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22화 (122/569)

122화

공평무사(公平無私)

정광은 내심 감탄했다.

‘대단한데.’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더니.

사흘 만에 만난 원굉은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몇 번씩이나 다시 보게 될 정도로.

그럴 때마다 강퍅한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던 원굉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보게, 진옥룡. 왜 자꾸 날 보는 겐가?”

“신기해서요.”

“신기하다니?”

정광은 대답 대신 원굉의 머리통을 빤히 쳐다봤다.

반질반질한 민머리 위에 큰 혹이 불룩 솟아 있었다.

마치 큰 계란 위에 작은 계란 하나를 올려놓은 것 같다 할까.

“허허. 거참…….”

연유를 짐작한 원굉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손이 닿자 굉장한 고통이 느껴져서였다.

그의 입에서 한숨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미타불. 정말 멀었구나.”

“네? 뭐가요?”

정광은 어느새 원굉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원굉은 잠시 주저하다가 느릿하게 토로했다.

“내 수양을 말하는 것일세. 자네가 날 깨우쳐 줬거늘, 아직도 우매한 짓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

정광은 자신이 대체 뭘 깨우쳐 줬다는지 몰라 황당했지만, 원굉의 표정과 목소리는 진지했다.

“머리의 혹을 만지면 아프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네의 시선이 부끄러워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다니…….”

“…….”

“내 내면을 반추하는 데 용맹정진하여 부끄러움 없는 이가 되고자 했거늘. 이리도 쉽게 무너져 버렸네. 이 얼마나 우매한 짓인가.”

“…….”

정광은 그제야 알아챘다.

‘머리를 너무 세게 때렸나? 정신이 좀 이상해졌네.’

타고난 강퍅한 얼굴을 억지로 부드럽게 보이려 하질 않나, 고승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를 구구절절 늘어놓질 않나.

차라리 사흘 전의 옹졸했던 원굉이 낫지 않은가.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세요?”

“무슨 말인지 아네. 하나씩 천천히 허물며 쌓아나가야겠지. 허나 언젠가 가고픈 곳에 미리 깃발을 꽂아놓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않은가.”

“……그 깃발은 잘 모르겠고요, 표정은 좀 편하게 하시죠.”

“편하게 하라? 나를 단련하기 위해 이러는 것이네만. 그렇게 어색해 보이는가?”

어색하기만 하랴.

저 딱딱한 얼굴에서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니 머리가 모자란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봐도 또 봐도 혼잡한 길을 편히 걷는 데나 쓸 만하지, 내면의 반추인지 깃발인지 하는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뭐 자기만 좋으면 된 거지.’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어색하다기보단 위험하죠.”

“……위험?”

“네. 보는 이의 나이가 적을수록, 또는 많을수록 더 경계할걸요.”

“…….”

원굉은 정광이 던져준 화두를 잡고 고민했다.

‘경계라니? 대체 왜…… 아!’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마음은 물론 표정까지 바꾸려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그를 대하는 이의 마음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를 속여 변화시키려는 거야 좋다만 나를 보는 이들은 내 거짓된 모습을 보는 것이다. 순수한 아이의 눈이나 노회한 노인의 눈에는 더 크게 보이겠지.’

정광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원굉을 본 아이가 무서워서 울거나 힘없는 노인이 놀라서 피하려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한 말이었다.

그런데 당사자인 원굉은 전혀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억지 미소야 홀로 정진할 때만 해도 충분한 것. 굳이 타인들 앞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아니, 가면을 쓰고 대하는 것이니 속마음조차 오해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

원굉은 얼굴에 주고 있던 힘을 뺐다.

입꼬리가 내려가며 원래의 강퍅한 얼굴이 돌아왔다.

‘……편하군.’

정광도 그랬나 보다.

“그거죠. 아. 이제야 좀 편해지네.”

“고맙네. 또 도움을 받았군.”

“뭘요. 서로 좋은 건데요.”

“서로 좋다라…… 그래. 그렇지. 맞는 말일세.”

깨달음을 받은 이는 고마워하고, 준 이는 기뻐한다.

서로가 이렇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기뻐하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는가.

‘이리도 젊은데 누구보다 큰마음을 품고 있구나. 내 눈이 어두워 미처 몰랐건만 이제라도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로다.’

이는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함께 걷던 소림승들 중 꽤 많은 이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구룡사봉 중 고룡으로 불리는 공우도 그랬다.

‘선입견을 걷어내니 보이는 게 달라지는군.’

