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41화 (141/569)

141화

납득하고도 남을 해명

장이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구룡사봉에 들 정도로 무공이 출중한 것도 아니요, 명문가의 자제도 아니다.

그런 그를 왜 데려가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내가 자질이 있는 걸까?’

지금의 실력이 아니라 발전 가능성을 보고 이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말도 안 돼.’

헛된 기대였다.

정광에게 여러 무공을 배운 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는 걸 느끼던 참이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천하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자들 역시 그만큼 많은 것이다.

‘그러면 왜?’

장이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정광에게 물었다.

“은공. 저처럼 부족한 사람을 왜 데려가려고 하십니까?”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품고 물었건만.

정광의 대답은 잔인했다.

“노숙할 경우가 종종 있을 것 같아서요.”

“……네?”

“장이 소협은 요리 잘하시잖아요.”

“…….”

그러면 그렇지.

발전 가능성은 무슨.

장이의 안색이 자괴감으로 물들었다.

그걸 본 정광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만 보고 같이 가자는 건 아니에요. 맹의 결집과 향후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죠.”

뭔가 있어 보이는 말에 장이가 다급히 물었다.

“제가 우매하여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뭘 또 가르침씩이나. 생각해 보세요. 지금 무림맹의 주축이 어디죠?”

“……구파일방과 칠대세가 아니겠습니까? 육방칠단삼장도 있겠고요.”

“잘 아시네. 꽤 많은 문파들이지만, 정파무림 전체로 보면 극소수긴 하죠.”

정파무림에는 수없이 많은 문파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군소 문파인지라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정파라 해도 힘의 논리가 통하는 건 당연지사, 무림맹 역시 힘에 의해 움직였다.

“장이 소협처럼 규모가 작은 문파나 가문 출신인 일반 무인들은 보통 무슨 일을 하죠?”

“……잡다한 일이나 경비뿐입니다.”

“하나 빼셨네요. 칼받이 역할도 있잖아요.”

“……비록 푸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맹의 성지라는 현협각(顯俠閣)에 가보셨죠?”

“그렇습니다.”

“거기 뭐라 쓰여 있던가요? 명문의 아무개가 악한 누구와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쓰러졌다, 이런 말밖에 없던데. 그들보다 훨씬 많이 죽어간 일반 무인들을 기리는 글은 본 기억이 없네요.”

“…….”

장이가 쓰디쓴 미소를 짓자 정광의 어조에 힘이 실렸다.

“그러니까 장이 소협이 이번 일에 나서야 하는 겁니다.”

“……제가 이번 일로 죽으면 현협각에 올려주시겠다는 겁니까?”

혹시나 싶어 물었을 뿐인데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 될 건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꼭 죽으셔야겠네요.”

“……그래도 이왕이면 사는 게…….”

“뭐 그거야 때 되면 알겠죠. 어쨌든 명문의 원로란 자들이 자파의 이익을 저울질하느라 발을 빼고 있어요. 그런데 후기지수를 대표하는 구룡사봉과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나섰죠?”

“……그분들이 나서신 게 아니라 은공께서 불러 모은…….”

“어쨌든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어요.”

“……그렇지요.”

“일반 무인을 대표해서 그 바람을 타세요. 아니, 바람이 되는 거죠. 맹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이 열광할 겁니다.”

“……!”

“명문은 체면을 세우려고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거고요. 차후 일반 무인에 대한 대우가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걸 장이 소협이 여는 거예요.”

장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운 바람의 일원이 된다.

동료나 후손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준다.

그의 이름이 수없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터.

그보다 더 가슴 벅찬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 죽을 수도 있는데 그건 뭐 어쩔 수 없고요.”

“…….”

“아니지. 죽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죽을 가능성이 더 크겠네. 현협각에 들어가시도록 힘 좀 써볼게요.”

“…….”

찬란하게 빛나던 장이의 눈빛이 점점 죽어갔다.

정광은 그의 등을 두드리며 권했다.

“생각 있으시면 빨리 어머니께 다녀오세요. 할 일이 천지거든요.”

장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무인의 길을 걷기로 한 이상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사실 조금은 두려웠지만 그 정도 각오야 항상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죽으면?

어머니는 어쩐단 말인가?

‘다행히 은공 덕분에 돈 걱정은 없어졌지만…….’

어머니는 무림의 사람이 아닌 평범한 여인이었다.

젊은 아들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래도 가고 싶어.’

장이는 마음을 굳혔다.

크나큰 불효였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무인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은공.”

“네. 기다릴게요.”

