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말이 통하는 사람
정광이 후원 담장의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서 있었다.
전보다 때깔이 더 좋아진 유정풍이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아우! 이게 얼마 만인가!”
“오오. 장이 소협 모친께서 하시는 반점에서 대접을 섭섭지 않게 했나 봐요.”
“……큼. 큼. 뭐 그렇긴 하지. 그보다 손부끄럽네만.”
“아. 잠시만요.”
정광은 고개를 돌려 백승무를 불렀다.
“사제! 이리와 봐!”
“네, 사형. 아. 유 소협이시군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자네도 잘 있었나?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들었네. 훌륭한 협행을 많이 했더군. 잠깐. 이보게, 아우. 왜 갑자기 백 소협을……?”
정광은 백승무의 등을 밀어 유정풍에게 보냈다.
얼결에 백승무를 받은 유정풍은 황당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백승무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를 밀은 정광은 언의진과 인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언 소저.”
“오랜만이에요. 천하가 놀랄 만한 일을 하셨더군요.”
“뭘요. 작은 잔재주일 뿐이죠.”
언의진이 눈이 커졌다.
“……도, 도사(刀邪) 가균을 꺾은 게 잔재주라고요?”
“어? 노름 얘기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
“맞다. 사제, 어서 인사드려. 언 소저시잖아.”
어느새 유정풍에게서 벗어난 백승무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포권했다.
하지만 말투는 마치 서책을 읽는 것처럼 어색했다.
“안녕하십니까, 언 소저.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전히 모든 게 아름다우시군요.”
“……네. 반가워요.”
언의진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자 백승무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정광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유정풍과 언의진을 번갈아 봤다.
“근데 무슨 일이세요?”
“아우, 가균을 어찌 잡았나?”
“천랑대는요? 한꺼번에 덤볐다 들었는데 어떻게 상대한 거죠?”
정광은 입을 열다가 닫았다.
설명하기엔 너무 긴 얘기였다.
마침 기꺼이 대신해 줄 이가 있는 게 다행이랄까.
“음. 다른 분이 설명해 주실 거예요. 자오. 이분들이 그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자오가 기쁜 얼굴로 다가오자 유정풍과 언의진이 기겁했다.
새벽까지 자오에게 괴롭힘당한 이들 중 그들 사문의 어른들도 있어서였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협. 그냥 편히 쉬시지요.”
두 사람이 손사래 치자 정광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건 넘어가고. 수련은 열심히 하셨어요?”
전에 알려줬던 체술과 곤술을 말하는 것.
유정풍과 언의진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렇네.”
“물론이지요.”
“그럼 한번 볼까요?”
정광은 정우에게 곤륜파에 배정된 연무장을 쓰게 해달라 했다.
“사백께서 움직이지 말라 하시지 않았더냐.”
“후원 바로 옆인데요, 뭐.”
“흐음. 그도 그렇군. 그러려무나.”
“다녀오겠습니다.”
정광은 유정풍과 언의진을 데리고 문을 나서다가 뒤를 돌아봤다.
“사제. 자오. 뭐 해요? 같이 가서 수련해야죠.”
얼굴이 노래진 두 사람이 정광을 따랐다.
연무장에 들어간 정광은 각자에게 할 일을 지시했다.
“유 소협은 곤술, 언 소저는 체술, 사제와 자오는 합격술. 시작하죠.”
유정풍과 언의진은 전력을 다해 갈고닦은 실력을 뽐냈다.
정광이 무림맹에 퍼뜨린 것들인지라 남에게 보이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어서가 첫째요, 그간의 성과를 보여주고 모자란 부분을 배우고 싶어서가 둘째였다.
백승무와 자오는 정광이 시켰으니 그러려니 하며 수련했고.
정광은 네 사람의 움직임을 보며 성취를 파악했다.
‘나쁘지 않네.’
구룡사봉은 괜히 구룡사봉이 아니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눈곱만 한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저 정도면 쓸 수 있겠고…….’
백승무와 자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마련을 상대로 실전을 한번 거쳐서 그런지 전보다 꽤 나은 성취를 보였다.
‘여기에 공우를 더하면…….’
원굉을 비롯한 소림승들은 송훈을 무림맹까지 호송한 뒤 원로들에게 증언을 하고 바로 떠났다.
정광을 도우라고 공우를 남겨놨는데 때를 봐서 부르면 되리라.
‘같은 수준으로 한 명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일단 계획대로 가자.’
정광은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모자란 부분을 지도했다.
네 사람은 눈을 빛내며 가르침을 흡수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들 연무장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값진 시간이었다.
“유 소협. 점심 드시고 당 소협이랑 당 소저 불러주실 수 있으세요?”
