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19화 (119/569)

119화

대자대비(大慈大悲)

봉(棒)을 든 나한들이 정광을 포위한 형태는 단순한 원진(圓陣)이 아니었다.

먼저 여덟 명의 나한이 사방을 둘러싸는 사방진(四方陣)을 펼쳤고, 그 한 걸음 뒤엔 다시 두 명씩, 총 여덟 명이 배치된 기묘한 진이었다.

또한, 십팔나한 중 남은 두 명은 그 밖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밀려오는 압력의 성질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 압력에 정광의 도복이 펄럭이고, 감각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음양(陰陽), 오행(五行), 팔괘(八卦)의 이치가 모두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나머지야 직접 겪어보면 알 일.

마침 꼴 보기 싫은 얼굴이 정면에 있었다.

‘일단 인사부터 할까.’

정광은 망설임 없이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 잠들어 있던 운룡이 깨어나며 날카로운 섬광을 토했다.

서걱-

장내가 침묵에 휩싸였다.

정광만 빼고.

“스님. 봉이 반 동강 났네요. 너무 쉽게.”

원굉은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더듬대며 중얼거렸다.

“……이, 이런 명검이 있다니…….”

그의 봉이 두 개의 단봉(短棒)이 되어 양손에 들려 있었다.

정광의 일검에 깨끗이 절단된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방장과 불존의 눈도 흔들렸다.

‘본사 비전(秘傳)의 방법으로 만들어 목(木)의 탄성과 철(鐵)의 강도를 지닌 봉이거늘…….’

‘……이리도 쉽게 베어내는 명검을 가지고 있다니…….’

흔들림도 잠시.

두 노승은 반장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아미타불. 진옥룡, 손속에 사정을 둬줘 고맙네.”

“네가 보여준 정명(正明)한 의지. 깊이 받아들이마.”

“……?”

정광은 황당했다.

원굉을 놀리고 도발하려 했을 뿐이건만, 손속이 어쩌고 정명한 의지가 어째?

“저는 그저…….”

방장의 웅혼한 내력이 실린 음성이 정광의 말을 잘랐다.

“나한들은 듣게. 진옥룡이 자신의 검이 무척 무서움을 미리 알려줬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응해야 할 걸세.”

병기도 실력이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명검이 나타나거나 보도가 나타나면 어떻게든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흩뿌린다.

그렇게라도 해서 가지고 싶을 정도로 대단한 병기의 이점을 싸움 전에 드러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나한들은 한 손으로 봉을 땅에 세우며 남은 한 손으로 반장(半掌)을 했다.

“감사하외다. 그 뜻에 걸맞게 최선을 다하겠소.”

양손에 단봉을 쥐고 있어 잠시 허둥대던 원굉은 하나를 버리고 나서야 반장을 취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에는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정광이 그를 놀리려고 벌인 짓임을 직감해서였다.

‘이놈! 버릇을 고쳐주마!’

그가 분노하든 말든 정광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러 명이 동시에 반장을 하니까 확실히 눈에 띄네. 나름대로 멋도 있고.’

소림사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합장이 아닌 반장을 한다.

그에 얽힌 일화가 있었는데, 정광의 관점에선 미친 짓이었다.

‘그런 걸 보면 정파도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지.’

정광이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한 승려가 원굉에게 새로운 봉을 건넸다.

봉을 다잡은 원굉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분노에 사로잡혀 또 다른 실수를 하기는 싫었기에.

“다시 시작하게!”

방장의 외침과 함께 나한들이 진기를 끌어 올렸다.

정광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신형이 흔들리나 싶더니 원굉의 앞에 나타나 운룡을 내려치고 있었다.

“합!”

원굉이 재빨리 물러남과 동시에 그의 양옆에 있던 두 나한이 봉을 내질렀다.

정광의 좌우면과 후면에 있던 나한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면 끝까지 짓쳐들어 가 머리를 반으로 갈랐으련만.

원굉의 뒤에 있던 두 나한까지 한 걸음 나서며 봉을 내지르는 것 아닌가.

‘뭐가 이리 많아?’

선(線)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라 점(點)으로 찔러오는 공격들이었다.

막아내기가 까다로울뿐더러, 더 많은 공격을 받게 되어 손발이 바빠질 판이었다.

‘그래 봤자지.’

정광의 손에 들린 운룡이 화려한 선을 그리며 휘돌았다.

하지만.

나한들이 재빨리 봉을 회수하자 헛된 짓으로 그치게 되었다.

누가 봐도 정광을 격살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견제하는 움직임.

과연 대자대비한 불문(佛門)답다고 해야 할까.

물론 정광의 생각은 좀 달랐다.

