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
송훈의 의문은 당연했다.
다른 사마련 무인은 호송용 마차에 몰아넣고 자신만 따로 빼서 이런 비싼 마차에 타게 하다니.
그것도 정광과 함께 말이다.
‘정파 놈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하지만 정광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짐이 좀 많아서요.”
“……?”
“사제에 자오에 저까지 같이 타면 숨 쉴 공간도 없겠더라고요.”
“…….”
송훈은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정광의 말을 이해했다.
“……본련의 도박장들에서 턴 재물을 넣기엔 이 마차가 너무 비좁았다는 말이군. 그래서 그 둘은 재물과 함께 다른 마차에 태운 것이냐?”
“털다뇨. 정당하게 얻은 것들인데.”
송훈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너 혼자 타면 될 텐데 나는 왜?”
“예우하는 거죠.”
“……예우?”
“산서지부장이시잖아요. 무림맹에서 생포한 사마련 무인 중 제일 높은 분인데 허투루 대접했다가 말 나오면 정파 체면이 영…… 아시죠?”
“……네 의지가 아니라 석가장주의 의지였군.”
송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파의 위선이 역겨워서였다.
그리고 정광을 향한 비웃음도 섞여 있었다.
“너는 날 감시하는 거고.”
“네.”
“하하하. 제멋대로인 네 성정을 생각하면 귀찮다고 거절할 법한데 잘도 따르는구나. 석가장주가 금원보라도 챙겨주더냐?”
정광이 정색하며 부정했다.
“아뇨. 전표요.”
“…….”
“안 그래도 짐이 무거워서 골친데 왜 금원보를 받아요. 은근히 판단력이 약하시네.”
“…….”
송훈은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더는 상대하기 싫어 지그시 눈을 감을 뿐이었다.
정광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전표를 아무리 많이 줬어도 제가 원하지 않았으면 거절했을 거예요.”
“……아무리 많이 줬어도?”
“사소한 건 넘어가죠. 이제 중요한 얘기를 좀 해볼까요?”
송훈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얼음보다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천하의 그 어떤 고문으로도 내 입을 열 순 없다.”
정광도 인정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열 순 있지만 시간이 꽤 걸릴 것 같긴 하네요.”
“어디 마음껏 해봐라.”
“아뇨. 쉬운 길을 두고 왜 귀찮은 길을 가요.”
“……쉬운 길?”
“네.”
“……지금 나를 회유하겠다는 거냐?”
송훈의 분노가 담긴 물음에 정광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사마련(邪魔聯)은 사흑맹(邪黑盟)이 중원 마인들을 끌어모아 만든 조직이죠.”
“……?”
“사흑맹(邪黑盟)은 쌍사문(雙邪門)이 다른 사파 세력을 병합해서 만든 것이고요.”
“…….”
“사마련의 핵심은 쌍사문. 현 련주도 쌍사문의 문주.”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왜 하는 것이지?”
“다들 알면서도 정말 중요한 건 놓치고 있으니까요.”
송훈은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꼈다.
한번 말해보라는 의미.
정광은 사양하지 않았다.
“사마련은 쌍사문만 무너뜨리면 사라질 겁니다.
“……웃기는 말이군.”
“쌍사문까지 갈 것도 없죠. 련주만 없어져도 될 테니까.”
“……뭘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한 것이냐?”
“뭐 여기저기서 듣고 자오한테서도 듣고 그랬죠.”
“……더 웃겨지는군. 자세히 말해봐라.”
“아. 얘기가 좀 긴데. 자오는 그냥 태울걸 그랬나.”
정광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 말을 이었다.
“사흑맹은 현 련주의 부친이 만들었죠. 현 련주는 그걸 이어받아 사마련으로 키웠고요. 그의 제자들도…… 너무 길어지니 이건 좀 넘어 가고. 어쨌든 수많은 사파들의 연합체를 한 핏줄이 대를 이어 다스린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대부분의 무인은 자존심이 강하다.
