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도신(賭神)
정광이 도박장에 들어가자 그의 안위를 걱정한 무인들과 민초들이 밖에서 기다리던 참이었다.
당연히 사마련은 그들을 경계하느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런데 정광이 얼마 안 돼서 나오는 것 아닌가.
심지어 함께 들어갔었던 백승무와 자오는 은자와 전표로 가득 찬 포댓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돼…….”
도박장에서 노름꾼들과 도박사들, 사마련의 무인들이 쏟아져 나와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송훈은 그중 도박장을 책임진 무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 짧은 시간에 도박장을 다 털다니! 대체 어찌 된 것이냐?
-시, 실은…….
정광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들에 신경 쓰지 않고 아까 두들겨 팼던 노름꾼들을 노려봤다.
그들은 각자의 가족에게 안겨 있었는데 정광과 눈이 마주치자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었다.
“또 노름하실 거예요?”
“저, 절대 안 하겠습니다!”
“하셔도 상관은 없어요. 식구의 돈만 훔치지 않는다면.”
잠시 의아해하던 노름꾼들의 입이 벌어졌다.
어쨌든 해도 된다지 않는가.
하지만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다시 다물어졌다.
“그런데 돈을 벌어본 기억은 나요? 아예 없거나 한참 됐을 텐데.”
“…….”
“땀 흘리며 번 돈을 이렇게 한순간에 날려 버릴 리가 없잖아요.”
“…….”
정광은 노름꾼들의 가족을 둘러봤다.
이미 사마련으로부터 돈을 돌려받고 사람도 돌려받은 그들은 고마움, 걱정, 기대감 등이 뒤섞인 복잡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사마련 지부장님 말씀 들으셨죠?”
“그, 그렇습니다만…….”
“식구의 돈을 빼앗아 오는 무도한 자들은 도박장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셨으니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사마련 분들께 고하세요. 맞죠, 지부장님?”
“…….”
“아닌가? 아까 사마련이 산서성에 온 건 이곳 분들께 더욱 나은 삶을 보장해 주기 위함이라 하셨는데.”
“…….”
도박장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수하에게 들은 송훈이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수하가 거짓을 고할 리도 없지 않은가.
우선 그가 했던 말을 들먹이며 압박하는 정광에게 답을 해야 했다.
어차피 답은 하나.
‘……한 방 먹었군.’
정광을 노려보던 송훈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음과 달리 무척이나 담담했다.
“네 말이 맞다. 다들 그렇게들 하시오.”
“……!”
한동안 정적에 빠졌던 장내가 시끄러워졌다.
석가장 무인들은 주먹을 움켜쥐며 환호성을 질렀고 소림승들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반장을 했다.
민초들은 사마련 때문에 차마 티를 내진 못했지만 고마운 눈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고마움 속엔 짙은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살아온 만큼 순진한 이가 없어서였다.
사마련 서산 지부의 우두머리가 공언했으나 힘없는 민초들이 무슨 담이 있다고 사마련을 직접 찾아가 요구하겠는가.
이미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던 정광은 석우완에게 전음을 보냈다.
-장주님. 체면을 세우시려면 지금 나서셔야죠.
-무, 무슨 말인가?
정광은 시선으로 민초들을 가리켰다.
석우완은 그들의 눈에 서린 두려움을 알아봤다.
그도 머리가 없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짐작한 것이다.
자연히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아챘다.
-고맙네.
-뭘요. 이번에 떠날 때도 노잣돈 주실 건데요.
-…….
-아주 푸짐하게요.
-…….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떤 석우완은 내공을 끌어모아 외쳤다.
“진옥룡의 협기와 사마련의 결단에 감사드리오! 허나 이곳에 계신 대부분의 분들은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쁠 터. 도박장을 찾아 연유를 설명할 여유가 없지 않겠소?”
많은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해서였다.
하지만 머리가 똑똑한 이들은 석우완의 수완에 탄복했다.
무척 똑똑한 송훈은 속으로 이를 갈았고.
그가 예상했던 말이 석우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석가장의 사업은 태원은 물론 그 너머로도 뻗쳐 있고, 대부분의 사업장에는 무인이 상주하고 있소이다. 가까이 있는 그들을 찾아 청하면 바쁜 여러분 대신 사마련에 말을 전해줄 것이오!”
“……!”
“이는 본장이 사마련을 압박하기 위해 하는 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겠소! 혹여 본장의 무인이 이 일로 무례를 범하면 언제라도 따져주시길 바라오! 어떻소이까, 송 지부장?”
“…….”
송훈은 석우완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동시에 민초들의 눈에 담겨 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대신 석가장에 대한 고마움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구관이 명관이라더니 과연.’
‘역시 명문정파는 다르구나!’
최근에 적지 않은 실망감을 준 석가장이었으나, 산서성을 통틀어 그들만큼 정대하고 힘을 가진 이들도 없었다.
