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21화 (121/569)

121화

질풍(疾風)

사마련의 이 공자 상소운은 무명심법(無名心法)을 이용해 정파에 타격을 줄 계획을 세울 만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계획으로 그치지 않고 성과를 보일 정도로 실행력도 갖추고 있었는데, 그 첫발을 떼는 대계를 하북팽가에서 벌일 예정이었다.

그리고 대계 당일, 팽가에 갔다가 사라졌다.

자신이 끌고 갔던 총단의 정예 무인들과 함께.

그로부터 소식이 끊기자 하북지부의 무인들이 나섰다.

상소운과 총단 무인들이 머물던 안가(安家)로 갔는데, 그들을 맞이한 건 황폐해진 장원이었다.

남아 있는 건 박살 난 전각의 잔해와 살찐 왼손 하나, 참혹한 시신들뿐.

상소운과 총단 무인들의 것이었다.

하북지부는 난리가 났다.

급히 총단으로 연락을 띄우고 안가를 수습했다.

하지만 상소운은 살아 있었다.

마공에 이지를 제압당한 그는 쉼 없이 달려 총단에 나타났다.

그리고 사마련주에게 천마신교의 인물로 추정되는 자의 경고를 전한 뒤 참살당했다.

‘흐음. 다른 점이 없군.’

사마련의 부련주 가균은 냉철한 데다 무척 똑똑한 자였다.

때문에 총단에서 출발하기 전 상소운과 관계된 모든 정보를 한 번 더 확인했다.

하북성에 온 지금은 정보들을 토대로 세운 가설이 맞는지는 젖혀둔 채 그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있었다.

사락. 사락.

서책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소리가 넓은 전각을 가득 채웠다.

부동자세로 선 하북지부의 무인들은 그 소리가 울릴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균의 입에서 ‘……음?’ 하고 의아해하는 소리만 나와도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총단 무인들이 칼질을 해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가균은 수많은 서책과 종잇조각들을 탁자 한쪽으로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깨끗해.”

“……!”

하북지부의 서류와 하북지부가 총단에 보낸 정보가 일치한다는 의미.

무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흠칫했다.

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너무 깨끗해. 이 공자답다고 해야 할까.”

“……!”

무인들의 눈에 두려운 빛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란 걸 느껴서였다.

가균은 손가락으로 깨끗한 탁자를 두드렸다.

톡. 톡. 톡.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박자.

그 소리에 맞춰 무인들의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손가락질이 느려졌다.

생각이 정리되고 있었다.

‘팽가의 잔치에 모였다는 이들 중 이 공자와 총단 무인들을 쓸어버릴 만한 고수는 없어.’

그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깔려 있는 시신들을 봤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소금에 잔뜩 절여져 있는데도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누가 봐도 대단한 마공에 당한 흔적이다. 천마신교의 마인이 잔치에 참석한 걸까? 아니면…….’

가균은 팽가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황태손에 주목했다.

그를 호위하는 황실의 고수 중 마공을 익힌 자가 없으리란 법은 없었기에.

현 황조는 건국 과정부터 사교와 엮여 있지 않은가.

그것도 오래전 천마신교로부터 떨어져 나간 지파와 말이다.

‘원래의 계획은 대공자 팽강웅을 조종해 잔치에 참석한 명사들을 도륙하는 것이었는데…….’

그대로 진행됐다면 황실의 고수가 상소운은 물론 안가의 무인들까지 쓸어버렸을 리는 없을 터.

그들의 임무는 황태손을 지키는 것 아닌가.

만약 황태손이 있는 자리에서 불경한 일이 일어났다?

일단 황태손부터 보호한 채 황궁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것이다.

‘……이 공자가 욕심을 낸 것일지도 모르겠군.’

팽강웅을 조종해 황태손을 시해하려 했을 거란 가정.

성공만 하면 그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분노한 황실이 하북팽가를 가만두지 않는 것은 물론 무림맹에도 손을 쓸 테니까.

‘하지만 너무 큰 욕심이야. 갑자기 왜?’

누구나 공(功)은 높이고 과(過)는 낮추기 마련이거늘, 상소운은 공과를 속이지 않았다.

정직해서가 아니었다.

의심 많은 사마련주의 눈에서 벗어날까 두려워서였다.

‘조급해하던 참에 황태손이 나타나자 과욕을 부린 건가.’

상소운은 련주의 사생아였다.

그래서 련주는 피가 섞이지 않은 다른 제자들보다 상소운을 신임하는 편이었으나 근래 들어 상황이 변했다.

