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17화 (117/569)

117화

수고하세요

소림사의 원 자 배는 근래 들어 곤륜의 허 자 배처럼 소림을 이끌어 나가게 된 배분이었다.

강퍅하게 생긴 중년의 승려 원굉이 거기에 속했다.

그는 소림을 대표하는 무승(武僧)인 십팔나한(十八羅漢)의 일원이었으며 불심도 깊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완벽하다 할 수 있는데, 그도 물론 사람인지라 단점이 있었다.

약간 옹졸하다는 것.

그게 오늘 제대로 드러났다.

“쯧쯧. 이런 불필요한 살생을 하다니…….”

사숙인 현오의 신물을 가져온 이의 말을 듣고 소작농들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그였다.

이곳에 도착해 현오에게 모든 사정을 듣고, 산으로 향해 범을 멀리 쫓아 보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정광이 불필요한 살생을 해버린 것이다.

그의 기준으론 그릇된 일인지라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을 뿐이건만.

돌아온 건 황당한 대꾸였다.

“일은 다 끝났는데, 불필요하게 오셔서 불필요한 말씀을 하시네요.”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 불필요하다고?’

그리고 곧 깨달았다.

눈앞의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청년 도사는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자라는 것을.

‘곤륜의 진옥룡, 진옥룡 하더니 과연. 그야말로 천방지축이로구나.’

조금 전 현오에게 듣기론 지극한 도를 가진 도사라 했건만.

역시 안 좋은 소문들이 사실인 것 같았다.

‘사숙께선 왜 그리 좋게 말씀하셨을까. 이유 없이 그럴 분이 아닌데.’

원굉은 옆을 힐긋 봤다.

현오는 담담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군.’

이는 알아서 하라는 무언의 허락.

원굉은 정광을 직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빈승(貧僧)은 소림의 원굉이라 하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진옥룡을 만나게 되었구려. 반갑소이다.”

정광은 두 손을 모으며 답했다.

“무량수불. 안녕하세요. 제 사부님과 같은 배분이시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원굉은 살짝 놀랐다.

방금까지는 말을 막하다가 이런 부분에서는 예의를 차리다니.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나마 최소한의 기본은 갖춘 것일지도 모르겠군.’

단지 그것뿐, 그 외에는 모두 엉망이다.

‘아까의 말은 나보고 들으라 한 것이렷다.’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실로 무례한 자 아닌가.

자연히 정광을 향한 그의 목소리도 그리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그럼 말을 편히 하겠네.”

“네.”

“하나 물어봐도 되겠는가?”

“네.”

“불필요하게 와서 불필요한 말을 했다 했지? 그게 무슨 의미인가?”

원굉은 그래도 뭔가 다른 뜻이 있겠지, 이렇게 짐작했다.

하지만 정광의 말은 말 그대로였다.

“그냥 안 오시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말씀드린 건데요.”

“……안 오는 게 나았다?”

“그냥 산에 계시는 게 낫죠. 뭐 하러 굳이 멀리까지 오셔서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을 하세요.”

“……불필요한 살생을 했다 한 것이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할 일인가?”

정광은 자오가 짊어진 지게에서 범의 거대한 앞다리 뼈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범이 이걸로 스님 뒤통수를 후려쳐도 그런 말 하실 수 있으세요? 아. 스님은 피하신 뒤 주먹질을 하시겠지. 무공을 모르는 분들을 말하는 거로 바꾸죠.”

“…….”

“원래는 여기에 살집 많이 달려 있어서 엄청 무거워요. 위력도 그만큼 더 세고요.”

“…….”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도 달렸죠. 스치기만 해도 살가죽은 물론 뼈까지 패일걸요.”

“…….”

“이놈, 미친 범이었어요. 이분들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정도로. 그래서 죽였습니다. 무량수불. 필요한 살생이죠. 불필요한 건 스님이고요.”

“……그러니까. 내가 불필요하다?”

“네.”

천하에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있나!

소문이 오히려 너무 축소된 것 아닌가!

이건 불심으로 막을 수 있는 화가 아니었다.

원굉이 입을 열어 호통을 치려는데, 정광의 말이 더 빨랐다.

“지금 화내시려는 거죠?”

“……!”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

정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소림승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당금(當今)의 황조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개국공신들을 처단하고 억울한 죽음을 많이 만들어냈잖아요. 그런데 주는 혜택은 다 받으시고 왜 꾸짖지는 않으신 거죠? 소림에서 보기에 그것들은 살생이 아닌가요? 오래전 일이라지만 지금도 성토할 만큼 큰일인데요.”

“……!”

이 엄청난 말에 현오를 제외한 모든 소림승들이 입을 떡 벌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원굉이 어떻게든 반박해 보려고 할 말을 정리하는데, 정광은 이미 멀찍이 떨어져 있는 소작농 옆에 가 있었다.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태도에 원굉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굳어버렸다.

