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불쾌했던 것들 중 하나
‘소림 방장이라…….’
정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겉으로 보기엔 꼿꼿한 노승이었을 뿐이지만, 품고 있는 기운이 범상치 않아서였다.
‘불존 정도 되려나.’
십존에 포함되지 않은 자이건만, 이런 기운을 가지고 있다니.
‘다들 소림 소림 하더니 과연.’
방장만이 아니었다.
무림맹에 모인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의 무인들은 각 문파와 가문이 엄선해서 파견한 고수들이다.
헌데 소림에서 지나다니며 본 승려들 중에는 그 정도 경지에 이른 이들이 허다했다.
‘두터움이 다르구나.’
돈 많은 절이라 그런지 머릿수가 많고, 그만큼 고수도 많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사문인 곤륜이 떠올랐다.
‘이거 너무 비교되네.’
찢어지게 가난하다가 정광이 입문한 뒤로 그나마 나아진 곤륜이다.
허청에게 제법 많은 재물을 맡겼으니 좀 나아지려나.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그간 새로 정립한 무공을 다들 익히느라 미루고 있었지만, 정 자 배도 제자를 받아야 할 때지.’
예전의 곤륜이 아니다.
명성도 높아졌겠다, 돈도 많아졌으니 똘똘한 녀석들이 꽤 모일 터.
보나 마나 운 자 배가 심성이 어떠네 하며 대부분 떨어뜨리겠지만, 전보단 훨씬 많은 제자를 건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녀석들은 처음부터 새로 정립된 멋지고 우아하면서도 강한 곤륜 무공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정광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곤륜도 머릿수만 늘어나면 이 정도야 뭐.’
정광은 대충 생각을 정리한 뒤 예의 있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방장님. 곤륜의 정광이 인사드립니다.”
방장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으나 말투에는 예가 담겨 있었다.
“반갑네, 진옥룡. 노납은 현죽일세. 자네와 나누고 싶은 말이 무척 많다네.”
“말씀하세요.”
“먼저 자네의 오해를 좀 풀어야 할 것 같군. 만약 본사가 황실이 내린 혜택을 거부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정광이 어제 소작농 마을에서 했던 말을 전해 듣고 해명하려는 것일까.
사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답은 뻔했으니까.
“둘 중 하나겠죠.”
“한번 말해보겠나.”
“소림이 피에 잠기던가. 다른 문파들이 대신 혜택을 받아내려고 경쟁을 하다못해 난리를 치던가. 그렇게요.”
“내 생각과 비슷하군. 그런데 앞의 가정은 무리가 있지.”
“그렇죠. 황제가 바보거나 미치지 않은 이상 민심을 잡진 못할망정 등을 지진 않을 테니까요.”
방장의 부리부리한 눈이 빛났다.
“자네, 말을 좀 주의하는 게 좋겠어.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만 조금만 더 조심하게.”
“네? 황제가 바보, 미치지 않은 이상, 이런 거요?”
“……어제 원굉에게 말할 때는 마을 시주들이 못 듣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들었네. 지금은 왜 그러나?”
“그분들이야 아무 생각 없이 얘기하다가 횡액을 당할 수도 있지만, 방장님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실 테니까요.”
“……자네도 사람을 대하는 기준이 좀 다르군.”
정광이 어깨를 으쓱하자 방장의 눈매에 주름이 잡혔다.
“좋은 쪽으로 말일세.”
정광이 ‘그렇죠’라고 답하려는데 방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만 아까의 얘기로 돌아가세나. 본사가 황실의 혜택을 거부했으면 무림에 큰 분쟁이 생겼겠지. 결국 어느 문파가 받게 되었다 하더라도 본사나 무당만큼 자중할 수 있었으리란 법도 없었을 걸세.”
“곤륜은 되는데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황실에서 곤륜에게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와. 아파라.”
“좋군.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세. 본사가 현 황조를 비난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소림 멸문(滅門)요. 아주 풀뿌리 하나, 머리털 하나 안 남을 정도로…… 아. 원래 없으시지. 어쨌든 싹 다 밀어버렸겠죠.”
“……방금은 미안했네. 그래도 표현이 좀 과하지 않나.”
정광이 씩 웃자 방장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어쨌든 민심을 다독여야 할 상황이었다 해도 그보다 중요한 건 새로운 황조의 권위를 세우는 것. 본사를 쳐서 본보기로 삼았을 게야. 중원에 사찰은 많고도 많으니 말일세.”
“많은 피를 흘리기 싫어서 황실을 꾸짖진 않았다, 이 말씀이시네요.”
“그렇지. 하지만 또 다르네.”
“네?”
