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좀이 쑤시던 참
자오는 여전히 쌩쌩했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안색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변했습니다. 진옥룡이 저를 갱생시킨 게 아닙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다 보면 갱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믿어주십시오. 혹시 아직도 못 믿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계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성심성의껏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남궁신건이 퀭한 눈을 부릅떴다.
저 미친 수다쟁이의 말을 자를 기회 아닌가!
“이제 됐네. 충분히 잘 알았어.”
“다행이군요. 혹여나 자그마한 의혹이라도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다니까.”
“그래도…….”
“알겠다고 하지 않는가!”
자오는 고마운 얼굴로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사마련의 부련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왜 저를 쫓아왔는지는 저 자신도 의문인지라 아까의 건보다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군요.”
안 그래도 핏기 하나 없던 원로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해가 지고도 세 시진이 지난 상황 아닌가.
쉽게 말해 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런데 뭐?
아까보다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다고?
정파무림의 당당한 무인으로서 약조한 바를 지키느라 무리를 했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정광에게 호의적인 무리는 물론 중립을 지키던 무리까지 살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자오를 트집 잡아 이 사달을 일으킨 남궁신건 무리를 향해서였다.
‘말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남궁신건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이 나서야 했다.
“이보게, 이제 그만하지.”
“네? 겨우 이 정도밖에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대협들께서 저를 믿어주시려면 조금 더…….”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나. 다음에 또 날을 정해서 듣도록 하세.”
“세상 이치가 다음이란 없을 수도 있더군요. 그러니 오늘 그냥 다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 그의 도를 먼저 보여 드려야겠지요.”
자오가 등에 메고 있던 가균의 한풍도(寒風刀)를 잡았다.
“이 도에도 참 많은 사연이 있습니다. 들어보시면 꽤 흥미를 느끼실 겁니다.”
그가 도에 감긴 천을 풀려 하자 원로들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수많은 살기가 남궁신건을 찔렀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였다.
“그만! 다음에 듣겠네!”
남궁신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다가 휘청했다.
고수라 불리는 그로서도 자오의 음공(音功)을 견디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고개를 홱홱 저어 정신을 차린 그는 소매를 거칠게 떨치며 원로원을 빠져나갔다.
당황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보던 자오는 다른 원로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남궁 대협께서는 급한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럼 다시 시작하지요. 천부터 금방 풀겠습니다.”
“다음에 부탁하네!”
정광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도, 적대적인 이도, 이도 저도 아닌 이도 모두 일어섰다.
그리고 남궁신건처럼 휘청거렸다가 이를 악물며 원로원을 나갔다.
자오는 다급히 장내를 둘러봤다.
‘아, 아무도 없잖아.’
서운한 표정을 짓던 그는 잊고 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 맹주!’
뒤를 돌아보자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팽수관이 보였다.
“맹주. 모두 가셨습니다. 제 말을 못 믿어서 그러시는 걸까요? 아무리 그래도 벌써 가버리시다니…… 맹주?”
자오가 목소리를 높이자 팽수관이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깬 듯 흐리멍덩한 눈빛이었다.
“……음? 끝났나?”
팽수관은 양 귀를 막고 있던 솜뭉치를 뺀 뒤 자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협께서 해내실 줄 알았소.”
“……네?”
“사람을 붙여줄 테니 곤륜파의 숙소로 돌아가 푹 쉬시오.”
“하지만…….”
자오가 또 뭐라 말하려 했다.
팽수관은 즉시 사람을 불러서 그를 끌고 가게 했다.
홀로 남은 팽수관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자오가 말하는 내내 자긴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몸이 피곤했다.
* * *
정광은 귀찮은 원로들을 자오가 상대하게 한 뒤 허청, 백승무와 함께 곤륜파의 숙소로 갔다.
무림맹은 전보다 한산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걷던 정광이 허청에게 물었다.
“상당한 전력이 각자의 본거지로 돌아간 것 같네요.”
“사마련이 중원 곳곳에서 도발을 해대니 어쩔 수가 없지. 그래도 본문만큼 많은 이가 떠난 곳은 없다.”
운 자 배 네 명은 모두 곤륜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허 자 배와 정 자 배의 대부분이 그들을 따라갔다.
이는 천마신교와 인접한 곤륜의 특성을 감안해 맹에서도 응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천룡단(天龍團) 일대(一隊)는 언제 청해성으로 가기로 했나요?”
