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명분
도박장은 한산한 곳에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그런 고택이었는데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무인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정광 일행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서 따르고 있는 민초들이야 그렇다 쳐도, 석가장을 상징하는 흰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떼로 몰려왔는데도 말이다.
백승무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놀라지 않아? 게다가 저런 수준의 무인들이 도박장이나 지키고 있다니…….’
잠시 생각해 보자 연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태원 곳곳에서 난리가 났으니 우리가 이곳으로 올 걸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 사마련의 무인들이구나.’
그의 생각대로였다.
사마련의 무리 중 선두에 서 있던 중늙은이가 우렁차게 외쳤다.
“귀하신 분들께서 이곳엔 어떤 일로 오셨소이까. 길을 잘못 드신 듯하오.”
“제대로 왔는데요.”
당연히 정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외모인지라 중늙은이는 아까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네가 요즘 강호를 위진하고 있는 곤륜의 진옥룡이구나.”
“네.”
“……과연. 명불허전이로다.”
“대협께서는…… 아니지. 그쪽은 누구세요?”
중늙은이는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사마련 산서 지부를 맡고 있는 송훈이라 한다.”
석가장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쌍도혈귀(雙刀血鬼)라 불리는 고수인 그가 강경하게 나오자 적잖은 긴장감이 솟아올랐다.
소림승들 역시 마찬가지.
송훈의 별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오직 정광만이 태연했다.
사마련주나 부련주도 아닌 이런 중늙은이의 이름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설령 안다 해도 동요할 이유도 없고.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느냐.”
“별로요.”
“……나도 그렇다.”
“그럼 들어가셔서 쉬시죠. 저도 빨리 일 보고 갈게요.”
송훈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냉정하게 계산했다.
‘석가장 놈들 중 상당수가 몰려왔군.’
석가장주 석우완이 홧김에 다들 모으라 했었지만 실제로 그럴 리는 없었다.
장을 방비하기 위한 인원은 남겨두고 온 것이다.
‘게다가 십팔나한을 포함한 소림승들까지. 오늘은 길(吉)보다 흉(凶)이 많구나.’
그래도 형편없이 밀리지는 않았다.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사마련 총단의 고수들에다 중원에서 암약하던 사파인은 물론 산서성에 본래 있던 자들까지 더해진 결과였다.
사마련의 머릿수가 삽시간에 많아졌다.
송훈이 석가장주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냉소를 머금는 그때.
정광이 재촉했다.
“안 가실 거예요?”
그래, 이 미친놈을 잠시 잊었다.
정광에 대한 소문은 귀가 닳도록 들어왔지만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래 봐야 특출난 후기지수일 뿐이지.’
송훈의 판단으로는 딱 그 정도였다.
십존 중 셋의 공동전인?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터.
그들의 깨달음을 금세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어떤 기재도 세월의 벽을 뛰어넘을 순 없어.’
정광의 언행이 계속 신경을 거슬렸지만 참고 흘리면 그만이다.
지금 송훈이 걱정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부련주께서는 대체 어디서 무얼 하시고 계신 건가.’
부련주가 모종의 일로 천랑대를 이끌고 산서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 오래다.
한데 어느 순간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이는 무척 중대한 문제였다.
‘혹시 누군가에게 해를 당하신 걸까?’
그럴 리가.
부련주는 사파무림의 최강자들인 팔사(八邪)의 일원 아닌가.
더구나 도사(刀邪)다.
같은 도를 사용하는 송훈에게 부련주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분명 산서성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어. 누가, 무슨 이유로 어떤 짓을 벌이는지 모를 일. 지금은 전력을 보존해야 할 때다.’
어차피 전면전은 사마련주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산서성을 맡으며 련주의 심중을 헤아린 송훈은 이번 일을 적당히 매듭짓기로 했다.
그래서 뻔히 아는 내용을 물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정광은 송훈의 입을 후려칠까 하다가 관뒀다.
이번 일만큼은 명분을 쌓아야 했다.
‘그렇다고 일일이 설명하긴 또 귀찮고.’
자오에게 부탁했다.
“자오. 설명 좀 해주실래요.”
자오는 움찔하면서도 한 걸음 나섰다.
송훈이 얼마나 악랄한 고수인지 잘 아는 그였지만, 정광의 명은 그 모든 것에 우선했다.
“실은…….”
그의 입이 열리며 장광설(長廣舌)이 쏟아져 나왔다.
무척이나 긴 얘기였는데, 그래도 요점은 빼놓지 않아 이번 일을 잘 모르면서 따라온 민초들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할 정도였다.
“다설범협(多舌凡俠)이라 불리신다더니 과연.”
“다설이 범협 앞에 붙는 이유가 있구먼그래.”
사마련에서부터 자오를 알고 있던 송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듣다가 말을 잘랐다.
“그만. 다 이해했다.”
“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만.”
“……아니. 끝났어. 그러니까 자그마한 흑도 패거리들을 우리가 사주하고 있었다는 말 아니냐? 그들을 징치하고 사람들에게 돈을 돌려줬더니, 그중 일부가 그 돈을 들고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고.”