방장의 부리부리한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의 이유로 결정되지 않지. 그 일도 마찬가질세. 제일 큰 건 천 년 가깝게 이어져 내려온 소림이 화마에 휩싸이는 게 두려워서였을 게야.”
정광은 살짝 놀랐다.
“솔직하시네요.”
“그 이유 외에는 할 말이 없어서 그랬을 뿐일세.”
방장은 작은 탄식을 뱉은 뒤 말을 이었다.
“현오 사제가 자네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다더군. 해가 뜨자마자 노납을 비롯한 현 자 배에게 열변을 토했네. 우리가 무엇이 잘못됐고 어찌해야 하는지. 어제 자네가 했던 일들도 말일세.”
“아. 그러고 보니 안 보이시네.”
“탈진해서 몸져누웠지.”
“그래서 답이 나왔나요?”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있나. 그래도 모두의 마음속에 화두가 심어졌을 걸세. 우선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보려 하네. 아미타불. 승려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작은 것이라 하다니. 내가 아직도 헛된 곳에 앉아 내려오질 못하고 있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방장은 눈짓으로 불존을 가리켰다.
“사형과 일부 제자들이 산을 내려가 탁발(托鉢)을 할 걸세. 시주들과 섞여 지내다 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고 할 수도 있게 되겠지.”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그 전에 무림에 알릴 걸세. 본사가 강호의 이권을 탐해서 이러는 게 절대로 아님을 말이야.”
정광이 불존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아뇨. 소림 말고 보시를 해주실 시주분들이 괜찮으시겠느냐고요. 불존 어르신, 엄청 많이 드시던데.”
“…….”
“그리고 그런다고 다른 문파들이 이해해 줄까요? 이것저것 트집을 잡을 텐데요.”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닐세.”
“무슨 일 있나요?”
“무림맹을 비롯한 이곳저곳에서 소식이 날아오고 있네. 사마련이 중원 곳곳에서 정도문파에게 싸움을 걸고 있다더군. 작은 싸움은 벌써 몇 번 벌어졌고.”
“어라. 몰랐네요.”
“자네는 하북성과 산서성에 있다가 왔지 않나? 하북성이야 황궁이 있으니 자중하는 것 같네만…….”
방장은 하북팽가를 노리던 상소운과 그의 수하들이 정광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걸 몰라서 한 말이었다.
“……산서성만 하더라도 사마련의 분타가 들어섰다네. 먼저 흑도문파들을 일거에 밀어낸 뒤 석가장(石家莊)을 압박하고 있다는데…… 자네도 경험해 본 일일 걸세.”
이번 말은 맞았다.
정광의 머릿속에 혈혼방이라던 흑도문파가 떠올랐다.
‘다른 흑도가 아니라 사마련한테 쫓겨나서 대동현으로 온 거였구나.’
뭐 그러던가 말던가.
사마련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미쳤다 해도 쓸모없는 청해성까지 기어가 곤륜을 칠 리는 없다.
무림맹에 있는 곤륜 도사들도 역시 마찬가지.
무림맹에 예비대로 거하고 있으니 정말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이 나설 일은 없지 않은가.
“말씀 끝나셨나요?”
“…….”
“이제 가도 되죠?”
정광은 엉덩이를 들다가 멈춰 버렸다.
방장의 말 때문이었다.
“자네가 현오 사제에게 큰 도움을 줬으니 뭔가 보답을 해야겠지.”
“그럼요. 그게 세상의 이치죠.”
방장은 불존을 눈짓하며 말했다.
“사제가 자네에게 뭔가를 주기로 했다지? 내가 대신 주겠네. 무얼 원하는가?”
정광의 눈이 빛났다.
아무래도 불존보단 소림의 우두머리인 방장이 더 큰 것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정광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청했다.
“장경각(藏經閣) 구경 좀 시켜주세요.”
“그건 안 되네.”
“조금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주시지.”
“그럴 건이 아니지 않은가.”
방장의 말대로였다.
장경각은 소림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달마역근경(達魔易筋經)과 소림칠십이종절예(少林七十二種絶藝)의 원본은 물론, 지금껏 징치해 온 마두들의 마공까지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선종(禪宗)의 대표적인 사찰답게 귀한 불경과 고서들이 있었기에 함부로 개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정광도 이 사실을 알았다.
‘좋아. 한 번 거절했으니 이번 것은 거절 못 하겠지.’
전생에서 들었던 말 중에서 무척이나 불쾌했던 것들 중 하나.
진천마였던 그라 하더라도 그것 앞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을 거란 소문이 돌던 것.
그것을 박살 내버리는 거다.
정광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을 상대하게 해주세요.”
* * *
당연히 거절당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정광이 약해 보인다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백팔나한진을 운용하려면 소림사를 탈탈 털어도 힘들다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럴 만했다.
