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큰 그림
정광이 향한 곳은 작은 시장이었다.
허름한 노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백승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사형. 여기엔 왜 오신 겁니까?
“만날 사람이 있어서.”
“아는 분이 여기 있습니까?”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네?”
정광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시장을 훑어봤다.
“아. 저기 있네.”
무척 반가운 이를 본 건지 발걸음도 성큼성큼.
얼마 안 가 초라한 좌판을 깐 노인에게 삿대질하고 있는 청년의 근처에 이르렀다.
껄렁해 보이는 청년은 삿대질뿐만 아니라 나직한 목소리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이봐요, 영감. 보호비를 안 냈으면 장사할 생각을 말아야지.”
노인은 애처로운 얼굴로 사정사정했다.
“대호방(大虎幇)보다 더 걷으면 어떡하나. 이보게, 명일이. 사정 좀 봐주게. 요즘 벌이가 영 신통치 않은 거, 잘 알고 있지 않나?”
“뭐? 이보게 명일이? 영감, 나 아쇼?”
“아, 아니. 내 자네가 어릴 때 군것질거리도 몇 개 쥐여주지 않았나. 옛정을 생각해서 제발 사정 좀 봐주게.”
“옛정 같은 소리 하네. 염왕채(閻王債)라도 놨소? 그때 줬던 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이제 와서 이렇게 퉁치려고 들어?”
“그, 그 말이 아니라…….”
“시끄럽고. 내일까지 준비해 놓으쇼. 또 봅시다.”
“어이쿠. 이렇게 가면 어떡해. 내 말 좀 들어보게.”
청년이 몸을 돌리자 깜짝 놀란 노인이 다급히 팔을 잡았다.
청년의 눈이 번들거렸다.
“이 미친 영감이 감히 누구한테 손을!”
“히익!”
청년이 주먹을 치켜들더니 노인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어찌 된 일인지 사정을 살피던 백승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노인께 무슨 짓을!”
크게 호통치며 막으려 하는데.
정광이 더 빨랐다.
짜악!
“어흑!”
청년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짜악!
“크헉!”
청년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짜자자자자작!
“끄아아아아악!”
청년의 고개가 좌우로 미친 듯이 돌아갔다.
정광은 청년의 뺨을 때렸던 손바닥을 도복에 문지르며 물었다.
“사람이 어찌 그렇게 흉포해요?”
삽시간에 얼굴이 탱탱 부풀어 오른 청년이 간신히 입을 놀렸다.
“누, 누구……?”
“지나가던 사람요.”
“대, 대체 왜……?”
“나쁜 짓을 하셨으니 그렇죠.”
청년은 얼굴이 너무 부어 입을 떡 벌릴 수조차 없었다.
대신 부리나케 도망치며 어눌하게 악을 썼다.
“두, 두고 보자!”
“조심히 다녀오세요.”
정광은 아예 손까지 흔들어준 뒤 노인을 봤다.
“괜찮죠?”
폭행을 당할 뻔했던 두려움에 정광의 눈부신 외모를 보고 놀란 마음까지.
멍하게 서 있던 노인은 한참 지나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소신선님.”
위험에서 벗어났건만 노인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였다.
정광은 노인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더 괜찮아지시게 해드릴 테니까.”
“……네?”
“근데 몇 가지 여쭤봐도 돼요?”
“무, 물론입지요. 말씀하십시오.”
“아까 들어보니까 여긴 원래 대호방이란 곳에서 관리했었던 것 같은데 사마련에 의해 쫓겨난 거죠? 그 후에 명일이란 사람의 조직이 들어와서 이곳을 잡은 거고요.”
“그, 그렇습니다.”
“그 조직은 아까 그 사람 같은 악소(惡少)들로 이루어져 있겠네요.”
“……그걸 어떻게? 정말 신선님이십니까요?”
“아뇨. 도사요.”
정광은 노인에게 멀찍이서 지켜보며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 틈에 들어가 있으라 했다.
노인이 연유를 묻자 간단히 답했다.
“아까 그 사람. 패거리를 끌고 올 거예요.”
“네?”
“머리 나쁜 애들은 정해진 대로 움직이거든요.”
가벼운 섭혼술을 걸었다는 것까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패거리가 올 거란 말에 연신 허리를 숙여 보인 뒤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정광은 느긋한 얼굴로 청년이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궁금증을 참고 있던 백승무가 넌지시 물었다.
“사형. 만날 사람이라는 게 흑도패입니까?”
“응.”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정광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협행(俠行) 하려고.”
“……!”
“왜 그렇게 놀래? 정파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잖아.”
너무 당연해서 놀란 거였다.
동시에 궁금증이 더 커졌다.