자신의 머리 위에 다른 이가 서는 걸 원치 않는다는 말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라 주장하는 정파만 봐도 그렇죠. 속 좁은 이는 사형이나 사제, 가문으로 치면 형이나 아우가 자신을 제치고 장문인이나 가주가 되는 걸 참지 못해요.”
공동파의 영추자와 하북팽가의 팽강웅이 그 예였다.
“그런데 남의 것을 뺏기 위해 뭉친 사파들, 그 사파들이 모여서 이뤄진 사마련에서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송훈이 한마디 했다.
“사파라고 남의 것을 뺏기만 하진 않아.”
“부련주의 사문인 귀도회(鬼刀會)나 지부장님의 가문인 절강송가(浙江宋家) 같은 곳을 얘기하시는 거죠? 네. 그래도 낫다고 하더군요. 근데 그래서 더 문제예요.”
사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타인의 것을 뺏길 원하는 이들이 모여서 결성된 곳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
후자의 경우도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남을 해칠 수밖에 없었으나 전자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여기서 전자는 쌍사문이요, 후자는 귀도회와 절강송가였다.
“성향이 그렇게 다른데 뭉쳐서 사는 건 말이 안 되죠. 근데 그걸 대를 이어서 해? 양쪽 다 불만이 얼마나 많겠어요. 아. 마인들까지 끌어들였으니 세 쪽이네.”
송훈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네 눈에는 세 무리가 그렇게 달라 보이냐?”
“당연하죠.”
“……재밌군. 정파에선 모두 똑같이 보는데.”
“걔들은…… 정파는 그게 문제예요. 왜 맨날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타령인지. 자그마치 두 배나 차이가 나는데.”
“…….”
“어쨌든, 현 련주는 내부의 불만을 분출시키기 위해 정파무림에 싸움을 걸 수밖에 없었겠죠. 본인의 야망도 있어서겠지만 비대해진 힘을 소모할 겸 이권을 챙기면 좋은 일이니까요.”
“머리가 있는 이라면 다 아는 얘기다.”
송훈이 고개를 젓자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알면서도 정말 중요한 건 놓치고 있다니까요.”
“아까 말했던, 련주를 죽이면 본련을 사분오열시킬 수 있다, 이건가?”
“아뇨. 그건 머리가 조금 더 있어도 아는 거고요. 지부장님이나 부련주도 알면서 못 한 이유가 있잖아요.”
“…….”
“첫째. 련주를 칠 자신이 없어서.”
송훈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정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역시 자존심이 강하시네요. 스스로 비참해지는 거짓말은 안 하시고. 근데 도박장, 진짜 다 파셨어요?”
“…….”
“아니시구나.”
“……!”
“네. 네. 그건 넘어가죠. 둘째. 련주가 죽으면 혼란이 생기겠지만 결국엔 정리되겠죠? 누군가는 욕심을 낼 테니까.”
“…….”
련을 차지해서 이권을 취하길 원하는 쪽은 뜻이 맞는 문파를 회유해서 뭉칠 것이고, 이를 거부하는 쪽 역시 무리를 이뤄서 대항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이 이기든 상대나 상대의 세력권을 흡수해 다시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내부의 불만이 커지면 외부로 힘을 표출해야 하고.
악순환이 끊임없이 이뤄지는 것이다.
송훈은 아까보다 깊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말의 앞뒤가 전혀 안 맞는구나. 아까는 련주만 죽이면 사마련을 없앨 수 있다더니 지금은 그래 봐야 똑같다?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게냐?”
“같지만 달라요.”
“……?”
“아까 제가 오십보백보 얘기했죠?”
“……그게 왜?”
“천하의 사파를 모두 멸할 순 없으니 차선을 택해야죠. 련주를 죽여서 지금의 사마련을 지우는 겁니다. 새로운 사마련이 만들어지도록.”
송훈은 한숨을 쉬었다.
무척이나 실망해서였다.
“……결국 하는 말이 련을 배신하라는 거군.”
“제가 언제요?”
“그런 의미였지 않느냐.”
