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만남
태원(太原) 석가장(石家莊)은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에는 못 미치지만, 각 성에서 떵떵거리는 육방칠단삼장 중 하나였다.
게다가 석가장이 뿌리를 내린 곳은 비교적 척박한 산서성.
그들 이상의 힘을 가진 문파는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석가장과 비등하거나 능가할 힘을 가진 문파가 굳이 산서성에 들어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믿었건만…….
‘사마련 이놈들. 감히 내 땅에 지부를 세워?’
그것도 아주 대놓고 세웠다.
석가장을 도발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일 정도로.
화도 나지만 어이도 없었다.
‘대체 뭐 먹을 게 있다고.’
안 그래도 넉넉지 않던 살림이 더 쪼그라들었다.
물론 그의 기준으로 봤을 때의 얘기지만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사마련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과감했다.
‘흑도문파들부터 일거에 밀어버리다니…….’
흑도가 가진 이권은 적지 않았다.
석가장으로선 여력도 없고 뺏어 봤자 손가락질만 받을 게 뻔하기에 모르는 척하고 있었건만.
사마련은 가차 없었다.
떳떳한 양지의 이권은 비열한 합법적인 수단으로, 숨기고픈 음지의 이권은 힘으로 강탈했다.
그리고 이젠 석가장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섬서성에서 화산과 종남이 당했던 예가 있어 어느 정도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석가장주(石家莊主) 석우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눌렀다.
전면전도 싫지만 이런 식의 흐름도 원치 않았다.
그는 생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현상 유지일 정도로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항간에는 석가장쯤 되는 대장원의 수장이 배포가 너무 작은 건 아니냐는 말이 떠돌곤 했지만, 그건 현실을 모르는 얘기였다.
석가장은 이미 정도문파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산서성이라 그 양이 적었을 뿐이다.
헌데 욕심을 부려서 다른 것들까지 탐한다?
바로 흑도나 사파 취급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외부로 진출해서 세력을 넓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동(東)은 천자가 거하는 하북성이요, 서(西)는 화산과 종남만으로도 넘치는 섬서성이다.
남(南)으로는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이 버티고 있고, 북(北)에는 흉악한 몽고가 있다.
어차피 옴짝달싹 못 할 판이란 말이다.
석우완의 지론대로 현상 유지가 최고의 선택이었다.
물론 그라고 과욕을 부린 적이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요즘 들어 톡톡히 받고 있었다.
‘망할 녀석 같으니…….’
막내아들 석용천을 떠올리자 이마에 핏줄이 섰다.
막내라 철이 없는 걸까, 원래 그런 성품인 걸까.
‘동년배의 후기지수들을 보고 배우라고 무림맹에 보냈건만…….’
지나친 기대였을까.
제 딴에는 공을 세운답시고 나섰다가 일반 무인에게 맞고 기절해 버렸다.
앙갚음할 명분도 없고 낯도 뜨거웠다.
급히 석가장으로 불러들였다.
헌데 이게 끝이 아닐 줄이야.
‘그리 자숙해라 신신당부했는데 또 사고를 쳐?’
석용천의 실수 때문에 사마련이 더 나대게 되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무림맹에 구원 요청을 해야 했다.
하지만 무림맹은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모두 남궁 가주가 미끄러져서다.’
당연히 남궁화인이 무림맹주가 될 줄 알았다.
석우완은 물론 대부분 사람이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밀었건만.
무림맹주의 자리는 팽가에 돌아갔다.
‘남궁 가주가 맹주가 됐다면 진작 사람이 왔을 것을.’
사실 이건 투정에 가까웠다.
사마련이 전 중원에서 발호하고 있는 상황. 정도문파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고, 그만큼 무림맹에 남겨진 예비 전력은 많지 않았다.
이렇게 전면전이 일어나지도 않은 산서성에 무턱대고 보낼 인원이 없는 것이다.
‘소림을 보내준다더니. 아니, 산서성에 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온단 말인가.’
소림만 오면 안심할 수 있다.
최소한 사마련이 전면전을 일으킬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신중하다 못해 소심한 그로선 그 이상의 경사가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아직까지!’
화가 치솟은 석우완이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치려고 하는 그 순간.
그의 아우가 문을 열고 들어와 기쁜 얼굴로 외쳤다.
“소림이 태원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
석우완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맞이할 준비를 하게!”
“……저…… 근데 그것이…….”
“……?”
석우완의 아우 석우현이 알쏭달쏭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소림이 본장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석우완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 * *
소림은 그들에게 몰려오는 민초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산서성의 성도(省都)인 태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정광, 백승무, 자오의 활약 덕에 민초 한 명, 한 명을 대하면서도 빠르게 전진할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나는 길마다 소림과 정광 일행의 명성이 퍼졌다.