그가 그러건 말건, 정광은 소작농에게 할 말을 했다.

“도우(道友)님. 솥 좀 내와 주실래요.”

“……!”

졸지에 소림사의 소작농을 도교 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정광이었다.

나이 든 소작농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늘같은 소림의 고승에게 폭언을 퍼붓질 않나, 자신에겐 난데없는 말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우님?”

“아! 네. 네. 소, 솥이요?”

“네. 한 대여섯 개면 되겠네요.”

“……죄송하지만 무슨 연유로…….”

노인이 조심스럽게 묻자 정광은 자오가 지고 있는 지게를 가리켰다.

“범 고기 삶으려고요. 상하기 전에 빨리 드셔야죠.”

“버, 범 고기!”

노인이 비록 일자무식이었으나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알 건 알았다.

‘범 고기라니! 그런 귀물을 우리 같은 것들에게 주신다고?’

범은 산군(山君)이라 불릴 만큼 신령스러운 존재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도 버릴 게 없었는데, 가죽과 뼈에는 못 미치지만 고기 역시 대단한 가치를 자랑했다.

‘기력을 북돋고 구토와 학질을 가라앉힌다 했지.’

뿐이랴.

잡귀를 물리치고 범 고기를 먹은 이는 거침없이 산을 돌아다닐 수 있다 했다.

범 고기를 먹으면 산의 모든 짐승은 물론 다른 범들조차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노인이 비록 불학무식(不學無識)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믿지는 않았다.

그래도 범 고기다!

최소한 기본은 할 것 아닌가!

노인은 재빨리 ‘알겠습니다요!’ 하고 외치려다 멈칫했다.

‘……소림의 고승들께서 계신데 이래도 되는 걸까?’

정광은 노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는 걸 보고 속내를 짐작했다.

“저녁 먹는 게 뭐 어때서요.”

“……그래도…….”

“이러다 해 지겠네. 잠시만요.”

정광은 몸을 돌려 현오에게 말했다.

“선사님. 저희 저녁 먹을게요. 같이 드실래요?”

현오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민초들을 위하는 정광의 마음이 기특하기 그지없어서였다.

“현오 선사님?”

“아.”

현오는 그제야 정광이 자신을 부른 것이란 걸 알아챘다.

원굉과 다른 사질, 사손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나서지 않고 있었지만, 자신을 지목해서 물었으니 대답해야 했다.

“고맙다만 사양하마.”

“범 고기인데요?”

“허허. 불제자로서 어찌 고기를 탐하겠느냐.”

“아니, 점심때까지만 해도 잘…….”

“아미타불! 네가 세 마리나 잡아 왔으나 여기 계신 시주가 몇 분이더냐. 배 불리는 못 드실 게다.”

“음. 그건 그렇죠.”

“그래. 그러니 맛있게 먹거라.”

“네, 선사님.”

정광은 다시 몸을 돌려 노인과 말을 나눴다.

여전히 입을 딱 벌린 채 상황을 지켜보던 원굉이 현오에게 물었다.

“사숙.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무슨 말이냐? 우리가 여기 있으니 저들도 육식을 금해야 한다는 게냐?”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내겐 그렇게 들리는구나.”

“……죄송합니다. 소질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너는 아직도 모르고 있어. 저들을 보거라.”

현오의 책망에 얼굴이 붉어진 원굉은 정광과 사람들을 바라봤다.

“왜 계속 안 된다 하세요? 선사님도 괜찮다 하셨는데.”

“그, 그래도 고승들께서 계신데 저희가 어찌 감히…….”

정광이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 남의 체면보다 여러분 몸부터 귀하게 여기셔야죠.”

“……네?”

“어르신. 허리가 아프고 무릎도 결리죠? 잔기침도 많고 조금만 움직이셔도 숨이 차고요.”

“그, 그걸 어떻게?”

원래 노인의 나이쯤 되면 다 그랬다.

그래도 정광의 빛나는 외모 때문에 마치 신선이 신묘한 수로 몸을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르신은 그냥 참으신다 쳐요. 얘들은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아, 아이들이요?”

“고기 자주 못 먹이죠?”

자주 못 먹이는 게 아니라 거의 못 먹였다.

비록 소림의 배려로 다른 소작농들보단 윤택한 삶을 살고 있었으나 그래 봐야 가난한 민초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고집 그만 부리시고 애들을 보세요. 딱 봐도 피골이 상접한 게 이러다 큰일 나겠네.”

노인은 물론 주위에서 숨죽이며 듣고 있던 모두가 아이들을 바라봤다.

피골이 상접하긴 커녕 소작농의 자식들이라는 게 안 믿어질 정도로 살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모든 부모의 눈엔 자식이 말라 보이고 안쓰럽기 마련.

여기저기서 한탄하는 목소리와 나직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크흑…… 애비가 못 나서…….”

