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43화 (143/569)

143화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

무림맹에 있는 수많은 연무장 중 하나.

잘생긴 청년이 뒷짐을 진 채 매서운 눈빛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밝구나.’

그냥 밝은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만월(滿月)이 수많은 별들을 압도하는 밝기로 그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그 같군.’

만월에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만월을 지워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정광의 얼굴이었다.

‘……이 순간에도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냐?’

잘생긴 청년 남궁력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자격지심이란 걸 인정해서였다.

‘그는 나를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아. 아니, 아예 잊었을지도 모르겠군.’

남궁력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려고 하는데…….

“남궁 형, 아직도 여기에 계셨소?”

멀리서 들려온 말에 남궁력은 시선을 돌렸다.

구룡사봉 중 청룡(靑龍)으로 불리는 청성파의 도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물을 말이오. 전체 수련은 끝난 지 오래인데 왜 다시 왔소?”

“그러고 보니 서로 물을 필요 없는 걸 묻고 있구려. 하하하.”

작은 키와 어려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게 도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가늘었다.

“남궁 형. 내 솔직히 말하리다. 잠이 안 와서 검무나 한 번 더 추려고 왔소.”

“청성파의 연무장에서 하시지 않고?”

“나나 남궁 형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날이 밝으면 사문의 어르신들께 그 일을 고해야 하는데, 전날 밤에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긴 부끄럽지 않소이까.”

“…….”

남궁력 역시 그랬기에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러자 도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음? 남궁 형, 부정하지 않는 것이오?”

“사실이니까 그렇소.”

“허어. 자존심 강한 그대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소이다. 사람이 이렇게 변하다니…….”

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무림맹에 늦게 와서 얘기만 들었건만, 진옥룡 그자가 대단하긴 한가 보군. 천하의 검룡을 이렇게나 탈바꿈시키다니 말이야.”

“…….”

“하긴. 검도 아니고 독으로 굴복시켰으니 그럴 만도…….”

“그만.”

“……음?”

도진은 고개를 내려 남궁력을 바라봤다.

남궁력은 오만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진 건 진옥룡이지 그대가 아니외다.”

“…….”

“왜. 증명해 보이리까?”

도진의 눈이 빛났지만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그는 두 눈을 둥글게 휘며 대답했다.

“지룡단의 일개 단원이 어찌 단주와 싸우겠소?”

“…….”

“뭐 어쨌든 내가 알던 남궁 형으로 돌아왔구려. 덕분에 힘이 나외다. 내일도 그렇게 부탁하오.”

도진은 가볍게 두 손을 모은 뒤 사라졌다.

남궁력은 그의 뒷모습을 비웃음에 찬 눈으로 쏘아봤다.

‘어리석은 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군.’

주제도 모르고 나섰다가 엉망이 되도록 깨지리라.

마치 그날의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남궁력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일 터.

내일이면 달라진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리라.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한 그는 날이 밝자마자 숙부인 남궁신건을 찾았다.

“이른 시간부터 무슨 일이냐?”

“숙부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이라? 그래, 말해보거라.”

남궁신건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정광에게 망신을 당한 뒤, 말을 거의 안 꺼내던 조카가 부탁할 게 있다 하니 웬만한 것이라면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웬만한 것이 아니었다.

“진옥룡과 자웅을 겨루고 싶습니다.”

“……!”

“허나 맹도 간의 사사로운 싸움은 금지돼 있지요. 맹에서 허락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

남궁신건의 얼굴에 노기가 맺혔다.

“……그 망신을 당하고 또 덤비겠다고?”

“그렇습니다.”

“……정녕 제정신인 게냐?”

“그렇습니다.”

“……후우우…….”

남궁신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께서 본가로 돌아가셔서 다행이구나. 여기 계셨다면 너는 경을 쳤을 게다.”

“그렇겠지요.”

“대답 하나는 잘하는군. 도대체 왜 그러느냐?”

남궁력은 담담히 대답했다.

“제가 진옥룡에게 당한 뒤 아버님께서는 저를 채찍질하셨습니다. 고개를 들라고, 움츠릴 바엔 차라리 전보다 더 오만해지라고 말입니다.”

“…….”

“남궁의 씨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 씨를 품은 이상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것이 세간의 조롱에 맞서 싸우는 길이라고요. 제가 힘을 더 쌓고 가문의 힘이 더해지면 그 누구도 저를 다시는 조롱하지 못할 거라 하셨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남궁신건이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그건 형님의 말씀이 옳다. 누구나 좌절은 있는 법, 부끄러움은 순간이다. 널 비웃던 자들은 결국 네 밑에서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어.”