“……하필 왜 이곳에서 그러시는지요?”
“아까 들었잖아. 전에 있던 흑도 문파보다 더 악랄하게 뜯고 있다고.”
“그랬지요.”
“그러니 좀 도와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옳은 말이었으나 분명 더 큰 이유가 있을 터.
정광과 노인의 대화를 떠올리던 백승무는 ‘사마련’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냈다.
“사형. 사마련은 왜 이곳의 흑도를 몰아내기만 하고 차지하진 않은 겁니까?”
“체면이 있으니까.”
“체면요?”
“사제. 설마 사파는 체면 안 차리는 줄 알아? 사마련이 뭐야. 중원 사파와 마인들의 연합이잖아. 나름의 위신이 있는 데다 이런 작은 곳까지 탐할 정도로 한가한 애들이 아니야.”
과연 듣고 보니 그랬다.
그런데 정광이 또 요상한 말을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탐할 때도 있지.”
“네? 말씀이 다르지 않습니까?”
“사제는 너무 순진하다니까. 자오가 대신 말해줄래요?”
자오가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입을 열었다.
“백 공자. 진옥룡의 말씀대로입니다. 규모가 있는 사파라면 평판을 위해 세력권 내의 자잘한 부스러기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허나 적대적인 상대의 세력권에서라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특히 그곳을 먹으려는 중이라면 말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자오의 대답이 끝없이 이어졌다.
대충 정리하자면 정보와 돈을 얻고 적대적인 상대의 평판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낯선 곳이니 제대로 된 정보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그 지역의 토박이를 고용하는 게 제일 편한 방법이란 것이군요. 아까의 명일이라는 악소 같은 이들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잘한 행패나 부리던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지요. 그럼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힘없는 이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게 됩니다.”
“헌데 그러면 사마련의 평판이 낮아지지 않겠습니까?”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흑도들 중 규모가 있는 무리는 적법과 불법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업을 한다.
당연히 규모도 크고 보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사마련이 직접 관리한다.
하지만 인신매매나 앵속처럼 엄청난 돈이 되지만 천인공노할 짓은 멀리한다.
이런 작은 시장의 이권 같은 하찮은 것들도 마찬가지.
손을 대되, 안 보이게 하는 것이다.
“꽤 쏠쏠하게 들어올 겁니다.”
“……그렇다면 아까의 악소가 속한 패거리도 사마련에 소속돼 있을 거란 말씀입니까?”
“소속이라기보단 우두머리쯤 되는 이가 정보와 돈을 상납하고 있겠지요.”
“……석가장의 평판을 떨어뜨린다는 말씀은?”
“석가장과 사마련 산서 지부의 갈등은 민초들이 보기엔 밥그릇 싸움으로밖에 안 보일 겁니다. 그래도 구관이 명관 아닙니까. 석가장은 정파라 그나마 부드러우니 그들을 응원하고 있을 텐데…… 이게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사마련과 관계없는 새로운 흑도들이 나타나 설치고 있다.
하지만 석가장은 이를 지켜만 보고 있는 상황.
석가장에 대한 민초들의 원망이 커질 수밖에 없으리라.
“……석가장에서는 몰라서 그러는 걸까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겠지요. 구태여 캐내 봤자 골치 아픈 일만 잔뜩 생길 테고.”
대부분의 정파가 가리고 있는 민낯이었다.
“……이해했습니다.”
백승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정광을 바라봤다.
“사형. 대체 이런 이치를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사람 사는 데가 다 거기서 거기지.”
흑도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저 멀리 십여 명의 사내가 우르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장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도, 독사파다!”
“에구머니. 전부 달려온 것 같은데?”
정광은 한숨을 쉬었다.
‘독사파는 청해성 서녕에도 있었는데.’
어디 그곳뿐이겠는가.
중원을 탈탈 털면 몇 수레는 나올 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흑도 놈들은 조직 이름을 참 직관적으로 짓는다.
역팔자(逆八字)의 얼굴에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알.
선두에 선 놈을 보자마자 ‘아. 얘네는 이름이 독사파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독사파는 열심히 달려 정광의 앞에 이르렀다.
대형인 듯한 그놈은 정광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이렇게 잘생긴 도사가 다 있지?’
그건 그거고.
“헉. 헉. 네, 네놈이 내 애를 건드렸냐?”
거친 숨소리만 들어봐도 내공조차 없는 놈이었다.
그래서 더 두려움이 없는 것일지도.
정광은 놈의 말을 정정했다.
“뺨 몇 대 때렸는데요.”
“……그게 그거지! 감히 우리를 건드려? 네놈은 누구냐!”
“정광요. 그쪽은요?”
“독사다!”