“현 정세가 이대(二隊)만 중원에 남겨두기엔 좀 그렇지 않느냐. 사마련의 기세를 어느 정도 깎아내지 않는 한,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예상대로였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에 이르자 맹에서 맡은 일을 하다가 돌아온 정우와 정현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정광과 백승무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드리며 격하게 환영했다.
“하하하. 네 소문이 아주 귀를 찌르더구나. 녀석, 승무 말고 나를 데려갈 것이지.”
“어이. 금권검협 나으리. 귀하의 높은 명성은 익히 들어왔소. 만나 뵙게 되어 삼생의 영광이외다. 크크크.”
반가워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정광의 실력을 그 누구보다 믿지만, 막냇동생처럼 생각하는 그들은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냈다.
정광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래도 사숙이 없어서 다행이네.’
꼬장꼬장한 허직이 무림맹 군사인 제갈문형과 함께 낙양에 갔기에 망정이지, 남아 있었다면 아주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달렸으리라.
어차피 사흘 뒤면 돌아온다 했지만 당장이 아닌 게 어딘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얘기들 나누거라. 먼저 들어가마.”
허청이 들어가자 잔소리를 늘어놓던 정우와 정현이 미소 지었다.
사백 앞에서 사형된 도리로 해야 할 일은 했으니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래도 걱정한 건 사실인지라 한마디씩 덧붙였다.
“정광아. 조심하거라.”
“대사형 말씀이 맞아.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홀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잖아.”
정광은 두 사형에게 씩 웃어 보였다.
그래서 돌아온 것이었다.
잔소리였지만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정광, 정우, 정현, 백승무는 방에 들어가 그간의 얘기를 나눴다.
두 사형은 평소와 달리 말이 참 많았다.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지?’
정광은 의아해하면서도 다 들어줬다.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까지 하며.
자오에게 단련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제법 괜찮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지자 정우, 정현, 백승무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인원이 적어지니 독방을 쓸 수 있게 돼서 좋네.’
무림맹 숙소는 겉은 허름하나 속은 알차다.
곤륜이나 소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환경이었다.
정광은 대충 시간을 가늠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자오가 잘하고 있나 보군.’
보나 마나 새벽이나 되어야 돌아올 터.
정광은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다.
침상이 좋은 것이라 그런지 유난히 기분 좋은 잠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정광이 괜한 시비에 휘말릴까…… 아니, 일으킬까 걱정한 팽수관이 사람들을 시켜 요리를 보냈다.
덕분에 곤륜파와 자오는 숙소 후원에 둘러앉아 편하게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백승무에게 자오에 대해 들은 정우와 정현은 정중히 인사만 하고 말을 걸지 않는 신기(神技)를 보였다.
그래서 조금은 딱딱한 분위기였으나, 정광이 소채를 씹으며 인상을 찡그리는 걸 본 정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 사제. 얼굴 좀 펴.”
“그러고 있는데요.”
“그러긴 무슨. 그보다 하나 물어봐도 돼?”
“네.”
“사제가 받았다는 무기명제자 말이야. 사제처럼 천재야?”
“그 정도는 아니고요. 꽤 똑똑하긴 하죠.”
“우와. 사제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대단한 천재잖아! 이 녀석. 대사형도 아직 못 받은 제자를 먼저 받다니!”
허청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무랐다.
“정현아. 팽가의 큰 어르신이신 팽만소 선배께서 서찰을 보내 사과까지 하시지 않았더냐. 애꿎은 녀석 잡지 말고 너도 제자 받을 준비나 하거라.”
“으으. 사백. 그건 좀…….”
몸을 부르르 떨던 정현이 후원에 덩그러니 놓인 마차를 가리켰다.
“사제. 저거는? 어마어마하던데 어떻게 할 거야?”
“안 그래도 여쭤보려 했어요.”
정광은 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사형. 돈 모자라세요?”
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반점, 의방, 도관, 고아원. 모두 무리 없이 운영되고 있다. 다 사제 덕분이지.”
“그러면 사부님. 본문에 더 보내야 할까요?”
허청 역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운학 사숙께서 본문으로 돌아가실 때 충분히 드렸어. 안 그래도 정 자 배가 제자를 받아야 할 때인데 네 덕에 걱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구나.”
정광은 속으로 그들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대답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욕심이 없어서야 원.’
정말 곤륜답다고 해야 할까.
이러니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지.
정광은 그들에게 마차에 실린 재물을 어떻게 처리하려는지 얘기했다.