“그래서 그 첫걸음으로 저를 지룡단주로 만들어주셨지요.”

“너는 그만한 자격이 있어.”

“말이 무척 많이 나왔었습니다.”

“절대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맹주도 원하는 일이었어.”

“천룡단을 곤륜과 팽가가 나눠 가졌으니 지룡단쯤은 맹주도 양보하는 게 모양새가 좋았겠지요.”

“잘 알면서 왜 그러느냐?”

남궁력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단주 자리에 오르자마자 평생 받아보지 못했던 대접을 받았습니다. 꽤 많은 단원들이 대놓고, 아니면 은연중에 무시하더군요.”

지룡단은 정파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들이 모인 곳, 나름의 자질을 뽐내던 이들이 남궁력을 만만하게 보고 지시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신선했습니다. 원래 밑으로 봤고 공적으로도 밑이 된 자들이 그렇게 나오다니. 심지어 일반 무인들까지 수군대는 걸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었습니다.”

남궁신건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었다.

“……그래서?”

혹시 좌절한 것일까?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모든 일의 원흉인 진옥룡에게 다시 도전하려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려고 할 정도로 망가졌을지도.’

그의 걱정과 달리 남궁력은 강한 사내였다.

“아버님께서 저를 단주로 올리신 이유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현실?”

남궁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보아라. 한번 실수를 했다고 너를 물어뜯으려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 절대 굴하지 말고 놈들을 모두 밟고 올라가라. 그러면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또 한 번 실수를 한다 해도 다시 올라갈 수 있다. 너만 똑바로 정신을 차린다면. 뭐 이런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모두 밟았느냐?”

“더 길게 봤습니다. 웬만한 녀석들은 실력과 덕으로 끌어안았지요.”

남궁신건은 조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장하다. 그래, 웬만하지 않은 이들은?”

“얼마 전 무혈단으로 간 이들과 지봉(知鳳)은 애초에 선을 지켰기에 손을 못 댔고, 청룡 그 친구는 그냥 밟을 기회를 노리던 참에 진옥룡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남궁력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제가 무공으로 진옥룡 위에 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력으론 다르지요.”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단 대 단으로 겨루려 하는 것이구나.”

“그렇습니다.”

“……명분은?”

“피 끓는 젊음을 내밀어보려 합니다. 불씨를 놓았더니 단원들도 끓어오르더군요.”

무혈단만 사마련과 싸우러 떠나는 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지룡단이 뭐가 부족하단 말인가? 우리의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다오.

이런 의미였다.

지룡단원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봉 그 아이는 의심하지 않더냐?”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습니다. 진옥룡이 다른 구룡사봉들을 차출하면서도 자신은 뺐으니 자존심이 꽤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직접 확인해 보고 싶겠지요.”

“영리한 아이다. 다른 뜻이 또 있을 게야.”

“무엇을 원하는진 모르겠지만, 이 일에 협조만 하면 그 정돈 내어줘도 될 것 같습니다.”

“흐음…… 너만 내게 이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지금쯤 다들 사문의 어른들께 이 명분을 주장하고 있을 겁니다.”

다들 들고 일어나는데 마냥 억누를 수도 없을 터.

이기면 명성을 높일 수 있고, 져도 좋은 경험을 한 셈이라 칠 수 있으니 나쁠 건 없으리라.

남궁신건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네가…… 아니, 지룡단이 진다면 어찌할 생각이냐?”

“진옥룡을 이용해 버릴 자는 버리고 끌고 가야 할 자들은 제 밑으로 확실하게 결집시키려 합니다. 패배한 원한을 부추겨 더 단단하게 뭉치게 할 수 있을 테니 남는 장사지요.”

“…….”

대충 짐작하고 물어봐 놓고도, 대답을 듣게 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많이 바뀌었구나.”

“그렇습니까? 진옥룡 그 친구에게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

남궁신건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라더니…… 껍질을 깨고 본모습이 나온 건가.’

방계(傍系)인 그가 평생을 두려워하며 받들어온 남궁세가의 적자(嫡子).

타고난 핏줄과 능력으로 남궁세가의 가주가 된 남궁화인.

그 간웅(奸雄)과 얼굴이 아니라 심계가 똑 닮은 아들이 그의 앞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허청은 자신의 앞에서 눈을 빛내는 제자를 보자 더럭 겁이 났다.

“……내 말을 이해한 것이냐?”

“네.”

“……한번 말해보거라.”

정광은 재깍 대답했다.