“그럴 줄 알았네요.”
독사는 버럭 화를 내려다 멈칫했다.
‘정광?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구경꾼들이 웅성거려서였다.
독사는 고개를 홱 돌려 스산하게 이죽거렸다.
“다들 한가하시네. 구경났소?”
“…….”
“눈 깔아! 지금부터 눈알 드는 놈은 아예 뽑아버린다!”
“……!”
사람들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광이 독사에게 물었다.
“지금 저분들 협박한 거죠?”
“그런데? 왜? 꼽냐?”
“아. 손 더럽히기 싫네.”
정광은 노인이 놓고 간 좌판을 보더니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작은 노리개를 집었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 숨어 있는 노인에게 들으라고 소리쳤다.
“이따 돈 드릴게요!”
“날 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냐!”
발끈하던 독사는 개처럼 얻어맞았다.
뻑! 퍽!
“으악! 카악!”
갑자기 시작된 폭행에 경악한 독사파 패거리가 정광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와 같이 개처럼 처맞았다.
빠각! 쿵!
“으아아악!”
정광은 한동안 노리개질을 하다가 손을 멈췄다.
더 이상 때릴 이도, 때릴 곳도 없어서였다.
독사파는 모두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입을 뺀 온몸이 퉁퉁 부은 채로.
정광은 노리개를 소매 속에 넣으며 물었다.
“독사님.”
“……크흐윽.”
“더 맞을래요?”
독사란 별호는 외모도 외모지만 독사 같은 심성을 지닌 자에게 붙기 마련.
이 시장의 독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빠르게 일어나 무릎을 쿵 하고 꿇었다.
“끄억! 아, 아닙니다, 대형!”
“대형?”
“대, 대협! 아니, 신선님! 죄송합니다! 제가 불학무식하여 신선님을 몰라뵙고…… 어? 시, 신선?”
독사가 입을 떡 벌리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퉁퉁 부은 볼 때문에 제대로 벌어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정광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불만 있으세요?”
“저, 절대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격렬히 부정한 독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시, 신선님. 혹시 곤륜산에서 내려오셨다는 진옥룡 아니십니까?”
“맞는데요.”
“……!”
독사와 그의 패거리는 물론 구경꾼들의 눈까지 찢어져라 커졌다.
“지, 진옥룡!”
“어쩐지 너무 잘생기셨더라니!”
“소, 소림의 대사님들과 함께 선행을 펼치셨다는 소신선 아니신가!”
사람들의 시선이 백승무와 자오에게도 이르렀다.
“그럼 저 귀공자는 대동현에서 신위를 떨치신 금권검협 백승무 소협?”
“저 평범하게 보이는 분은 다설범협(多舌凡俠)으로 칭송받는 자오 대협이시겠군!”
정광은 그러려니 했다.
백승무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자오는 처음 듣는 해괴한 별호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들은 산서성 민초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북부인 대동현에서 벌였던 협행과 남부에서 태원까지 소림승들과 이동하며 보여줬던 공평무사한 모습 때문이었다.
“우와아아아!”
사람들은 밝은 표정으로 환호했지만 독사파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갔다.
마음은 아예 까맣게 탄 지 오래였고.
그래도 독사는 우두머리답게 할 말은 했다.
“시, 신선님. 제 눈이 멀어 신선님을 미처…….”
“됐고요.”
“네?”
정광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가진 것 다 내놔요.”
* * *
독사파는 몇 군데씩은 부러진 거지가 됐다.
정광은 그들이 바친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물론 그냥 막 준 것은 아니었다.
무식한 독사파가 괴발개발 그려놓은 장부를 보며 공정히 분배했다.
마치 암호와 같은 글자를 해독하느라 눈이 빠질 뻔했던 백승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재밌게도 한숨은 짙었으나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제. 왜 웃어?”
“무공을 배운 보람이 있어서입니다.”
“사제는 구경만 했잖아.”
자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자 백승무가 못 당하겠다는 듯 웃었다.
“하하. 사형의 사제가 된 보람이 있어서로 바꾸지요. 헌데 진짜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협행?”
“돈을 왜 안 챙기셨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신 노리개값은 안 냈잖아.”
“그 대신 그 노인은 훨씬 더 많은 돈을 돌려받지 않았습니까.”
정광은 손가락을 하나 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사제. 푼돈에 연연하지 말고 큰 그림을 봐야지.”
백승무는 어이가 없었다.
역시 지당한 말이지만 정광이 왜?
큰 그림은 또 뭐고?
다시 물으려는데, 정광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자고.”
“어, 어디를 말입니까?”
정광이 씩 웃었다.
“할 일이 많아. 그림을 더 그려야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