“헉. 헉. 그러지. 그런데 나와 언 소저는 오후에 맡은 일이 있어 못 올 걸세.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면서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니 수련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
정광이 씩 웃었다.
“오늘만 날인가요. 내일도 오세요.”
순간 유정풍과 언의진은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서도 고맙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무인이기 때문이리라.
얼마 뒤 도착한 당오군과 당예지도 마찬가지였다.
정광은 자오를 내세워 그들의 질문을 막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독은 많이 연구하셨어요?”
“물론이지.”
“그렇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대답하며 정광의 입을 노려봤다.
그 입에서 그들이 원하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맛 좀 보죠.”
“좋네!”
“좋아요!”
정광은 맛뿐만 아니라 향도 들이키고 찔리기도 하는 등 온갖 독을 즐기게 됐다.
당 씨 남매는 앞의 두 사람처럼 정광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독이 확실히 개량된 것이다.
정광은 주즉시공으로 독을 배출하는 한편 품평도 곁들였다.
체술과 곤술도 확인했는데 그간 꽤 노력했는지 나쁘지 않은 성취였다.
정광은 미진한 점을 손봐준 뒤 손뼉을 쳤다.
“자. 자.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훅. 훅. 내일 또 와도 되겠나?”
“물론이죠. 아. 가시는 길에 장이 소협이랑 그 동료분들 좀 불러주실래요?”
당 씨 남매가 떠나고 장이를 포함한 일곱 명의 일반 무인이 왔다.
그들은 가균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축하만 했다.
덕분에 정광은 자오를 내세우지 않아도 됐고 바로 수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여기까진가.’
장이는 예상보다 나아졌지만 나머지 여섯의 성과는 미미한 상태.
그래도 이왕 부른 것, 꼼꼼히 지도했다.
“쿨럭. 커헉. 지, 진옥룡. 내, 내일 또 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가, 감사합니다. 크흑.”
일곱 사람이 떠나자 연무장엔 정광과 백승무, 자오만 남았다.
물론 서 있는 사람은 정광뿐이었다.
오전, 오후, 저녁 동안 계속 수련을 한 백승무와 자오는 일어설 힘조차 없어 누운 채로 앓는 소리만 냈다.
“수고했어요, 가죠. 아. 못 가나?”
정광은 양어깨에 한 명씩 짊어지고 숙소로 돌아가 방에 넣었다.
이런 식으로 사흘이 지나고.
무림맹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군사인 제갈문형과 허직을 비롯한 무림맹 무인들이었다.
* * *
“네 이놈들!”
허직은 망나니 사질들을 보자마자 불같이 소리부터 질렀다.
잔뜩 겁먹은 백승무와 달리 정광은 태연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숙. 건강하셔서 다행이네요.”
“……이…… 이……!”
수염을 부르르 떨며 정광과 백승무를 번갈아 노려보던 허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얼굴로 짧은 말을 뱉었다.
“생각 외로 멀쩡한 것 같으니 더는 말하지 않겠다. 조심 좀 하거라.”
“네?”
의아한 정광이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데 허직은 그대로 방에 들어가 버렸다.
빙그레 웃으며 지켜보던 허청이 나직이 말했다.
“너희들이 무사해서 안심한 거다. 그간 걱정을 많이 해서 한마디 한 것이니 흘려듣진 말고.”
“혹시 사숙, 심마(心魔)에 드셨나요?”
“무어라? 하하하. 그래, 좋은 심마라 할 수 있지.”
허청은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백승무를 방으로 보내고 정광과 후원을 거닐었다.
“사람들을 불러 수련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그들을 쓰려고 함이냐?”
“네.”
“자세히 좀 말해다오.”
정광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허청의 미간에 있는 골도 깊어졌다.
끝까지 들은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우리가 모자라서 네가 이렇게까지 하려 하는구나.”
“아뇨. 안 모자라세요.”
“말이라도 고맙다.”
허청은 진심으로 말했으나 정광 역시 진심이었다.
지금껏 상대해 본 사파에 비해 정파가 모자랄 게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사마련을 박살 내기로 한 건 정광 자신의 의지였다.
“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만 위험하지 않겠느냐?”
“뭘요. 사지로 뛰어드는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그렇다만…….”
허청은 마음이 복잡했으나 이어지는 정광의 말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길게 끌어봐야 힘든 건 우리 같은 무인이 아니잖아요.”
“……그래, 네 말이 옳다.”
“게다가 진짜 위험한 일은 사부께서 하시게 되는데요, 뭐.”
“하하하. 그렇게라도 잘됐으면 좋겠구나.”
평상시의 얼굴을 되찾은 허청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맹주와 군사를 보러 가자.”