‘이런 치사한 땡중들을 봤나. 차륜전(車輪戰)으로 힘을 빼려 하네.’

정광은 타고난 기감으로 사방을 살폈다.

전후좌우 어느 하나 처지지도 넘치지도 않는 기운이 느껴졌다.

‘어느 쪽을 쳐도 똑같다는 말이지.’

그럼 그렇게 해줄 수밖에.

정광의 신형이 번뜩이며 사방을 몰아쳤다.

나한들은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나설 자는 나서고 물러설 자는 물러서며 공수를 펼쳤다.

그야말로 음양, 오행, 팔괘의 이치를 한데 품고 맞물려 돌아가는 진법!

정광의 눈이 번뜩였다.

‘뭔가 했더니. 하도낙서(河圖洛書)구나!’

나한진에는 태극과 팔괘의 효시가 되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이치가 담겨 있었다.

종이 됐든 횡이 됐든, 그 열에 있는 나한들의 공력의 합이 같은 마방진(魔方陣)!

그 균일한 힘으로 여덟 명의 나한이 차륜전을 펼친다.

마방진 밖에 있는 또 다른 여덟 나한은 마방진이 밀릴 때마다 뛰어들어 힘을 보탠다.

여기서 끝나면 숨 쉴 틈은 있으련만, 남은 두 나한이 상황에 따라 사방으로 움직여 힘을 보태고 빼며 음양의 변화를 주도했다.

정광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참 볼만하잖아!’

나한진의 무서움은 그 속에 담긴 묘리는 물론이요, 그걸 행하는 나한들에게도 있었다.

길고 치열한 수양으로 닦아온 부동심(不動心) 덕분일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움직이는 진은 강호의 여느 문파가 흉내 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까까지만 해도 분노해서 흔들리던 원굉조차 냉정한 눈빛으로 진에 맞물려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정광의 내공이 점점 소진되어 갔다.

이대로 가다간 차륜전의 먹이가 되어버릴 판이었다.

‘십팔나한진이 이 정도 위력이라. 백팔나한진이라면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도 잡을 수 있다더니…….’

정말 가능할지도 몰랐다.

보통의 천마라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정광은 진천마라 불렸던 존재.

아직 전생과 같은 힘은 없지만 십팔나한진을 깨는 건 지금의 그로서도 가능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속전속결!’

정광의 신형이 솟구쳤다.

그리고 원굉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압!”

나한들은 허공에 뜬 정광을 향해 봉을 찔렀다.

원굉은 뒤로 물러나며 속으로 코웃음 쳤다.

‘바보같이 신형을 띄우다니. 얼마 안 가 끝나겠군.’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리려던 순간.

정광의 신형이 허공에서 한 번 더 뛰어올라 원굉의 머리를 노리는 것 아닌가!

원굉의 눈이 커졌다.

“허, 허공답보(虛空踏步)?”

그럴 리가.

아무리 정광이라도 지금의 경지로는 허공을 걸을 순 없었다.

옳은 답은 불존에게서 나왔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로구나!”

마치 구름 속을 노니는 용과 같다 할까.

허공에서 자유롭게 방향 전환을 하는 곤륜의 비전 신법 운룡대팔식.

그 요체를 깨우친 정광이 응용해서 펼친 움직임이었다.

원굉은 감탄할 틈도 없이 허겁지겁 물러났다.

자연히 나한진도 그와 함께 이동했다.

그러면서도 정광을 노렸는데, 정광이 허공에 떠 있다 보니 거리도 멀어지고 공격할 수 있는 인원도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몇 개의 봉이 정광을 노리고 나아가 찌르기 직전.

정광은 또 한 번 신형을 뒤집어 원굉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원굉의 눈에 어처구니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왜 나만!’

입 밖으로 외쳤으면 ‘응. 너니까’라는 정광의 대답을 들었겠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운룡의 날카로움 때문에 감히 대항할 생각도 못 한 원굉은 계속해서 물러났다.

그리고 당연히 정광은 또 따라붙었다.

원굉의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대체 왜!’

응. 너니까.

정광은 상식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원굉을 몰아쳤다.

원굉과 나한들은 정광을 피해, 정광을 쫓아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정광은 간간이 땅에 내려섰다가 다시 뛰어올라 같은 공격을 행했다.

그의 내공도 점점 소모됐지만, 극심한 긴장감을 가지고 대항하는 나한들의 내공은 급속도로 소모됐다.

게다가 해도 중천에 걸린 상황.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머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한들이 자발적으로 유지하는 대머리에 햇살이 비쳐 아름답게 빛났다.

그중 가장 빛나는 원굉의 머리에 기어코 운룡이 떨어져 내렸다.