련주가 항상 찬밥 대우하던 후위진이 공을 세우며 조금씩 치고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진짜 확인을 해봐야겠군.’

상소운은 조심성이 많은 만큼 묻어둔 것도 많을 터.

비록 그는 죽었다 하나 그의 손발 노릇을 했던 이들이 남아 있었다.

가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작해라.”

“존명(尊命)!”

그의 수하들이 일제히 외치며 병기를 뽑았다.

매타작이 시작됐다.

하북지부의 무인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 갈 뿐이었다.

“……대, 대체 왜……?”

하북지부의 무인이 억울한 얼굴로 물었지만 가균의 수하들은 대답 한마디 안 했다.

그저 묵묵히 고문만 할 뿐이었다.

“으아악! 무,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여기저기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져 전각을 울릴 정도가 되었다.

하북지부 무인들은 살기 위해…… 아니, 더 이상의 고문 없이 죽기 위해 갖은 말을 다 내뱉었다.

그러길 한참.

가균의 귀에 쓸모 있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말을 한 이를 지목했고, 그의 수하들은 그자를 치료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는 것.

제발 그냥 죽여달라고 빌던 그들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입으로 토해냈다.

“이, 이 공자의 수하 중 자오라는 자가 있습니다.”

“얼굴은 안다.”

“이 공자가 그를 철혈장에 남겨 누군가를 감시하게 했는데…….”

“누군가를?”

“자오가 보낸 암어에 따르면, 요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진옥룡이라 했습니다.”

“흐음. 그자가 철혈장엔 왜?”

“철혈장주에게 검을 만들어줄 것을 청하러…….”

“패기도 좋군. 그게 가능한가?”

“후, 후위진 공자의 신물을 들고 있었다 합니다.”

“……!”

“대략 두 달 정도 철혈장에서 머물 예정이라 했는데…… 심상치 않은 낌새가 있어 오래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그 후로 연락이 없었나?”

“그, 그렇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철혈장을 탐문해 볼 예정이었는데 뜻밖에…….”

가균이 손을 들자 무인의 입이 멈췄다.

“흐음.”

가균은 두 손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진옥룡이 막내 공자의 신물을 들고 철혈장에 갔다? 이건 또 왜 숨긴 것이지?’

괜히 사마련주에게 알렸다가 최근 들어 공을 세우고 있는 후위진을 음해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더 확실하게 알게 될 때까지 지켜보려 했을 수도 있지. 그만큼 믿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그의 추측은 사실에 근접했다.

상소운은 그런 이유로 정광이 마인이라는 것을 자오에게만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균에게는 추측일 뿐, 직접 확인해 봐야 했다.

“할 말이 더 있느냐?”

제지당해서 말을 끊었던 무인이 급하게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아까 말씀드리던 자오 있잖습니까.”

“그래.”

“며, 며칠 전에 팽가를 탐문하다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이가 참사가 일어난 날 팽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놈은 무척 평범하게 생기지 않았더냐.”

“네. 네. 물론입지요. 그래도 체구며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너무나 비슷하여…… 게,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

“진옥룡과 그의 사제와 함께였다고 하는데…….”

“……무어라?”

“……산서성 방향으로 떠났다 합니다.”

가균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시기상 철혈장에 있어야 할 진옥룡 사형제가 팽가에 있었다? 그것도 자오와 함께 움직였다고?’

그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상소운은 대체 무엇을 숨긴 걸까.

자오는 왜 진옥룡과 함께 있을까.

‘난데없이 나타난 마인과 진옥룡이라…….’

왠지 둘이 연결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공자와 수하들을 공격한 건 천마신교의 마인일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이 내게 언질을 줬을 터.’

가균은 ‘그들’을 믿었다.

하지만 의심도 했기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가균이 손을 들자 그의 수하들이 나섰다.

비밀을 숨기고 있다가 토설한 이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가자.”

“존명!”

가균과 수하들은 장원을 나섰다.

그들의 목적지는 산서성이었다.

경공을 펼쳐 질풍처럼 내달리던 그들은 얼마 안 가 한 마을 어귀에 이르렀다.

척후조로 앞서 출발했던 수하가 가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수하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부련주님. 나무에 본련의 암어(暗語)가 새겨져 있습니다.”

“암어?”

“네. 그것도 을급(乙級) 암어입니다.”

가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을급 암어는 련에서 상당한 직위에 있거나 그런 이를 호종하는 이쯤은 되어야 읽고 쓸 수 있는 것.

이런 대로에서 볼 정도로 흔한 게 아니었다.

‘설마 자오가 남긴 것인가? 대체 누구에게?’

자오가 자의로 진옥룡과 동행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사마련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내용일 터.

