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칼을 갈고 있는 사람
무공이란 본디 상대를 속여서 허점을 드러내게 한 뒤에 치는 것이다.
우직하게 정면으로만 싸운다면 현란한 허초(虛招)가 왜 있겠는가?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앗!”
정광이 뿌린 흙이 언의진의 눈에 들어갔다.
순간 시야가 가려져 당황한 것도 잠시, 그녀는 권봉(拳鳳)이란 별호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기민하게 대응했다.
즉시 내공을 일으켜 내부의 장기를 감쌌다.
전신을 웅크려 공격받을 면적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익혀온 외문기공(外門氣功)을 믿고 근육에 힘을 주었다.
취약한 안면은 양팔의 하박(下膊)을 들어 올려 보호하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아 눈 속의 흙을 눈물로 빼내며 다짐했다.
‘한 방만 막아내고 반격이다!’
하지만 상대는 정광이었다.
그 한 방이 너무나 아팠다.
빠각!
“아악!”
외문기공은 개뿔!
목검에 배를 얻어맞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를 악물고 참아낸 그녀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드디어 흙을 빼낸 것이다!
‘가만두지 않겠…… 어?’
또 다른 흙이 눈에 다시 들어왔다.
‘망할!’
완전히 망했다.
시야가 가려진 그녀는 또 한 번 목검에 맞아야 했다.
따악!
‘아, 악귀…….’
뒤통수를 강타당한 그녀가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후기지수들은 넋을 잃은 듯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광이 해맑은 얼굴로 소리쳤다.
“다음요!”
일방적인 매타작이었다.
후기지수들은 갖가지 암수에 당하며 의식의 끈을 놓았다.
‘또 당할쏘냐!’
‘가만 안 두겠다!’
무공이 부족한 장이도 혼을 불태우며 다짐했다.
정신을 차린 그들이 용맹하게 맞섰지만…….
정광의 암수는 무궁무진했다.
‘어, 어떻게 저런!’
‘악귀다! 진짜 악귀야!’
사파의 암수를 직접 겪어보고 대응하는 수련이 아니었다.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음험한지 몸에 새기고 자신도 모르게 그 수법을 펼치게 되는 사이한 대법 같았다.
“어? 그냥 이런 수도 있다고 알려 드리는 건데. 똑같이 펼치시면 어떡해요?”
정광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유정풍이 대노(大怒)했다.
“시끄럽다!”
악에 받치게 한 게 누군데!
그딴 짓들을 해놓고 착한 척을 하다니!
‘내 다른 이들에겐 절대로 이런 비겁한 짓을 안 하겠지만, 정광 네 녀석에게만큼은 아니다!’
유정풍뿐만 아니라 모두의 생각이었다.
이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뜻이 제대로 서면 습득도 빨라지는 법.
그들의 암수 경지는 눈이 부실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니 일취월장(日就月將)이니 하는 표현을 뛰어넘어, 시시각각(時時刻刻) 나아질 정도로!
‘생각보다 자질이 있네.’
정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자오의 말이 맞는 걸까?
사파는 물론이요, 천마신교에서 태어나 자랐어도 한몫 단단히 했을 만한 인재들 아닌가.
마음이 기꺼워지자 더 많은 걸 가르쳐 주고 싶었다.
‘좋아. 조금만 더 제대로 해볼까.’
후기지수들에겐 악몽 같은 시간이 흘렀다.
“목인은 이제부터 동료입니다! 걸리적거린다고 베시면 안 돼요!”
……뭐?
“이런! 그렇다고 보호하다가 칼 맞으란 얘기가 아닌데! 걸리적거리면 발로 차서 밀어내세요! 되도록 안 다치게!”
……아!
후기지수들은 정광의 가르침을 하나씩 하나씩 흡수해 갔다.
연무장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헉. 헉. 헉.”
무림맹 인근의 야산.
짙은 어둠을 헤치며 후기지수들이 달렸다.
꽁무니에서 달리던 팽강휘가 뒤를 돌아본 뒤 외쳤다.
“젠장. 왔다! 산개(散開)!”
존대고 뭐고 없었다.
최대한 짧게 요점만 담은 외침!
일렬로 달리던 후기지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냐?’
당오군의 무표정하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앞에 나타난 정광 때문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당오군은 정광을 향해 독분(毒粉)을 뿌리며 동료들과 정해놓은 수를 외쳤다.
“삼(三)!”
호흡독(呼吸毒)을 쓸 테니 호흡을 멈추고 도와달라는 신호!
동료들은 즉시 호흡을 참으며 정광의 퇴로를 차단했다.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연수합격(聯手合擊)이었다.
당오군과 동료들의 눈에서 자신감이 떠올랐다.
