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사바세계(娑婆世界)
현오는 자신이 그린 작품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허어. 침도 흘렸군.’
조심스레 눈동자만 굴려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소매로 침을 닦아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나이에 웬 주책인지.’
그래도 좋았다.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행동한다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근래 들어 가끔은 후회가 됐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현오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미타불. 이렇게 재밌게 느껴지진 않았겠지.’
그저 약간의 아쉬움만 있을 뿐, 지난 삶을 후회하진 않았다.
앞으로 얼마 안 남은 생.
무료할 때마다 치병에 걸린 척하며 자유를 맛보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그런데 어디에 가신 걸까?’
현오는 불존을 떠올렸다.
치병이 도진 것처럼 행동할 때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사형이었다.
거짓 치병이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티를 내지 않고 배려해 주고 있었다.
‘거참. 서로 상대가 알고 있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이러다니.’
오늘 역시 마찬가지.
사형이 자신의 건강과 마음을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고맙소, 사형. 소싯적에 내가 춘화를 그리는 걸 어르신들께 일러바쳐 참회동(懺悔洞)에 갇히게 했던 일은 없어진 거로 칩시다.’
분명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다.
사형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그랬을 뿐이고.
‘흘흘. 그때는 참 많이도 원망했었지.’
사형은 그를 달래느라 비지땀을 흘렸었다.
세월이 흐르며 하나의 추억이 된 일이었지만, 사형은 어쩌다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미안해했다.
‘이제는 안 그래도 되는 것을…….’
사형은 사람이 너무 착했다.
‘……그에 비해 그 녀석은……’
진옥룡이라 했던가.
무척 잘생긴 도사 녀석.
외모와 옷차림은 그랬지만 그 심성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녀석이 항마주를 차고 소림에 올 줄이야.
처음엔 사형이 데려온 손님이겠다, 그냥 알려주려 했건만.
대화를 좀 나누다 보니 알려줘도 될지 회의감이 들었다.
사형의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항마주는 위험한 귀물 아닌가.
그래서 치병에 걸린 척하며 며칠 더 지켜보기로 한 현오였다.
‘그나저나 어찌 됐을까.’
현오의 집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춘화에 몰입해 있었기에 뒷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사형이 녀석을 데리고 나가 달래고 있는 건가.’
그때, 문이 열리며 사형과 진옥룡이 들어왔다.
‘달래고 자시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나 보군.’
사형의 안색은 불안했고, 진옥룡이란 녀석은 뭔가 불만이 있어 보였다.
‘어떤 얘기를 나누었기에?’
현오의 궁금증을 불존이 풀어줬다.
“사제.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게나.”
“……?”
현오는 치병에 걸린 척하고 있었기에 궁금해도 물어볼 수 없었다.
“진옥룡…… 별호로 계속 부르기 그렇군. 이 아이의 도호는 정광일세. 자네를 도울 게야.”
“……!”
무슨 이런 느닷없는 말이 있나.
바람을 쐬는 거야 좋다만, 하필이면 저 녀석과?
현오의 황당함은 더 커졌다.
정광이 그를 번쩍 업은 것이다.
“어르신, 그럼 다녀올게요.”
“아까 했던 말, 반드시 명심하거라.”
“그럼 이만!”
현오는 갑자기 몰아치는 광풍(狂風)에 눈을 꼭 감았다.
‘가, 갑자기 웬 바람이!’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세찬 바람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연유인지 깨닫기도 전에 멈춰 버리는 것 아닌가.
‘……끝난 건가?’
살며시 눈을 뜬 현오는 주변 풍경을 확인하고 입을 벌렸다.
‘이, 이곳은 참배객들이 거하는 곳인데…… 대체 어떻게 온 것이지?’
현오의 암자와 이곳은 상당히 먼 거리였다.
그런데 바람 한번 맞고 나니 도착해 있다?
‘이 정광이라는 녀석. 대단한 고수구나.’
정광은 현오를 업은 채 크게 말했다.
“사제, 자오. 좀 나와봐요.”
문이 열리며 곱상한 귀공자와 평범한 중년인이 나왔다.
현오를 발견하고 멈칫하던 그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사, 사형. 업고 계신 분은 누구신지…….”
“진옥룡. 소인 자오, 명하신 대로 나왔습니다.”