방장이 그를 정광의 안내인으로 붙인 건 많은 걸 보고 배우라는 의미였다.

말은 적게. 궁리는 많이.

‘그러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거라 하셨지.’

공우는 방장의 말을 되새기며 길을 걸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위맹한 인상의 중늙은이가 많은 무인들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아미타불! 여러 사형들과 사질들이 속세에 발을 디디셨구려! 현정문(顯正門)의 한 모가 인사드리러 왔소이다!”

현정문은 육방칠단삼장에는 못 끼지만 정주현에서 위명이 쟁쟁한 문파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곳의 문주.

누구나 아는 소림 속가문파의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소림승들도 그를 알아봤다.

“아미타불. 한 사제께서 오셨구려. 오랜만에 뵙소이다.”

“하하. 원굉 사형. 지난달에 뵈었는데 오랜만이라니요. 소제를 더 자주 보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한윤권은 원굉은 물론 다른 소림승들과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눴다.

짐을 바리바리 싸서 들고 거의 매달 숭산을 오르내린 덕분이었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부러운 눈빛을 던졌다.

한윤권쯤 되는 고수가 그걸 모를 리 있나.

‘급히 뛰어오길 잘했군. 다들 똑똑히 봐라. 이게 현정문이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허리는 꼿꼿해졌고 넓은 가슴은 더 넓어졌다.

하지만 그런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으니.

괜히 천년소림이 아니다.

오랫동안 강호에 발길을 끊었으나 소림에서 무공을 사사한 속가문파들은 넘쳐났다.

하물며 이곳은 소림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정주현.

거의 모든 문파가 소림 속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주현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문파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정주표국(鄭州鏢局)의 상 모가 왔소이다!”

“잘들 계셨소이까? 숭의무관(嵩義武館)도 있소!”

어느새 정주현을 위진하는 문파들이 모두 모였다.

정말 오랜만에 산에서 내려온 소림승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서로 안면이 있는 소림승들과 속가 무인들이 인사 한두 마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원굉이 문파의 우두머리들을 둘러보며 반장을 했다.

“아미타불. 뵙게 되어 무척 기쁘나 가야 할 곳이 있어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죽도록 뛰어왔는데 벌써?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십팔나한 중 한 명의 말 아닌가.

사람들은 무척 실망했으나 애써 얼굴을 펴며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아미타불. 죄송이라니요. 저희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원굉은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소림승들도 그를 따랐다.

그때, 맑은 목소리가 그들을 잡았다.

“와. 진짜 너무들 하시네요.”

허탈함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 말을 한 사람에게 모였다.

바로 정광이었다.

“……너무하다 했는가?”

원굉의 물음에 정광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원굉은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다.

정광은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렇게 대하셔도 돼요?”

“……이렇게라니?”

“소림은 정말 오랜만에 산에서 내려온 거잖아요. 다들 반가워서 달려오셨는데 하루 묵지는 못하더라도 한 분, 한 분 인사는 제대로 나누고 가셔야 할 것 아니에요.”

“……하지만 시간이…….”

“시간은 줄일 수 있어도 마음은 못 되돌려요.”

“……?”

“저분들 실망하신 거 안 보이세요? 나중에 어떻게 위로하실 건데요?”

원굉과 소림승들은 속가문파 사람들을 돌아봤다.

내색은 안 하고 있지만 왠지 실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허어. 진옥룡의 말을 들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아니면 말을 듣고서야 내가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건가?’

고민하던 승려들은 정광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속가 귀한 줄 모르시네요. 본문처럼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져야 아시려나.”

“……!”

무림인 중 곤륜에 속가가 없는 이유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소림승들도 마찬가지였다.

‘마교가 곤륜을 침공하자 구원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죽임을 당했지.’

‘아아. 본산이나 속가나 하나이거늘, 시간이 부족하다 해도 너무 소홀히 대했구나.’

소림승들은 나직이 한탄하며 자신들을 탓했다.

속가문파들은 고마운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이곳에 모인 문파들은 같은 정주현에 있으나 경쟁하는 사이.

소림과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승려들에게만 매달리나 보니 이제야 정광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허억! 저게 사람이냐!’

‘뭐가 저리 잘생겼어!’

‘소문과는 다르게 인품도 훌륭하구나!’

잘생긴 건 맞다만 정광의 인품이 훌륭할 리가 있나.

그저 배가 아파서 한 말이었다.

곤륜 도사들은 다른 건 몰라도 민초들을 무시하는 것만큼은 용서하지 않았다.