자오가 뭔가 더 덧붙이려 했다.
송훈은 고수답게 그 기척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석가장주 석우완이 있었다.
“석 장주. 내 하나 묻겠소. 그 흑도패들이 토설했다는 말이 사실이라 믿소?”
석우완은 가슴을 펴며 당당히 나섰다.
비록 정광 때문에 일이 이렇게 진행됐지만 산서성의 주인은 그가 아닌가.
그가 해결해야 했다.
“그렇소이다. 증인도 많으니 원하면 말씀하시오. 대질시켜드리리다.”
“필요 없소.”
“……?”
“나는 못 믿겠소.”
무어라?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무슨!
석우완이 호통을 치려는데 송훈의 말이 더 빨랐다.
“이유를 모르겠소이까?”
“……한번 말해 보시오.”
“내게 그 흑도패들을 넘겨주시오. 일각이면 충분하외다. 그들이 석가장의 명을 받아 민초들을 괴롭히고 있었다고 토설하게 할 자신이 있소.”
“……!”
“매를 때려 남을 모함하도록 하는 건 쉬운 일이오. 헌데 그걸 증거라고 들고 오다니. 석가장의 일 처리 방식은 원래 이렇소이까? 거참 실망이군.”
“……본장이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지를 것 같소!”
“우리가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 어찌 확신하시오? 설마 사파라서? 그렇다면 귀주, 호남, 강서, 절강 등 본련의 본거지인 곳들은 인세지옥(人世地獄)이나 마찬가지겠군.”
“…….”
“아니 그렇소이까?”
석우완은 할 말이 없었다.
비록 사파가 흉악하다 하나 바보는 아니다.
본거지에선 어느 정도의 선은 지키는 것이다.
대롱을 꽂아놓고 오랫동안 빨아먹기 위함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사마련이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걸 믿으란 말이오?”
“석가장이 소림까지 끌어들여 우리를 핍박하나 할 말은 해야겠소. 맞소이다.”
“허나…….”
“석 장주. 서로의 주장이 이리도 다르니 더는 말해봤자 소용없소이다. 설마 관(官)에 청해 시시비비를 가리길 원하오?”
관을 끌어들이는 건 양측 다 원치 않는 바였다.
관과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법.
무림문파 간의 밥그릇 싸움은 무림에서 끝내야 했다.
“……지부장. 결국 힘으로 해결을 봐야겠소이다.”
석우완이 도병(刀柄)을 어루만지며 말하자 송훈이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소.”
“……?”
“본련이 산서성에 들어온 건 이곳 사람들에게 더욱 나은 삶을 보장해 주기 위한 것. 평화롭게 해결해야 하지 않겠소.”
“……허허…….”
석우완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으나 송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식구의 돈을 빼앗아 이곳에 온 이들을 내어주겠소.”
“……!”
“그전에 먼저 확실히 해야겠군.”
송훈은 깜짝 놀란 사람들을 둘러보며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그들이 그런 무도한 짓을 벌이고 온 줄 알았다면 결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이오. 그대들이 두려워 이러는 것이 아니란 말이외다. 그러니 사람을 받고 그만 물러들 가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분노한 석우완의 귀에 송훈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보시오, 석장주. 왜 자꾸 피를 보려는 것이오? 혹 그대의 자제가 저지른 일을 덮으려고?
-……사실을 날조하지 마시오! 녀석이 비록 실수를 했으나 몇 번이나 돈을 갚으러 찾아왔었소. 그때마다 피한 건 그대들 아니오!
-증거 있소이까? 우리가 피했다는 증거가 있냐는 말이오. 석 공자가 갚기 싫어 오지도 않고 거짓말을 한 것 같소만.
-이…… 이…….
-우리는 증거가 있소이다. 차용증에 석 공자의 수결(手決)은 물론 지장(指章)까지 찍혀 있지 않소. 다시 보여 드리리까?
석우완은 송훈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에겐 싸움을 시작할 명분이 없었다.
* * *
가만히 듣고 있던 정광은 주위를 둘러봤다.
석가장도 소림도 당황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석우완의 표정이 가관인 게, 석용천 그 망나니의 일을 가지고 전음으로 협박당한 것 같았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정파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뒷일도 훤히 그려졌다.
잠시 후 끌려 나올 이들은 사마련을 원망할 것이다.
도박장의 다른 고객들도 불만을 가질 것이고.
누군가 자신들을 내어놓으라 하면 내놓아야 하는 선례를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봤자지. 지들이 또 어딜 가서 노름을 하겠어.’
산서성의 어느 도박장이나 사마련에게 먹힌 상황.
어딜 가도 똑같으니 가까운 이곳에 올 수밖에 없다.
노름에 중독된 이상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정광은 송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 똑똑한 놈이네.’
죄를 범한 사람을 내놓는단다.
게다가 아무도 안 믿을 말이었지만 민초들을 위하는 사마련을 천명했다.