정광은 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소림의 고승이신데 너무 어릴 때 절에 들어오셔서 세상을 못 보셨대요. 선천적으로 병약하셔서 평생 단 한 번도.”
“아아. 이런 안타까운 일이…….”
“무엇이든 명하십시오, 진옥룡.”
정광은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속세를 얼마나 꿈꾸셨으면 치병에 걸리신 와중에도 춘화(春畵)를 그리실까.”
“……!”
“그것도 삼도천을 건너시기 직전이신데 말이야.”
“……!”
“아. 주책이라고 비난하지 마세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줍시다.”
순간 현오는 정광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려다 간신히 참았다.
황당하다는 듯, 정말 불쌍해서 미치겠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 때문이었다.
“불존께서 세상 구경 한번 시켜 드리라고 하시더라고요. 이왕 하는 거, 며칠 정도 제대로 시켜 드려야겠죠? 협행 한번 합시다.”
“지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백승무가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오는 이미 방으로 뛰어 들어가 봇짐을 메고 있었고.
“사제도 빨리해.”
“아, 알겠습니다, 사형.”
백승무도 재빨리 짐을 챙겼다.
정광의 등에 업힌 현오는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어차피 치병에 걸린 척하고 있어서 반응을 보일 수도 없었지만.
정광이 선언했다.
“최고로 모셔야 해요.”
“네, 사형.”
“물론입니다, 진옥룡.”
백승무와 자오는 힘차게 대답한 뒤 신법을 펼쳐 사라졌다.
“좋아. 나도 할 일을 해야지.”
정광은 방으로 들어가 현오를 의자에 내려놨다.
현오는 의외의 상황에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뭘 하려고?’
정말 의외였다.
정광은 침상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시늉이 아니었다.
기분 좋은 꿈을 꾸는지 헤실거리기까지 한다.
‘……천하에 이런 황당한 놈이 있나…….’
하도 어이가 없어 가만히 지켜보길 한 시진.
정광이 눈을 번쩍 떴다.
“흐아암. 지금쯤이면 다 됐으려나.”
침상에서 내려온 그는 주섬주섬 봇짐을 싸더니 현오의 어깨에 멨다.
‘……이건 또 무슨 짓?’
그리고 현오를 업었다.
“그럼 갑니다.”
어딜?
순간, 아까 경험했던 미친 광풍이 불었다.
현오는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감고 있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돌아갔다.
광풍은 더 거세졌고, 이는 정광이 더 빠르게 달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현오는 숨이 막히다 못해 넘어갈 지경이었다.
‘더, 더는 안 돼! 사, 살려…….’
살려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비참한 열반에 들 것 같아 눈물이 나오려는 그때!
엉덩이가 따뜻해졌다.
‘……이건?’
그를 업은 정광이 그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두 손으로 내공을 밀어 넣고 있었다.
‘……따뜻해…….’
세 살에 여의어 얼굴조차 기억 안 나는 어머니의 내공 운용이…… 손길이 이랬을까.
엉덩이에서 시작된 따스함은 그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정광의 내공은 그의 기맥(氣脈)을 어루만져 편하게 하였다.
자연히 호흡까지 편해질 수밖에.
현오는 그도 모르게 눈을 떴다.
놀라운 광경이 그의 두 눈을 가득 채웠다.
‘이럴 수가!’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게 아니었다.
현오는 정광에게 업힌 채 절벽 사이로 날듯이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남이 만든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여는 질주!
현오는 놀란 눈으로 정광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더한 고수로다! 진옥룡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별호로 불린다더니 과연! 이 나이에 이런 경지라니…….’
소림사의 최고수이자 사형인 불존이라면 가능할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현오는 비록 무공을 익히진 않았지만 보는 눈은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림의 학승(學僧)은 불경만 연구하는 책벌레라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달랐다.
그들은 불경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소림 무공을 이론적으로 탐구했다.
그런 학승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소림 무공은 체계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현오는 그런 학승들 중에서도 뛰어난 이였기에 짙은 의혹을 느꼈다.
‘……이건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천재라고 될 일이 아닐 터인데.’
누구나 정광을 보면 그런 생각을 했지만 현오의 생각은 좀 달랐다.
‘하늘이 이런 이를 내려보낸 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일 터. 대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려고…….’
현오의 멍했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멍한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어느새 대로에 내려선 그들 앞에 아까 봤던 백승무와 자오가 깍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사두마차(四頭馬車)와 함께.