‘이번 수련에서는 독에 대한 내성이 평범하다고 가정했지. 아무리 진옥룡이라 해도 한 방쯤은 먹일 수 있어!’
천하의 후기지수들 중 날고 기는 이들의 합공 아닌가.
정광 저 악귀는 호흡을 참으며 상대하다가 최소한 한 대는 얻어맞을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정광이 괜히 정광이던가.
그의 뒤에서 도를 휘두르려던 팽강휘가 흠칫했다.
‘억!’
어느새 반전해서 쇄도한 정광이 손을 뻗치고 있었다.
그 손은 기묘하게 움직여 팽강휘의 팔을 뱀처럼 휘감았다.
곤륜 비전의 금나수, 운룡금나수(雲龍擒拿手)였다.
‘멋지구나!’
상황에 안 어울리게 감탄한 팽강휘는 정광에게 끌어당겨졌다가 당오군을 향해 밀쳐졌다.
당오군이 뿌린 독분을 전부 뒤집어쓸 판이었다.
‘이런!’
아무리 호흡을 참고 있다 해도 독분을 뒤집어쓰고 싶을 리가 있나.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피하려 하는데 등허리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커헉!”
정광에게 걷어차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헛바람을 토했다.
날숨이 나왔으니 들숨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일.
독분이 그의 들숨을 따라 폐로 들어왔다.
“크학! 쿨럭. 쿨럭.”
수련이라 아주 약한 독을 썼기에 쓰러지진 않았다.
하지만 규칙상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정광은 팽강휘를 한 번 더 걷어차 당오군에게 날린 뒤 뒤엉킨 그들에게 목검을 휘둘렀다.
빠각!
“크흑!”
“흐억!”
소리는 하나였으나 신음은 둘.
두 사람이 쓰러지자 나머지 후기지수들의 얼굴이 검게 죽어갔다.
정광은 몸을 돌려 그들을 덮치며 외쳤다.
“이 악무세요!”
정광뿐만이 아니었다.
공간을 찢고 나타난 자오가 쌍단봉을 휘둘렀다.
동료였던 백승무도 마치 간자(間者)였던 것마냥 후기지수들을 습격했다.
정현은 자신의 사제를 노려보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이 더러운 배반자 같으니!”
심지어 공우조차 암울한 얼굴로 진중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친.”
뒤늦게 분노해서 뭐 할까.
따다다다다닥!
“끄아아아아악!”
이를 악문다고, 분노한다고 해서 덜 아프진 않았다.
무지막지하게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픽픽 쓰러질 뿐이었다.
정광은 바닥에 널브러진 후기지수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물었다.
“모두 아프시죠?”
알면서 왜!
“저도 마음이 아프네요.”
퍽이나!
“다들 피를 안 흘리기 위함이니 참고 따라와 주세요.”
차라리 피를 흘리고 말지!
모두 속으로 부르짖었으나 그때뿐이었다.
정광의 말은 틀린 게 없었으니까.
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제발 오지 않길 빌던 다음 날이 찾아왔다.
후기지수들은 또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효율적으로 싸우려면 진법을 익혀야 해요. 준비되셨나요?”
준비 안 됐다고 안 가르칠 것도 아니면서 무슨!
어쨌든 정광이 만든 무혈진(無血陣)은 대단한 진법이었다.
공우는 뭔가 알 듯 말 듯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경악했다.
‘나, 나한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혈진에는 소림이 자랑하는 나한진의 묘리가 희미하게나마 담겨 있었다.
공우는 정광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지, 진옥룡. 이건 나한진의 묘리 아닙니까? 설마 나한진을…….
-에이. 설마요. 그런 절진을 짧은 시간에 어떻게 배워요?
-하,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이치를 담은 마방진(魔方陣)인데…….
-천하에 그런 진이 나한진밖에 없나요?
-……그, 그건 모르겠습니다.
-네. 그러니까 그냥 배우세요.
-…….
아니라는데 할 말이 있나.
공우와 동료들은 무혈진을 익혔다.
각자 다른 무공과 병기를 사용하기에 큰 위력을 보이기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무혈진은 기이할 정도로 안정적인 위력을 뽐냈다.
후기지수들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고금제일천재라더니!’
‘진옥룡은 진옥룡이구나!’
잠시 후, 그들은 정광에게 얻어맞으며 이를 갈았다.
‘그래! 진옥룡은 진옥룡이구나!’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 닷새째가 되자 그들의 눈에 있던 독기가 사라졌다.
그렇다.
그들은 암수를 당하는 것은 물론 펼치는 것까지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무혈단은 이렇게 하나가 되어갔다.
