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설화(說話)
백승무, 자오, 공우는 정광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정광 홀로 악전고투를 벌였는데, 그 정도 일이야 왜 못 해주겠는가.
무엇보다 너무나 정광다운 생각인지라 ‘왜 이걸 이제야 말하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으음…….’
‘…….’
‘아미타불…….’
시신에서 진주와 보석을 빼내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시신을 훼손된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 역시 옳은 일은 아니었기에 하는 게 나았다.
한동안 손을 쓰던 세 사람은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사형이시구나.’
‘역시 주군이시군.’
‘역시 진옥룡이로다.’
대체 진주와 보석들에 내공을 어떻게 주입한 걸까.
단단한 병기를 튕겨내거나 단련된 사람을 뚫은 주제에 무척이나 상태가 양호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정광을 바라본 세 사람은 흠칫했다.
정광은 우두커니 선 채 멍한 눈빛으로 시신들을 보고 있었다.
‘후우우.’
백승무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평소라면 빨리빨리 하라고 구박하셨을 것이거늘, 사형도 심적으로 타격이 크신 것 같구나.’
자오도 비슷했다.
‘아무리 진옥룡이라 해도 도사는 도사. 이런 살육을 벌이고 제정신을 유지하긴 힘들겠지. 모두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충성을 다해야 해.’
공우 역시 마찬가지.
‘마음속으로 도경을 읊으며 제를 올리는 것인가. 살계를 너무 크게 열어서겠지. 아미타불…….’
정광은 사마련을 어떻게 족칠지 궁리하고 있을 뿐이었으나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비슷한 고민을 했다.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백승무는 특히 더 그랬다.
‘지금껏 사형께 받기만 했는데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되어드리는구나. 부단히 노력하면 언젠가 대협이 될지도 모르지만 당장 이렇게 사형께 짐만 되어서야 어찌한단 말인가.’
항상 보호받으며 만만한 상대와만 싸워왔다.
아까는 사형의 기지로 위협에서 벗어났으나, 제대로 된 이들과 또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했다.
‘차라리 나를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죽으면 복수해 줄 테니 편하게 눈 감으라 했던가.
적들이 손을 쓸 필요를 못 느끼게 하려고 그랬을 뿐, 진실된 마음은 달랐을 것이 분명했다.
정광은 말이 험하고 심술궂은 데다 종잡을 수 없는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사람을 버릴 위인은 아니었다.
‘힘을 키워야 해. 우선 합격술이라도 더 열심히 수련하는 거다. 시간이 나는 대로 자오 대협과 상의를 해야겠어.’
자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 공자와 얘기를 좀 해봐야겠군.’
정광을 주군으로 모시기로 결심한 마당이다.
무공이란 단기간에 급속히 올리기 힘든 것, 백승무와의 연계를 통해 당장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한편, 공우는 두 사람보다 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룡이라는, 자신의 헛된 명성에 대한 부끄러움은 그 축에 끼지도 못했다.
‘진정으로 강한 적을 만나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항상 외치던 자비는 사라지고 두려움과 살심(殺心)만 치솟다니…….’
이런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잘도 설치고 다녔더랬다.
정광의 언행을 통해 어렴풋이 유추하던 것들이 직접 겪게 되자 뼈저리게 느껴졌다.
‘진옥룡은 힘없는 민초들에겐 친절하지만, 무공을 익힌 자라면 약하고 강하고를 떠나 똑같이 대한다. 남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지. 실로 존경할 만한 일이지만…….’
홀로 서 있는 정광은 너무 외로워 보였다.
‘음? 언제 앉았지?’
힐끔 보니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것 아닌가.
공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고통스러운가 보군. 명상 중인가.’
내상은 완치했다고 했으니 문제없을 터.
비록 적이지만 수많은 이들을 죽였기에 괴로워하는 것이리라.
‘차라리…….’
공우는 자오와 백승무에게 각각 전음을 보냈다.
-시신들을 수습하여 묻어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두 사람은 바로 동의했다.
눈에라도 안 보이면 그나마 나을 것이다.
시신을 묻어줌으로써 마음도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이고.
세 사람은 진주와 보석들을 모두 챙긴 뒤 적당한 곳을 찾았다.
마침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공터가 보였다.
그들은 시신을 옮기랴 땅을 파랴 무척 바쁜 시간을 보냈다.
시신의 숫자만큼 구덩이도 많이 필요했기에 녹초가 되고 나서야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공우가 불경을 외우며 시신들을 위로했다.