가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슨 내용이지?”

수하가 딱딱한 말투로 암어를 읽었다.

“망향반점(望鄕飯店). 가성비 종결자. 무엇을 골라도 후회 없는 선택.”

“…….”

가균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였다.

“일단 가본다.”

“존명!”

망향반점이란 곳을 찾기 위해 누굴 잡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향긋한 요리 냄새가 그들을 이끌었다.

가균은 현판에 쓰인 글자를 확인한 뒤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군. 그런데 왜 입구에 검은 천이 묶여 있는 걸까?’

일단 들어가 봤다.

반점 이름처럼 고향이 그리워지는 향이 가득했다.

‘보기엔 그냥 반점 같은데…….’

가균 일행을 발견한 점소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생긴 것부터 엄청난 이들이 잔뜩 왔으니 그럴 수밖에.

그나마 수많은 이들을 대하며 담을 키워온 점소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마, 망향반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가균은 불쑥 입을 열었다.

“가성비 종결자.”

“……!”

점소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무엇을 골라도 후회 없는 선택!”

“……!”

가균은 제대로 찾아왔다는 걸 눈치챘다.

혹시나 정해진 암어인가 싶어 말했더니, 재깍 암어로 화답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본 반점을 이용해 주셨던 어르신들이시군요!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

이쪽이고 뭐고 할 게 없었다.

식사 시간이 아닌지라 빈자리가 가득했고 가균 일행의 수가 많았기에 반점이 꽉 차게 되었다.

점소이가 빙글거리며 물었다.

“알아서 내올까요?”

“……그래라.”

“넵!”

점소이는 나는 듯한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상식적인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설마 그냥 반점을 선전하는 문구인 건가?’

그럴 리가.

그런 것에 을급 암어를 사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침 시장하기도 했던 가균은 묵묵히 기다렸다.

그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점소이가 수많은 요리를 탁자 위로 날랐다.

“맛있게 드십시오!”

일단 먹어봤다.

‘……맛있군.’

이것저것 먹어봤다.

무엇을 골라도 후회 없는 선택이라더니 과연.

가균의 눈썹 끝이 위로 휘었다.

‘어떤 놈이 이런 장난질을! 자오 그놈인가!’

그렇다고 애꿎은 객잔에 화풀이를 하진 않았다.

사마련의 부련주쯤 되는 이가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

대신 점소이를 불러 몇 가지 물었다.

점소이는 재깍 대답했다.

“네. 네. 맞습니다.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이 먼저 들러서 값을 지불하고, 눈이 번쩍 뜨이도록 잘생긴 도사님과 곱상한 도련님이 들러서 드셨습니다.”

“……그리고?”

“글쎄요. 소저들이 몰려들어서 피하려 하신 것인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시더군요.”

가균은 냉철하게 생각했다.

‘자오가 본련을 배신한 게 맞는 걸까. 뭔가 더 있을 법도 한데.’

그래도 진옥룡 일행을 제대로 쫓아온 게 다행이랄까.

식사를 마치자마자 반점을 나섰다.

그 뒤에서 한 수하가 값을 치르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성비 종결자라더니 과연…….’

배를 채운 가균 일행은 또다시 질풍처럼 달렸다.

그리고 자오가 남긴 암어들을 계속 발견하게 되었다.

[황화루(黃花樓). 가반주(加飯酒)의 달콤한 향과 함께 고즈넉한 풍경을.]

달콤함과 고요함.

의외로 괜찮은 궁합이었다.

[운상객잔(雲上客棧). 구름 위에 누운 것처럼 푹신한 침상.]

덕분에 숙면을 취했다.

[전취반점(全聚飯店). 양육포막(羊肉泡饃). 국물이 끝내줘요.]

정말 끝내줬다.

따로 해장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이렇게 하루가 지나자 가균은 더 이상의 기대를 접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역시 아무 의미가 없군. 자오가 먼저 앞서며 진옥룡 일행을 안내하는 것뿐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이대로 따라가다 보면 그들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를 상황,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며 그들을 쫓아야 했다.

“이번 암어는 어디를 가리키느냐?”

수하가 대답했다.

“항산반점(恒山飯店)입니다. 여러 소채와 갖가지 버섯이…….”

“됐다. 가자.”

“존명!”

가균과 수하들은 질풍처럼 달렸다.

수하들의 눈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 * *

정광도 만족스러웠다.

소림에서 내려와 사흘 동안 줄창 먹고 마셔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가 중천에 걸리자 소림승들이 그를 찾았다.

정광 일행은 그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가균 일행과 같은 산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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