* * *
밤늦은 시간, 무림맹 안에 있는 한 식당.
당예지와 언의진은 누가 봐도 놀랄 정도로 엄청나게 먹고 있었다.
수련이 힘든 만큼 먹는 양도 많을 수밖에.
그녀들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제갈린도 당연히 놀랐다.
“……당 언니. 수련이 무척 힘드신가 봐요?”
“응.”
“언니가 힘들다고 하실 정도면 보통 힘든 게 아닐 텐데. 저녁 식사도 이렇게 늦게 하시니 알 만하네요.”
제갈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언의진이 코웃음 쳤다.
“흥. 저녁 식사는 한참 전에 먹었네요.”
“뭐?”
“이건 다섯 끼째라고.”
“다, 다섯 끼째?”
제갈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그러든 말든 당예지와 언의진은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련을 하길래…….’
제갈린은 말이 나온 김에 물었다.
“무혈단은 어떤 수련을 하고 있어?”
“우물. 우물. 밥 먹는데 자꾸 말 시킬래?”
“응.”
“아 진짜.”
언의진은 투덜대면서도 대답했다.
“이것저것.”
“…….”
“아주 많이.”
“…….”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다.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싸움이었다.
그사이 식사를 마친 당예지는 입가를 닦은 뒤 조용히 타일렀다.
“그만들 해. 너희는 왜 만나기만 하면 이러니?”
“언니. 쟤 잘못이에요. 먹는데 괜히 와서 귀찮게 하잖아요.”
흉을 보는 언의진과 달리 제갈린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언니. 주의하겠습니다.”
“저, 저…….”
“의진아, 미안해. 사과할 테니 받아줄래?”
“이, 이 여우 같은…….”
당예지가 한숨을 쉬며 중재했다.
“그만들 하렴. 더 하면 화낼 거야.”
“…….”
“…….”
당예지는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제갈린을 바라봤다.
“린아. 혹시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니?”
제갈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지룡단(地龍團)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으음.”
“조만간 일이 터질 것 같아서 말씀드리러 왔어요.”
“…….”
당예지는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힐끔거리던 언의진이 제갈린에게 전음을 보냈다.
-분위기가 왜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어머. 모르겠니?
-…….
-알면서 묻는 거지? 응?
-……너 진짜!
제갈린은 언의진을 한바탕 놀린 뒤 설명했다.
-무혈단이 부러워서.
-……?
-그리고 자존심 상해서.
-……아!
언의진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피가 끓는 젊은 무인들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만 사마련과 싸우러 가게 돼서 부러워하는 거야?
-맞아. 지룡단은 맹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 하잖아. 안 그래도 답답하던 참이었는데 무혈단만 나가게 되니 얼마나 부럽겠어.
-지룡단도 강한데, 잘할 수 있는데 차별당해서 화가 난 거구나.
-화가 난다기보단 자존심 상한 거지.
-린이 너도?
제갈린은 언의진을 빤히 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하긴…… 그렇겠다.
-네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라.
-뭐?
-지룡단은 정파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들이 모인 곳이야. 아직 영글지 못한 나이라 어르신들이 보호하려고 하시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럼 왜 그러는데?
제갈린의 얼굴에 냉기가 서렸다.
-진옥룡 그자는 왜 나를 안 뽑았을까?
-……!
-나도 구룡사봉에 속한 지봉(知鳳)이야. 다른 구룡사봉을 다섯이나 뽑아놓고, 심지어 일반 무인까지 합류시켰는데…… 나는 왜?
언의진은 그제야 제갈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도 그랬을 게 뻔했다.
-진옥룡 그 사람…… 아니, 그 악귀가 원래 좀 이상해서 그래.
-이상하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어.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도 귀따갑게 들었지. 사마련의 부련주를 잡다니. 그게 사람이야?
제갈린의 눈에 질투의 빛이 스쳤다.
그녀의 아비인 제갈문형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정광이었다.
어찌 질투를 느끼지 않겠는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문으론 무공만큼 안목도 뛰어나다더라. 맞지?
-……응.
그래서 더 자존심 상했다.
직접 대면한 적이 없어서 내 능력을 모르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
-지룡단에서 며칠 전부터 한번 겨뤄보자는 말이 나오고 있어.
-…….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나보다 훨씬 더 칼을 갈고 있는 사람도 있는걸.
언의진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청룡(靑龍)을 말하는 거구나!
-그 사람보다 더 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왜 빼?
-……?
잠시 생각하던 언의진이 놀란 얼굴로 부르짖었다.
“아! 변룡(便龍)!”
“…….”
“아, 아니 검룡(劍龍)!”
정광에 의해 똥싸개가 되어버린 남궁력을 말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