게다가 결국엔 이렇게 나서서 도움을 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고마운 눈빛에 잊고 있던 협기가 끓어오른 석우완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잃었던 신뢰를 한층 더 올릴 수 있는, 돈도 얼마 안 드는 훌륭한 걸음이었다.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던 것이지만 이 자리를 빌려 말하겠소. 노름에 한 번 빠진 이는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든 법. 본장이 그들을 거둬 적절한 삯을 치르며 갱생시켜 보겠소이다!”
“……우와아아아아!”
참지 못한 민초들이 함성을 질렀다.
석가장 무인들과 소림승들의 목소리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백승무와 자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정광만이 침착했다.
“식구가 돈을 뺏어서 노름하러 갔는데 여기 없으신 분 계신가요?”
열광하는 민초들 사이에서 한 개의 손이 올라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정광은 그 손의 주인에게 말했다.
“폴짝폴짝 그만 뛰어도 돼. 네 이름이 이삼이었지? 여기에 아버지 안 계셔?”
어린 소년은 정광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자 눈물을 떨궜다.
“다른 도박장에 다니시니?”
“흑흑. 네. 더 큰 판이 있다고…….”
“어딘지 알아?”
“네. 전에 한 번 몰래 따라가 봤어요.”
“잘됐네. 가자.”
“……!”
어느새 주위는 조용해져 있었다.
소년은 물론 모든 이가 놀랐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얼마 안 가 거대한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우와아아아!”
한 번의 호기로 한 협행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이라니!
사람들이 열광하는 그때,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식구의 돈을 강탈해서 온 이는 내쫓겠다고 공언했거늘, 나를 못 믿는 것이냐?”
송훈의 몸에서 목소리와 같은 차가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정광은 오히려 시원해져서 좋았다.
“첫날이잖아요.”
“……무슨 의미냐?”
“석가장과 좀 전에 협의하신 것들에 대해 논의하실 게 많을 텐데 다른 도박장에도 사람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정리할 틈이 있으세요?”
안 될 것도 없었다.
“가능하다.”
“다행이네요. 근데 제가 아까 여기 계신 분들께 뺏긴 돈과 빼앗아간 사람을 되찾아주겠다고 약조했거든요. 그러니 약조를 지켜야죠. 설마 못 지키게 하시려는 건 아니시죠? 사마련에 해가 되는 일도 아닌데.”
“…….”
송훈은 내심 탄식했다.
무림인은 자신의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법.
많은 사람에게 약조한 일을 타인의 강요로 인해 못 지키게 되면 남는 건 칼부림뿐이었다.
그보다 더한 모욕은 찾기가 힘든 것이다.
‘교활한 놈 같으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로다. 옆에서 지켜봐야겠군.’
이미 도박장 하나를 탈탈 털은 정광이었다.
수하에게 정광의 신위를 전해 들었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봐야 했다.
‘수작을 부린 거라면…….’
도박장의 법대로 행하면 될 터.
송훈은 잔인한 그림을 떠올리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렇게 해라. 함께 가서 도우마.”
“와. 친절하시네요. 석가장과 논의는 뒤로 미루고요?”
“부지부장과 실무자들을 남길 거다. 어차피 일은 그들이 하는 것이니 상관없어.”
송훈은 시선을 석우완에게 돌렸다.
“장주. 내 말이 맞지 않소? 협의는 실무자들에게 맡깁시다.”
석우완도 바라던 바였다.
정광을 따라가 보고 싶었기에 송훈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그렇게 합시다.”
남는 이들과 떠날 이들이 정해지자 정광이 말했다.
망나니 아비를 찾는 소년을 품에 안은 채.
“사제. 자오. 빨리 가죠.”
“네!”
“알겠습니다!”
정광은 소년의 등에 진기를 불어 넣어주며 달렸다.
그 뒤를 백승무와 자오는 물론 석가장, 소림, 사마련의 인물들이 따랐다.
남겨진 민초들은 차마 따라갈 엄두는 못 내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광의 협행에 대한 칭송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칭송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광이 도박장에서 펼친 신기(神技)를 보고 넋이 나가 있던 노름꾼들이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내가 본 게 정녕 사실일까?”
“……후우우. 나도 그렇네. 그야말로 도신(賭神) 아닌가.”
그들의 혼이 나간 듯한 넋두리에 민초들이 다가와 물었다.
“보소.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오?”
한 노름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말해도 믿지 않으실 게요. 절대로…….”
* * *
정광은 도박장에 도착하자마자 소년의 아비를 돌려받아 징치를 한 뒤 도박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송훈이 이를 보고만 있을 리 있나.
“지금 협객행이랍시고 도박장을 또 털려는 것이냐?”
“아뇨.”
정광이 무슨 말이냐는 듯 대답했다.