백승무와 자오는 진중한 얼굴로 그 옆을 지켰다.
세 사람의 마음이 봉분은 물론 비석도 없는 무덤을 감쌌다.
“……아미타불. 그만 가시지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소이다.”
그들은 전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정광에게 다가간 그들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넝마가 다 된 그의 도복이 눈에 아프게 들어와서였다.
세 사람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묵묵히 기다렸다.
시간은 조용히 흘렀다.
관도에는 아직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까 있었던 싸움에서 났던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 소리 때문에 겁을 먹고 다가오질 않아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아까보다 더 밝고 기운찬 빛을 뿌리고 있었다.
공우는 장중한 얼굴로 반장했다.
“아미타불. 진옥룡, 한 꺼풀 깬 것을 축하하오.”
정광은 어리둥절했다.
잠에서 깼을 뿐인데 뭘 깼다고?
더 황당한 건 백승무와 자오도 기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뭔진 모르지만 싱긋 웃어줄 수밖에.
그리고 기대감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
“진주와 보석, 많이 안 상했죠?”
* * *
신경깨나 쓴 보람이 있는 걸까.
진주와 보석은 대부분 무사했다.
천랑대원들을 이미 묻어버려 그들의 소지품을 못 턴 것은 아쉬웠으나 가균이 남기고 간 도를 챙기니 기분이 좋아졌다.
‘자세히 보니 더 명도(名刀)야. 팔면 꽤 나오겠는데.’
정광은 도를 자오에게 맡긴 뒤 엉망이 된 도복을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에 들렀던 반점에 갔다.
요리가 맛있는 데다 힘을 많이 써서 그런지 많이도 들어갔다.
자연히 식사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관도로 돌아가자 사람이 조금씩 지나다니고 있었다.
모두 오대산에 오르는 이들이었다.
정광 일행은 그들보다 빠르게 산을 올랐다.
현통사(顯通寺)는 유서 깊은 사찰이니만큼 찾는 이도 많았다.
대부분 부유한 참배객들이었는데, 정광 일행은 그들보다 더 깊숙한 곳으로 안내됐다.
모두 공우 덕분이었다.
소림사의 승려인 데다 고룡으로 명성 높은 그는 현통사의 주지(住持)와도 안면이 있었다.
주지는 일행 모두와 인사를 나눈 뒤 공우의 청을 들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주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항마주와 관계된 서책을 보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선사님.”
“공우 자네가 그걸 왜 찾는 겐가?”
“제가 아니라 이쪽 시주입니다.”
주지의 시선이 정광에게 옮겨졌다.
정광은 너무 늙어 짓무른 주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적당히 깨끗하네. 사찰이 잘되는 이유가 있구나.’
곤륜에서도 느꼈지만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법이다.
이렇게 딱 좋을 정도로만 깨끗하니 현통사가 번성한 것이리라.
‘사부라면 이 정도는 될 수 있겠지.’
허청을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주지가 물었다.
“곤륜의 진옥룡이라 했지? 내 비록 무림인은 아니나 자네의 얘기는 많이 들어봤네.”
“무량수불. 무슨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선입견은 지우시지요.”
“지우고 자시고 할 게 있겠나. 오랜 세월 대해도 모르는 것이 사람이거늘.”
“오, 선사님답게 도를 아시네요.”
“도도 역시 잘 모르네만 한 가지 아는 게 있지.”
주지는 공우를 슬쩍 봤다.
“소림의 방장께서 아끼는 사손을 보내 도우라 하셨으니 진옥룡 자네는 믿을 만한 사람일 걸세.”
똑똑하고 재밌는 노인이었다.
짧은 말로 소림에 책임을 지우지 않는가.
공우가 흠칫하는데 정광이 맞장구쳤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주지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붙여줄 테니 보고 가게나. 단, 소중한 고서이니 조심히 취급해 주길 바라네.”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정광은 작은 승방으로 안내됐다.
백승무를 비롯한 일행은 다른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자기들끼리 뭔가 나눌 얘기가 있는 듯했다.
“그러세요, 그럼.”
세 사람은 진지한 얼굴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정광은 방에 들어가 내부를 둘러봤다.
보통 이의 눈에는 검박해 보일지 모르나 곤륜이나 소림과 비교하면 재상집 안방이 따로 없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사람이 사는 곳이지.’
정광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머리를 긁었다.