정광이 황당한 얼굴로 항변했다.
“제가 죽일 건데.”
“……!”
“그러니까 뒤처리에 힘을 보태시라고 드린 말씀이에요.”
한동안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송훈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를 죽일 수 없어.”
“흐음.”
“내게 그런 말을 해봐야 소용없고. 난 그럴 역량이 안 된다.”
“부련주에게 직접 말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분도 죽일 건데.”
“……무슨 수로 그분을 이겼는진 모르나 너무 쉽게 보는군.”
“그거야 앞으로 보면 아실 거고. 무림맹에 련의 정보를 말하진 않으실 거죠?”
“당연하다.”
“그러세요. 나중에 련을 정리할 때 사파인들에게 배척받으면 안 되니까.”
송훈은 대꾸 없이 눈을 감았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들이었기에.
‘만약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황당할 정도로 광오한 말들이었으나 그 말을 한 사람도 황당할 정도로 강한 존재.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정광은 그 주름을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가 빨리 달리는 만큼 풍경도 빠르게 지나갔다.
‘일단 씨앗은 심었고.’
송훈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했다.
제법 똑똑한 자이니만큼 더 다루기 쉬웠고.
‘그나저나 할 일이 많네.’
지금의 정광으로선 사마련 총단에 쳐들어가 련주의 목을 벨 수 없다.
련주를 끌어내기 위해선 사마련 지부들을 박살 내야 했다.
겸사겸사 좋은 곳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정광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 * *
정광은 무림맹에 도착하자마자 허청에게 무지막지한 잔소리를 들었다.
물론 걱정이 가득 담긴 잔소리였다.
“가균 그 흉악한 자와 싸웠다 들었다. 정말 다친 덴 없는 게냐?”
가균이 아무리 흉악해 봐야 정광보다 흉악할 리가 있나.
“천랑대까지 덤볐다며? 악독한 놈들 같으니, 한 명에게 떼를 지어 덤벼?”
악독함 역시 정광이 몇 수는 위였다.
허청은 정광과 백승무를 앉혀놓고 호들갑을 떨다가 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물었다.
두 제자의 대답에 허청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제자야. 너 때문에 이 사부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구나.”
허청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하자 정광이 백승무를 나무랐다.
“사제. 처신을 똑바로 해야지. 사부께서 힘들어하시잖아.”
“……죄송합니다.”
“사부. 들으셨죠? 그냥 용서해 주시죠.”
허청은 어이없는 얼굴로 정광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승무가 아니라 네게 말하는 것 아니냐.”
“저요?”
“그래.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안 했다만 너무 지나쳐.”
“무량수불. 도리에 안 어긋났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크게 안 어긋났다 했다.”
“작은 건 대충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요?”
허청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네가 사형이랍시고 승무의 명성을 높여줬더구나.”
“그게 사제 간의 정이죠.”
“헌데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군. 금권검협이 무림맹에서 하북성으로 넘어갈 때 함께 다닌 이의 얼굴이 천하제일미남은 아니었다던데.”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니까요.”
“예끼, 이놈. 편하게 먹고 마시려고 역용을 한 것 아니냐?”
“사부.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거든요. 자오라고 하는데…….”
“바람이 부니까 돛을 돌리는 건 여전하구나. 그래, 그도 만나 봐야겠지.”
밖에 있던 자오가 들어왔다.
허청은 인사를 나눈 뒤 맑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오 대협. 있는 그대로 말해주시오. 그래야 그대를 도울 수 있소이다.”
실수였다.
허청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내 전부 이해했소이다. 아! 이럴 게 아니지. 다들 맹주를 만나러 가야 해.”
허청은 두 제자와 자오를 이끌고 팽수관의 집무실로 갔다.
팽수관은 껄껄 웃으며 정광과 백승무의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자오의 얘기를 듣자 허청처럼 안색이 하얘졌다.
“……완벽하게 이해했소. 더는 말할 필요 없소이다.”
