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직접 경험해 봤기에 한 말
가균은 거대한 전각에 들어섰다.
그곳은 이미 많은 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하나같이 사마련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인물들.
그중 일부는 눈으로 인사를 보냈지만 상당수의 이들은 시선조차 안 맞추려 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마음이 무거워졌다.
‘꽤 많이 떨어져 나갔군.’
이번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가균은 담담한 얼굴로 그들 사이를 걸었다.
정면에 보이는 높은 단.
그 위에 오롯이 놓인 화려한 의자.
그곳에 몸을 파묻고 있는 중년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몇 걸음이나 더 걸었을까.
중년인 사지환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돌아오셨구려.”
인사 같지만 멈추라는 의미.
지금껏 허락된 거리보다 가까운 자리였다.
가균은 그 자리에 서서 껑충한 몸을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련주.”
허리를 펴기도 전에 추궁이 시작됐다.
“둘째에게 수작을 부린 놈을 내 앞에 데려오라 했을 텐데.”
“…….”
“하다못해 갈기갈기 찢긴 시체로라도.”
가균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몸을 꼿꼿이 세운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다.
“제 능력이 부족해 흉수를 찾지도 못했습니다.”
“찾지도 못했다라…….”
사지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리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해도 하북지부의 수하들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놓고, 직접 키운 천랑대를 전멸시킨 대가로 알아낸 게 겨우 그거란 말이군.”
“그렇습니다.”
“애도인 한풍도(寒風刀)도 뺏기면서.”
“그렇습니다.”
“손가락도 세 개나 놓고 왔으면서 말이오.”
“그렇습니다.”
많은 이가 모인 자리에서 연이어 받은 질책이건만.
가균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반면에 사지환의 입꼬리는 더욱더 위로 올라갔다.
“어디, 일전에 부련주가 보냈던 보고서 외에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나 봅시다. 아니, 아예 합쳐서 직접 말해보시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균은 하북성에서부터 산서성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말했다.
사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때론 인상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둘째의 수하였던 자오 그놈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군.”
“왜 변절해서 곤륜의 진옥룡에게 붙었을까. 뭐 먹을 게 있다고.”
“둘째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되면 좋은 일이지만 황태손을 노려? 머저리 같은 놈.”
“그렇지. 변방에서 자중지란을 벌이고 있다는 마교가 아니라 황실 쪽 인물일 수도 있겠군. 뿌리부터 사교와 엮인 황조이니 그럴싸해.”
시간이 흘러 가균의 얘기가 끝나자 사지환은 정리하듯 말했다.
“황실을 당장 탐문하긴 어려우니 자오 그놈을 쫓아 산서성으로 갔다는 것 아니오? 타당한 판단이외다.”
“…….”
“헌데 왜 진옥룡이라는 애송이에게 당한 것이오?”
“그가 저보다 강했습니다.”
“……팔사(八邪) 중 도사(刀邪)요, 본련의 부련주인 그대보다 곤륜의 어린놈이 강하다고?”
“그렇습니다.”
“철혈장주가 직접 만든 신검을 가진 놈이라 방심했다가 당한 건 아니고? 헌데 그놈은 대체 어떤 놈이길래 콧대 높은 철혈장주가 검을 만들어준 것이오?”
가균의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릿속의 뇌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막내 공자가 진옥룡에게 신물을 줬다는 걸 아는 이들은 모두 죽였다. 련주는 그냥 떠보는 거야.’
눈 깜빡할 새에 몇 번이나 생각해 봤지만 답은 같았다.
자신이 직접 하북지부의 정보를 통제했으니 련주가 그 사실을 알 리는 만무했다.
“보기만 해도 범상치 않은 검이었으나 철혈장의 것인 줄은 몰랐습니다. 철혈장주가 왜 놈에게 검을 만들어줬는지는 저 역시 모릅니다.”
“흐음. 그래서 부련주는 방심했다는 것이오, 아니오?”
“했습니다. 하지만 놈도 강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놈이 석가장 버러지들은 물론 소림 땡중들과 힘을 합해 산서 지부를 박살 냈다 해도 그렇게까지 고수일 리는 없지.”
“…….”
“그나저나 참 대단하군.”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내려친 사지환이 노한 목소리로 따졌다.
“부련주 덕분에 본련은 웃음거리가 되었소. 무림맹에선 부련주에게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했고. 어떻게 책임을 질 생각이오?”
가균은 천천히 두 손을 모았다.
그렇게 예를 표한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련주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
“처분을 정하실 때까지 근신하면서.”
“…….”
사지환은 가균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하하하. 역시 시원시원하구려.”
“…….”
“즉결처분하고 싶으나 부련주가 세워온 공이 있으니 생각 좀 해봐야겠소이다.”
“알겠습니다.”
“그만 물러가시오. 고생하셨으니 오늘 하루는 좀 즐기시고.”
