부우웅-
목검이 허공과 함께 남궁력의 검을 가르려 했다.
강맹함을 자랑하는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이었다.
‘헛!’
생각 외로 강한 일격에 남궁력은 목검을 회수했다가 떨쳤다.
그의 목검이 정우가 그린 호선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쏘아졌다.
정우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찔러오는 목검을 또다시 양단하려 했다.
‘무식하기는!’
남궁력은 방법을 바꿨다.
‘창궁비연검(蒼穹飛燕劍)이다!’
일직선으로 찌르던 목검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그의 손목 움직임에 따라 빠르고 부드러운 변초를 쏟아냈다.
정우의 가슴을 노리는가 싶더니 어깨를 베었고, 허벅지를 찌르는 줄 알았더니 목을 가른다.
검룡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은 대단한 실력!
하지만 정우의 안색은 평온했다.
제자리에 굳게 서서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의 검초를 연달아 떨쳐낸다.
용을 잡는다는 이름에 걸맞는 강맹한 초식들!
어떻게든 뚫어보려 애쓰던 남궁력이 경악했다.
해도 해도 되지 않아서였다.
‘교활한!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그럴 리가 있나.
듬직한 성격과 성실함으로 신망을 받는 정우였다.
아까의 비무에서 힘을 아꼈던 건 변수가 많은 다수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
일대일 대결은 달랐다.
전력을 다해 압도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수였다.
그는 지금 정광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었다.
남궁력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건 어떠냐!’
빠르고 부드러운 변초로 공격하는 걸 멈추고 눈부신 쾌검을 쏟아냈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였다.
하지만 정우는 여전히 강한 검식으로 쾌검을 분쇄했다.
‘마, 말도 안 돼!’
정우는 뿌리를 내린 듯 굳건히 딛고 있던 발을 떼어 한 발, 한 발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남궁력은 그만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그도 전력을 다해야 할 터.
내공을 십성까지는 끌어 올려 싸워야 한다는 말인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놈만 아니었으면!’
과거 정광의 도발 때문에 독을 먹고 죽다 살아난 뒤 생긴 후유증.
홀로 수련하다가 그것을 알게 된 뒤 얼마나 절망했던가!
그렇다고 남에게 말할 수도 없었기에 속으로 끙끙 앓았다.
결국 불타는 분노와 투지로 후유증 없이 십성 내공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을 알아냈지만, 그걸 지금 써야 하다니!
‘속전속결! 터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끝낸다!’
무림맹의 거의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 꼴을 보였다간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터.
‘차라리 혀 깨물고 죽어버리는 게 낫지!’
세상에 태어난 뒤로 가장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간다!’
단전에서 막대한 진기가 솟구쳤다.
순간 그도 모르게 항문을 조일 뻔했으나 억지로 참은 뒤 목검을 휘둘렀다.
마음은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펼쳐서 정우를 난자하고 싶었으나, 소가주인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검법은 제왕벽력검(帝王霹靂劍)이었다.
제왕의 벼락!
남궁력의 한을 담은 위력적인 검초가 정우에게 쏟아졌다.
정우 역시 눈을 빛내며 맞섰다.
우직하게 후려치던 태허도룡검이 아니라 우아하면서도 멋진 기세를 담은 운룡십삼검(雲龍十三劍)이 펼쳐졌다.
남궁력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무식하기만 한 게 아니잖아!’
벼락을 떨어뜨렸건만.
용이 구름을 헤치듯 꿈틀거리며 벼락을 거슬러 올라왔다.
십여 개의 벼락을 더 떨어뜨렸지만 소용없었다.
용은 계속 자세를 바꿔 움직이며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궁력의 눈에 암울한 빛이 맺혔다.
‘십성을 넘어 십일성까지 끌어 올려야 하는가…….’
하지만 이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으니.
계속 십성으로 싸웠다간 결국엔 터질 것이다.
십일성으로 올리면 바로 터질 것이고.
어떻게 해도 답이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
오늘부로 검룡(劍龍)이라는 별호는 완전히 사라지고, 정광이 안겨줬던 치욕적인 별호만이 남게 될 판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인다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터.
‘방법이…… 방법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남궁력은 속이 시커멓게 타다 못해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거의 대등한 접전으로 보일 상황.
정우를 상대하느라 숙부 남궁신건에게 전음을 보낼 여력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절규할 뿐이었다.
‘제발 누가 이 싸움을 멈춰줘! 그렇게만 해주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마!’
그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걸까?
그 하늘은 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고.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성이 아닌 전음으로.
-그만하고 싶죠?
-……!
* * *
정광은 비무를 지켜보다가 피식 웃었다.
‘적당히 상대해 주라 했는데 호승심이 생겼나 보네.’
정우가 남궁력을 몰아치고 있었다.
곤륜의 강함을 증명하려는 것이리라.
‘하긴. 그런 마음은 있어야지.’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계획을 바꿔야 했다.
살짝 밟아주고 거래를 제안하려고 했는데, 위기에서 구해주는 대신 거래를 강요하는 꼴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뭐 그게 그건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정광이 눈을 빛냈다.
‘어라? 저거 저러다 또 싸겠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두 번이나 짓밟히면 재기불능이 될 터.
전에야 쓸모없었지만, 아비보다 나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데다 한 조직을 이끌게 된 놈을 이대로 버리긴 아까웠다.
-그만하고 싶죠?
-……!
-중지시켜 드려요?
-……!
남궁력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그토록 바라던 말이었건만.
‘하필이면 이놈일 줄이야!’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미미하게 저었다.
-어? 슬슬 신호가 왔을 텐데?
-……!
-아. 그냥 시원하게 싸시려고요?
-……!
싸는 것보다 분노가 먼저 터졌다.
‘이 새끼! 내 후유증을 알고 있었구나!’
아니, 아는 걸 넘어서 일부러 그렇게 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죽인다!’
안타깝게도 마음은 그랬으나 몸은 아니었다.
얼마 안 가 그가 먼저 수치사(羞恥死) 당할 위기!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멈춰 드려요?
남궁력은 재빨리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일단 사람이 먼저다.
굴욕은 훗날 어떻게든 갚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안 좋았다.
-멈추면 뭐 해주실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