백승무의 조언이라 덧붙이며.
설명을 들은 모두가 동의하며 백승무를 칭찬했다.
“역시 막내 사제는 돈을 굴릴 줄 아는군.”
“그렇지요, 대사형? 괜히 금권검협이 아니라니까요.”
“저, 정현 사형. 그 과분한 별호는 제발 좀 그만…….”
“과분하다니? 한참 모자란 것 같은데?”
정현의 너스레에 백승무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와하하하!”
식사 내내 웃음꽃이 피었다.
자오가 입을 열라 치면 긴장감이 흐른 게 유일한 흠이었는데, 그때마다 정광이 귀신처럼 제지했기에 무척이나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흐뭇하게 그들을 둘러보던 허청이 먼저 일어섰다.
“천천히 즐기거라. 맹주와 약조가 있어 먼저 가마.”
그는 한 가지 당부를 남겼다.
“정광아. 당분간 이곳에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네?”
“자오 대협이야 누가 또 뭐라 하면 어제처럼 대질시키면 그만이지만 네가 걱정이어서 그런다.”
“사부. 저를 못 믿으세요?”
“…….”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러마.”
허청이 떠나자 정우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사제.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돌아온 걸 보니 맹에서 뭔가 하려는 것 같은데.”
“정리되면 말씀드릴게요.”
“흐음. 조율이 필요한 일인가 보구나.”
잠시 생각하던 정우가 말을 이었다.
“네가 무얼 하든 지지하마. 허청 사백께서도 같은 마음이셔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을 것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 믿는다. 이런 말씀이시죠?”
정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오를 흘깃 봤다.
“가균이 왜 자오 대협을 쫓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네가 정말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든, 알면서도 함구하는 것이든, 네 도에 비추어 봤을 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는다. 잔소리가 길었구나. 마저 먹자.”
정우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한 젓가락 집기도 전에 정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사형. 지룡단(地龍團)에 있으신 거 어때요? 따분하죠?”
정우가 아니라 정현이 대답했다.
“내 말이. 후기지수들을 모아놓은 무력 조직은 개뿔. 실상은 부잣집 도련님들을 모아놓고 금이야 옥이야 하는 꼴이라니까.”
“어허. 사제. 말이 너무 심하군.”
“대사형. 심하다니요. 딱 봐도 그렇잖습니까.”
정현의 말대로였다.
천룡단이야 새로운 무림맹의 상징처럼 창설됐으니 그에 걸맞는 고수들이 남았지만, 그 외의 고수들 중 많은 이들이 본거지로 돌아갔다.
맹보다 자신의 문파와 가문이 더 소중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큰 전력이 못 되는 지룡단에는 대부분의 후기지수들이 남았는데, 이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거야 원. 맹에 있으면 더 안전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제는 어떻게 생각해?”
정광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이긴 하잖아요.”
“후우우. 그래서 더 웃긴다는 말이지.”
무림맹은 확실히 안전했다.
맹에 상주하는 전력도 적지 않은 데다 하남성은 소림과 개방의 텃밭 아닌가.
사마련이 치고 들어올 일은 거의 없다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천룡단이야 큰일이 터지면 그곳으로 급파되겠지만, 지룡단은 그럴 일이 없었다.
아무리 강해봐야 후기지수일 뿐, 애지중지 키워야 할 때였기에.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일에 내보낼 리가 없는 것이다.
‘사형들이 이러는 걸 보면 다른 이들도 비슷하겠네.’
정광은 생각을 정리하고 정현에게 물었다.
“다들 불만이 많죠?”
“아무렴. 당연하지.”
“잘됐네요.”
“……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정현이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광에게 바짝 붙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제. 뭔가 꾸미고 있구나? 빨리 말해봐.”
“아까 정리되면 말씀드린다고 했잖아요.”
“그럼 이렇게 하자. 나 빼먹지 않는 거다. 알았지?”
정현을 지켜보던 정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마치 음모를 꾸미는 듯한 모습이 우스워서였다.
물론 그도 그 음모에 동참하고 싶어 했다.
“흠. 흠. 사제. 나도 잊지 말아다오.”
“네?”
“……미, 믿으마.”
정광은 빙그레 웃었다.
원래 그럴 계획이었지만 정우가 그답지 않게 민망해하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려던 정광은 시선을 담벼락으로 돌렸다.
익숙한 기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잘 왔네.’
얼마 안 가 담 너머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정광 아우! 계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