백승무와 자오를 내보낸 팽수관은 정광과 허청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원로원에서 당장 자리를 마련하라고 성화요. 송훈의 심문보다 먼저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더이다. 조금이라도 미루려 했으나 하도 말이 많아서 원.”
허청은 고개를 끄덕였고 정광은 주먹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본 팽수관과 허청이 기겁했다.
“안 돼!”
“네? 뭐가요?”
정광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두 사람은 동시에 외쳤다.
“어쨌든 안 돼!”
한동안 잔소리를 늘어놓던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내가 이래 봬도 맹주일세. 알아서 처리할 테니 조금만 참게.”
“맹주의 말씀이 옳다. 각 문파와 가문들의 수장은 거의 다 본거지로 돌아갔어. 아주 까다로운 상대는 없다는 말이다.”
“저야 그렇다 치고 자오는요?”
팽수관과 허청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별문제 없을 것 같네.”
“내 생각도 그렇다.”
“네. 그럼 그럴게요.”
팽수관이 일어서는데 허청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헌데 제갈 군사께서 안 보이는군요.”
“아. 어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낙양으로 갔소.”
“허어. 큰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 정도는 아니오. 내일이면 돌아올 것이외다.”
“다행이군요.”
팽수관과 허청은 정광, 백승무, 자오를 데리고 원로원으로 갔다.
그 큰 전각이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정광은 순식간에 좌중의 분위기를 읽었다.
‘삼분지 일씩쯤 되네.’
호의적인 기운이 삼분지 일, 적대적인 기운이 삼분지 일, 이도 저도 아닌 기운이 나머지였다.
물론 적대적인 기운은 남궁세가와 그편에 선 세력이었다.
그들은 정광을 보자마자 따졌다.
먼저 나온 건 도사답지 못한 행동과 거친 손속이었는데 정광에게 호의를 가진 문파들이 도울 필요도 없었다.
허청의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됐다.
“정광은 본문의 제자. 본문의 문규(門規)에 비춰 옳고 그름을 가른 뒤 처벌할 것이오.”
“그래도 너무 심하지 않소! 산적을 털고 도박장을 털고! 도적이 따로 없지 않소이까!”
남궁세가주의 아우 남궁신건이 나섰으나 허청의 상대는 아니었다.
“도적을 털면 도적이오? 그럼 악인을 처벌하면 악인이겠소?”
“……그런 궤변을…….”
“궤변이라니. 그릇된 일을 보고도 자신의 명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따지면 언제 협행을 하겠소? 정광은 민초들을 위해 나선 것이오. 그들이 칭송하는 소리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소이다. 정광을 욕하는 이들은 악행을 하다가 처벌받은 자들밖에 없는데 남궁 대협께서 그들의 편을 드니 대협께서도 악인이 되는 것이오?”
“말씀이 심하시오!”
“그대로 돌려 드리겠소이다.”
“……명문정파의 제자가 어찌 그런 일을…….”
“그 말씀은 맞구려.”
“……?”
“수많은 명문정파의 제자들 중에 내 제자만큼 많은 협행을 한 이가 없으니 안타깝소이다.”
정광을 적대하는 이들 중 몇몇이 또 나섰으나 허청의 침착한 응수에 박살이 났다.
“정광이 행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우리가 아니라 민초들이 판단하는 것이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본문 제자의 행실을 본문의 문규에 따라 판단하고 처분하겠다는데 왜 이리 참견이 많으시오? 설마 본문 내부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오?”
그랬다고 했다간 곤륜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상황.
침묵하던 사람들은 정광이 해낸 엄청난 쾌거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팽수관이 나섰다.
“못 믿는 분이 많으시구려. 맹주로서 비무를 주선해 드리겠소. 누가 먼저 진옥룡과 겨루시겠소이까?”
“…….”
수많은 이들과 싸우고도 불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정광이었다.
게다가 십존 중 셋의 공동전인.
정파무림 최강자들이 고금제일천재라 칭하는 것은 물론, 가균을 이길 만도 하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도는 판에 누가 감히 싸우자 하겠는가.
