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혹시 가시고 싶으신 분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이곳은 무림맹이다.
무림맹이 무엇인가?
협을 추구하는 정파들이 불의에 맞서기 위해 결성한 조직 아닌가!
그런데 시정잡배들도 꺼릴 만한 만행을 저질러 놓고 멋진 승부였다고?
‘진옥룡, 진옥룡 하더니.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사람들의 경악과 달리 정광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제대로 해낼까 긴가민가했는데. 아직 젊은 녀석들이라 그런지 사고가 제법 유연하네.’
명문정파라는 허울을 벗어던진 효율적인 싸움이었다.
무혈단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가만. 아예 이쪽으로 가버려?’
하필이면 다들 정파에서 나고 자라 억압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도 괜찮으리라.
‘오랜만에 좋은 일 한번 하지 뭐.’
무혈단원들은 정광에게 하도 당하다 보니 악에 받쳐서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정광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슬슬 나가서 얘기해 보자.’
그렇게 마음을 정한 그때, 한 도사가 벌떡 일어서며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청성파(淸成派)의 장로 청해였다.
남궁화인에게 뇌물을 받았다가 정광에게 털렸던 그는 남궁화인을 의심해서 팽수관을 맹주로 밀었던 자였다.
지금은 남궁화인과 팽수관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아끼던 사질인 청룡 도진이 어이없는 꼴을 당하자 참지 못하고 외친 것이다.
“무혈단주! 어서 대답하게!”
“뭘요?”
“명문의 제자가 다른 곳도 아닌 무림맹에서 이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해명을 해보란 말일세!”
정광은 황당했다.
해명은 무슨.
제대로 된 승부를 벌였는데 뭐가 불만이야?
바로 반박하려는데 팽수관이 끼어들었다.
“청해 도장. 진정하시오.”
“맹주! 이게 지금 진정할 수 있는 일입니까? 도진 저 아이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보십시오!”
팽수관은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도진을 힐끔 봤다.
게거품을 물고 가늘게 경련하는 모습을 보자 사타구니가 오싹해졌다.
“……흠. 흠. 그래도 다행히 피는 안 보지 않았소?”
청해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아니, 솟다 못해 터져서 피를 흩뿌릴 기세였다.
“다행이라니요! 맹주와 도진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
차라리 팔 한 짝을 내줬으면 내줬지,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수도 없는 일.
그냥 침묵을 지키자 청해가 날뛰었다.
“맹주! 혹시 도진을 해한 이가 맹주의 자제라 무혈단주를 두둔하시는 겁니까?”
“말씀이 심하시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요!”
“허어…….”
“빈도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팽수관은 눈만 굴려서 주변을 둘러봤다.
청해의 말대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원로 모두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무혈단원들이 속한 문파와 가문의 원로들까지!
팽수관은 내심 탄식했다.
‘적당히 좀 할 것이지…… 이 일을 어쩐다?’
어쩌긴 뭘 어째.
이럴 때 쓰라고 군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제갈문형에게 전음을 보내서 나서게 하려는데…….
‘……텄군.’
안색이 시커멓게 죽은 제갈문형은 한쪽 눈이 시커멓게 멍든 채 기절한 자신의 딸 제갈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다. 그냥 뒤집어 버려?’
최후의 절초를 써야 하나 고심했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정광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는 사내.
다른 누군가의 뒤에 숨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저기요, 청해 도장님.”
“오호라. 이제야 대답할 마음이 생겼는가? 어서 말해 보게!”
“진정하시죠. 도진 도우(道友)는 손해 본 게 없잖아요.”
“……무어라?”
“아까 팽 소협이 말한 것처럼 어차피 쓸데도 없는 데만 다친 거잖아요.”
“……!”
“설마 쓸 일이 있어서 그러시는 건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무량수불. 역시 그렇죠? 그럼 됐네요.”
“……뭐?”
“딱 봐도 터지진 않았으니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거예요.”
청해는 하도 어이가 없어 대꾸조차 못 했다.
정광은 그에게 두 손을 모아 보인 뒤 원로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자나 자제분이 조금 다쳐서 마음이 불편하신 거죠?”
조금?
조오금?
원로들은 어이없는 얼굴로 장내를 둘러봤다.
그들의 제자들과 딸자식들이 최소 한두 군데씩은 부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다.
비록 당오군과 당예지를 비롯한 당가 무인들이 치료를 해주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한 달 정도는 침상 신세를 져야 할 게 뻔했다.
‘됐군.’
상황을 살피던 남궁신건은 때가 왔음을 느꼈다.