그런데 정파에서 계속 싸우자 한다?
모양새가 영 그렇지 않은가.
‘역시 그렇군.’
송훈이 스스로 체면을 깎으면서 한 발짝 물러선 연유가 짐작됐다.
사마련주의 생각도 비슷할 것이다.
‘전면전은 되도록 안 일으키면서 자그마한 충돌만 만든다. 장기전으로 가려는 거였어.’
중원의 사파와 마인들을 일통한 사마련.
흩어져 자유롭게 활동하던 이들이 하나로 뭉쳐졌으니 이런저런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를 분출하려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게 당연한 일.
정파무림을 상대로 싸움을 걸며 과도해진 힘을 소모함과 동시에 이권을 챙긴다.
정광이 사마련주여도 할 법한 발상이었다.
‘뭐 그건 그거고.’
이곳 일부터 정리해야 했다.
원래의 계획대로 명분에 어긋남 없이.
“저기요, 지부장님.”
“……넌 또 왜 그러느냐?”
“시간이 너무 지나서요. 내주시기로 하신 분들, 빨리 주시죠.”
송훈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외쳤다.
“데려오너라!”
“존명!”
사마련 무인들이 고택으로 들어가 몇 명의 사내를 끌고 나왔다.
잔뜩 겁먹은 기색의 사내들은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되자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왔다.
정광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그리고 소매에서 노리개를 꺼내 그들 중 한 청년부터 때려눕혔다.
쿵!
“으아악!”
“노모께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시며 모은 돈을 기껏 도박에 탕진해요?”
“사, 살려주십시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살려달라 하면 안 되죠.”
콰직!
“끄악!”
자식이 두들겨 맞자 놀란 노파가 달려왔다.
하지만 정광이 고개를 가로젓자 멈칫하며 두 손을 모았다.
‘소, 소신선께서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냥 지켜봐야 해.’
다음은 코가 빨간 중년인이었다.
정광은 그를 패며 훈계했다.
“부인이 허드렛일을 하며 간신히 번 돈을 훔치다뇨.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어요?”
팡! 퍼억!
“으악! 크윽! 시, 신선님! 저는 혼인을 안 했습니다! 아버님 돈을 훔쳤…….”
“아. 강 아저씨가 아니라 마 아저씨셨구나. 어쨌든 좀 맞으세요.”
태앵!
“크허헉!”
보는 이가 움찔거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였으나 뼈를 부러뜨리거나 피를 튀기진 않는 신묘한 노리개질.
정광은 끌려 나온 노름꾼들을 모두 팬 뒤 우아하게 두 손을 모았다.
두 손 사이에 낀 노리개가 무섭게 까딱거렸다.
“무량수불. 정신 차리셨죠?”
“네! 네!”
“설마요. 아직 멀었죠.”
“히, 히익! 아악!”
정광은 한동안 더 패다가 노리개를 소매 속에 넣었다.
“잠깐 다녀올 테니 반성하고 계세요.”
“물론입니다! 그러겠습니다!”
정광은 자애로운 얼굴로 그들을 다독인 뒤 백승무와 자오를 불렀다.
두 사람이 달려오자 도박장을 가리켰다.
“가자.”
“네?”
“네!”
어리둥절한 건 백승무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송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분노하고 있었다.
“네가 지금 이곳을 치겠다는 말이냐?”
“그런데요.”
“……무슨 명분으로?”
정광이 씩 웃었다.
“도박으로 치는 것도 명분이 필요하나요?”
송훈도 놀랐지만 다른 이들은 더 놀랐다.
“이보게, 진옥룡! 무슨 소리인가!”
“아미타불. 도사의 몸으로 갑자기 도박이라니……?”
정광은 어이없어하는 석우완과 원굉에게 역으로 물었다.
“민초들이 고통을 겪고 있지만 안 싸우실 거죠? 명분이 부족해서.”
“…….”
“저는 이렇게라도 싸울래요.”
“…….”
주위가 조용해졌다.
정파 무인들은 부끄러운 표정을, 민초들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달리 정광을 잘 아는 백승무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방법으로 떳떳하게 노름을 하려고 하신 건가. 헌데 겨우 이런 일로 그런 수고를 할 사형이 아니신데…….’
정광은 분명 큰 그림이라 했었다.
‘그렇다면…….’
뭔가 보일 듯 말 듯 하려는 그때.
송훈이 입을 열었다.
“도박을 하겠다고?”
“네.”
정광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송훈은 어이가 없었다.
‘도사 주제에 도박이라. 주사위나 몇 번 던져봤을 주제에 오만방자하구나.’
소문 그대로의 정광이랄까.
그렇다면 망신을 주면 된다.
“……자고로 도박장은 돈만 있으면, 장난질만 안 치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 뜻대로 해라.”
“네.”
정광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에 들어갔다.
도박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거덜 났다.
“……어, 어떻게!”
송훈이 경악하자 정광이 해맑게 웃었다.
“수고하세요.”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