이번에는 엄청난 살기까지 동반한 채.

지금이 적기라 판단한 정광이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원굉의 강퍅한 얼굴이 굳어졌다.

‘이렇게 끝인가!’

그만큼 막대한 살기가 담긴 검이었다.

순간,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정광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눈앞에 환상처럼 펼쳐졌다.

‘……안 오는 게 나았다? 불필요한 살생을 했다 한 것이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할 일인가?’

‘범이 앞다리로 스님 뒤통수를 후려쳐도 그런 말 하실 수 있으세요? 아. 스님은 피하신 뒤 주먹질을 하시겠지. 무공을 모르는 분들을 말하는 거로 바꾸죠.’

원굉은 정광의 말에 분노한 자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막상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하자 그간 해온 언행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져서였다.

‘……내가 하찮은 힘이 있다 하여 힘없는 시주들의 생을 이리도 가벼이 여기며 살아왔다니…….’

오만했다.

또한 비겁했다.

승려로서, 무인으로서. 그 어느 하나에도 부합되지 않는 언행 아닌가.

‘……이렇게 죄만 짓다 가는구나…… 죄만 지어서 가는 것일지도…….’

원굉은 눈을 감았다.

불제자로서 업보(業報)를 받는 판국에 추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찬란한 황금빛이 보였다.

마치 부처의 광휘와도 같은 그 빛이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만 같았다.

‘아미타불. 소승 원굉. 내세(來世)에는 다른 삶을 살고야 말겠습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반기듯, 황금빛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까앙-

* * *

정광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이 한 방을 위해 땀에 절 정도로 생고생을 하지 않았는가!

‘좋아! 한 놈 머리통은 깼고.’

일부러 검면으로 살살 깼다.

깨어나면 또 깨려고.

나한진의 요체는 대강 깨쳤다.

이제 나머지 중들의 머리도 한 번씩 다 깨는 거다!

‘간다!’

정광의 신형을 또 띄우려 하는데.

“아미타불!”

방장의 무거우면서도 낮은 불호가 귀에 들려왔다.

“진옥룡. 십팔나한진이 그대에게 파훼되었음을 인정하네. 무림맹에서 수련할 때조차 대단한 살기를 발산했다더니 명불허전이군.”

“……네?”

이제 시작이건만, 뭐가 어째?

정광이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계속하기로 한 약조였다.

그래서 그 점을 짚으려는 순간.

불존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게다가 큰 상처 없이 꾸짖기만 하다니. 네가 불민한 원굉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구나.”

“……네?”

“그걸 제대로 깨치느냐는 원굉의 몫. 너무 겸손할 필요는 없느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광에게 겸손이라니.

백승무와 자오는 이 놀라운 싸움보다 불존의 말에 더 놀랐다.

‘……사형이 겸손?’

‘……생각하면 안 돼.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이 두 사람보다 더 놀란 건 정광이었고.

‘아니, 대체 무슨 헛소리야?’

그때, 원굉을 제외한 나머지 실 칩 명의 나한들이 감탄하면서도 고마운 얼굴로 반장을 했다.

지고 이기고를 떠나 양측에 큰 피해 없이 싸움을 종식시킨 정광의 무위와 성품의 정명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의지라니, 이런 무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를 인정하겠는가.

“아미타불. 진옥룡, 그대의 자비에 감탄하였소. 그야말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하구려.”

“실로 놀라운 무공과 너른 마음씨였소이다.”

“역시 소문이란 건 믿으면 안 된다더니. 빈승은 오늘 크게 탄복했소.”

정광은 입만 뻐끔거렸다.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는데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기껏 올라왔던 흥이 식어버리다 못해 꺾여 버렸다.

그런 정광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방장이 입을 열었다.

“나한들은 원굉을 데리고 물러나게. 진옥룡, 자네는 나와 얘기 좀 하세.”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었건만.

방장은 정광을 끝없이 칭찬하며 선문답을 던져댔다.

불존도 합세했는데 정광으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그래서 대충 대답했다.

“그런 어려운 거 모르는데요.”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하늘이 있든 없든 내 할 일이나 하면 되죠.”

“근데 언제까지 이래야 해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뭔가를 생각하며 ‘아미타불’을 중얼거리던 두 노승은 그제야 정광을 놔줬다.

“사람을 붙여줄 테니 현오에게 가보게. 탈진해 쓰러지면서도 자네를 기다리겠다고 하더군.”

정광은 한 승려를 따라 현오의 암자로 갔다.

백승무와 자오도 함께했음은 물론이다.

정광 홀로 암자에 들어가자 누워 있던 현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고 있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