장이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당당하게 걸으려 했으나 어머니에 대한 걱정 때문에 힘이 없는 걸음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정광이 소리쳤다.

“저기요!”

“……네?”

장이가 돌아보자 정광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까 죽을 가능성이 크다 했죠?”

“……네. 그러셨습니다.”

“근데 그거. 제가 먹는 게 부실할 경우를 말한 거예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무인은 소채보다 고기죠.”

“……?”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어 눈을 크게 뜨는데.

정광이 씩 웃었다.

“어머니께 육포 좀 많이 준비해 달라고 하세요. 많으면 많을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고요.”

* * *

반나절이 지나자 떠났던 사람이 모두 모였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우와 정현도 왔다는 것.

정우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사제. 불러줘서 고맙다.”

그와 달리 장난기 많은 정현은 실실 웃었고.

“흐흐. 날 빼먹으면 가만두지 않으려 했는데. 운이 좋구나, 사제.”

하지만 웃음도 잠시.

정현은 곧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이 일의 위험성과 중요성을 알아서였다.

다른 이들 역시 그랬기에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들을 둘러보던 장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다들 마음의 수양이 대단하구나. 그에 비하면 나는……’

유일하게 그만 두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어미가 펑펑 울자 불효를 저지른 그도 울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눈이 부을 정도로 울다니…….’

다행히 이곳에 모인 후기지수들은 상식적인 사람들인지라 모르는 척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광은 비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어? 장이 소협, 눈이 왜 그래요?”

“……먼지가 들어가서 비볐더니 이렇게 됐습니다.”

“아닌데. 우셨어요?”

“…….”

장이는 눈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붉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왜 하냔 말이다.

하지만 정광은 당당했다.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자기가 부끄럽게 해놓고 무슨!

“눈물을 흘리는 건 괜찮으니까.”

……뭐?

“대신 피를 흘리지는 마세요.”

……아.

“그게 제일 부끄러운 겁니다.”

…….

삽시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사람들은 의지가 깃든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둘러보던 정광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이름을 안 지었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무혈단(無血團) 어때요?”

정광이 생각한 것치곤 나쁘지 않은 이름이었다.

다들 동의하자 정광이 말을 이었다.

“무혈단의 목표는 사마련의 지부들을 들쑤셔서 사마련주를 끌어내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거든요. 안 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테니 며칠이나마 익혀보죠.”

“……?”

“사제. 자오. 그것들을 나눠 드리세요.”

“네, 사형.”

“알겠습니다, 진옥룡.”

두 사람은 후기지수들에게 두꺼운 솜옷을 나눠줬다.

얼결에 받아 든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우. 갑자기 이게 뭔가?”

유정풍의 물음에 정광이 답했다.

“피를 안 흘리기 위한 것이요. 갈아입으세요.”

“흐음. 뭔진 모르지만 그렇게 하겠네.”

사람들이 흩어졌다가 잠시 뒤에 모였다.

그들은 두꺼운 솜옷 때문에 비대해 보이는 동료들을 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거야 원.”

유정풍이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새 옷을 입어서 좋긴 하다만, 좀 그렇군.”

“왜요? 잘 어울리시는데.”

“아우. 당연히 원래의 넝마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움직이기가 불편하지 않나?”

“그래도 입으시는 게 나아요. 다들 가시죠.”

정광은 사람들을 이끌고 외진 곳에 있는 연무장으로 갔다.

제갈문형이 준비한 곳이었는데 여느 연무장과 다른 점이 있었다.

나무로 사람처럼 만든 인형들이 연무장 곳곳에 불규칙하게 세워져 있는 것 아닌가.

장내를 둘러보던 유정풍이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목인(木人)들은 또 뭐지?”

“사람요.”

“……뭐?”

“이제부터 사람이라 생각하세요. 일단 무공을 전혀 모르는 양민으로 가죠.”

“……?”

정광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병기대(兵器臺)에 꽂혀 있는 목검을 꺼내 들었다.

“자. 수련 시작! 갑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정광은 섬전(閃電)처럼 빠르게 유정풍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기습을!”

유정풍은 얼굴을 굳히며 타구봉을 휘둘렀다.

목검과 타구봉이 부딪히며 어울리지 않는 굉음이 터졌다.

콰앙!

“크흑!”

유정풍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정광의 일격에 형편없이 밀린 것이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대충 휘두른 일검이었는데도 이런 위력이라니.

많이 봐준 게 뻔히 보이는데도 고맙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정풍은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자존심이 크게 외쳤다.

‘수세가 아니라 공세로 간다!’