그리고 소림승들은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불경 한 구절, 고사 한 토막만 얘기했을 뿐인데 이리도 고마워하다니…….’
‘천하의 혼란을 막기 위해 산에 머문다는 핑계로 속세의 힘없는 시주들을 등한시해 왔구나.’
‘오해를 살까 두려워, 해야 할 일을 안 해왔어. 본사로 돌아가면 이 문제에 대해 반드시 논의해야 한다.’
화두를 잡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직접 몸으로 겪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날이 갈수록 정광에 대한 고마움이 커져 갔다.
승려로서는 물론 무인으로서도.
‘으윽. 허리가 또 결리는군.’
‘아미타불. 의식하면 할수록 아프거늘 왜 자꾸 의식하는가? 내 수양이 너무나 부족하구나.’
덕분에 뼈마디가 결리고 온몸에 찰과상이 가득했지만, 그쯤은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값진 시간이었다.
이건 정광 역시 마찬가지.
그도 얻은 게 적지 않았다.
매일 밤 십팔나한진을 상대하며 그 요체를 흡수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쓸 만한 변형진(變形陣)도 만들어냈다.
그중 일부를 백승무와 자오에게 알려줬던 합격술에 적용해, 더 나은 합격술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백승무와 자오는 그걸 수련하느라 날밤을 새우곤 했는데 약한 소리 한 번 안 낼 만큼 만족하고 있었다.
이렇게 모두가 소중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제는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거의 다 왔군. 진옥룡, 오대산으로 바로 갈 겐가?”
원굉의 물음에 정광은 하늘을 바라봤다.
“음. 해가 떨어지고 있으니 자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럼 석가장에서 하루 묵는 건 어떤가? 산서성의 패자라 불릴 정도로 부유하더더군. 이대로 헤어지기 영 아쉬워서 그러네.”
행화촌까지 달려가 그곳의 분주를 한 번 더 맛볼까 생각 중이었던 정광은 원굉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
“무량수불. 대사(大師)님, 부유하다는 걸로 도사의 마음을 흔드셔야 되겠습니까?”
“미안하네. 자네를 잡을 방법이 따로 있으면 좀 알려주게나.”
“없죠. 가시죠.”
“그런데 왜 갑자기 대사라 부르는가?”
“그게 어울리실 것 같아서요.”
정광의 말대로 원굉은 예전의 원굉이 아니었다.
여전히 얼굴은 강퍅했지만 사람 자체의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고맙군. 더 정진하겠네.”
“쉬엄쉬엄하시죠. 사십 년은 더 사실 텐데요.”
“허어. 그리도 오래?”
“별다른 일만 없으면요.”
“이보게, 진옥룡. 나는 어떨 것 같은가?”
“원상 스님요?”
“이런. 나는 왜 스님이지?”
“그거야…….”
무척 밝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석가장에 도착하자 석가장주에게 엄청난 환영을 받게 되었다.
마치 한이 서린 듯한 이상한 환영이었다.
‘왜 이래? 미친 건가?’
정광이 석우완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이랬다.
그에 비해 석가장 자체에 대한 인상은 긍정적이었다.
‘산서성의 패자라 불릴 정도로 부유하더니…….’
거대한 장원의 크기만큼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탁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다양한 요리가 놓였는데, 그 하나하나가 무척 맛깔스러웠다.
모두 풀인 게 문제였지만.
‘뭐 그래도 먹을 만하네.’
그냥 풀이 아니라 비싼 풀투성이였다.
그것들을 다양한 조리법으로 요리해 그 맛이 보통이 아니었다.
소림승들은 부담스러운 얼굴로 요리를 먹었다.
주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였다.
“하하. 대사들께서 오셔서 한시름 놨습니다. 부디 즐겁게 드셔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석가장주 석우완은 먹는 걸 독려하며 정광을 힐끔거렸다.
말로만 듣던 진옥룡을 보게 되자 두 가지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바로 찬탄과 분노였다.
‘명불허전이군. 저렇게 잘생긴 얼굴이 있을 줄이야.’
‘저놈이 가르친 일반 무인 때문에 망신을 당했으렷다. 설마 의도를 가지고 그런 것일까?’
천하제일미남이라 불리는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니 그간 품고 있던 의심이 커져갔다.
안 그래도 하북팽가주가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른 데에는 진옥룡의 공이 크다는 게 정설 아닌가.
‘아니. 그런 게 확실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풀어졌다.
곤륜에 시비를 걸 배포도 없는 데다, 잘 이용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연배로 판단하면 안 돼. 십존 중 세 분의 공동전인인 데다가 무림맹에 수련 열풍을 일으킨 고수다. 분명 큰 전력이 될 게야.’
십존까지는 아니겠지만 측량할 수 없는 고수가 석가장을 찾았다.
이건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석우완은 슬며시 정광에게 다가갔다.