팽수관과 제갈문형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천룡단주. 무슨 일이오?”
“정광이 계획을 하나 세웠는데 타당한지 논의를 해보러 왔습니다.”
“호오.”
팽수관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진옥룡. 자네의 신산묘계(神算妙計)를 말해보게.”
“별것 아닌데…….”
“하하하. 겸손은. 무엇인가?”
정광이 생각하기엔 정말로 별것 아니었다.
“타초경사(打草驚蛇)요.”
“하하. 타초경…… 사?”
수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
이는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어서 팽수관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사마련을 섣불리 건드려 방비를 굳히게 하는 우(愚)를 범하겠다는 말은 아닐 테고…… 설마?”
“네. 사마련 지부를 들쑤셔서 머리인 총단이 나서게 하는 거죠. 정확히는 사마련주요.”
“흐음. 무척 원론적인 방법이군.”
신묘한 귀계(鬼計)를 기대했던 팽수관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마음이 바뀌었다.
‘하긴. 원론적인 것만큼 확실한 건 없지.’
문제는 그런 원론적인 수를 행하려면 그에 걸맞는 힘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자네 혼자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죠.”
“누구를 생각하고 있나?”
정광이 몇 사람의 이름을 말하자 팽수관의 얼굴이 다시 찌푸려졌다.
“안 돼.”
“왜요?”
“천룡단이면 모를까, 그 전력으로 뭘 하겠다고?”
“천룡단은 맹에서 대기하다가 급보를 받으면 미친 듯이 뛰어가야 하죠? 그때까진 어차피 못 움직이잖아요.”
“……흐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가균도 잡았는데 지부 하나 못 잡겠어요?”
“……흐음. 그건 또 그렇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팽수관이 시선을 돌려 물었다.
“군사가 듣기엔 어떻소?”
우아한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제갈문형은 청수한 얼굴에 어울리는 낭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다못해 지룡단이라도 함께하면 모를까, 너무 위험합니다.”
정광이 싱긋 웃었다.
“짐만 돼요.”
“없는 것보단 낫지 않나.”
제갈문형이 받아치자 정광 역시 그랬다.
“지룡단을 이 일에 끌고 간다 하면 각 문파나 가문에서 난리를 치지 않겠어요?”
“자네가 데려가려는 이들 중 대다수도 지룡단에 속해 있지 않은가?”
“의(義)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보내줄 문파에,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나설 사람들뿐이니 괜찮죠.”
제갈문형의 눈이 빛났다.
“……자네 참 재밌는 사람이군. 맹이 자네 의견에 응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만 더 대보겠는가?”
“어차피 다 놀고 있는 인원이잖아요. 맹의 입장에선 있으나 없으나 똑같은 사람들이니 이렇게라도 써먹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일이 잘못되면 후폭풍은?”
“맹에서 감수해야겠죠. 군사님이시라면 오히려 잘 이용할 수 있으실 것 같은데. 무림의 정영(正英)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가 이렇게 피를 흘렸다. 다들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뭐 이렇게요.”
“……이건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 걸세. 왜 이리 서두르는 건가?”
“에이. 아시면서. 맹주님도 사부님도 다 아실 텐데.”
“…….”
제갈문형은 정광을 잠시 바라보다가 팽수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맹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나쁘지 않소.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좋지. 나도 이대로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거든.”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맹주께선 많은 비난을 받게 되실 겁니다.”
“그러라지.”
콧방귀를 뀐 팽수관은 정광을 보며 말했다.
“강휘가 곧 올 것이네. 녀석도 데려가게나.”
“아. 잘됐네요.”
“천룡단주. 할 말이 있소?”
“없습니다.”
“그럼 다 됐군.”
팽수관의 눈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진옥룡. 내 자네의 안건에 찬성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네. 첫째, 자네를 믿어서고. 둘째, 위험하지만 옳은 일이어서야.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 군사와 세부 계획을 짜보게나.”
팽수관은 허청과 함께 방을 나갔다.
제갈문형은 정광과 단둘이 남게 되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부적으로 생각해 놓은 게 있는가?”
“아뇨.”
“……뭐?”
제갈문형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광은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큰 줄기만 세우면 됐지, 가는 가지를 만들어봤자 헛수고죠. 상황이 삐끗하면 전부 쳐내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자네가 산서성에서 그렸던 그림도 뼈대만 만들고 임기응변으로 행한 것인가?”
“네.”
제갈문형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자네, 정말 똑똑하군.”
청수했던 그의 얼굴에 가는 웃음이 걸렸다.
무척이나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바보들은 자세히 그리면 그 그림이 영원할 줄 안다니까.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기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