백팔나한진은 소림은 물론 강호 전체를 뒤져봐도 짝이 없을 정도의 절진(絶陣) 아닌가.
그 엄청난 규모의 진을 이해하고 펼칠 수 있는 고수를 백팔 명이나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리라.
하지만.
‘그거야 소림 사정이지.’
정광의 무공도 완전치 못한 상태였다.
양쪽 다 그러니 너무나 공평한 상황.
그냥 붙게 해달라고 말하려는데 방장이 다른 제안을 했다.
“억지로 펼칠 순 있지만 그래선 요체를 드러내기 힘드니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을 상대해 보는 건 어떤가? 어차피 백팔나한진은 십팔나한진 여섯 개를 연계해서 펼치는 것이니 큰 차이는 없을 걸세.”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백팔에서 십팔로 줄어드니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인데.’
그래도 요체를 볼 수는 있을 거란다.
‘그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십팔나한진의 요체를 훔쳐낸 뒤 깨부수는 거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묘수!
‘잠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절진이잖아. 꽤 신묘해서 시간이 좀 걸리지는 않을까?’
해결할 방법은 있었다.
정광은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그럼 제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계속 상대하게 해주세요.”
“……이상한 단서를 다는군. 묘한 소문이 떠오르는구만.”
“어떤 거요?”
“자네는 한 번만 싸워보면 상대 무공을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던데…… 사실인가?”
“아뇨.”
정말 아니었다.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깨닫는 것이었으니까.
잠시 정광을 바라보던 방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은 아닌 것 같군. 하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헌데 왜 나한진을 상대하려고 하는 건가?”
정광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훔치려고 하는 이유는 쏙 빼고.
“십팔나한을 전부 다 깨려고요.”
“……!”
방장의 큰 눈이 가늘어졌다.
‘……깬다고?’
보통 사람이라면 분노했겠지만 그의 수양은 깊었다.
아니, 깊다 못해 너무 깊어서 다른 의미를 추론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사제들에게 들은 말들과 그가 직접 확인한 정광이 보통 도사가 아니었던 탓도 컸다.
‘진옥룡이 아무리 광오하다고 하나 나한진을 가벼이 여길 리는 없다. 가만. 진이 아니라 십팔나한을 깬다 했지. 설마……?’
십팔나한은 소림을 대표하는 무승.
그들의 굳어버린 생각을 깸으로써 소림의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야 그렇다 쳐도 대체 어떤 방법으로? 짐작이 가지 않는구나.’
정광은 십팔나한의 대가리 하나하나를 전부 다 깨겠다고 한 말이었지만 방장에겐 혼란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유야 뭐가 됐든 이미 약조한 것. 제대로 한번 지켜봐야겠군.’
방장은 무거운 얼굴로 승낙했다.
“그렇게 하세.”
“감사합니다.”
이로써 정광은 소림이 자랑하는 십팔나한진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백승무와 자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사형. 괜찮으시겠습니까?
-진옥룡. 십팔나한진은 절진 중의 절진입니다.
정광은 쉽게 답했다.
-그러니 해야죠.
-……?
-나는 물론 사제와 자오에게도, 본문에도, 꽤 도움이 될 거예요.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승려들이 나타났다.
모두 열여덟 명.
한 명, 한 명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기운을 조금이나마 느낀 백승무가 그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단하구나. 당대의 십팔나한(十八羅漢)인가…….”
곤륜으로 치면 허 자 배의 배분인 원 자 배의 승려들이다.
그중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정광이 헛웃음을 지을 만큼.
‘하. 저 양반. 뼈마디가 좀 단단해 보이더니, 십팔나한의 일원이었어?’
바로 원굉이었다.
“스님. 또 뵙네요.”
“……아미타불. 반갑네.”
표정은 전혀 아닌데 말은 그렇단다.
덕분에 정광은 의욕이 솟았다.
그도 원굉이 마음에 안 들었다.
서로가 싫어하니 마음껏 패주면 되는 것이다.
정광이 씩 웃자 원굉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마교의 진천마가 살아 돌아와도 백팔나한진을 상대하겠다는 말은 못 할 것이거늘…….”
이미 환생으로 돌아와서 했는데.
‘뭐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지.’
대신 정광은 몸으로 말해줄 생각이었다.
“시작할까요?”
방장과 불존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존의 입이 열리며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한(羅漢)들은 십팔나한진을 펼쳐라!”
열여덟 명의 승려가 순식간에 정광을 에워쌌다.
동시에 강대한 압력이 그를 짓눌렀다.
정광은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머리를 긁었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겠는데?’
그래.
그쯤은 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