정광은 깨작깨작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허어. 먹는 모습조차 우아하군.’
좋게 마음을 먹으니 모든 게 좋게 보였다.
홀린 듯 정광을 바라보던 석우완은 정신을 차렸다.
“이보게, 진옥룡. 음식은 마음에 드는가?”
“네.”
“허허. 많이 드세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 뭐든 준비해 주겠네.”
석우완에게서 안 좋은 첫인상을 받았던 정광이었다.
하지만 뭐든 준비해 주겠다고 하자 호감이 약간 올라갔다.
‘뭐가 좋을까? 술이랑 고기?’
그거야 내일부터 먹고 마셔도 된다.
‘쓸 만한 무공은 당연히 없을 테고.’
청해성보다야 낫지만 이런 촌구석의 문파가 무슨 대단한 걸 가지고 있겠는가.
‘하나밖에 없네.’
정광은 예의 있게 말했다.
“노잣돈요.”
“허허, 그래. 노잣…… 도온?”
“네. 안 되나요?”
어리둥절해 하던 석우완은 애써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안 될 게 뭐 있나. 내 섭섭지 않게 챙겨주겠네.”
“무량수불. 감사합니다.”
“뭘 또 감사씩이야.”
“언제 주실 건데요?”
“음? 하하. 그야 자네가 떠날 때지. 언제쯤 갈 건가?”
“내일 해 뜨면요.”
“……!”
정광은 황당해하는 석우완에게 정중히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지금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정말로 정광은 해가 뜨자마자 떠났다.
석가장이 처한 상황부터 사마련의 움직임까지. 이것저것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정광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간만 보면서 지지부진하게 끌겠네.’
담이 작은 석가장주와 살생을 피하려 하는 소림승이 만났다.
게다가 석가장주의 바보 막내아들 때문에 명분도 크게 없는 상황.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은 이상 그렇게 진행되리라.
‘그래도 사람은 나쁘지 않던데.’
석우완은 보기보다 대협의 자질이 있는 자였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니까.’
사람의 그릇은 주는 것의 무게로 판단하는 것이지 그걸 줄 때의 표정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달라고 할걸 그랬나?’
정광이 고민에 빠지자 백승무는 그 마음을 짐작했다.
지금껏 지내온 시간이 있기에 자연스레 짐작이 간 것이다.
자오는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고.
하지만 공우는 달랐다.
‘이건 강탈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 했더니 노잣돈이라 답했다.
석가장주는 자신이 뱉은 말을 책임지기 위해 전낭을 줬을 뿐, 표정만 봐도 기분이 안 좋은 게 느껴졌다.
‘이리도 무도한 일을 한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무척 궁금했지만 정광에게 묻지는 않았다.
말은 적게. 궁리는 많이.
방장이 공우에게 건넨 조언이었고 그렇게 해야 얻는 게 있을 것이라 했기에.
이렇게 네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하며 길을 걸었다.
제대로 먹고 마시며 수련과 대련으로 하루를 태우는 나날이었다.
그들은 어느덧 목적지인 오대산 근처에 이르렀다.
‘저기에 가면 항마주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게 되겠지.’
정광은 산 중턱에 있는 현통사를 바라보다가 눈을 빛냈다.
‘어라? 이런 기운이?’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말 제법이잖아.’
그냥 제법이 아니라 정말 제법이었다.
중간에 있는 키가 껑충한 노인은 제법의 수준을 아득히 넘었고.
‘기운으로 봐선 사마련 놈들인데.’
그때, 정광과 노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 * *
살구꽃과 봄바람처럼 화사한 대동현 행화춘풍.
가균과 수하들은 그곳을 나서자마자 질풍 같은 추적을 시작했다.
정광의 외모는 워낙 아름다웠기에 곳곳에서 그를 봤다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대산을 지목했다.
그 말들을 따라 달리길 며칠.
오대산에 이른 그들은 익히 아는 중년인과 들어온 것보다 훨씬 잘생긴 청년 도사를 보게 되었다.
‘아직도 여기 있을 줄이야. 저놈이 진옥룡이군.’
천하에 저런 미남이 또 있을 리가.
가균은 정광의 외모보다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무공 경지에 놀랐다.
‘저 나이에 저런 말도 안 되는 무공을? 마공을 숨기고 있는 마인이란 말인가? 그래도 천마신교는 아닐 텐데…….’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다른 두 놈이야 알 바 아니지만, 자오만큼은 사로잡아야 했다.
입을 열어 명을 내리려는 그 순간, 정광이 가균을 보며 웃었다.
“……!”
마음속에서 이상할 정도로 불길한 기분이 싹텄다.
그래도 그의 입은 원래 하려던 말을 내뱉었다.
“포위하라!”
“존명!”
가균의 명령에 수하들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