겨우 이런 것에 만족하는 자신이 이상해서였다.
‘그나저나 다들 잘 있나?’
아무 때나 떠나도 크게 생각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함께한 시간이 많다 보니 가끔 생각이 났다.
이런 게 사람들이 말하는 정이란 것일까?
곤륜에 있는 이들과 무림맹에 있을 이들을 떠올리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났다.
얼마 안 가 젊은 중 한 명이 보자기로 감싼 서책들을 가져와 정광에게 건넨 뒤 돌아갔다.
보자기를 풀자 서책 두 권이 드러났다.
정광은 위의 것부터 집었다.
‘어디 보자. 고승전(高僧傳)이라.’
어쩐지 두껍다 했더니.
양(梁)나라 때 혜교(慧皎)라는 승려가 저술한 고승들의 전기였다.
정광은 서책을 펼쳐 휘리릭 넘기다가 혀를 찼다.
‘이런. 소림에서 봤던 그거잖아.’
다른 점이 있다면 표지는 물론 속지까지 깨끗하다는 것.
항마주의 그림도 온전히 그려져 있었고 그 옆의 글 또한 남아 있었다.
헌데 그러면 뭐 하는가?
현오에게 다 들은 얘기인데.
‘이거 어째 불길한데…….’
정광은 고승전을 내려놓고 얇은 서책을 들어 올렸다.
‘감몽구법설(感夢求法說)?’
이름부터 영…….
몇 장 넘길 것도 없었다.
구전되어 내려오던 설화(說話)를 글로 옮긴 것이었는데, 고승전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꽤 있었다.
아니,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할까.
정광은 서책의 내용을 읽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가 꿈에서 황금빛이 나는 신인(神人)을 봤다. 그가 부처라 생각한 명제는 천하 곳곳에 사람을 보내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대월씨국(大月氏國)에서 천축의 고승 가섭마등과 축법란을 모셔와 불교를 퍼뜨렸는데…….”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꿈 하나 때문에 신하들을 개고생시키다니.
명제는 무능한 것을 넘어 축생보다도 못한 반푼이 황제였음이 분명했다.
뒤의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그 덕에 나라가 안팎으로 평안해질 수 있는 초석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잠깐. 뭐? 먼 훗날에 천하가 도탄에 빠지면 황금빛을 내는 신인이 또 나타날 테니 천하는 명제의 예를 따라야 할 거라고?”
자화자찬하고는.
명제가 얼마나 사람들을 들볶았으면 이런 설화가 전해 내려올까.
꿈에서 황금빛이 나는 신인을 봤다더니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것도 일품인 명제였다.
“이거, 보는 사람이 부끄러워지는데…….”
다행히 쓸 만한 내용도 있었다.
“……두 고승과 제자들은 부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간혹 악(惡)을 만나 위험에 처하면 합장을 하며 속으로 부처를 찾았는데, 그때마다 부처께서 현신하시어…… 뭐? 승려들의 한쪽 팔이 위엄 있게 울며 찬란하게 빛났다. 악은 그 소리와 빛을 견디지 못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정광은 이 부분을 몇 번이나 되읽었다.
명제의 입김이 듬뿍 들어간 설화일 테지만 승려들이 싸우는 장면까지 장난질을 치진 않았을 것 같아서였다.
“적힌 대로라면 항마주가 빛났다는 얘기인데…… 합장을 하며 속으로 부처를 찾았다고?”
합장을 했다 하니 수인(手印)을 맺은 것도 아니요, 속으로 했다 하니 주술을 중얼거린 것도 아닐 것이다.
‘……설마?’
정광은 왼팔에 찬 항마주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우우우웅-
항마주가 위엄 있게 우는 게 아니라 역천경이 경련하듯 울었다.
아니, 웃었다.
-……죽고 싶냐?
-우웅! 우웅! 우웅!
잠깐 미쳤던 역천경이 격렬하게 부정하며 후회했다.
정광이 하북성에서 일으킨 살겁에 주눅 들었다가 오전에 있었던 살육에 또 긴장했었건만 이런 실수를!
그래도 아미타불이라니.
너무 웃기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역천경은 웃은 대가를 받게 되었다.
-조금만 기다려. 더러운 피를 잔뜩 먹여주마.
-우웅! 우웅! 우웅! 우웅!
-그냥 지금 반으로 접어줄까?
-……우웅.
정광은 역천경을 한 대 쥐어박은 뒤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