“네.”
가균은 몸을 돌려 전각을 나왔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입술 사이를 비집고 피가 흘러내렸다.
아직 완치되지 않은 내상에 사지환의 모욕적인 말들이 더해진 결과였다.
‘평소 허락지 않던 거리까지 오도록 하여 자신을 치도록 종용하다니.’
물론 그런 도발에 넘어갈 가균이 아니었다.
련주도 그걸 알기에 놀린 것이고.
‘역시 여기까지군.’
사지환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내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나쁘진 않았겠지.’
오히려 사지환으로선 평소 껄끄러워하던 가균에게 죄를 묻고 처벌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사마련의 세력 구도상 거기까지 가는 건 득보다 실이 많았기에 모욕만 잔뜩 주고 운신의 폭을 줄여 버린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이렇게 예상했을 거라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었을 거라는 것.
‘뭔가 예상치 못한 수를 따로 꺼낼 텐데 짐작이 안 가는구나.’
하지만 변수는 그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옥기린 후위진과 정광의 관계다.
후위진이 별다른 이유 없이 자신의 신물을 정광에게 내주지는 않았을 터.
‘정과 사를 대표하는 청년들이다. 둘 사이의 끈을 알아내면 양쪽 다 조금씩이나마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진옥룡 그놈은 어떤 방법을 써도 꿈쩍도 안 할 테니 막내 공자와 그 가문만 움직일 수 있어도 련주에게 숨긴 가치가 있다.’
둘째는 정광의 진정한 무공 경지다.
‘아무리 소문이 나도 곧이곧대로 믿을 이는 없을 터. 련주의 판단에도 착오가 생기겠지.’
정광의 강함은 직접 대적해 본 이만 알 수 있다.
아니,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모두 나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방심하다 신검 때문에 당했다는 말을 흘리니 련주 역시 믿는 눈치 아니던가.
‘의심은 하고 있겠지만 내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인의 정체가 큰 변수였다.
‘진옥룡은 마인이 아니야. 천마신교의 마인이 둘째 공자를 쳤을 리도 없고. 그럼 대체 누가?’
사지환의 말처럼 황실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가 그렇게 판단하도록 유도하기도 했고.
‘여기까진 나쁘지 않게 됐는데…….’
앞으로가 문제다.
정광에게서 도주할 수 있도록 해준 기물을 줬었던 그들.
단일 세력으론 천하 최강이라는 천마신교라 할지라도 아직까지 정리 못 했을 그들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또 다른 강대한 세력에게 동시에 일을 꾸미느라 여력이 없다는 의미겠지.’
가균의 예상으론 그만한 세력은 황실밖에 없었다.
‘련주가 잘 쑤셔주길 바라야겠군.’
운이 좋으면 그들이 숨기고 있던 것들을 발견해 낼지도 모를 일.
‘아니. 틈이라도 벌려주면 돼.’
가균은 련주도 그들도 믿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며 나아가기 위해선 양쪽의 틈을 찾아야 했다.
‘이제부터는 인내 싸움이다.’
그들에게 연락을 보내 작아진 자신의 입지를 설명한 뒤 기다리면 될 터.
그들이, 그리고 련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며 칼을 갈아야 하리라.
“후우우…….”
그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왔다.
산서성에서 이곳까지 달려오며 되뇌었던 생각들을 정리하자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와서였다.
게다가 평소 아끼던 송훈이 생포되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녀석들이 없어서인가?’
직접 고르고 키운 만큼 깊은 신뢰를 나누고 있던 천랑대.
그들을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쓰려 왔다.
‘그래도 한동안은 잘 먹이고 잘 재워서 다행이군.’
오늘 하루만큼은 즐기란 소리를 들었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 천랑대와 함께 들렸던 곳처럼 좋은 곳들을 또 가겠지만, 그때의 즐거움은 다시 못 느낄 것 같았다.
* * *
“자. 자. 즐기게, 즐겨.”
“…….”
“어허. 뭐 하는가. 쭉 들이키지 않고.”
정광은 계속 즐기라 재촉하는 석우완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술잔에 차를 채워놓고 즐기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정광은 속으로 탄식했다.
‘꽉 막힌 머리를 트여줬건만. 이런 쪽은 여전히 막혀 있네.’
앞에 놓인 요리들만 봐도 그랬다.
풀. 풀. 풀.
이딴 걸 먹으면서 뭘 어떻게 즐기라는 건지 원.
정광은 찻물을 입에 털어 넣으며 결심했다.
‘내일 해 뜨면 바로 나가야지.’
산서성 전역을 돌며 적당히 털었겠다, 노잣돈도 든든히 받았으니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읽은 걸까?
석우완이 앞으로의 행보를 물었다.
“그래, 언제쯤 떠날 생각인가?”
“내일요.”
“역시 바람 같군.”
“네?”