‘……설마?’
예상대로였다.
백승무와 자오가 한 입으로 말했다.
“마차를 준비했으니 오르시지요.”
“…….”
현오는 하도 어이가 없어 치병을 연기할 필요도 없이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렇게 비싼 마차를 언제? 여기에 오르라고?’
뭐 이런 말도 안 되게 과분한 일이 있나.
그런데 정광은 불만이었나 보다.
“사제. 사제라면 알아서 팔두마차(八頭馬車)쯤은 준비해 놨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사형. 시간이 없어 이것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사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르신, 좀 좁지만 참으시죠.”
“…….”
들어가 보니 좁기는 무슨.
넘칠 정도로 넓지 않은가!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이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았다.
‘……자오라 했나?’
경험이 많은지 마차는 무척 부드럽게 굴러갔다.
사두마차를 홀로 차지한 현오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각각 말을 한 필씩 탄 정광과 백승무가 마차의 앞뒤에서 호위하고 있었다.
‘왜 이런 사치를…….’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이건 사치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걸 현오는 알지 못했다.
* * *
백승무와 자오는 모든 것을 최고로 준비했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정주현(鄭州縣)에서 제일 큰 포목점이었다.
화려한 사두마차가 서자 포목점 주인이 나는 듯 뛰어나왔다.
재신이 방문했다는 걸 직감해서였다.
“소신선께서 와주셨군요! 삼생(三生)의 영광이옵니다! 본 포목점은 정주는 물론 천하 최고의 원단을 매입하여 최고의…….”
주인의 말은 길었지만 정광의 주문은 짧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부탁드려요. 최고로요.”
주인의 눈이 눈부신 속도로 정광을 훑었다.
“아아. 지금의 차림새만 해도 대단하신데 어려운 주문이십니다. 하지만 본 포목점은 정주 제일! 반드시 소신선께서 흡족하시도록…….”
“저 말고요.”
“……네?”
정광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업고 있던 현오의 앙상한 몸이 드러났다.
“……아!”
다시 몸을 돌린 정광이 물었다.
“화려하면서도 품위 있게. 가능하시죠?”
자고로 장사꾼이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존재다.
하지만 빼빼 마른 데다 볼품없게 생긴 노승이다.
대체 무슨 수로 화려하면서도 품위 있게 꾸민단 말인가?
주인의 마음속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났다.
‘돈도 돈이지만 참 안 됐군. 보아하니 소림의 고승이신 듯한데…….’
딱 봐도 오늘내일할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며 대답했다.
“아미타…… 무량수불. 소신선님. 소인이 애는 써보겠으나…….”
바로 그때.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전표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 적힌 금액을 본 주인은 두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가 급히 말을 이었다.
“……애쓴 만큼 당연히 좋은 결과를 보여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돈의 힘은 놀라웠다.
도저히 답이 없어 보일 것 같던 현오가 현기 흐르는 부유한 노인으로 탈바꿈될 만큼.
‘……이럴 수가.’
현오는 우아한 비단 장포를 입고 비단 모자를 쓴 노인을 바라봤다.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게 나라고?’
이때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정광 일행은 그를 데리고 정주현을 누볐다.
입은 것이 최고였으니 먹는 것도 최고인 게 당연한 일.
비싸디비싼 반점과 객잔, 심지어 주루까지 거침없이 달렸다.
정광이 백승무에게 말했다.
“사제. 스님 좀 먹여 드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고기를 드려도 될지…….”
“아까 얘기했잖아. 불존께서 부탁하신 일이야.”
“아. 이것도 그런 것이었군요.”
백승무는 바로 납득했다.
힘없는 노인을 상대로 거짓말을 할 정광이 아니었기에.
게다가 불존의 부탁이라지 않는가.
아마 자신이 모를 현묘한 뜻이 있으리라.
“자. 스님. 넣겠습니다. 꼭꼭 씹으십시오.”
현오는 얼결에 백승무의 말에 따랐다.
‘……이게 말로만 듣던 고기인가?’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이런 신묘한 맛이 있나!’
기쁨과 놀람도 잠시.
소채와 콩만 먹던 위장이 고기의 기름기를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복통이 찾아왔다는 소리이다.
‘으윽…… 아, 안 돼!’