원로들이 분노하고 팽수관이 한 발 물러선 지금이 기회였다.
“무혈단주. 조금이라 했는가? 한동안 정양해야 할 판에 조금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군.”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죠.”
“……무어라?”
“진검을 썼으면 부러진 게 아니라 잘렸을 텐데요.”
“……그런 비열한 수를 안 썼으면 그렇게 다쳤을 리도 없었을 걸세.”
“비열요? 아. 융통성 있게 싸운 걸 말씀하시는 거구나.”
“……!”
“이건 견해차가 있는 것 같으니 잠시 미뤄두고. 무혈단이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았으면 지룡단이 이겼을까요?”
남궁신건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개인의 무력은 물론 단원들 간의 연계까지 무혈단이 압도적으로 강했으니까.
그래도 할 말은 있었다.
“무혈단이 더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 그런데 왜 그런 수를 쓴 건가?”
“사파와 실전을 벌이는 것 같은 비무를 하기로 했으니까요.”
“누가 그걸 모르는가? 너무 과해서 하는 말일세.”
“과하다뇨.”
정광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하게 변했다.
“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다?”
“네. 최대한 많은 수법을 상대해 봐야 훗날 그런 수를 쓰는 자를 만났을 때 몸을 건사할 수 있으니까요.”
“…….”
“순진하게 상대하다가 어디 한 군데 잘려놓고 ‘이런 비열한 수를 쓰다니!’ 하고 외쳐봐야 뭐 합니까. 바로 목도 잘릴 게 뻔한데.”
“…….”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정파는 너무 순진해요. 시장통 악소가 던지는 석회가루에 눈이 멀어 칼침을 맞을 정도로요.”
“……경험이 부족한 어린 이들에게만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사고일세.”
“아닌데. 체면 때문에 쉬쉬해서 그렇지,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을걸요?”
사실이었다.
간혹 눈이 돌아간 악소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협행을 한답시고 나섰던 어린 무인은 생전 처음 보는 비겁한 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했다.
“이거야말로 체면 깎이는 일이죠. 미리 경험해 봤으면 코웃음 치면서 상대할 수 있는 것들인데.”
“…….”
남궁신건이 무언으로 긍정하자 정광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악소들도 별의별 수를 다 쓰는데 사파의 고수들은 어떻겠어요.”
“…….”
“물론 사파도 여러 부류가 있어서 정정당당하게 덤비는 이도 있죠. 하지만 그런 자들만 만나기를 원시천존이나 부처께 빌 수는 없잖아요.”
“…….”
정광은 원로들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맞췄다.
“이런저런 수를 겪어보며 대응하는 방법을 익히는 겁니다. 똑같은 수로 상대하자는 게 아니라 머리와 몸에 새겨두자는 것이지요.”
“…….”
“원로님들은 이미 강호에서 비열한 수를 상대하는 자들과 싸워보셨잖아요. 제자나 자제분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언젠간 맞닥뜨리게 될 것, 미리 알려주고 생명을 건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
“좀 전처럼 사파와 실전을 벌이는 것 같은 경험을 하면서 사망자가 한 명도 안 나오는 비무를 하는 겁니다. 한 문파나 가문이 아닌 무림맹 전체가요.”
“……!”
원로들의 눈이 번뜩였다.
귀가 솔깃해서였다.
‘하긴. 그런 수련이 좀 필요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하고 있었지.’
‘홀로 하면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안 했을 뿐. 나쁜 얘기는 아니야.’
‘모두가 함께라면 무엇이 문제 되겠는가.’
정광은 그들의 마음이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라고 한 말이었다.
‘고생 좀 해봐라.’
마냥 줄 수만 있나.
받을 건 받아야지.
“물론 원로님들도 함께 하시는 겁니다.”
“……!”
원로들은 황당했다.
우리는 또 왜!
정광이 그들의 의문을 풀어줬다.
“무림맹의 적은 사마련뿐만이 아니잖아요. 그쪽 수법도 미리 겪어봐야죠.”
“……아! 마교!”
“…….”
정광은 마교란 명칭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네. 혹시 그들을 상대해 보신 분 계신가요?”
“…….”
풍요로운 중원에서 오랫동안 놀고먹던 무림맹에 그런 이가 있을 리 있나.
“이런. 사마련 일이 대충 정리되면 천룡단도 청해성으로 가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생소한 적을 상대하다가 얼마나 피를 보려나.”
“…….”
“천룡단뿐만이 아니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원로님들도 수련하셔야 해요.”
“…….”
“제 말이 맞죠?”