정광은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도 하는 일을 소림승들이 안 한다?

그것도 소중하디소중한 속가한테?

그 꼴을 어찌 보겠는가.

‘하여간 배가 불러서는.’

정광 덕분에 배가 꺼진 소림승들이 정중한 얼굴로 사과했다.

당연히 원굉도 마찬가지였다.

“깨우쳐 줘서 고맙네.”

“뭘요.”

“자네 말이 맞아.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겠어.”

원굉과 소림승들은 사람들을 향해 반장을 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분위기가 따뜻해졌다.

여기저기서 정다운 인사가 오갔다.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원굉은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살짝 불안한 마음을 느꼈다.

‘옳은 일이긴 하나 무척 오래 걸릴 듯한데…… 석가장을 구원하러 가는 길인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건 아닐까.’

원굉은 정광의 의견을 구했다.

“이보게, 진옥룡. 석가장에서 무척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빨리 가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

“당장 멸문의 위기에 처하거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도 아니라 들었어요. 그럼 급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우리가 빨리 가면 상황이 더 좋아지지 않겠나?”

“아. 소림의 위명으로 압박하시겠다는 거구나. 근데 안 될걸요. 사마련이 소림의 이름에 겁먹을 녀석들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안 벌였겠죠.”

“음. 그건 그렇네만…….”

“시간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제가 줄일 수 있다고 했죠?”

“……그랬지. 정말 방법이 있는가?”

“물론이죠.”

“이런 일엔 경험이 없어서 당황하고 있었네만 자네가 있어 다행이야. 잘 부탁하네.”

원굉이 승낙하자 정광은 두 사람을 불렀다.

백승무와 자오였다.

“사제. 백가상단에서 했던 것처럼 하자고.”

“……아. 이해했습니다.”

“자오. 사제를 도와주세요.”

“맡겨만 주십시오.”

정광은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내공을 끌어올려 외쳤다.

“무량수…… 아미타불! 찾아와 주신 시주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대사님들과 시주님들께서 교분을 나누시기 위해선 질서가 필요합니다! 질서를 지켜주시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실 수 있으실 테니 부디 협조 부탁드립니다!”

“…….”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질서?

협조?

대체 무슨…… 아!

사람들의 머릿속에 전설과도 같은 소문이 떠올랐다.

청해성 서녕에서 곤륜파가 세웠다는 위업이었다.

‘……지, 진옥룡수호단 대집회?’

‘……그걸 여기서 한다고?’

입을 떡 벌린 채 정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정광의 사제인 백승무가 안내했다.

“이쪽으로 줄을 서주시면 됩니다.”

눈치 빠른 자오도 합세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모두를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그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소림승들도 그들의 말을 따르고 있어서였다.

혼잡했던 장내가 순식간에 정리됐다.

한쪽엔 소림승들이 횡(橫)으로 서고, 한쪽엔 속가문파들이 종(縱)으로 섰다.

속가문파들 중 제일 앞에 선 건 현정문이었다.

문주 한윤권이 머뭇거리다가 정광에게 물었다.

“이, 이제 앞으로 나가 인사를 나누면 되는 것이오?”

“네. 오신 순서대로요.”

“……순서대로?”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은 도착한 순으로 줄을 서고 있었다.

‘……허어. 이럴 수가…….’

정주현의 내로라하는 문파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그리 큰 차이는 아니더라도 우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헌데 세력의 명성이나 무위가 아니라 선착순으로 하다니 이보다 공정한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진옥룡이라…… 정말 공평무사한 이로다.’

말도 안 되는 오해였지만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다.

정광은 소림승들과 산서성으로 향하며 비슷한 평을 많이 듣게 되었다.

산서성으로 넘어가서도 마찬가지.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소림승들에게 수많은 민초들이 다가왔다.

정광은 그들을 줄 세우며 명성을 쌓아갔다.

그리고 어느덧 태원(太原) 석가장(石家莊)에 도착하게 되었다.

* * *

산서성 대동현(大同縣).

행화춘풍(杏花春風)에서 하룻밤을 묵은 가균은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살구꽃과 봄바람이라는 이름처럼 화사한 느낌이라더니 과연.’

호사는 여기까지다.

이제 다시 쫓아야 할 시간이었다.

“이번 암어는 어디를 가리키느냐?”

가균의 물음에 수하가 답했다.

“없습니다.”

“……무어라?”

대답한 수하는 물론 다른 수하들의 눈빛도 왠지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가균은 흔들리지 않았다.

“탐문해.”

“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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