술 취한 사람처럼 취팔선보(醉八仙步)를 어지럽게 밟았다.

동시에 미친개를 때려잡을 때처럼 타구봉에 힘을 주어 휘둘렀다.

하지만 정광의 강맹한 일검에 화급히 물러나야 했다.

정광은 단 일검으로 끝내지 않았다.

유정풍을 귀신처럼 따라가며 계속해서 목검을 내질렀다.

정신없이 물러나던 유정풍은 이러다간 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한 대는 먹여주마!’

단전에서 끌어올린 막대한 내공이 타구봉에 담겼다.

거기에 온몸의 근력을 실어서 휘두르려는데 정광의 신형이 그의 옆으로 이동했다.

‘이쯤이야!’

유정풍은 재빨리 왼발을 옆으로 열고 오른발을 내디디며 몸을 반 회전시켰다.

그리고 혼신의 내공을 실은 타구봉으로 정광을 베듯이 후려쳤다.

콰직!

하지만 정광은 이미 몇 걸음이나 물러나 있는 상태.

유정풍이 이를 악물고 달려드려 하는데.

정광이 한숨을 쉬며 비난했다.

“휴우우. 양민을 그렇게 죽이면 어떡해요.”

“……뭐?”

“그것도 아주 산산조각을 내버리시네.”

유정풍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박살 낸 목인의 잔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대체 무슨…… 아!”

정광이 목인들을 보며 무공을 전혀 모르는 양민으로 가자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우는 지금 양민들이 있는 자리에서의 난전을 가정한 건가?”

“네.”

“거참. 인기척이 전혀 없어서 뒤에 있는 것도 몰랐군.”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내공도 살기도 없는 양민이잖아요. 인기척이 있어도 복잡한 난전 중엔 알아차리기 힘들어요.”

“음. 일리가 있어. 헌데 왜 이런 수련을 하려는 건가? 설마 앞으로 이런 싸움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될 걸요.”

“……?”

“사마련은 사파죠. 공개된 장소에서 치러지는 싸움에선 체면을 지키려 할 것이나 밀폐되거나 인적이 드문 곳에선 별의별 수를 다 쓸 거예요. 기회다 싶으면 양민이 있는 곳에서도 덤벼들 거란 얘기입니다.”

유정풍은 물론 다른 이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 말이 맞네. 이거, 신경 좀 써야겠군. 항상 주위를 느끼고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이렷다?”

“사실 양민이 있으면 발로 걷어차던가 해서 멀찍이 밀어내 버리는 게 제일 편하죠.”

“하하하. 못 본 새에 농이 많이 늘었군.”

“네?”

“……농일 거라 믿네. 다시 한번 해보세나.”

유정풍은 몇 합 지나지 않아 허리에 일격을 얻어맞았다.

정광의 목검이 아닌, 공간을 찢고 나온 자오의 단봉에.

“크흑. 자오 대협! 이게 대체 무슨 짓…… 아! 아니오! 대답 안 해도 되오!”

유정풍은 정신없이 손을 저어 자오의 말문을 막은 뒤 정광을 노려봤다.

“아우! 이게 무슨 짓인가? 납득할만한 해명을 하게! 아니면…….”

“사마련은 사파라니까요.”

누구나 납득하고도 남을 해명이었다.

유정풍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가 타구봉을 곧추세웠다.

“……잘 알겠네. 다시 한번 부탁하지!”

“네.”

유정풍은 개처럼 얻어맞았다.

정광의 목검에, 자오의 단봉에.

간간이 권과 장은 물론 발로도 걷어차였다.

‘뭐 이런 비열한 수법이!’

자오야 사마련 출신이니 그렇다 치자.

정광 이놈은 자오보다도 몇 수 위로 보였다.

아니, 까마득히 위였다!

자오의 수법이 치가 떨린다면, 정광의 것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으니까!

‘대체 어떻게 이런 수법들을 아는 거지?’

유정풍은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두들겨 패려고 두꺼운 솜옷을 입힌 거구나. 그래도 너무 아프잖아…….’

의식을 잃은 그는 생각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정광은 자오를 시켜 유정풍을 멀리 갖다 놓은 뒤 사람들을 둘러봤다.

“다들 보셨으니까 유 소협보다는 잘하실 수 있겠죠?”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떨리는 눈으로 정광의 손을 바라봤다.

목검을 얼마나 세게 쥐고 있는지 혈색 하나 없는 손이었다.

정광의 미소 역시 하얬다.

“자. 그럼 가볼까요?”

이렇게 칠주야 동안의 수련이 시작됐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