“변룡(便龍)이…….”

“검룡(劍龍).”

“그게 그건데.”

“어허.”

고개를 갸우뚱한 정광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자가 지룡단원들과 함께 각 사문의 어른들에게 항의했다는 말씀이잖아요. 무혈단은 싸우러 나가는데 자기들은 왜 안 되냐고요. 비무를 하고 싶다 떼를 썼고, 각파의 어른들은 그걸 원로 회의에서 얘기했고, 맹주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놈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치란 말씀…….”

“적당히 상대하라 했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한 달 안에서 끝내면 되죠?”

허청의 안색이 하얘졌다.

“……한 달 안에 무덤에 보내겠다는 말이냐?”

“무량수불. 설마요. 침상에서 한 달 누워 있게요.”

“……허어. 네가 철이 들었구나.”

기꺼워하던 허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무슨 꿍꿍이인 게냐?”

정광이 씩 웃었다.

“단 대 단으로 겨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안 그래도 단원들한테 실전 수련이 필요했거든요. 좀 다쳐도 상관없는 상대로요. 한 달 꽉꽉 채우죠 뭐.”

“네가 빠진 상태로 겨뤄야 하는데?”

“네?”

“지룡단 측의 요구는 이렇다. 진옥룡의 강함이야 천하가 알고 있으니 비무에서 빼야 한다. 이 비무는 양측의 단주를 뺀 단원들 간의 비무가 될 것이다.”

“뭐 그런 비겁한!”

“네가 끼는 게 더 비겁한 짓이지. 상대가 되겠느냐?”

“음. 그건 또 그렇네요.”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허청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맹주는 무혈단이 이길 거라 믿더구나.”

“사부님도 당연히 그러실 거고. 군사는 뭐라 했어요?”

“네 말과 같았다. 무혈단에게 좋은 수련이 될 것이라더군. 네게 말을 좀 전해달라더구나.”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보여줘서 그들이 분발하는 계기로 만들어 달라고요?”

“거참. 말할 필요도 없는 걸 말했군.”

피식 웃던 허청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룡단과 그들의 사문이 이렇게 나오는 게 마음에 안 들지? 하지만 그들도 무림맹이다. 길게 보고 적절히 대처해 줬으면 한다.”

“그럴게요.”

“적절히. 아주 적절히 말이다.”

“네. 마음 놓으세요.”

“후우. 그게 안 되니 걱정이구나.”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정광은 빙긋 웃어 보인 뒤 방을 나왔다.

길을 걷는 내내 허청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연히 적절히 할 건데 뭘 그리 강조하는지.’

물론 ‘적절히’라는 말의 수위는 사람마다 다른 법.

정광은 자신의 수위에 맞는 ‘적절히’를 실천할 생각이었다.

‘아. 군사가 자기 딸 얘기는 일부러 안 한 것 같은데. 챙겨줘야 하나?’

아니다.

단원들끼리 싸우는 데 자신이 뭘 어쩐단 말인가.

‘흠. 딸의 실력을 믿어서 아무런 부탁을 안 했을 수도 있겠군.’

아비를 닮았으면 딸도 머리가 좋을 터.

비무 도중이라도 상황을 보고 알아서 판단하리라.

‘뭐 정신 좀 차리라고 그러는 걸 수도 있고.’

하긴, 둘 중 뭐가 됐든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중요한 건 단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연무장에 도착하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단원들이 보였다.

“다들 푹 쉬셨어요?”

“으윽…….”

“쿨럭. 쿨럭.”

여기저기서 신음과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정광은 만족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상태들 좋으시네. 자. 자. 모이세요.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있을 비무에 대해 설명할게요.”

‘오늘은 이만 쉬고’란 말에 쓰러져있던 단원들이 눈부신 속도로 일어섰다.

“사, 사제. 정말인가?”

대사형 정우의 말에 정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그보다 빨리 모이세요. 설명 끝내고 배 채우러 가야 하거든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원들이 정광의 앞에 도열했다.

“수련할 때 좀 이렇게 빨리 움직이시지.”

정광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내일 있을 비무에 대해 말했다.

놀란 얼굴로 듣던 단원들 중, 언의진이 손을 들며 물었다.

“단주가 빠지면 단은 누가 지휘하게 되는 거죠?”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장이, 백승무, 자오를 제외하면 모두 정파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들.

정광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이들이었다.

누가 정광이 없는 무혈단을 이끄느냐.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그 기색을 눈치챈 정광이 씩 웃으며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

모두가 놀랐다.

심지어 이름이 불린 사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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