저도 모르게 치병의 끝을 선보이려는 순간!
어떻게 눈치챘는지 정광이 나섰다.
그가 웅혼한 내공을 밀어 넣자 복통이 씻은 듯이 가셨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아! 저게 바로 술인가?’
향기로운 향에 짜릿한 목 넘김.
그리고 뒤따르는 신묘한 취기라니.
몇 잔 안 마시고 인사불성이 될 뻔했지만, 이번에도 정광은 가만있지 않았다.
주즉시공의 묘리를 담은 내공이 재차 밀려들어 왔다.
향만 남고 나빌레라.
‘아아. 향기만 가득하구나.’
이렇게 현오는 극락과 지옥을 넘나드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진 그는 극락만을 느끼게 되었다.
‘허허. 이런 삶이 있다니…….’
여러 명승고적을 둘러보는 건 기본이요.
호수에 화려한 놀잇배를 띄우며 즐기는 건 덤이었다.
그러다 지치면 값비싼 객잔의 별채로 돌아가 비단 금침에 몸을 눕혔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잠에서 깬 현오는 주위를 둘러봤다.
화려한 방이 그의 두 눈을 가득 채웠다.
‘아미타불. 깨어 있을 땐 눈에 들어오고, 잠이 들면 사라지며, 눈을 뜨면 또다시 반복되는구나.’
현오는 내심 탄식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지금껏 겪었던 일들을 곰곰이 되짚었다.
무엇보다 정광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사치와 향락을 즐기면서도 즐기지 않는 자라…….’
정광은 아무리 비싼 요리와 술 앞에서라도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자세는 물론 눈빛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행인 백승무와 자오는 눈치 못 챘던 것처럼 보였지만, 정신을 놓은 척 정광만 지켜보고 있던 현오는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정광은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암습과 싸움을 대비해 본능적으로 그럴 뿐이었다.
하지만 현오로서는 알 수 없는 일. 그의 생각은 깊어져만 갔다.
‘세속의 사치와 향락을 멀리하는 것은 거기에 빠져 마음을 놓치는 걸 막기 위함이거늘. 그것들을 가까이 하면서도 자신을 굳건히 지킨다라…… 결국 마음을 얼마나 다스릴 수 있느냐. 거기에 달렸을 뿐인가.’
정광의 경지가 그럴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허허. 상상도 못 할 경지로군.’
자고로 깨달은 자일수록 기행을 일삼는다더니.
지금까지 품고 있던 선입견이 날아가 버렸다.
그런 정광이라면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가 있을 터.
대충 짐작이 갔다.
‘내 꾀병을 알아챈 건 당연한 일. 내 삶에 동정심을 품어서만이 아니요, 자신의 모습을 비춰 나를 돌아보게 하려는 뜻이겠지.’
현오에겐 시간이 얼마 없었다.
죽기 전에 이 화두를 잡고 정진해야 했다.
‘허허. 너무 버거운 선물을 받았구나.’
그때, 방문이 열리며 정광이 들어왔다.
“어르신. 날이 밝았네요. 가시죠.”
현오의 멍한 눈이 본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총기를 머금은, 빛나는 눈이었다.
“이제 되었다.”
“네?”
현오가 빙그레 웃었다.
“꾀병은 끝이야. 그만 돌아가자꾸나. 생각해 볼 게 너무 많아.”
갑작스런 고백에도 정광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미묘한 표정이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역시 꾀병을 눈치채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기에, 현오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달콤한 맛을 더 느끼셔야 하는데…….”
“충분히 맛봤느니라.”
“아니, 근데 표정이 무슨 득도한 고승 같아요. 지나온 삶이 후회되지 않으세요? 진작 이러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거요. 맞죠?”
“허허허.”
현오는 소리 내어 웃다가 기침을 했다.
그의 두 눈이 둥글게 휘었다.
“녀석. 쑥스러워하는 걸 보니 너도 나 같은 사람이구나.”
“네?”
“너무 큰 도움에 내가 미안해할까 봐 이러는 것 다 안다.”
“네?”
끝까지 모른 척이라니.
현오는 정광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아미타불…… 고맙다. 네 덕에 많은 걸 깨우쳤구나.”
그를 바라보는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겨우 이 정도로 만족했다고?’
현오가 깊어진 눈으로 손짓했다.
“잠시 앉거라. 너와 할 말이 있다.”