침묵하던 사람들은 만만한 자오에게 화살을 돌렸다.
“사파 출신인 자를 믿을 순 없소이다! 언제 또 돌아설 줄 알고!”
“저자가 무엇을 숨기고 있기에 부련주인 가균이 쫓았겠소? 숨기고 있는 것을 토설하게 해야 하오!”
“이번만큼은 맹주도 천룡단주도 나서지 마시오! 우리가 직접 들어야겠소이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울 걸 각오하고 한 말이었건만.
무척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진 팽수관을 빼고 허청, 정광, 백승무가 밖으로 나가는 것 아닌가.
“자오! 멋지게 결백을 증명하세요!”
정광이 문을 나가기 전에 외치자 자오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쿵!
문이 닫혔다.
자오는 원로들을 돌아보며 포권한 뒤 비장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말이란 본디 짧게 축약하면 전체의 진의를 표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많은 오해가 생기곤 하지요. 진실을 말씀드릴 터이니, 부디 끊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냉소를 흘리며 자오를 노려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얼굴로.
“그럼 모두 승낙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자오는 다시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은 본디 선하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저는 둘 중 무엇이 옳은지 알 정도로 현명하진 않으나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있습니다. 사람이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지요.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제가 산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십삼 년 전 귀주성(貴州省) 정안현(正安縣)에서 삼남이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나이 열하나에 사흑맹(邪黑盟) 소속인 파천방(破天幇)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했기에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했고 무공에도 작게나마 재능이 있었기에 그 길밖에 없었지요. 네. 저는 그렇게 사파인이 되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게 정(正)이 무엇이고 사(邪)는 어떤 것이며 마(魔)는 또 뭘 의미하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살기 위한 선택을 강요받았고 상황에 맞는 끈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입문하고 나니 알겠더군요.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그때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살아왔다 생각했었는데 진짜는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욕설과 구타가 계속됐습니다.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잘하면 잘했다고 말이지요. 기대에 못 미칠 땐 사부와 사형들 모두가 절 미워했고 뛰어넘을 때면 사부는 칭찬했으나 사형들이 가만두질 않았습니다. 자연히 독기가 생기더군요. 입문하기 전에는 굶주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진짜 죽음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억울해서라도 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반드시 살아남고 싶었단 말씀입니다. 독기론 부족했습니다. 살심이 필요했습니다. 저를 죽이고자 했던 자들이 저를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늘이 그래도 무심치 않았던 걸까요? 제 자질이 사형들의 것보다 나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승복하더군요. 그래, 이제 됐어. 이대로만 가면 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보통 이렇게 생각하는 게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직 사파의 생리에 대해 잘 몰랐던 겁니다. 어느 날 삼사형이 뒤통수를 치더군요. 혹시 몰라 숨기고 있던 수로 간신히 죽였습니다. 물론 저도 무사하진 못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받은 암습이라 작지 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때 대사형이 나타나더군요. 깜짝 놀란 얼굴로 제 상처를 살피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사형에게 썼던 수법으로 대사형도 죽였습니다. 선량한 그를 왜 죽였냐고요? 그가 상처를 살피는 척하면서 몰래 독침을 꺼냈거든요. 죽고 죽이는 사형제들이라니. 이해가 가십니까? 더 가관인 건 사부였습니다. 뒤늦게 나타난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습니다. 네가 진정한 제자다. 내 모든 걸 전해주마라고. 저는 물론 안 믿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부까지 죽이진 않았습니다. 그럴 힘이 없었으니까요. 대신 어느 정도 무공을 전수받은 뒤 도망을 쳤습니다. 사마련 총단으로요. 그곳이라면 무서운 사부도 못 쫓아올 거라 생각해서였지요.”
숨도 안 쉬고 말하는 듯한 자오를 보며 질려 하던 사람들 중, 남궁신건이 대표로 나서서 간신히 물었다.
“아직 멀었는가?”
자오는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본격적인 얘기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말을 끊지 않기로 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미,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가 지고.
세 시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