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으며 한탄하는 사내.

“으흐흑. 엄마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이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여인.

장내는 순식간에 슬픔에 잠겼다.

이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은 정광은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고기 먹고 싶지?”

평소 없던 이상한 일에 어리둥절해 하던 아이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리고 힘찬 대답이 터져 나왔다.

“네!”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들으셨죠? 얘들이 원하고 있어요. 어서 하죠.”

사람들은 눈물을 닦은 뒤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허리를 숙였다.

정광에게 극진한 예를 취한 것인데, 노인이 대표로 감사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선님.”

사람들에게 정광은 신선이었다.

두려운 범을 반나절 만에 세 마리나 잡아 오질 않나, 그 귀한 고기를 그냥 주질 않나, 이런 이가 신선이 아니면 누가 신선이겠는가?

물론 정광은 손사래를 쳤지만.

“신선 아니래도요. 사제. 자오. 이리 와서 도와줄래요.”

“네! 사형!”

“맡겨주십시오! 진옥룡!”

백숭무와 자오는 힘차게 대답한 뒤 사람들을 도왔다.

정말로 기쁜 마음으로.

“자. 자. 놓겠습니다!”

쿵.

마을 공터에 큰 솥들이 놓였다.

범 고기로 가득 채워진 솥들이 진한 고기 향을 내며 팔팔 끓었다.

날카로운 눈과 코로 시기를 가늠하던 정광이 선언했다.

“그만! 이제 드시면 됩니다!”

“와아아아!”

다들 솥에 달라붙으려는데 정광과 얘기를 나눴던 노인이 제지했다.

그리고 정광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만 먹어서 죄송합니다.”

곧 다른 사람들도 노인과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

정광이 어디 보통 도사던가.

“제가 같이 안 먹으면 고기가 잘 안 넘어갈 것 같아서 그러시죠?”

“네? 아. 비, 비슷합…….”

“그러면 안 되죠.”

정광은 솥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여러분을 위한 일이니 원시천존께서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자. 먹죠, 어서.”

정광이 국자로 솥 안을 크게 젓자 고기 냄새가 폭발하듯 흘러나왔다.

정광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대체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던 사람들은 생각의 끈을 놓아버렸다.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맛있는 편은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소신선님!”

사람들은 열심히 고기를 뜯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안색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범이라 당연히 질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럽구나!’

‘시큼한 맛이 좀 나는데 불쾌할 정도는 아닌걸? 중독되는 풍미야.’

정광의 말과 달리 무척 맛있었다.

민초들의 기준은 정광과 달랐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사제. 자오. 뭐 해요? 같이 먹어야죠.”

두 사람은 난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정광의 옆에 앉았다.

기분 좋은 일을 해서 그런지 고기도 맛있게 넘어갔다.

공터에선 맛있다는 감탄과 함께 즐거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한편, 원굉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복잡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는 그뿐만이 아니라 함께 온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중에는 정광을 이미 겪어봤던 공우도 있었다.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황제에게는 안 하고? 아미타불. 나와 소림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건가…….’

현오는 뒷짐을 진 채 사질과 사손들을 훑어봤다.

‘조금이나마 느꼈으려나.’

이번 일로 삽시간에 바뀔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직접 보고 느낀 만큼 마음속에 화두로 심어졌을 터.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천천히 가더라도 꾸준하게 가는 거다.’

현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원굉에게 말했다.

“그만 가세나.”

“……사숙. 저희도 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겠나? 어디 한번 말해보게나.”

“…….”

할 말이 없었던 원굉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현오를 업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부끄러움과 함께 화가 솟았다.

‘도사 된 이가 화식은 물론 육식까지 즐기다니…….’

정광이 지적한 문제는 무척이나 날카로워 반박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광의 행실에 대한 못마땅함이 이상하리만치 커져갔다.

그의 등에 업힌 현오는 정광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오후쯤에 소림으로 오너라!”

“먼저 가시게요?”

“그래! 내가 할 일이 좀 있구나!”

정광으로선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소림보다는 이곳 밥이 나을 테니.

“네! 그럼 수고하세요!”

“수고? 흘흘흘.”

현오는 원굉에게 업혀 가는 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 땀 좀 흘려보마.’

그는 정광의 말대로 수고를 좀 해볼 참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소림을 위해서.

그리고 정광을 위해서.

* * *

다음 날 아침, 소작농들에게 극진한 감사의 예를 받은 정광 일행은 정주현 중심부로 나가 호피와 호골을 팔았다.

흥정하는 백승무 옆에서 자오가 알아서 분위기를 잡아줬기에 적정한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한 정광 일행은 소림사로 향했다.

그리고 산문을 넘자마자 의외의 인물에게 안내되었다.

대나무처럼 꼿꼿한 몸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노승이었는데, 옆에 있던 불존이 담담하게 소개해 줬다.

“인사드려라. 방장(方丈)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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