침묵하는 원로들 대신 팽수관이 나섰다.
정광의 말에 동의했으나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서였다.
“뜻이야 좋다만 그들의 수법을 아는 이가 없는 게 문제군.”
“있는데요.”
“……!”
팽수관은 물론 원로들도 놀랐다.
“……설마 자네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맞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정광이 말하고자 했던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들이었다.
“군사님은 아시죠?”
제갈문형의 안색은 평소와 같이 청수했다.
딸의 얼굴에 멍이 좀 들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값진 경험을 했기에 마음을 추스른 지 오래였다.
정광의 언변을 즐겁게 감상하던 그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곤륜밖에 더 있는가.”
“아!”
사람들은 일제히 감탄하며 허청을 바라봤다.
그의 허리는 거목처럼 꼿꼿해져 있었고, 가슴은 바다보다 넓게 펼쳐져 있었다.
“사부님, 한 말씀 하시죠.”
“그래. 그래야겠지.”
허청이 눈을 빛내며 일어섰다.
천룡단은 물론 맹 전체를 수련시켜 마교와의 싸움에 더 큰 도움이 되게 할 기회 아닌가.
원로들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굳은 의지가 서렸다.
“본문이 그들과 오랫동안 싸워온 건 익히 알고 계실 것이오. 특히 진천마 그 천고의 악적(惡敵)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일곱 번의 침공이 있었소이다.”
“…….”
허청의 말이 어찌나 비분강개했는지, 마치 그 참상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자연히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정광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잘못 없다니까!’
자신의 제자를 비난한 허청이 계속 말을 이었다.
“마지막 칠 차 침공 때, 빈도는 약관도 안 된 나이었소. 그들은…… 정말 강하고 잔인했다오.”
“사부님. 추상적으로 말고 예를 하나 들어주세요.”
“……그래. 그게 낫겠구나.”
허청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빈도는 한 마두를 상대했소. 상대했다기보단 형편없이 밀렸었소이다. 곧 죽겠구나 싶었을 때 운학 사숙께서 나타나 그 마두의 어깨를 베었소. 팔이 통째로 잘리며 엄청난 핏줄기가 쏟아졌다오. 빈도는 그 마두가 더 이상 싸우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마음을 놓았소만…….”
“……?”
“자신의 잘린 팔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고 휘두르더이다.”
“……!”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죽었다 생각했는데 사숙께서 또 한 번 검을 휘두르셨소. 그 마두는 두 팔이 다 잘리게 되었지. 그런데…….”
“…….”
“끝끝내 달려들며 박치기로 빈도를 죽이려 하더이다.”
“……!”
“결국 사숙께선 마두의 목까지 자르셨소. 그리고 이런 교훈을 주셨다오.”
“……?”
“마교의 강함은 마공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
“네가 상상할 수 없는 수를 상상해라. 그래도 그 이상의 수가 나올 것이다.”
“……!”
원로들의 안색이 변했다.
평화로운 중원에서 사문의 이익이나 따지며 투덕거리던 이들이 어찌 그런 일을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사문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들이나 현협각에 새겨진 글귀들로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한 이에게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아…… 마교여…….’
‘진천마가 죽은 뒤로 이상하리만치 조용해.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까?’
‘수련을 하긴 해야 할 것 같군.’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원로들은 침중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광도 그랬다.
‘그래. 무인이면 최소한 그 정도는 돼야지.’
더 정신 나간 놈들도 많았지만 정광이 생각하는 적정선은 허청이 말했던 마교도였다.
‘그건 그렇고. 빨리 끝내자.’
정광은 원로들을 향하여 낭랑하게 외쳤다.
“악독한 수에 덧없이 스러져 가느니, 지금 좀 아프더라도 미리 배워놓는 게 낫죠!”
“…….”
“현협각에 모셔지는 분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
“혹시 가시고 싶으신 분 계신가요?”
“……!”
“그러고 싶으셔도 천천히 가셔야죠. 사문과 가문에 남는 사람들은 어찌합니까?”
“…….”
“어쨌든, 수련을 제안합니다!”
맹주 팽수관과 군사 제갈문형은 전폭적으로 밀어줄 기세였다.
원로들 대부분도 동의하는 듯했고.
정광은 흡족한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떠들었지? 자오한테 시키면 됐을 것을.’
아무렴 어떤가.
잘 정리됐는데.
‘그럼 이제 그만 가야…… 아!’
깜빡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손봐줘야 하는 놈이 남아 있지 않은가.
마침 그놈도 정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광과 남궁력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