“그냥 도박하려고요.”
“…….”
송훈은 할 말이 없었다.
사마련에 타격을 주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도박을 하겠다는데 무슨 명분으로 말리겠는가.
그래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사의 몸으로 도박이라. 곤륜의 도가 참 헐겁구나.”
정광은 발끈하긴커녕 두 손을 우아하게 모았다.
“무량수불. 헐거운 게 아니라 드넓고 깊은 것이지요. 삶 자체가 하나의 도박 아닙니까. 더구나 우린 칼날 위에 서서 사는 무림인. 비무, 싸움, 그 무엇 하나 도박이 아닌 게 없지요.”
“……내 이 일을 곤륜에 반드시 알리마.”
“네. 곤륜산에 오르시면 시주 좀 넉넉히 해주세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노파심에 말한다만, 도박장에선 도박장의 법을 지켜야 한다. 헛된 수작을 부리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해.”
“우와. 이 작은 도박장에 법이 있어요? 나라도 아닌데?”
“……관례를 지키란 말이다.”
“그 정도야 뭐. 서로 지킨다면 말이죠.”
정광은 백승무, 자오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송훈은 전의 도박장과 달리 정광을 따랐다.
이는 석우완과 원굉도 마찬가지였다.
뒤를 돌아본 송훈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두 분은 왜 들어오시는 것이오? 설마 내가 진옥룡을 암습이라도 할까 그러오?”
딱딱한 얼굴로 반장을 하는 원굉 대신 석우완이 답했다.
“설마 지부장께서 그러시겠소? 혹여나 괜한 잡음이 나올까 봐 이러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오. 우리야 서로 믿는다 한들 세상은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소이까.”
“흥.”
송훈은 주위에 눈이 없자 가볍게 콧방귀 뀐 뒤 걸음을 옮겼다.
도박장은 이미 인산인해였다.
하나같이 도박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정광처럼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못 알아챌 정도였다.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정광을 봤고 다들 놀랐다.
석가장주인 석우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승려 원굉, 무엇보다 송훈까지 보게 되자 더더욱 놀랐고.
송훈은 이곳의 책임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 들어온 도사가 곤륜의 진옥룡이다.
-……!
-네 생각보다 더 고수야. 기술 쓰지 말고 상대해라. 어떤 수를 쓰는지 파악하고.
-아,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정광이 빈 탁자에 앉았다.
책임자는 솜씨 좋은 수하, 온화하게 생긴 장년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송훈이 말했던 내용 그대로였다.
장년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정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극진한 예를 취하며 나긋나긋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본장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놀이를 즐기시겠습니까? 투전(投錢), 검패(劒牌), 쌍륙(雙六) 등 무엇이든 있으니 원하시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상하점(上下點)이요.”
“호쾌한 놀이를 즐기시는군요. 지금 바로 준비할까요?”
“네.”
장년인이 어디론가 가더니 작은 목함을 들고 왔다.
덮개를 열자 주사위들과 나무를 깎아 만든 목이 긴 통이 나왔다.
“대인, 한번 보시겠습니까?”
혹시 주사위와 통에 수작을 부렸는지 확인하란 말이었다.
“아뇨.”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네.”
장년인은 주사위 하나를 꺼내 통 속에 넣은 뒤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다 그대로 뒤집으며 탁자에 내려놓았다. 통 속에 든 주사위가 탁자와 통에 부딪히며 구르다 멈췄다.
장년인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상하점은 무척 단순한 도박이었다.
주사위의 숫자를 맞추는 것이었는데, 육부터 사는 상(上), 삼부터 일은 하(下)였다.
상이나 하를 불러 맞추면 건 돈은 물론 팔 할의 금액을 더 받는다.
이와 달리 점(點). 즉, 숫자를 맞추면 건 돈의 다섯 배를 받고.
규칙도 간단하고 시간도 얼마 안 걸렸기에 무척이나 성행하는 것은 물론 그만큼 많은 거지를 만들어내는 노름이었다.
“……대인?”
정광 대신 백승무가 나섰다.
“판돈의 상한선이 얼마요?”
장년인이 대답하자 백승무는 전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장년인이 말한 상한선에 딱 맞는 금액이었다.
“헉!”
“왜 그러시오? 첫판부터는 안 되는 것이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년인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정광을 바라봤다.
‘고, 고수라더니 무공의 고수가 아니라 도박의 고수인가?’
말이 상한선이지 처음부터 이런 큰 금액을 밀어 넣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정광은 정녕 고수다운 풍모로 주사위를 덮고 있는 나무통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장년인이 침을 꿀꺽 삼킨 그 순간.
정광의 입이 열리며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삼점(三點)요.”
“……!”
장년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떨리는 손으로 통을 들자 그 속에 있던 주사위의 숫자가 드러났다.
육(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