“이곳 일을 해결했으니 다른 곳을 도우러 가려는 것 아닌가?”
“네?”
“하하. 쑥스러워하기는. 내 한번 맞춰보지. 자네, 무림맹으로 가려는 게지?”
정광은 진짜 놀랐다.
“……그걸 어떻게?”
석우완은 빙그레 웃으며 좌중을 둘러봤다.
석가장의 무인들은 물론 소림승들까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진옥룡이라면 맹에 직접 가서 어려운 곳을 묻고 그곳으로 달려갈 거라 생각했소. 아니나 다를까. 딱 맞췄구려.”
“하하하하.”
모두가 웃었으나 정광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들의 오해가 어이없어서였다.
‘그림대로 무림맹을 이용해 사마련을 치려는 건데 어려운 곳을 돕기는 무슨.’
뭐 오해를 하든 말든.
자신의 행보에 방해만 안 되면 무슨 상관인가.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석우완이 말을 이었다.
“소림 역시 무림맹으로 떠나야 하는데 같이 가면 되겠군.”
“네?”
“생포한 송훈과 그 수하들 말일세. 원굉 대사 일행이 무림맹까지 호송하기로 했다네.”
“저는 그냥 따로…….”
“다친 이가 많아 마차를 여러 대 빌릴 걸세. 자네의 것은 특별히 좋은 것으로 준비할 테니 함께 가게나.”
단칼에 거절하려던 정광은 마음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도박장에서 턴 재물 대부분이 은자였다. 옮기기 피곤할 정도로 무겁지 않은가.
그냥 산서성에서 전표로 바꿀까 했었지만 백승무의 조언에 따라 조금 먼 곳까지 가져가기로 한 참이었다.
‘마차도 공짜겠다, 사람이 많으니 덤벼드는 놈들도 없겠지.’
돈도 아끼고 귀찮은 일도 피할 기회.
“……따로 가는 것보단 같이 가는 게 좋겠네요.”
“하하하. 다행이군. 그럼 맛있게 들게.”
석우완은 정광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입을 닫았다.
그 대신 전음을 보냈다.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몇 가지 걱정되는 것들이 있네.
-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세요?
-맹에 가면 많은 이들이 무례를 저지를 게야. 정말로 가균을 잡았냐고 비아냥대는 건 물론이요, 자오 대협을 의심하며 손가락질하는 이도 있을 걸세. 아니, 왜 사마련의 부련주씩이나 되는 자가 쫓았는지 그 이유를 토설하라고 윽박지를 수도 있겠군.
-아아. 그거야 뭐…….
-일일이 상대하지 말게나.
당연히 일일이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본보기로 몇 놈만 패면 조용해질 테니까.
하지만 석우완의 방법은 달랐다.
-맹주와 자네 사부가 방벽이 되어줄 걸세. 소인배들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얼마 안 가 자네의 본모습을 알게 되면 알아서 꼬리를 말고 승복할 텐데 뭐 하러 상대하는가.
석우완은 겸연쩍은 얼굴로 전음을 이었다.
-자네를 만나 직접 경험해 봤기에 한 말일세.
-와아. 의외로 솔직하시네요.
-크흠. 그럼 내일 보세나.
그는 감탄하는 정광을 뒤로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식사도 대충 해야 할 만큼 바빠서였다.
‘거참. 협행을 해도 너무 크게 하니 주변이 힘들어지는군.’
정광이 산서성 전역을 돌며 도박장들을 털거나 영업정지시킨 덕분에 산서성 노름꾼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이쯤 되면 정광을 원망하고 저주해야 하기 마련이건만 그들은 찬양만 할 뿐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정광은 도신선(賭神仙)이었다.
그들의 우상인 것이다.
졸지에 갈 곳을 잃은 노름꾼들은 삼삼오오 모여 노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판에서 판돈이 커봐야 얼마나 클까.
일확천금의 꿈이 사라지자 노름도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석우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에게 두 팔을 벌렸다.
전에 천명했던 말을 그대로 외치며.
‘노름에 한 번 빠진 이는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든 법. 본장이 그들을 거둬 적절한 삯을 치르며 갱생시켜 보겠소이다!’
노름꾼들 중 일부가 석가장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는 많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석우완은 바빠졌다.
무척 귀찮았지만 기분 좋은 귀찮음이었다.
귀찮은 만큼 성과도 커질 거고, 마음 한편에 잠들어 있던 의기와 석가장의 명성 또한 커질 테니까.
‘그가 무림맹에 가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잠시 상상하던 석우완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소문으로 들으며 웃으면 될 터, 지금은 일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정광은 화려한 사두마차에 올라 길을 떠났다.
창밖으로 경치를 구경하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왜 나를 이곳에 태운 것이냐?”
가슴에 천을 둘둘 감은 송훈이었다.
마차 안의 사람은 그와 정광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